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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세미나) 『들뢰즈의 니체』 p. 67-111

뮤즈 2019.01.29 18:18 조회 수 : 178

(니체세미나) 『들뢰즈의 니체』 p. 67-111 20190121 발제자: 뮤즈(박연희)

 

니체 철학의 주요인물 사전

* 독수리(와 뱀): 뱀은 독수리의 목둘레 감겨있다. 동맹으로서 원환중의 원한,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라는 신성한 쌍의 혼약으로 영원회귀를 상징. 영원회귀를 동물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풀려난 뱀은 영원회귀 안에 받아들일 수 없는 점과 불가능한 점이 있다는 사실

* 당나귀(혹은 낙타): 사막(니힐리즘)의 동물. 사막에서 짐을 나르는 당나귀는 두 가지 결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아니다(부정)’는 거짓된 ‘아님’이며 원한의 아님이다. 그의 ‘그렇다’(긍정)은 거짓된 ‘그렇다’이다. 당나귀는 기독교적인 동물로 ‘삶 위에 존재하는 가치’들을 짊어지고 신이 죽은 후엔 인간적인 가치들을 지고 나른다. 당나귀는 디오니스적인 긍정의 희화이며 배반이다. 당나귀의 긴 귀는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작고 둥글고 미궁 같은 대극에 존재한다.

* 거미(혹은 타란툴라): 복수와 원한의 정신. 전염력이 독이며 거미의 의지는 처벌과 단죄의 의지이다. 거미의 가르침은 세계가 자기와 동일하게 되도록 하는 평등이다.

* 아리아드네(그리고 테세우스) : 아니마(Anima. 정신 생명 혼)인데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는 서로 사랑했지만 그녀는 실을 쥐고 있었는데 그것이 차가운 생물의 요소를 나타낸다. 테세우스는 ‘영웅’이며 ‘더 높은 인간’의 상징으로 ‘더 높은 인간’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짐을 지고 받아들이는 것, 짐을 내려놓을 줄 모르고 경쾌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 의해 그녀의 여성성을 구속당하고 실에 의해 묶어지지만 디오니소스-황소가 올 때 아리아드네는 진정한 긍정과 경쾌함을 알게 된다. 그녀는 긍정의 아니마가 되고 이 두 사람이 영원회귀를 구성하고 초인을 낳는 쌍이 된다. 왜냐면 영웅이 ‘아름다운 혼의 여성’을 버렸을 때 그때 비로소 꿈속에서 초영웅이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 광대(원숭이, 난장이 혹은 악령): 차라투스트라의 희화. 차라투스트라를 흉내 내지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 광대는 원한에서 무시하고 무거움의 정신을 가진다. 광ㅈ대의 초극은 자신을 지고 나르게 하거나 혹은 위로 뛰어 오르는 것이다.

* 그리스도( 성 바울과 부처) (1) 유대교적인 원한 후에 나타난 양심의 가책. 니힐리즘을 의미한다. 그의 기도는 삶에 대한 복수와 반감에 찬 기도이며, 죄를 내면화함으로써 삶을 단죄하는 수단과 삶에 대한 저주를 보편화하는 수단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 성 바울의 해석이며 ‘교회’와 역사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디오니소스의 순교는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정당하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만 그리스도의 순교는 삶은 단죄되고 참회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는 이미 ‘니힐리즘의 최고단계’를 ‘최후의 인간의 단계’를 혹은 ‘소멸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단계도 상징한다, 모든 죄에 무관심하고 죽기만을 바란다.

