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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11- 11강 후기

진규 2017.12.17 19:34 조회 수 : 286

라캉 기획 세미나 후기

 

안녕하세요 이규진입니다!ㅎㅎ

 

전 개인적으로 매회 수업을 거듭하며 “분명 지난주에는 저런 의미로 이해했는데, 이번 주에 보니 이런 의미였어?” 이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후기를 쓰려고 보니 많이 배우긴 했는데 머릿속에 제 것으로 정리를 다 해내지 못해서 슬픕니다. 그래서 정말 라캉 세미나 한 번 더 하면 좋겠습니다 ㅋㅋㅋㅋ

라캉 공부하면서 영감도 많이 얻고 다른 문학작품들 읽을 때에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정말 많이 되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문장들이 가진 의미를 모르고 지나쳤을 텐데, 그 의미들을 찾고 이해하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감동도 받고 위로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캉 공부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라캉 세미나 한 번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최근에 시험 치르느라 복습을 소홀히 했던 게 너무 후회가 됩니다. 막상 후기를 쓰려고 보니 머릿속이 정리가 안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캉 수업 초에 저 혼자 이해하려고 쓴 글을 후기 대신 남깁니다.

“일단 분량이 많으니까 읽다가 관두시지 않을까, 다 보여주면서 동시에 숨길 수 있겠군 하하” 정제되지 않은 분량은 이런 걸 의도했습니다.

“수유너머 104 라캉 세미나 뒤풀이 때 셜록에 이런 장면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셜록은 첫인상에도 그 사람이 뭘 하는지, 어느 지역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추측해내니까 어느 의뢰인은 그의 앞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나타났다는 거다. 아무것도 추측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셜록은 적잖은 당황을 한단다. (뛰는 셜록 위에 나는 의뢰인…?)

알몸의 의뢰인(언표의 주체)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보임 = 보이고 모든 것(직업, 지위, 부 등등)을 숨김 = 숨기고자 하는 게 있다 = 진실(무의식의 욕망에 뿌리를 둔 진실)이 존재한다는 게 숨기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드러남.

무의식의 욕망(언표 행위의 주체)” - 제가 쓰는 메모장 中

 

복습을 소홀히 한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지만, 혼자 복습하려고 하면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매주 ‘아, 다른 의미였구나!’ 깨닫는 걸 반복하다보니, 사실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도 못합니다.

기승전 라캉 세미나 한 번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하면서 이렇게 문학 작품들이랑 연계해서 이해하다보니 너무 재밌었습니다.

 

 

 

 

노발리스 <푸른 꽃>

 

p239

 

하인리히가 대꾸했다. “저는 아버지에게 고통과 더불어 남모르는 불만이 있음을 자주 목격했어요. 아버지는 쉬지 않고 일하셨는데,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열의와는 상관없는 습관적인 것인 것이었어요. 아버지에겐 뭔가가 결핍된 것 같았어요. 그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삶도, 안정된 수입도,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마을의 모든 일에 있어서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데서 누리는 기쁨도 그것을 채워줄 수는 없었어요.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가 얼마나 삶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지, 시계가 그의 눈에 얼마나 공허하게 보이는지, 그가 얼마나 현실을 박차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지, 돈을 벌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어요.”

 

-주인공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상징계의 측면에서 보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삶을 삽니다. 안정적인 직업과 수입, 마을 사람들의 존경에서 비롯되는 지위 등, 이러한 것들은 많은 이들이 상징계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리며 흔히들 열망하는 것들이지요.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항상 느끼고 그러한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현실로 도피’합니다. 다시 말해, (이건 제가 인용한 문장의 앞 내용을 읽어야 볼 수 있습니다.) 실베스터 노인이 본 젊을 적 아버지는 상징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실재를 향한 공부에 대한 또는, 실재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 길을 걷지 않습니다. 숙련된 장인의 한 사람으로, 상징계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무의식에서라도 과거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쪽 길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실재의 빛은 결국 무의식 너머로 져버려 이따금씩 조우의 형태로만 마주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반가움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놓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해서 느끼는 심적 갈등과 두려움, 불안, 번뇌로 찾아옵니다. 그는 그러한 “마음 상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대신 도망쳐버립니다. 어디로? 현실로. 현실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는 실재를 외면하고자 하지요. 상징계에서의 바쁜 삶은 실재와의 조우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는 라캉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p240

 

"내가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실베스터가 대꾸했다. “자네 아버지가 자네의 교육을 몽땅 자네 어머니 손에 맡겨두고서 ,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자네의 발전에 간섭하거나 자네가 어떤 특정한 직업을 택하도록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자네는 부모님의 간섭을 조금도 받지 않고 자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하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서로 다른 식성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구 헤집어놓고 간, 잘 차려진 만찬의 찌꺼기일 뿐이거든.”

