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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후기] 즐거운 학문 제 4부

연두 2019.03.22 12:47 조회 수 : 150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후기를 써야만 하니까.

즐거운 학문은 회복기에 있는 나의 신체에 잘 맞다. 내게 아주 아름답다. 이 시기에 이 텍스트를 만나는 데에는 지극히 드문 우연이 필요했다. 나는 니체 씨에게 이런 필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내 운명을 사랑하고자 한다. 나는 사랑하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4부를 읽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는데, 세미나도 역시 그랬다. 세미나 이후에 텍스트를 읽으면서는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그것이 후기를 쓰는 나의 행복이었다.

 

‘아포리즘 #333, 인식이란 무엇인가‘는 세미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333이라는 특이한 번호에 이 아포리즘을 일부러 배치한 것 같다. 즐거운 학문을 읽어가다 보면 그가 ‘인식’이란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인식에 우호적인가, 다르게 말하면 니체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니체 씨는 묻는다. 너는 무엇을 인식하고 있는가. 너의 인식이라는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그렇게 인식하는 게 타당한가. 라고 말이다.

 

깨어 있으라, 지금 여기.

매번 세미나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니체 씨가 쓰는 개념이 무엇인지 왈가왈부한다. 그가 쓰는 단어의 용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굳이 애를 써야 한다. 그는 이것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가 쓰는 개념의 통일성을 버렸다. 개념의 일관성이란 인식을 고정시키는 ‘지속적 습관’이니까. 니체 씨는 지속적 습관을 싫어한다지 않는가. 그는 개념들을 단기적 습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자양분이 되고 있으며 깊은 만족감을 나누어주기 때문에.

애초에 명확한 개념이란 없다. 개념의 경계선은 없다. 우리는 개념 위로 사뿐히 안착할 수가 없다. 니체 씨는 우리에게 그럴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는 절대적 개념에 안주하려는 것을 일종의 죽음 충동으로 보는 것 같다. 개념은 일종의 추세선이다. 이리 저리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는 흐름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사유의 잠재력을 잊고 의식된 사유에 편안히 머무르려 하는 우리의 나태를 계속해서 흔들어 깨운다. 어이, 계속 죽으려고 하지 마! 우리는 삶의 파도를 넘으며 계속 항해 중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 평온, 영원한 안식이란 죽음 아니겠는가.

 

세미나 말미에 아주 중요한 화두가 던져졌다. 이규상님이 도대체 니체 씨에게 영원회귀가 삶의 윤리로 왜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힘의 의지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궁금하다 하셨다. 규상님은 거기에서 기독교 사상의 짙은 그림자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피안, 천국, 영원한 안식’이라는 믿음이 시대의 공기로 니체 씨를 밀어부칠 때 그가 그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영원회귀를 창안해내어야만 했을 것이라는 그런 의혹을 제기하시면서. 나는 그런 물음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는데, 과연 당장 니체 씨에게 달려가 물어봤음이 타당한 그런 질문이었다.

 

정직하라, 자기에게.

도대체 매번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생겨나는가(#335. 물리학이여 영원하라!). 나는 이 질문이 4부에서 니체 씨가 가진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 생각한다. 니체 씨는 도덕이란 우리 행동의 수레바퀴에서 가장 강력한 지렛대라고 말한다. 도덕이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도덕이 나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가 서문부터 내내 강조해 오던 지적 섬세함과 예민함은 바로 이 질문을 파헤치는 데 활용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 너는 왜 이것을 옳다고 여기는가?

- 너는 왜 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양심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새롭고,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고, 자기 스스로가 입법자이고,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인간인 그 ‘자신’ 말이다. 니체 씨는 그를 위해 물리학과 정직성을 동원한다. ‘창조자’라는 의미에서의 물리학자가 되라고?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이야말로 사물과의 관계, 힘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우리 행동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도덕이라는 지렛대를 연구하라는 것이다. 무엇으로? 양심의 배후에 있는 양심, 지적 양심, 바로 정직성으로.

니체 씨는 정직성을 통해서만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에 정직해야 하는가. 양심? 그럴 리가 없다. 너의 양심의 배후를 보라고 그는 단호히 말한다. 의식된 자아? 그럴 리도 없다. 비웃고, 한탄하고, 저주하고자 하는 충동들의 투쟁인, 힘들의 복합체인 자기 자신이다. 지속된 습관에 붙어 있는 자가 아니라, 단기적 습관들 사이를 이행하는 존재. 고정불변 하는 통일된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대는 잠재성, 그것은 쉼없이 해안으로 밀어닥치는 파도 자체다. 그것을 관찰하는 일이야말로 니체의 물리학일 것이며 그 물리학을 통해 나는 나를 맞이하게 된다.

 

흘러라, 액체처럼.​

그래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의 인식은 나의 신체에 맞는 것인가. 현재의 내게 타당한가. 나의 인식은 내게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자신의 도덕, 자신의 윤리를 세우는 일은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윤리를 세우는 일은 단단한 울타리를 치거나 높은 곳에 깃발을 꽂는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중심을 찾고, 균형점을 찾아가는 일이다. 한 다리로 서 있기나 파도타기 같은 일 말이다. 중심점과 균형점은 외부에 있지 않다. 서핑을 하려면 끊임없이 파도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무게 중심을 찾아가야 한다. 파도의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끊임없이 다른 내가 될 때 나는 계속해서 중심을 잡으며 파도를 탈 수 있다. 자신의 윤리를 단단한 울타리로 세울 때 그것은 우리를 다시 압박하게 될 것이다. 니체 씨는 액체와 같이 유동적으로, 단기적 습관으로 자신의 윤리를 세워야 함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우리는 세미나 시간에 종이 한 장 차이, 그 작은 틈에 대해서 얘기했다.

현재의 파도는 이전의 파도와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다. 모든 행동은 일회적이고 재귀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매번의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모든 도덕은 해체되고 다시 생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원회귀가 필요한 이유 아닐까.

삶이 파도라는 비밀을 알게 된 나.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오로지 힘으로서만 존재한다. 밀어붙이고 부서지고 심연으로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는 그런 힘으로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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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의 스케치로 발제자인 자스민, 정화 두 분의 이야기를 약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자스민님은 4부 전체에서 터지기 직전의 상태에 이른 고양감을 느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감각적으로 그걸 느낄 수 있는 예민함이 있다니, 튜더인 오라클님도 감탄했다. 그는 니체 씨의 친구가 될 만하다. 정화님은 아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기쁨에 더 충만해질 것이다. 발제 분량의 많은 내용들이 눈물나도록 와닿았다고 하셨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아포리즘 #334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고찰하게 되었다 하셨고,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맞이하는 순간 무기력했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아마 두 분 모두 온 몸으로 텍스트를 읽어가고 계신 것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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