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자유정신
# 자유정신 소유자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
# 무지에의 의지를 세련되게 한다는건 무슨뜻인가?
주장하는 진리들이 아름답게 꾸며진 상태 (영화 혹은 소설처럼 가상의 예술세계를 통한 방식).
진리가 존재하므로 오류가 존재한다.
진리는 수많은 오류 중 하나, 아직 반박되지않은 오류이다.
가상성을 긍정하기.
#25~26 은 철학자들에 대한 요구 (진리를 즐겨라!)
진리를 위해 순교하느니 차라리 대중속으로 들어가라
#29/41 독립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위험한가?
자기보존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보존할 줄 알아야한다.
독립은 기존가치로부터 멀리 떨어져와 있는 상태, 그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따라서 책임도 그만큼 많다.
#33 감정이 갖는 힘의 의지 (감정의 즐거움)
이타주의는 결국 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즐거움일뿐이다. (동정과의 구분!)
#36 의지의 인과성 (방법의 양심)
니체는 의지의 인과성을 유일한 인과성으로 정의한다.
과감하게 ‘작용’이 인정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의지가 의지에 대해 작용한다.
세계는 힘에의 의지가 근본충동이요, 의지이다!
제3장 종교적인 것
# 종교적 인간의 영혼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가 되었는가?
#51 성자들의 금욕주의(반자연)
#58~59 학자의 종교적 정서와 예술가의 종교적 정서는 어떻게 다른가?
학자들은 객관성에 집착하여 종교적 신앙심없이 대하고있다
예술가들은 순수형식- 가성성, 피상성(허구), 숭고미
(다음시간에 마저 토론할 것)
# 61~62 종교의 활용론(교육수단), 종교의 위험성(절대권력)
# 56 영혼회귀
힘의 의지
1 |
유일한 인과성 |
인간의 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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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 |
동물의 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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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유기체의 기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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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운동 |
2 |
의지의 복합성 |
감정, 사고, 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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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명령하는 의지/ 복종하는 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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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변화가 가능(다원론) |
시간은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돌이킬수없는 과거/ 예측불가 미래)
니체의 문체
-
논리적 문체 (논문형식)- 낙타시대 (가치의 복종) =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 도덕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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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 문체 (잠언형식) - 사자시대(가치전환) =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학문 / 선악의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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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체 (산문시) - 아이시대(가치생성) = 짜라투스트라, 디오니소스 송가 / 메시아 전원시, 즐거운학문 일부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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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결과 순결
3장 종교적인 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니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 3장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던 질문이었더랬습니다.
처음에는 그래, 종교란 이렇게 사람을 마비시키고 하락하게 만드는 거야! 역시 버려야할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뭔지 모르게 내가 너무 피상적으로
읽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이 생기더군요. 그렇다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그토록 비판했던
반종교적 태도에서 더 나아간게 없는, 확대 재생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심연에서 또 악의적인 곁눈질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세미나 시간 도중에 불현듯 스쳐가는 질문들.
종교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왜 니체는 서문이라 할 수 있는 #45 아포리즘에서 인류 역사의 모든 체험은 자신에게는 수렵장에 불과했다고
말했을까?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하는 정신에 이어 왜 삶을 긍정하는 정신, 드높아지는 하늘이 필요하다고 했을까?
설마? 니체는 종교적인 것에서 자신이 드높아질 수 있는 넓게 펼쳐진 하늘이라도 본 것일까?
세미나를 마치고 집안 서재에 앉아 3장을 다시 펼쳐듭니다.
이번엔 거꾸로 읽어보자!
종교적인 것에서 버릴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니 어쩌면 드러내놓고 긍정하지 않지만
니체의 부정 속에서 그 이면에 긍정하고 있는 점들에 집중해보자!
아래는 그 결과 얻은 저만의 스토리 텔링입니다. 저만의 해석이기에 딴지는 대환영입니다! ^^
물론 그것 역시 당신의 해석일테지만 말이지요. ㅎㅎㅎㅎ
#45. 너 지금까지 "종교적 삶"을 살아온 자
기존의 가치, 질서, 규범, 습속, 평균적인 것, 관습과 관습이 된 생각들과 감정들 모두에
충실하게 믿고 의지하며 너의 모든 것을 바치며 자신의 욕망을 극복해 온 자
이 점에서 너는 종교적 인간일 것이다.
이제 니체와 세미나를 통해 겨우 그러한 통념들로부터 자유로워 지려고 날개짓 하려 하는 자
먼저 기존의 가치 = '도덕'이라 칭해보자.
도덕을 넘어서고 극복하려고 하는 자.
도덕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나는 이제 구습에 대한 믿음을 모두 버리겠어! 라는 선언 만으로 가능한가?
이제 신은 없어! 라는 선고만으로 가능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자산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미워하는 내 안의 종교성(믿는다는 것 그 태도 자체)에도
뭔가 보존해야 할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연구해보자!!!!!! (p81)
#51. 종교적 인간, 속칭 '성자'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그는 신에 의지하는 약한 의지만 있는 인간인가?
