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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발제] 즐거운 학문 제3부

숲속옥탑방 2019.03.04 16:18 조회 수 : 165

★ 제3부

 

-- 새로운 투쟁. ~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엄청나게 크고 두려운 그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이 그렇듯이, 앞으로도 그의 그림자를 비추어주는 동굴은 수천 년 동안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그림자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 인식의 기원 : 우리 인간은 진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유기체는 진리에 반대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유기체의 보다 높은 모든 기능, 즉 감각적 지각과 모든 종류의 감성은 태곳적에 체화된 저 근원적 오류들을 지닌채 작동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 명제들은 순수한 논리학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참'과 '거싯'을 구분하는 인식의 규범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식의 힘은 진리에 관한 인식의 정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연륜, 그것의 체화, 삶의 조건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에 달려 있다.  삶과 인식이 모순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진지한 투쟁이 일어난 적은 결코 없다.  이럴 경우 부정과 의심은 미천 짓으로 간주되었다.  → 생명체에게 생존과 번식이 우선이지 진리가 아니다.

 

..... 그리하여 인식이 삶 그 자체의 일부분이 되고, 살아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권력이 됨으로써, 마침내 인식과 저 태고에서 유래한 근원적 오류가 서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삶이고 권력으로서 동일한 인간 내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상가란 진리에의 충동이 생명을 보존하는 힘이라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도 여전히 진리에의 충동과 생명을 보존케 하는 오류가 그의 안에서 서로 투쟁을 벌이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 투쟁의 중요성과 비교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 논리적인 것의 유래 :  인간 머릿속의 논리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영역이 원래 엄청나게 광대했던 비논리에서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현실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없는 실체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은, 사물의 변화가 오랜 시간 동안 관찰되지 않고 지각되지 않은 결과임에 틀림없다.  정확하게 관찰하지 않았던 자가 모든 것을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던 자보다 더 앞으로 도약했던 것이다.  추론을 할 때 보다 조심스럽고 회의적인 모든 경향은 그 자체로서는 삶에 커다란 위험을 가져온다.  그 반대되는 경향, 즉 판단을 보류하기보다는 차라리 긍정하고, 끝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잘못을 저지르거나 꾸며내고,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동의하고, 정의롭기보다는 차라리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도록 키워지지 않았더라면, 단 하나의 생명체도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 원인과 결과 : ....우리는 이렇게 추론한다.  이것과 저것이 미리 선행되어야만 저런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우리는 사물들과 그것의 연쇄를 기술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보다 엄밀하게 기술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이원성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앞에는 연속이 있을 뿐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것을 분리시킨다.

......원인과 결과를 우리들처럼 자의적으로 구분되고 분할된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으로서 볼 수 있는 지성적 존재, 생성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을 내버리고 모든 조건성을 부인할 것이다.  → 아이작 뉴튼류의 결정론적 세계관의 부인?

 

-- 네 가지 오류 : 인간은 오류에 의해 교육되어 왔다.  첫째로 인간은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겼다.  둘째로 자신에게 꾸며낸 속성을 부여했다.  셋째로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잘못된 서열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넷째로 거듭 선의 목록을 만들어 한동안 이것을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인간의 이런 충동과 상태에, 또 때로는 저런 충동과 상태에 가장 높은 서열이 매겨져, 그러한 평가에 따라 고귀한 것으로 되었다.  → 불완전한 인간?  불완전한 박테리아?  불완전한 꽁치?

 

-- 무리 본능 : 도덕과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충동과 행동에 대한 평가와 그 서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평가와 서열은 항상 공동체와 집단이 필요로 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공동체와 집단에 첫 번째로 유익한 것이-두 번째도 세 번째도-또한 모든 개인들에게도 최상의 가치 척도이다.  도덕에 의해 개인들은 집단의 기능이 되고, 또 오로지 기능으로서만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도록 인도된다.  하나의 공동체가 보존되기 위한 조건은 다른 공동체의 그것과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매우 상이한 도덕들이 존재한다...........도덕성이란 개인들 속의 무리 본능이다.