* 디오니소스: 아폴론과의 관련성. 소크라테스와 반대됨. 그리스도와의 대립. 아리아드네에 대한 보충

보충설명

디오니소스 축제가 한겨울의 밤에 거행된 것은 디오니소스의 본질이 밝음이 아니라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겨울과 밤은 태양(아폴론)의 힘이 약해지는 때다. 아폴론의 밝음이 자리를 비운 사이

디오니소스의 어둠이 다가온다. 아폴론의 이성이 약화되는 틈을 타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신이다. 아폴론의 이성은 조형 의지다. 그것은 일정한 형식과 틀을 형성한다. 과도함을 거부한다. 무엇이든 너무 넘쳐서도 안 되고 너무 부족해서도안 된다. 아폴론의 이성은 항상 절제된 세계를 지향한다. 디오니소스의 광기는 해체 의지요 자유 의지다. 그것은 아폴론의 이성이 형성한 형식과 틀을 깨뜨리고 찢어버린다. 무한과 극한의 세계로 휘몰아친다. 그리하여 아폴론의 이성이 빠져들 수 있는 박제화와 도식화를 거칠게 무너뜨린다.

[Daum백과] 디오니소스 항목 중

 

* 더 높은 인간: 신이 죽은 후에 신적인 가치들을 인간적인 가치들로 대체함. 가치평가의 원리는 동일한 채로 가치전환이 수행되지 않기 때문에 니힐리즘에 속하며 차라투스트라의 광대에 가깝다. ‘실패한 자’, ‘서툰 자’이며 웃을 줄도 놀이할 줄도 모른다. (1) 최후의 교황: 신의 죽음 사실을 알지만 신은 이간에 대한 사랑을 견딜 수 없어 연민 때문에 질식해서 죽었다고 믿는다. 주인이 없지만 자유롭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산다. (2) 두 명의 왕: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하나의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데 하나는 수단을 다른 하나는 목적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풍습의 도덕성’은 퇴화해가며 후퇴하는 방향으로 훈련하고 선택하면서‘천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추락해간다. 두 왕이 당나귀를 끌고 오지만 인간은 이 당나귀를 자신들의 새로운 신으로 만들 것이다. (3) 가장 추악한 인간: 신의 연민을 견딜 수 없어서 신을 살해하고 그가 살해한 신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인간으로부터 유래하는 연민과 천민으로부터 유래하는 연민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의 ‘그렇다’는 거짓이다. (4) 거머리에 몰두하는 인간: 인식이 신앙을 대체한 자. 거머리에 몰두하는 인간은 그 인식자체가 거머리라는 것을 도덕과 종교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도덕과 종교의 바통을 넘겨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5) 자발적인 거지: 인식도 단념하고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행복은 천민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젖소들에게만 존재한다.(???) (6) 마술사: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자. 연민을 불어 넣고 강자들에게도 죄책감을 불어넣으려고 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수치심을 심고 자신의 독을 전염시키려고 한다. (7) 방랑자의 ‘그림자’: 문화라는 활동을 나타내며 선택되고 훈련된 자유인이 되려고 하지만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데 목표자체가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이며 그를 따르지만 가치전환의 시점인 한밤중과 정오에는 사라지고 만다. (8) 예언가: 모든 것은 ‘헛되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신을 대체하려고 했던 노력이 헛됨을 깨닫고 무를 의욕하기보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의욕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소멸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종말을 원하는 자로서 니힐리즘은 실제로 완성되며 니힐리즘 그 자체에 의해서 극복된다. 가치전환과 초인이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그리고 사자) 차라투스트라의 ‘아니다’는 니힐리즘의 ‘아니다’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긍정에 전적으로 참여하며 이미 긍정의 이념. 즉 디오니소스의 이념인 것이다. 디오니소스가 ‘초인’의 아버지인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이 자신의 ‘아이’이다. 그는 열망하는 자일뿐 영원회귀의 원환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며 초인을 산출하기 보다는 인간 내에서 초인의 산출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초극하고 초극되는 조건들. 사자가 어린애가 되는 모든 조건을 산출하는 것에 의해서)

저작

『힘에의 의지』는 유고 중에서 일부를 뽑아서 편찬한 책이다.

니체 전집본들은 면밀한 교정 작업을 거치지 않았지만 콜리와 몬티나리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신판편집에 의해서 유감스런 사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니체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는 니체 문고판과 관련하여 전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해보면

(1) 날조가 있었는가? 1888년 원고들이 정확하게 배치되지 않았다.

