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니체_첫 번째 후기
쟈스민
아침놀을 끝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선악의 저편,의 인트로인 <다이너마이트 니체>.
믿고 가는 엇결의 발제는 특유의 방식으로 리듬감있게 진행되었다. 자세한 것은 발제문을 참고하면 되고 후기에는 토론 중 나왔던 이야기와 말하지 못한 내 생각을 담아보려 한다.
■ 엇결/ 아이디어 개선안, 어떤 일을 바꾸기 전
이 일의 기존 매뉴얼은 누가 만들었고, 그 상황은 어떠했지?
그 당시 상황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 확인
이에 맞추어, 어떻게 접근해야하지?
□ 무작정 문제의 개선안을 현재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그 팀원분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작게는 학교나 가정부터, 크게는 정책이나 시대의 현상까지 다양한 문제들과 만난다. 그때 당장 그럴듯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에 급급하게 되면 그 문제는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타나게 된 그 시작점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이고 계속 그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이전과 다른 체질이 될 것이다.
■ 현대성에 대한 비판
-다원성 대신 평범성
-평범성을 향한 본능
■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 vs 올바른 길이 충돌할 때, ‘피로’로 인해 다수를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특함, 옳음, 아름다움 대신 선택한 길. 서로 다른 갈등들을 오직 하나로 취합할 수 있다는 위험한 믿음.
-민주주의를 극복할 민주주의 : 민주주의 그자체가 옳은 것이 아니다. 필요에 의한 제도라는 생각과 그 속의 다수가 ‘옳은’ 존재가 아닌 힘과 힘의 대결에서 ‘잠시’ 승리한 자라는 생각을 품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넘어갈 때 그른 쪽은 악이 되고 더 이상 의견을 토해낼 수 없다. 힘과 힘, 내가(우리가) 진 것은 내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힘이 약해서이다. 서로 다른 우리를 모아 힘을 합하자.
□다수결은 그저 합의의 기술일 뿐이다. 합의에 따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에게 권한을 주고 그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평등에 대해서 더 촘촘히 바라보면, 모든 이들은 이미 동등하지 않다. 공장제가 아닌 이상 서로 다른 유전자를 타고나서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성장한다. 같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이다. 존중이라는 가치 아래 다른 말을 내뱉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다수결의 합의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
인간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져있다. 각각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는 옳지만 모든 문제에 그 목소리를 전부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상은 토론하는 그 순간에는 일어나며 많은 결정은 시간성을 가진다. 이런 시간제한 속에서 최선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적 합의는 함께 내린 결정을 믿고 책임자를 지지해주는 것이다.
□잠시 승리한 자를 바라보며, 그의 사상이 옳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똑같이 믿는 이들을 모아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라는 말처럼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많지만 모이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그러면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또다시 ‘우리’라는 집합 속에서 타인을 획일화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 광부와 동성애자라는 다른 집단이 각자 다름을 인정한 채로, 그럼에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쌓인 유대감으로 함께 했듯이 말이다.
■ 어떤 청소년의 이야기
왕따라는 아픈 기억이, 모든 감정과 마음을 끝까지 토해내는 6개월을 보낸 후 더 이상 자신을 지배하지 못했다.
□ 스스로를 괴롭히는 복수심을 만족시키고 해방된 아이. 만족은 어설픈 외면이나 위로보다 건강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 현우의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 편을 들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의견을 수용한다는 것에 대해 불신의 눈초리를 던지다.
-밖에서 멈춘 듯 보더라도, 나는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다림’
-돈키호테) 광기-꿈, 현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들었을 때 최근 읽었던 칼럼니스트 위근우의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점점 자신이 믿는 도덕을 따르는 힘을 잃어가고 모호하게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거나(상대주의) 다수(대중)나 오피니언 리더/언론(권력)의 도덕을 따르려 한다. 도덕을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이 사회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대성’의 문제일까?
□돈키호테가 나와서 반가웠다. 언젠가 읽어봐야지하고 계속 벼르고 있는 책이자 벼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2018년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실제 현실의 이야기와 작품 속의 내용이 묘하게 겹치며 우리들의 꿈과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얼마나 나에게 진실했는가?
■ 떠오른 생각
p.28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고착화된 한 가지 스타일의 인간을 넘어,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봤는가?(=실험, 시도, 질문)”
□내 안에는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나의 모습’ 외에 수많은 모습(가능성)들이 숨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나타나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고 나는 다가간다.
현우의 말을 듣다가 떠오른 인간 유형이 아래와 같다.
#과거의 관성의 자각 – 비평가
#과거의 관성 부수기 – 혁명가
#새로운 나, 길, 진리, 삶, 도덕 세우기 - 입법가
□비평가는 비평가로 끝날 수 없고, 입법가는 처음부터 입법가가 아니다. 과거의 관성,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이를 부수는 과정이 있고나서야 나는 새로운 관성, 새로운 나를 만든다. 이는 작게는 매순간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지각할 수 없고, 보통은 큼직한 삶의 연속성에서 느끼고 고뇌하고 부수고 다시 일어난다. 그렇게 다시 살아가다가(-동작, 움직임) 어느날 문득, 때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 이 과정은 또다시 크게 일어난다.