 

-- 집단의 양심의 가책 : 인류의 기원 이래로 길고 긴 시간 동안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양심의 가책이 존재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부심을 지니고, 자신이 의욕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만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의 모든 법률 선생들은 개인의 그러한 자아 감정과 쾌락 감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마치 이것이 예전부터 법률의 기원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구한 시간 동안 인류에게 자신을 혼자라고 느끼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홀로 있는 것, 혼자라고 느끼는 것, 복종도 없고 지배도 없는 것, 개인을 의미하는 것-- 당시에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징벌이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심판을 받는 것을 의매했다.  사상의 자유는 불안 그 자체로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는 법과 질서를 강압과 피해로 느끼는 반면에, 과거에는 이기주의가 고통과 궁핍으로 여겨졌다.  → 근대의 발명품인 개인라는 관념, 삼족을 멸하는 반역 처벌의 수용, 마을에서 내쳐지는 징벌에 대한 공포 등

 

-- 영혼의 건강 :......하지만 결국 우리가 병 없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덕의 발전을 위해 병이 없어도 될 것인가.  인식과 자기인식을 향한 우리의 갈증은 건강한 영혼만큼이나 병든 영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중요한 물음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오직 건강만을 추구하는 의지는 편견과 비겁, 일종의 세련된 야만과 후진성일지도 모른다. → 고통과 병에 대한 과대기피증이 나타나는 오늘의 모습은 어떤가?

 

-- 삶은 논증이 아니다. : 우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세계를 머리 속에 만들어 왔다.  물체, 선, 면, 원인과 결과, 운동과 정지, 형상과 내용 등과 같은 믿음의 조항들이 없다면 이제 아무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들로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논증이 아니다.  삶의 조건들 중에는 오류도 있다.

 

--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도덕적 회의 : 그리스도교도 계몽에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  그리스도교는 매우 날카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도덕적 회의를 가르쳐왔다.  인간을 비난하고 삶을 어둡게 만들기는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세련됨을 가지고 도덕적 회의를 가르쳐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개인들에게서 그들의 '덕'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다.  그리스도교는 고대에 적지 않았던 저 위대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 영웅적인 투우사의 위엄을 완전히 구현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인망을 얻었던 저 위대한 사람들을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었다.......하지만 이제 종교적 감정을 잘 알고 잘 기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오래된 신앙을 지닌 경건한 사람들도 사멸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식을 위해서라도 종교적 감정의 모상과 유형을 구해내야한다!  →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신은 공존할 수 있는가? 영웅 혹은 위버멘쉬도 없고 종교적 인간도 없는 세상은?

 

-- 수단 이상의 것으로서의 인식 : .....고대에는 학문을 가장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도들조차 덕의 추구를 더 중요시했으며, 인식에 최고의 찬사를 바치는 것도 그것이 덕의 최고의 수단으로 환영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학문의 위엄과 학문에 대한 인정이 감소되었던 것이다.  인식이 수단 이상의 것이 되려 하는 것은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다.

 

-- 무한한 수평선 :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의 배여, 앞을 바라보라!  네 곁에는 대양이 있다.  대양이 항상 포효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 그것은 비단과 황금, 자비로운 꿈처럼 그곳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대양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오, 한때 자신을 자유롭다고 느끼다가 이제 새징의 벽에 몸을 부딪고 있는 새여!  마치 육지에 자유가 있었다는 듯 향수가 너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로다!  '육지'는 이제 없다.

 

-- 광인 :.....광인은 (시장의)그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꿰뚫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이 행위는 아직까지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이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그날 그 광인은 여러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영원진혼곡을 불렀다고 한다.  밖으로 끌려나와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 대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너무나 기독교적인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의 모습

 

-- 신비주의적 해석 : 신비주의적 해석은 심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은 피상적인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 가장 오래된 해석 : 지각 없는 사람들은 의지가 독자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의욕은 단순한 것, 순수하게 주어진 것, 파생되지 않은 것, 그 자체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무언가를 행하는 경우, 예를 들어 무언가를 가격하는 경우, 그것을 가격하는 것은 그 자신이며, 그가 그것을 가격한 것은 그가 그것을 의욕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에 가로놓여 있는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추정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에 있어서도 의지의 감정에 만족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메카니즘, 가격이 이루어지기까지 행해지는 수백 가지의 섬세한 작용, 이 작용의 가장 사소한 부분을 행하는 데조차 의지 자체는 무력하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의지는 신비하게 작용하는 힘이다.  결과의 원인으로서의 의지에 대한 믿음은 신비하게 작용하는 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어떤 사건을 목격하는 모든 경우에,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의지와 인격을 지니고 의욕하는 존재가 그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역학의 개념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인격적 존재만을 믿어왔기 때문에(물질, 힘, 사물등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적 믿음이 되어버렸다. 

