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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인문지능-철학] 청인지 에세이

호핀 2019.04.01 00:44 조회 수 : 63

<정치인과 말>

-청년인문지능 세미나 에세이(류성애)

정치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주5일을 내내 여의도 국회로 출근해 매일 국회의원을 지켜보는 내게는 오랫동안 품어온, 중요한 질문이었다. 중소기업부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이 박영선을 거부한다”는 팻말을 붙여놓는 이들, 의혹의 출처가 ‘떠도는 말‧소문’이라면서도 ”국민이 궁금해한다“며 청와대가 나서서 대통령 딸의 해외이주 이유를 밝히라고 소리치는 이들. 이들 정치인들이 쓰는 ‘국민’과 내가 알고 있는 ‘국민’은 같은 사람인가? 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내가 아는 그것과는 다른 개념인가?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정치인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확신에 차서 상대를 악마화하며 발언하는 국회의원들을 볼 때마다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번 실망했다.

정치(政治)의 한자 뜻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한자 안에는 법‧규칙의 뜻도 있어, 법치의 구조 위에서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치는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상호 간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쓰여 있었다. 현실은 물론 달랐다. ‘하는 일 없는 여성가족부를 해체하라(하태경)’는 주장부터 ‘5.18 유공자는 세금 먹는 괴물 집단(김순례)’이라는 왜곡까지, 상호 이해를 도와 거리를 좁혀야하는 게 역할인 이들이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남녀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다. ‘당신이 내는 혈세’라는 무기를 사용해 유공자와 비유공자 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이 속한 정당, 혹은 자신의 ‘표(지지율)’를 얻기 위해서. 나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질문은 더 명확해졌다. ‘정치인의 궤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되겠다. 이들의 단어 선택과 논리 구조는 매우 신선할 때가 많았다. 역사왜곡 발언을 통해 사회 갈등을 조장한 국회의원을 징계해야 한다는 지적에, 이를 징계할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 ‘정치권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면 안 된다(나경원)’는 논리로 징계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런 궤변과 오류가 포함된 정치인들의 발언을 이해하는 데에 힌트를 준 건 비트겐슈타인이었다. 해당 정치인의 ‘언어사용규칙(언어게임)’을 파악하는 것. 동일하게 쓰는 하나의 단어도 각자가 처한 생활형태, 즉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보니 같은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집단(정당) 간에는, 합의와 이해보다는 충돌과 대립이 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가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들 중 잦은 비문 사용과 주어-동사의 불일치, 이것‧저것‧그것과 같은 ‘지시대명사’의 남용으로 인해 온라인상에 ‘박근혜 번역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불투명한 언어사용규칙을 남발할 때 그걸 지켜보는 국민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통’은 결국 정당 간 대립으로 이어지고, 소통은 요원하며, 결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부추기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들이 지금 내뱉는 말들이, 훗날 정치인들의 행동을 평가할 좋은 도구가 되어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토록 ‘국민’을 찾아대는 국회의원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숨진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가 국회에 왔을 때 그를 어떻게 대접하는가(복도에 세워두기만 했다). 숨겨진 스포츠계 성폭력이 드러나 사람들이 공분할 때, 데이트 폭력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맞아 숨졌을 때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발언하는가(아예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현 정권이 ‘(좌파)독재’라며 부르짖는 제1야당의 대표가, 실제 과거 독재 정권하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핵심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다. 한 정치인이 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 왔는지, 그가 내뱉은 말과 실제 삶은 일치하는지. 무엇보다 한 정당이, 또 정치인이 다른 집단의 차이와 갈등을 부추겨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지, 아니면 그 이득을 포기하고서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차이와 갈등을 좁히려 노력하는지.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에 근거해, 이런 기준으로 정치인과 정당을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생각해본다. 장애인들이 수십 년 투쟁해 이뤄낸 차별금지법으로 인해 여성인 나 또한 직장에서 ‘대놓고’ 차별받지는 않게 되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먹고 자며 노숙 투쟁한 결과로 사회적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이후에 비슷한 여객선 침몰 사고로 희생될 가능성이 적어졌다. 고 김용균씨가 사망한 뒤 어머니 김미숙씨가 직접 국회를 찾아 복도에서 내내 서성거리며 관련법 통과를 촉구해, 비슷하게 위험한 작업 환경에 놓여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이 이전보다는 더 안전해지게 됐다.

이러한 ‘정치효용감’을 잊지 않고 약자의 목소리에 연대하는 것. 5.18 역사 왜곡을 한 의원의 징계가 나오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것. 정치인들의 언어게임과 사용규칙을 파악하고 그들의 발언과 그 아래 깔린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 말에 속지 않고 행동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 “정치라는 게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자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중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 받는다”는 한 미국 사회운동가파커J파머의 말을 기억하면서, “정치가 (누군가의) 영혼을 구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비통한 자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일이어야 한다”는 한 문학평론가신형철의 지적을 되새기면서.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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