(2)『힘에의 의지』니체 자신에 의해 출판된 책은 아니며 연대순으로 간행되는 것이 중요한데 슐레히트 판은 그렇지 않다. (3) 유고 전체에 관한 문제: 니체의 『유고』는 니체 철학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록

A. 철학자란 무엇인가?

1. 가면을 쓴 철학자: 철학자가 철학자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이상을 표명하고 종교인으로서 자신을 가장하고 변화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금욕주의자임을 믿어야했는데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역겹고 어두운 애벌레의 형태였기 때문에 철학도 이러한 형태아래서만 살아서 기어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자들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자부심, 대담성, 용기, 자기 확신, 정신의 의지, 의지의 자유가 존재하는가 (『도덕의 계보학』,Ⅲ,10)

2. 비판하는 자로서의 철학자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날조한 만큼 현실 세계에서 그것이 갖는 가치, 의미, 진실성등을 박탈해왔다. 참된 세계는 날조된 세계이고 가상의 세계야 말로 현실이다.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탐구하고 도덕에 의해 추방된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금지된 것일수록 얻으려 애쓴다. 이런 표지 아래 나의 철학은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진리만을 금지해 왔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라』, 서문, 2-3)

3. 반시대적 철학자

국가가 최고의 목표이고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높은 의무라는 것은 어리석음으로의 후퇴이다. 나는 국가의 번영보다 더 높은 목적을 갖는 종류의 남성들, 즉 철학자를 다룬다. 국가와는 무관한 문화에 관련해서만 철학자들을 다룬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학자들은 더 이상 등대도 피난처도 아니고 교양인은 교양의 최대의 적이다. 사회전반에 있는 병을 없다고 함으로써 의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도 결국 일반적인 불안과 위협을 증가시키는 하나의 요인일 뿐이다. 우리는 원자의 시대, 원자론적인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반시대적 고찰』,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4)

4. 생리학자이자 의사로서의 철학자

이 시대는 의식이 겸허해져야하는 시대이므로 우리는 모든 의식적인 의욕, 모든 의식적 목적, 모든 가치 평가는 아마도 그것이 의식 안에서 생각되고 있는 것과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도달되기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물어야한다. 우리의 쾌와 불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어떤 것을 수행하기위한 수단일수도 있다. 정신이 발달되어 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다. 하나의 고차원적인 육체가 자신을 계속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감촉할 수 있게 되어가는 역사다. 자연을 인식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육체가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다. (1883,『힘에의 의지』, 제 2부, 261)

 

5.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는 자로서의 철학자

사상가들의 생애에서 경이로운 것은 두 개의 서로 적대적인 본능, 즉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몰아대는 본능들이 말하자면 하나의 멍에를 지고 걷도록 강제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인식을 원하고 한편으로는 삶을 원하는 본능이 있다. 그리스 문화만이 철학이라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그러한 문화에서만이 철학자가 방랑자가 아님을 알고 있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하나의 참된 문화에 긴밀히 묶여있지 않으면 철학자는 예기치 못한 성격에 의해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혜성일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에서 철학자는 태양계에서 일등성처럼 빛난다.

6. 입법자로서의 철학자

철학자를 철학적인 노동자이나 일반적인 과학적인 인간들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철학자는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었고 다양한 눈과 양심을 가진 자이지만 그는 가치를 창조할 것을 요구받는다. 연구자들은 그간의 자료들을 정식화 하고 개관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축소해야하지만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이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을 위한 수단, 도구, 망치가 된다. 그들의 ‘지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이다. 이제 이런 철학자들이 존재해야만하지 않을까? (『선악의 피안』,Ⅵ,211)

B. 철학자 디오니소스

7.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양자의 화해(비극적인 것)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이 두 개의 충동은 대체로 대립하면서 서로가 항상 새롭고 더 힘이 있는 탄생물을 낳도록 한다. 두 개의 충동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짝지어지고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아티카(그리스 비극이 가장 융성했던 도시) 비극작품이 산출된다.