.....쇼펜하우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욕하는 존재라는 가정을 통해 태고의 신화에 왕좌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의지의 분석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의욕의 단순성과 직접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욕은 너무 매끄럽게 작동해서 사람들의 눈에 거의 띄지 않는 메커니즘일 뿐이다.  - 자아 주체 인정의 오류,  모르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도입하는 인간의 오류?

 

-- 기도의 가치 : 기도는 원래 자신의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 영혼의 고양을 아예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고요함과 엄숙함이 요구되는 성스러운 장소나 인생의 모든 중요한 상황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경우 적어도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지혜를 발휘하여, 손과 발과 눈이 항상 동일한 고정된 자세를 취하게 하고, 기억력을 발휘하여 입술이 오랫동안 기계적인 일을 하도록 하는 기도의 형식을 사람들에게 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정신적 고양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피로를 느끼는 때가 있으며, 이런 경우 일련의 엄숙한 말과 음향, 기계적인 경건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곤 한다.  그러나 이 희귀한 사람들은-모든 종교에서 종교적인 사람은 예외에 속한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반면에, 저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기도문 암송을 금지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종교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의 조건 :  "현자들이 없다면 신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 루터의 말은 옳다.  하지만 "현명하지 못한 자들이 없다면 신은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루터는 말하지 않는다. ~ 신은 어설픈 지혜의 산물?

 

-- 위험한 결심 : 세계를 추악한 것으로 보려는 그리스도의 결심이 세계를 추악하게 만들었다. ~ 이 세상을 추악하게 만든 자는 그리스도? 아님 바울?

 

-- 그리스도교와 자살 : 그리스도교는 그 성립 당시에 자살을 무섭도록 강하게 요구하는 것을 힘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리스도교는 두 가지 형태의 자살만을 허용하여 이를 최고의 존엄과 희망으로 변형시켰고, 그 외의 모든 자살은 무섭게 금지했다.  순교와 완만한 자살인 금욕만이 허용되었다. →  초기 기독교 분파의 강한 자살 충동 및 실행의 역사, 대부분의 기독교도가 자살을 하면 누가 여호와를 칭송할 수 있는가?

 

-- 희생자로서의 염세주의자 : 현존재에 대한 깊은 불만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한 민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저질러온 식이요법상의 중대한 과오가 분명히 발견된다.  일례로 불교의 전파는(그 성립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지나치리만치 전적으로 쌀만을 주식으로 삼아 쇠약하게 되었던 것과 상당 부분 관련이 있다.  근대 유럽이 느끼고 있는 불만은 아마도 우리 이전의 세계, 즉 중세 전체가 게르만족의 성향이 유럽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음주벽에 빠져든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중세는 유럽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든 시기를 의미한다.  삶에 대한 독일인들의 불만은 근본적으로 독일 주거 공간의 지하실 공기와 난로 연기의 독기로 인한 겨울 질병에서 기인한다. ~  인류의 정신적 불만, 염세주의 , 비탄적 견해 등이 의식주생활, 영양 결핍 등에 기인하고 있다?

 