어쩌면 그야말로 자신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강한 의지의 인간은 아닐까?
내가 아닌 나의 밖의 그 무엇을 믿고 의지한다는 관점에서는 약자이나,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 복종한다는 태도적 측면에서는 강자의 특징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우리 안의 종교성을 통해 우리는 수치스러운 모습만 얻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그 종교성 덕분에 나는 현재 나름 이 사회에서
그나마 평균적인 아름다움에 걸맞는, 그것을 나름 즐겨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긍정적 종교성. 그것은 내가 나에게 스스로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적어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하게 밀어부치는
실천력과 자기 억제력("력" - 이것도 분명 힘이다! 힘의 의지!)을 가지고 있다!
#53. 어쩌면 현대의 무신론은 종교적 본능 때문이 아닐까?
종교적 본능......믿는다는 것. 진정으로 믿고 싶을 때 상대가 모호하면
참을 수 없다.
내가 믿는 나의 보스는 강해야 하며 보다 분명한 자기 논리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강자인 만큼 나의 보스도 강자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신뢰는 오히려 상처받고 실망할 것이다.
종교도 그렇지 않을까?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그 대상인 신도 그에 걸맞는 신성으로 무장되길 바라지 않을까?
니체는 지적한다. 너의 종교적 본능,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본성이 오히려 너로 하여금
실체없는 기존 종교에서 너를 이탈시킬 거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은?
정직의 자세로 우리가 믿고 있는 나 자신 (= 현재의 도덕)을 끝까지 밀어부쳐야 할테다.
나의 강한 믿음만큼 나는 충분히 강한가? 독립적인가? 자기 원인을 가지고 있는가?
그 결과는 뻔하지만 말이다.
: 나는 충분히 강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스스로의 이유조차 되지 못한다고 말이다!
#54. 현대철학은 이 점에서 정직하지 못했다.
종교적 본능에서 시작된 의심을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한 결과
어설프게 신의 자리에 내가 아닌 또 다른 그 무엇(근면성, 삶의 위조 본능, 그리스도의 부정)으로
채웠을 뿐이다.
현대철학은, 아니 지금까지의 나름 무신론자로 살아 온 '나'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56. 정말 극복하고 싶다고? 그럼 섣불리 떠나려고하지 말고,
우선 현재 서있는 그 곳을 파들어가 보라.
끝까지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종교적 본능을 가지고 끝까지
나는 끝까지 밀어부쳐봤을 뿐인데......
"의도한 적이 없다고 해도"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어느덧 반대되는 이상에 (도덕의 반대편에, 현재의 나의 반대편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라고 니체는 예언한다.
그랬을 때에만 우리는 영원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된다고도......
그럼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우선 나의 종교적 본능을 더 강하게 키우는 것이겠다.
진심으로 믿고싶다. 나의 현재의 생각과 습관들의 타당성을.
나의 목공이 순수한 자기 목적을 갖기를, 나의 이타심과 이기심이 순수한 정당성을 갖기를
믿어야겠다.
끝까지 믿고 그 정당성을 찾으려 스스로 노력해봐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거꾸로, 의도치않게, 뜻밖에
나의 목공의 근거없음을, 나의 이타심과 이기심에는 아무런 정당성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제서야 비로소 비워진 그 믿음의 그릇에 또다른 믿음이, 새로운 믿음이
물이 고이듯 고이지 않을까? 역시나 의도치 않게 말이다. ^^
#보론. 꼼꼼한 니체씨, 덧글을 붙이다.
종교에 대한 어설픈 학자들의 경멸, 경건함으로 소망하는 예술가와 종교인,
종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시도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너는 적어도 이런 실수는 안할거지? 그정도 바보는 아니지? 라고.......^^
신속하고 핵심적인 후기입니다. ㅎㅎ 특히 토론주제를 중심으로 한 요약정리인 거 같습니다.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추가하면.
니체는 "시간조차 의지의 대상을 삼을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ㅎㅎ
이는 우리의 의지와 분리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현재는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의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무기력'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시간도 우리의 의지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미래라는 시간의 형식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지나간 수많은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소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지나간 일들 가운데 아픈 과거를 아픈 방식으로 소환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의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불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신대 위안부의 과거를 가진 대부분의 여성은 죽는 순간까지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했지만,
김복동할머니 같은 분들은 그 과거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수치스러운 약자가 아니라, 사건을 주도하는 강자로 변신합니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의지는 무엇인가?"
다가올 수많은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예측할 것인가 역시 전적으로 ‘나의 의지’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공포와 불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모험과 활력으로 즐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일의 모든 날씨를 나쁜 날씨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일의 어떤 날씨든 좋은 날씨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능동적인 힘과 긍정하는 의지를 갖는 한,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긍정하게 될 것이며, 반면
우리가 반동적인 힘과 부정하는 의지를 갖는 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우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의 제약에 구속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역시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