 

-이 말을 읽었을 때 최근의 DD와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DD는 제게 있어서는 대타자 중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가뜩이나 나는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개썅 마이웨이’ 불길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고 내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내가 선택한 길에 확신도 줄었고 자심감도 많이 낮아졌다. 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며 내가 향하는 곳마다 도피하기 위한 선택은 아닌지, 내가 원해 내린 선택까지도 의심했다.” - 제가 쓴 메모장 中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게 DD는 여러 가지 선택지들을 보여, 아니 던져줬습니다. 간략히 예를 들면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거나, 지금까지 해온 게 결과가 없는 걸 보면 재능이 없으니 장사라도 하라거나 뭐 그런 식이었지요. 그것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진규는 이랬으면 좋겠다” 는 자기 욕망들을 제게 성취해내라고 요구하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왜 ‘남들처럼’ 해내지 못하느냐는 물음과 DD가 뜬금 내놓으라는 ‘결과물’들에 저는 줏대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 ‘결과물’들을 신속하게 성취해내지 못하는 제가, DD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하는 제가 싫었습니다. 한없이 멍청해 보이고 무능력해 보였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세상을 아는 사람은 누구지?” / “그야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지” <푸른꽃 p206 中>

어린 파벨과 스핑크스의 대화. “운명과 마음은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이름” (p242 中) 제가 정말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은 문장입니다. 간이 콩알 만해지거나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주문처럼 되뇌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내부에 반짝이는 빛, 그 빛이 진정한 실재이고, 상징계는 그 위에 여러 그림자들을 드리울 뿐이라는 그런 뉘앙스의 내용도 정말 인상 깊어서 인용하고 싶은데, 어느 페이지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못 찾겠습니다.ㅠㅠ 빛은 이미 우리 각자의 안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하나 하나의 우주였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에 저마다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위에 드리운 그림자, 상징계의 환상이 전부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때가 많지요. 푸른 꽃을 읽으면서 이런 여러 아름다운 문장들을 통해 결국 진정한 진리의 열쇠와 진리 그 자체는 자기 안에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라캉이 무의식은 시니피앙, 상징계에서 얻어낸 일상, 표상, 상징들의 연쇄 고리, 그 끝이 실재와 맞닿아 있다고 표현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가서, 저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부모, 스승, 친구에 의해서,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서 상징계의 ‘좋아 보이는’ 환상들을 성취하고 얻기 위해 스스로의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볼 생각도 안 하고, 묻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를 닦달하고 성취해내지 못할 때면 한없이 채찍질하고 무시하고 내팽개치고.

하지만 대타자 (우리가 상징계의 성취들을 이뤄내는 목표, 대타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요. 대타자 역시 결핍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타자가 요구하는 목표를 이룬다고 해서 우리가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하인리히의 아버지처럼, 늘 무언가 결핍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의 욕망을 억압해버리고 상징계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대타자는 분명 한 명이 아닐 겁니다. 때로는 부모님이고, 때로는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또 때로는 선생님, 형제, 선배 등등 그때그때마다 다르지요. 그들은 제각기, 심지어는 제 안에서도 끊임없이 뒤바뀌는 어떤 인간상을 우리에게 성취해내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받기위해,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 이미 “잘 차려진 만찬”인 우리 자신을 (우리는 이미 하나의 우주, 빛이지만, 상징계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진짜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그들 입맛에 맞춰 뒤엎고 뒤바꿉니다. 그렇게 다듬어지고 깎이고 또 걸러져서 우리는 상징계의 시점에서 보면 보기 좋은, “찌꺼기”가 되는 것이겠지요.

감히 노발리스의 문장에 라캉의 표현을 대입해 이해해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혼자 이러고 놉니다. 죄송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서로 다른 식성과 취향을 가진 사람(대타자)들이 마구 헤집어놓고 간, 잘 차려진 만찬(인간 한 명 한 명 안에 이미 실재는 존재하니까요)의 찌꺼기(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욕망들을 거세해내고 남은, 상징계에 적당한 형태로 깍이고 깎인)일 뿐이거든.”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노발리스의 문장들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 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이후로도 라캉 세미나 공부가 정말 즐거웠습니다.

 

 

p246

 

“(중략) 사실 어린 시절은 땅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요. 구름은 어쩌면 두 번째이자 보다 높은 차원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다시 찾은 천국의 현상인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소나기가 되어 첫 어린 시절을 향해 은혜롭게 떨어지는 거예요.”

“구름은 분명 뭔가 아주 신비스러운 면을 갖고 있어.” 실베스터가 말했다. “어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영향을 주기도 하지. 구름은 떠가면서 서늘한 그림자로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려 데려가고 싶어해. 그리고 만일 구름의 모양새가 우리의 마음이 내뿜는 소망처럼 화사하게 아름답다면, 구름의 밝은 빛, 즉 구름이 이 땅에 던지는 찬란한 빛은 어느 미지의 장관의 전조와도 같아. 그렇지만 침울하고 심각하고 끔찍한 먹구름도 있지. 그런 구름들을 보면 간밤의 모든 공포가 튀어나올 것만 같지. 그러면 하늘은 다시 맑아질 것 같지가 않아. 새파란 빛은 모두 지워지고 없고, 짙은 회색 바탕에 그려진 퇴색한 적갈색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지. 그러다가 모든 것을 부술 듯이 번개가 내리치고, 이어서 조롱하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천둥이 우르르 쾅쾅거리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온통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지. 그때 우리의 가슴 속에서 도덕적인 위엄의 숭고한 감정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끔찍한 지옥에, 다시 말해 악한 망령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믿는 거야.