-- 죄의 기원 : 그리스도교가 지배하고 잇거나, 과거에 지배했던 곳이면 어디에서나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죄는 유대인의 감정이며, 유대인의 발명품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도덕의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교가 실제로 목표로 하는 것은 전 세계를 '유대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럽에서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가 하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탁월한 인물들이 열의를 가지고 고대 그리스 문화에 접근하고 동화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에서 예민하게 감지된다.  "참회해야만 신은 은총을 내린다"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폭소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리스인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노예들이나 그렇게 느끼겠지"  그리스도교는 강력한 존재, 초강력한 존재, 복수를 즐기는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명예를 해치는 것 외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다.  모든 죄는 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신에 대한 불경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명예욕에 불타는 동방에서 온 하늘의 신은 개의치 않는다.  죄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은총을 내리는 자에게 신은 죄의 자연적인 결과에 개의치 않는 평안도 내려준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완전히 분리되고 대립되는 존재로 여겨져서, 인간에 대한 죄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유대적인 감정은 모든 행동을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결과와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려 한다.  모든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는 무가치한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불경죄도 고귀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에 다가가고 있다.  심지어 프로메테우스의 경우처럼 절도를 저지르거나, 아이아스의 경우처럼 가축을 무분멸하게 도살하여 광적인 질투심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귀한 가치를 인정한다.  그리스인들은 불경죄의 고귀한 가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구현하기 위해 비극을 창안했다.  유대인들은 문학적 재능과 숭고한 경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의 예술과 즐거움에 내재된 심오한 본질을 알지 못했다. → 영화 '밀양', 죄는 타인에게 저지르고 피해자와 상관없는 여호와에게 다가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상한 행위가 왜 가능한가? 차라리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훨씬 정당하지 않나.  기독교는 정당한 복수마저 막는 것이 아닌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자에게 어찌 복수할 수 있나?

 

-- 선택된 민족 : .....프랑스의 귀족계급은 모든 권력과 재량권을 빼앗겨 경멸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이를 느끼지 않기 위해, 그리고 또 이를 잊어버리기 위해, 귀족게급에게만 접근이 허용된 국왕의 영광, 국왕의 유례없는 권위와 권세를 필요로 했다.  이 특권에 의거하여 궁정의 높은 위치에 올라, 이 높이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발밑으로 내려다봄으로써, 모든 것을 경멸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일체의 양심의 자극을 벗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왕의 권력의 탑을 의도적으로 점점 더 많이 구름 속에 쌓아올려, 자신들의 권력의 최후의 초석을 그 위에 세웠다. → 중세봉건체제 몰락 이후 프랑스(유럽)에 절대왕정이 성립된 역사적, 심리적 이유?

 

-- 비유적으로말해. :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오로지 유대적 풍토안에서만 가능했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풍토란 분노한 여호와의 음울하고 숭고한 뇌우가 항상 하늘을 뒤덮고 있는 풍토를 뜻한다.  이런 곳에서만 보편적이고 지속적이며 두려운 낮과 밤을 꿰뚫고 극히 드물게 돌연히 내리비치는 햇빛이 '사랑'의 기적으로 놀라운 은총의 빛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곳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인간에게로 밟고 내려올 무지개와 하늘 사다리를 꿈꿀 수 있었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맑은 날씨와 태양은 너무도 당연한 규칙이자 일상으로 여겨졌었다.  → 기독교는 불행한 혹은 불행으로 인식되는 환경의 산물?

 

-- 그리스도의 오류 :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죄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느끼는 자, 죄를 경험해본 일이 없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오류다!  그의 영혼은 죄를 발명한 그의 민족에게조차 그리 크지 않았던 고통에 대한 놀랍고 환상적인 연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의 사후에 그들의 스승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오류를 '진리'로 신성시할 줄 알았다. → 예수는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유대적 관습과 망상에 의해 죄를 만들어냈고 그 후예들은 이를 위조하고 신성시하여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성공한 것인가?

 

-- 정열의 색깔 : 사도 바울과 같은 천성을 지닌 사람들은 정열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그들이 정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오직 인간을 더럽히고 왜곡시키고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이상적인 충동은 정열을 절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도 바울이나 유대인들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그리스인들의 이상적인 충동은 정열을 지향하고, 사랑하고, 고양하고, 금빛으로 치장하여 신성시했다.

 

-- 너무나 유대적인 :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려 했다면, 신은 심판과 정의를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을 내리는 자는 비록 자비로운 심판자라 할지라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이 점에서 충분히 섬세하지 못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 너무나 동양적인 : 뭐라고?  인간이 그의 존재를 믿는 경우에만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이러한 사랑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눈길을 보내고 위협을 가한다니!  뭐라고?  전능한 신이 이처럼 조건적 사랑을 느끼다니!  이러한 사랑은 명예와 복수심조차도 지배하지 못하는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동양적인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인가?"  이것만으로도 그리스도교 전체를 비판하기에 충분하다.