□내가 비판하는 자본 원리 속에 비판하는 내가 살아가기에 생기는 오류와 모순. 그럼에도.
□내 삶에 정말 진지했는가?
■ 퍼스펙티비즘
-자신의 생존조건/방식을 반영한다. 자한당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끝났다’는 옳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끝났으므로 진정성있는 말. 조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그들’이 참을 수 없는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각자의 퍼스펙티브
-특정한 조명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해석한다.
-세계에 대한 해석 이전, 하나의 해석으로서의 세계(이미 ‘어떤 해석’으로 나타난 이 세계)
-당신은 얼마나 많은 퍼스펙티브를 체험했는가?
-상대주의의 함정. “모두가 옳은가?” 너의 관점의 가치를 논한다. 위계의 논의. 보편주의가 인류에게 지속성을 부여한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하나 거기까지이다.
-민감한 사람은 에피쿠로스가, 튼튼한 위장을 가진 사람은 스토아가 어울린다. 구체적 배치라는 차원에서 퍼스펙티브의 위계를 말하다.
□앞으로도 계속계속 나올 관점주의는 카메라가 낀 렌즈와 같다. 어떤 렌즈를 갈아끼우냐에 따라 사물은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깝게 보이기도 하고 움추린듯 하고 활짝 핀듯 하다. 해석의 렌즈는 내 삶에 접착되어 있어서 물건처럼 자유자재로 갈아끼울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렌즈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 NQ(관계능력)
-이해는 못해도 공감은 가능하다.
-7빠, 7일 동안 춤추러 나오는 중년의 춤꾼들. 그들에게 갑자기 정치, 철학 얘기를 하면 귀담아 들을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또래 사이에서는 확실히 들을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의 삶의 일면을 엿본 것 같았다. 평소에 내가 쓰는 말 중 관계지능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높은 친구는 배려를 받는 상대방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배려한다. 타인과 맺는 관계 외에도 자신과 맺는 관계도 확실하여 자신의 상황, 호불호, 가치관을 배려 뒤로 물리지 않고 필요한 때 분명히 세운다.
■ 엇결의 만남이야기
-만나는 사람들의 층위가 달라지면, 그 만남만으로도 신체감각이 바뀐다.
-어떤 비열했던(했다고 생각한) 인간이 순진무구하고 참으로 인간적인 인간으로 바뀌기(생각되기)까지의 여정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두렵다. 내가 어떻게 바뀔지 기대되고 내가 어떻게 부숴질지 무섭다. 서로 싸우는 두 충동은 내가 약할 땐 두려움이 승리하지만, 대부분 이기는 것은 설렘이라서 환대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나도 위의 사례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을 믿었다가 그의 비겁함에 치를 떨었지만 후에 돌이켜 생각해봤을 때 그는 자신에게 솔직했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그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는 분명하게 전달했다. 그저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인간적인 인간, 자신의 충동에 충실한 자.
인간 너머의 인간, 도덕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충동에 충실한 자.
아주 작은 차이가 가른 두 유형의 인간들.
늦은 후기라서 더 반가운 쟈스민의 후기 가운데, 저는 이것을 픽PICK 했습니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봤는가?(=실험, 시도, 질문)"
이 질문의 전제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 서문의 이 텍스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보다 '잠재성 전체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힘들(충동, 의지, 욕망, 정서)의 복합체이며, 이 가운데 지배적인 힘이 그때마다 이질적인 주체를 구성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주체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힘에의 의지의 구성'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내부에 얼마나 다양한 충동, 얼마나 거대한 힘들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시도와 실험과 질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토드 헤인즈의 영화 [I'm Not There 아임 낫 데어]는 참으로 적절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1628
이 영화는 먼더, 밥 딜런의 생애를 7명의 각기 다른 배우를 통해 표현하여, 단일한 자아정체성을 해체합니다.
이러한 자아의 해체는 다분히 의도적이어서, 감독은 백인 중년 남성인 딜런을 흑인으로 혹은 여성으로 표현합니다.
뿐만 아니라, 7명의 밥 딜런은 각 시대와 각 사건의 주인일 뿐, 단일한 주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7명의 딜런을 이어주는 일관성이란, 그들의 '사유나 의식'이 아니라 모든 딜런들이 '발을 튕기는 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딜런'을 상정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각 시대와 사건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딜런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이 딜런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내부의 다양한 힘과 충동에 나를 개방한다면, 즉 더 많은 시도를 통해 새로운 나를 실험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기다리는 방식일 것입니다.
밥 딜런이 하나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딜런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자기 내부의 힘에 자신을 열어둔 실험때문일 것입니다.
딜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혼돈을 받아들여요. 혼돈이 날 받아들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딜런은 'I'm Not There 거기에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는 없었다'고,
다만 각 시대, 각 사건에 접속해 있는 '자신의 충동에 충실한 나'만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