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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 에세이

Q. 당신은 자유로워 졌나요?

 

정영진

 

많은 이들이 원하지만 쉽게 가질 수 없고, 무엇인지 조차 정의 내리기 힘든 것…… 세미나 첫 시간 에서 왜 갑자기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이 자리에 앉게 된 생각의 근원 속에는 아마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내제되어 있었다는 것을 공부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쯤 알게 되었네요.

 

며칠 전 우연히 길에서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와 갑작스럽게 마주쳤습니다. 꽤 친한 사이였는데 별것 아닌 불편한 마음에 멀어졌다가 한동안 연락하기가 미안해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시에 마주하니 놀라웠습니다. 친구는 얼굴이 많이 밝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제 얼굴은 조금 지쳐 보인다고 하더군요. 피곤한 기색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도 드러났구나 싶어 아차 했습니다. 다음날 용기 내어 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전했습니다. 친구의 프로필 사진 속에 인상 깊은 시가 있어 읽고서 한동안 멍해졌습니다.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정호승

뜨거운 것이 눈에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이가 바로 제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친구는 말없이 찾아온 부처의 현현 이었나 봅니다.

 

해를 거듭하며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마주합니다. 그날의 날씨, 그 공간 속 사람의 풍경, 그 사람의 말투, 입었던 옷의 색깔과 향수 냄새까지…… 많은 조각들이 내 안에 박혀 하나의 견고한 덩어리로 자리 잡습니다. 그것들은 막연한 삶에 하나의 태도와 취향을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커지면 커질수록 무시무시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습관의 덩어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서져 깨어지는데 고통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모든 의미 있는 탄생에는 찬란한 만큼 그림자도 깊다는 뻔한 역설을 믿고 싶기도 합니다.

 

기억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 모습이 보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리고,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교재에 기억과 자유를 다룬 단락이 가장 가슴속에 와 닿습니다. 메모리즈 1편 속 오페라 가수도, 2046의 차우도, 동사서독의 구양봉도 모두 나의 조각의 일부라고 느꼈습니다. 모두 과거의 기억의 단단한 덩어리들에 결박 당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자신의 조각난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져 있는 인물들 이기도 하지요.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난 상태는 온전한 모습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모습입니다. 이것이 자유구나! 하고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깨어진 조각을 아무리 본드로 붙여봐야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균열이 나고 조각이 빠진, 온전한 모습을 흉내 낸 허상에 불과하지요. 그 동안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집착이 마음의 병을 만들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이 조각 난 물체를 통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 것 입니다. 결과에 대한 전면수용, 온전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창조를 해 내는 것. 모두가 지금이 시작이며 창조의 순간임을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는 길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개나리를 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봄입니다. 이 공간은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과거 어떠한 사건의 작은 날개 짓 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했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자유로워졌나요? 라는 질문 앞에 아주 조심스럽게 네, 조금은요 그리고 ‘점점 자유로워 지는 중’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들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음은 이 순간에서만 가능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현재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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