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의되었던건 많았는데 따로 기록을 하지 않아서인지, 막상 후기를 적으려니까 제가 고민했던 생각들만 떠오르네요.
있는 존재를 없음으로 규정하는 시선, 권력의 시선, 다수의 시선, 자본의 시선은 그 존재들이 비가시화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시선이다.
그 수직의 힘 아래에서 가리워진 존재들, 있어도 보이지 않는 힘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관계들, 수평의 힘이 있다.
가리워진 존재들이 재잘거리고 소란스럽게 하고 제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할 때 없는 존재는 있음으로 나오게 된다.
그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없어도 있는 자들을 한번씩 보게 될 때, 우리는 무능력한 권력의 시선에서 한발자국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도를 하게 된다. 기존에 나를 규정했던 시선은 무엇이었는지, 그 규정들은 어떤 경계들을 만들어냈는지, 그리고 나는 그 경계안에서 어떤 시선을 갖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내 주변에, 도처에, 무엇보다도 나에게 수직의 힘이 만연해 있음을 알고 한번씩 꿈틀거려 본다. 그래서 부딪히고 멍이들고 상처입는다. 거절당한 존재가 한번씩 되어보며 아파서 그만두기도 하고, 다시 멍이 들어보기도 한다.
다소 멀리 있는 정치권력의 힘, 자본의 힘에는 분노나 저항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이 나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규정하는 것에 화가 나서 비장하게 한 방 날려보고자 고민해보기도 한다.
나는 매 순간 거절당한 존재로 살아간다. 수직의 힘과 수평의 연대는 매번 달라지며 매번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한다. 합의나 설득이 되지 않은 채 늘 함께 있다. 어쩌면 이것이 환타지를 걷어낸 삶의 실제일지 모른다.
어긋난 존재, 거절당한 존재로 살아가면서 멍과 상처로 얼룩진 자의 분노나 슬픔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한두가지 감정으로 내 삶 전체를 채색해버리지 않는 것, 나를 무력한 타자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것, 사태의 원인을 특정하여 그것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시인과 철학자에게서 내가 배운 점이다.
권력의 시선 아래, 빛의 세계를 사는 자들은 그림자와 어둠의 세계를 잘 보지 못한다. 권력의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날 때, 빛의 세계에서 어둠을 한번씩 보게 된다. 시인은 말한다. 이제는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존재의 어긋남을 살아내려면 어둠에서 필요한 새로운 감각으로 나의 감각을 이행시켜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 어긋남의 감각으로 살아내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