천둥은 태곳적의 비인간적인 자연의 메아리야. 또한 보다 드높은 자연, 즉 우리 가슴 속의 숭고한 양심이 부르는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지. 유한한 존재는 땅속 깊은 움막 속에서 소리를 질러대지만, 불멸의 존재는 보다 밝게 빛나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지.”

 

-이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정리입니다. 맞는 해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 연결 지어서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문학 작품을 이렇게 해부하듯이 뚝뚝 단어만 끊어서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제가 이해가 부족한 관계로 단어 단위로 쪼개서라도 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하핳:;)

천국 - 미지의 장관 - 보다 드높은 자연 - 숭고한 양심 - 빛 - 실재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상징계의 법과 규율에 물들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창조자로서 내세울 줄 알지요.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그 인물들이 앞으로 겪어나갈 일들을, 사건들을, 운명을 앉은 자리에서 스스로 지어내고는 하지요.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를 창조자의 위치에 두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실재는 내면에서 작용하며 아이에게 이야깃거리, 환상을 만들어낼 자본을 대줍니다 (여기서의 ‘자본’은 프로이트가 말한 “낮 동안의 일들은 ‘기업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꿈이 되려만 돈을 대는 ‘자본가’가 필요합니다. 꿈에 자본을 대는 역할을 ‘어린 시절의 소원’이 한다는 겁니다. (중략) 유년기에 비롯된 무의식적인 소원의 성격은 성적인 것이라는 거지요.”-라캉 세미다 4장 프린트 p7- 이때의 자본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해야할 것 같습니다.) ‘환상을 만들어낼 자본’을 노발리스는 “첫 어린 시절”에 떨어지는 소나기에 빗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구름 - 천국의 현상 - 먹구름 -미지의 장관이 던지는 전조- 그늘 - 천둥 - 숭고한 양심이 부르는 목소리 - 투케(실재와의 조우)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라캉 두 번째 세미나를 듣고 난 뒤, 제가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을 시적인 상징으로 풀어냈던 게 떠올랐습니다.

 

*불안과 그림자 (…라캉 두 번째 세미나를 듣고) -누런 메모장 中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일상을 산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은 실감하지 못한다.

이런 인간에게 이따금 어렴풋 죽음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죽음이 알싸하게 오감에 감지되어 읽힐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불안’을 느낄 때인 것 같다. 내가 의미 부여했던 대상이, 일이 틀어지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리거나 또는 그것의 존재 자체가 한순간에 소멸되버리거나 할 것 같은 아주 어렴풋한 느낌.

(메모장) 앞장의 글에서 썼듯이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 소멸을 맞는다. 영원히 빛나는 것은 없다. 그런데 빛이 있는 곳에도(생명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어둠(소멸)이 늘 따라 붙는데, 그것이 ‘그늘’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에게는 늘 죽음이 따라다니고 그것을 생명체가 어렴풋이 실감할 때 불안의 형태로 느껴진다.

빛에는 늘 어둠, 소멸의 순간이 따라다니고 그것이 빛이 존재하는 가운데 형체를 들어낼 때 그늘의 형태를 갖는다.

 

존재하는 것에게 늘 따라붙어 있는 죽음, 소멸. 그것들은 끝내 존재의 끝에 가서 맞닥뜨릴 것이지만, 존재가 존재하는 그 순간에도 슬쩍 슬쩍 얼굴을 내비친다. ‘불안’과 ‘그림자’의 형태로. (여기까지)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 실재와 조우하는 순간, 투케. 그 순간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불안을 느끼는 까닭은 제가 밝혀낼 수는 없겠지만, 그 불안을 개인이 받아들였을 때, 보이는 반응은 흔히 우리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상징계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며 무의식의 차원, (또는 노발리스처럼 표현해보자면) 그 이상의 차원을 느끼지도 못한 채, 찾을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유한한 존재”들이 그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볼까요?

그들은 생각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하늘은 다시 맑아질 것 같지가 않아.”, “악한 망령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믿는 거야.”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 공포에 사로잡혀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안 좋은 일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생각 그 자체를 이미 벌어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과 공포에 쫓기며, 시야를 가린 말처럼 그저 앞을 향해 열나게 달리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안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시하고 일상 속에서 열나게 달리기라도 한다면 상징계에선 물질적으로라도 건질 것이 있을 테니 말이지요.

 

 

 

 

 

제가 정리한 건 여기까지입니다. 미완의 글을 존댓말로 고쳐서 올리다보니, “넘겨짚기 갑, 제멋대로 몰아가기 갑”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애정하던(?) 수업의 끝에 후기 하나 쓰고 마쳤다고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이 글이라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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