 

-- 그윽한 향불 : 부처가 말하기를,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아첨하지 말라!"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이 말을 따라하기만 해도 그리스도교의 모든 공기가 즉시 정화될 것이다.

 

-- 다신교의 가장 큰 이점 : 한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수립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원칙과 기쁨과 권리를 이끌어내는 것--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저지를 법한 과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과오이자 우상숭배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이런 일을 감행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론을 필요로 했다.  이 변론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라 신이 나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신들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술과 능력인 다신교는 그 안에서 그러한 충동이 해소되고, 정화되고, 완성되고, 고결하게 되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본래 그것은 고집, 집요, 질투 등에 가까운 비속하고 천박한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이 다른 신을 부정하거나 이단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개인을 허용했으며, 개인의 권리를 존중했다.  모든 종류의 신들, 영웅들, 초인들뿐만 아니라, 난쟁이, 요정, 켄타우로스, 사티로스, 악령, 악마 등과 같이 인간과 동급이거나 인간보다 저급한 존재들을 창안한 것은 개인의 자아충동과 자율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더없이 소중한 예비훈련이었다.  다른 신들에게 대항하는 자유를 신에게 부여한 것은 결국 법과 윤리와 이웃에 대항하는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의 정상적 인간을 가르치는 경직된 교설의 결과인 일신교, 하나의 정상적인 신이 있고 그밖에는 허위의 거짓신들만이 있다고 맏는 일신교는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최대의 위협이었다.

......다신교에는 인간의 자유정신과 다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즉 새롭고 독자적인 눈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 계속하여 보다 새롭고 더 독자적인 눈을 만들어내는 이 힘으로 인해 모든 동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영원한 지평과 관점이 주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 다신교에 대한 매우 고급스러운 옹호론

 

-- 채식주의자의 위험 : 감자를 지나칠 정도로 주식으로 하는 것이 독주를 마시도록 만들듯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것은 아편과 마취제를 사용하게 만든다.....그리하여 인도의 도사들처럼 마취적 사고와 감정을 장려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채식주의의 식이요법을 권장하고 이를 민중의 계율로 만들고자 한다.  

 

-- 독일의 희망 : 민족의 이름들은 대개 욕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예를 들어 타타르족의 이름은 '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그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독일인'이라는 말은 원래 '이교도'를 의미했다.  고트족이 개종한 후 같은 종족 내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커다란 무리를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 민족이라는 이름의 야만적인 기원

 

-- 종교개혁의 실패 :......... 한 민족 전체의 종교개혁이 실패하여 종파들만이 머리를 들면, 언제나 우리는 그 민족이 이미 자체 내에 다양성을 지니게 되어 거친 무리 본능이나 윤리적 관습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동요 상태를 사람들은 흔히 윤리의 타락이나 부패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알이 성숙하여 껍질이 깨질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북유럽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북유럽이 남유럽에 비해 뒤처져 있었으며, 상당 부분 같은 유형과 같은 색깔의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오래된 남유럽 세계의 문화가 게르만의 야만적인 피와 과도하게 뒤섞여 점차 야만화됨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잃지 않았다면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개인이나 그 개인의 사상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작용하면, 그것은 그 영향을 받는 민중들이 그만큼 동일하고 저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그에 대한 반작용은 만족시키고 실현시켜야 할 반대의 요구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역으로 힘과 지배욕이 매우 강한 천성을 지닌 인물이 단지 미약한 종파적 결과만을 가져오는 데 그치는 경우, 이로부터 그 문화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  이는 개별 예술과 인식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지배가 있는 곳에는 대중이 있다.  대중이 있는 곳에는 노예가 필요하다.  노예가 있는 곳에 개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 개인들은 무리 본능과 양심에 반대한다.

 

-- 성자에 대한 비판 : .....聖者들은 그들의 덕행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자신에 대한 경멸감에 사로잡히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삶을 견뎌냈다.  그러한 영향을 미치는 덕을 나는 잔혹하다고 부른다.