8.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양자의 대립(변증법)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은 항상 무엇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방식으로 들려온다. 소크라테스에서는 본능이 비판자가 되고 의식(양심)이 창조자가 된다. (결함으로 인해 생겨난 괴물이다) 낙천주의적 변증론은 삼단논법의 채찍을 휘둘려 비극에서 음악을 추방하는데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유일한 표현이자 형상화이자 음악의 상징화이며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표현하는 꿈의 세계로서 해석될 수 있는 비극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13장과 14장)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니체는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매우 비중 있는 신이면서도, 올림포스 산에 사는 그리스의 다른 주신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신이 아니라, 구원을 약속하는 미래의 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디오니소스는 하늘을 상징하는 최고신 제우스와 땅(데메테르 혹은 세멜레)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헤라의 질투를 받아 어린 시절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으나, 심장만은 제우스에게 무사히 수습되어 다시 살아난 존재로 그려진다.

현재는 미치광이가 되어 반인반수의 사티로스 등의 무리와 함께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를 방랑하고 있으나, 그가 그리스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는, 미치광이 신, 포도주의 신, 부활한 신으로서 디오니소스가 예수와 동일한 이미지로 부각되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런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근대에 대한 비판자의 형상으로 정립했다. 그리스비극을 매개로 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대조적인 위상을 지니지만, 책 전체를 보았을 때 이 둘은 비극의 탄생을 위한 협력적 파트너십을 지니고 있으며, 진짜 대립관계는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서 형성된다. 니체는 그리스비극의 몰락 과정에 대해 기술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비극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 즉 음악(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기능이 현저하게 위축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음악이 힘을 잃으면서 그리스비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새로운 작풍의 비극이 등장했던 것과 동시의 일로서, 음악적 요소가 사라지는 것이란 인간의 운명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은 그 이전의 비극이 지니고 있던 인간의 운명적 한계에 대한 탄식 대신에, 인간의 삶을 논리로서 이해하고 접근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일컬어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동시대인이었던 철학자의 이름을 빌려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논리와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라 불렀던 것인데, 니체는 또한 이런 태도를 ‘이론적 세계관’이라 지칭했고 그에 맞서는 개념으로서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비극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비극적 인간이 주어진 삶의 진리 속에서 행복해하는 인간이라면, 진리를 찾아 헤매다 눈이 멀어버린 인간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이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소크라테스의 행위는 니체를 몸서리치게 했다. 일체의 모순적인 것을 배제하고 투명한 진리를 향해 가는 소크라테스적인 변증법 대신에, 니체는 부조화스럽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품어 안고 함께 가는, 숭고하여 아름다울 수 있는 비극의 세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이솝우화를 제외하면 어떤 예술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청년 비극작가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자기 작품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고 덧붙여놓았다. 비극을 내세움으로써 행해지는 니체의 소크라테스 비판은,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라는 시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근대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 개념에 기초해서만 성립된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우리 대부분은 디오니소스의 사도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72XX56800031참조

 

9.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양자의 모순(종교)

두 가지 유형: 디오니소스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고대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라는 이상은 삶에 대한 종교적 긍정, 부인되고 반으로 조각난 삶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스도와 디오니소스는 각자 순교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디오니소스의 경우에는 삶 자체 삶의 영원한 산출력과 회귀가 고통과 파괴와 절멸에의 의지의 원인이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삶이 성스러운 존재에 이르는 길이어야만 한다. 비극적인의미에서는 삶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며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시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스러운 것이다. 비극적인 인간은 가혹한 고통도 긍정하지만 기독교적인 인간은 지상에서의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한다. (1888 『힘에의의지』, 제 4부,464)

 

10.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그것들 간의 상보성 (디오니소스 찬가)

 

11.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 양자의 근친성 (시련)

그러자 나에게 소리 없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그대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하며 수치심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대에게는 아직 젊음의 긍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되려는 자는 그의 젊은 시절조차도 극복해야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 가장 고요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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