 

-- 종교의 기원에 대하여 : 형이상학적 요구는 쇼펜하우어가 주장했던 것처럼 종교의 기원이 아니라, 종교에서 파생된 가지에 불과하다.  종교적 사상의 지배하에서 사람들은 '다른(배후에 있는, 밑에 있는, 위에 있는)세계'에 대한 생각에 익숙해져서, 종교적 망상이 파괴되면 불안한 공허감과 결핍을 느낀다.  그리하여 이 느낌으로부터 다시금 '다른 세계'가 자라나는데,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종교적 세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애초 태고 시대에 '다른 세계'를 상정하도록 만든 것은 충동이나 요구가 아니라, 특정한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와 지성의 곤경이었다.  → 종교나 형이상학의 기원이 인간의 본성이나 충동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인가?

 

-- 가장 커다란 변화 : ........'진리'도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에게는 공포와 폭소의 대상인 광인이 과거에는 진리의 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의심이 가장 위험한 종류의 죄악으로 여겨지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불경죄로서, 선하고 고귀하고 순수하고 자비로운 모든 것에 대한 불신으로 간주되던 때에 철학이 무엇이었겠는가?  우리는 사물에 새로운 색을 부여하고, 또 그 위에 거듭 새로운 색을 칠하고 있다.  하지만 저 옛날의 거장들, 즉 과거의 인류가 그린 색채의 화려함에 맞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사물에 본래적인 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색이 칠해지고 지나간 색이 벗겨지고 있을 뿐이다. 

 

-- 모든 미덕에는 때가 있나니 : 오늘날 강직한 사람은 자신의 정직성으로 인해 자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강직함은 정직함과는 다른 시대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 에고이즘 : 에고이즘이란 가까운 것은 크고 무겁게 보이고,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모든 것의 크기와 무게가 감소되는 감정의 원근법을 말한다.

 

-- 커다란 승리를 거둔 후 : 커다란 승리에서 가장 좋은 일은 승리자에게서 패배의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 인간 혐오와 사랑 : 우리는 사람을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데도 그들로 위장이 가득 차 있을 때만, 사람들에게 질렸다고 말한다.  인간 혐오는 지나친 인간애와 '인간 탐식'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나의 햄릿 왕자여.  누가 그대에게 인간들을 굴처럼 삼키라고 명했는가?

 

-- 깊이 있는 것과 깊이 있게 보이는 것 : 자신을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모호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은 바닥을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깊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겁이 많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

 

-- 사상 : 사상은 감각의 그림자다.  사상은 감각보다 항상 더 모호하고, 더 공허하고, 더 단순하다.

 

-- 가난 : 지금 그는 가난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에게 무슨 문제인가?  그는 발견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의 자발적인 가난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 웃음거리! : 저기를 보라! 저기를 보라!  그가 사람들에게서 달아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뒤쫓고 있다.  그가 그들보다 앞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들은 무리 짓는 동물이다.

 

-- 필요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들 한다.  실제로 필요는 발명된 것의 결과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다. → 스마트폰이나 마라도의 짜장면집?

 

-- 목소리의 위험 : 목소리가 큰 사람은 섬세한 것을 생각할 능력이 거의 없다.

 

-- 오류, 오발 : 그는 자신을 쉽게 제어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그를 쉽게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추론하고, 그를 향해 그물을 던진다.  이 가엾은 여자는 머지않아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 습관 : 모든 습관은 우리의 손을 더 기민하게 하고, 우리의 지적 기민함을 더 무디게 한다.

 

-- 죄 : 가장 명민한 마녀 재판관들은 물론 심지어 마녀 자신들도 마법의 죄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죄도 마찬가지다.

 

-- 독창성 : 독창성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 있는데도,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아 불릴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은, 이름이 붙여져야 비로소 그 사물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命名者들이기도 하다.  → 이름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외부자인 것, 우리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 우리가 행하는 것 : 우리가 행하는 것은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항상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뿐이다.  → 소통은 없고 선악의 구분만 있다

 

-- 잔인함이 요구될 때 : 위대성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이차적인 덕이나 생각들에 대해 잔인하다.

 

-- 무엇이 영웅적으로 만드는가? : 최고의 고통과 최고의 희망을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것

 

-- 나는 무엇을 믿는가? : 모든 사물의 중량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 나의 양심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 너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 同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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