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세미나자료 :: 기획세미나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뜨거운 삶을 사는 여자, 혜진!

 

뜨거운 여자 혜진을 처음 만난 날은 내가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였다.

 

 한 여름날 나는 도서관에 가기 위해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눈을 반쯤 뜨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귀신을 본 것인가? 나는 다시 눈을 비비고 그녀를 보았다. 분명 그녀는 꿈속이 아닌 실존하는 인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수 여자친구 혜진이예요.”

 

   나는 잘 못 들었나? 하는 의심 속에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때 엄마가 나서서 설명을 해주었다. 당시 내 남동생 진수는 대학생이 된 첫 여름 방학을 맞아 고등학교 친구들과 3박 4일의 여행을 갔었고, 그 날은 새벽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혜진은 3일 동안 보지 못한 진수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그 아침 일어나자마자 우리 집, 거실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 설명을 듣고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유심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어... 그래, 그래... 안녕!”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단어를 어설프게 내뱉은 나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두피를 박박 무지르며, 나는 뭔가 띵하게 종이 울리는 것 같은 그런 타격감을 느꼈다. 저기 화장실 문밖에 찾아온 뜨거운 여자 혜진이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 유형! 마른 하늘에 떨어진 벼락 같은 여자! 저 여자에게 나는 심각한 질투심을 느꼈다.

  이 여자는 진짜 뜨거운 진짜의 삶을 살고 있구나. 나는 늘 내 삶의 마찰지점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자적 삶을 살고 있었는데, 늘 감정을 조절하며 어떤 것에도 나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며 산 적이 없었는데, 혜진 그녀는 삶의 순간순간, 주저 없이 세상의 중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이 이끄는 방향으로 본능의 삶을 살고 있구나. 진짜구나. 그녀는 상처받는 따위는 관심도 없구나.

 

뜨거운 여자 혜진, 군대 간 진수를 버리다.

 

그 다음 해, 봄날 내 동생 진수는 입대했다. 한동안 우리 집을 드나들며 막내를 군에 보내고 마음이 허한 엄마를 찾아와 혜진은 진수의 성장 과정이 담긴 오래된 앨범을 보면서 진수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3달쯤 지났을 무렵, 혜진은 더 이상 진수를 기다릴 수 없었는지, 원래 사귀었던 선배가 제대하고 돌아오자 그에게 돌아갔다. 진수는 군대 생활의 어려움과 연락을 끊은 혜진에게 받은 상처로 한동안 많이 힘들어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뜨거운 열정을 가진 혜진과 한참 사랑만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춘의 한 가운데를 함께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진수에겐 의미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지독히 순수한 열정을 함께 했을 것이기에 나는 내 동생을 버렸지만, 혜진이 밉지 않았고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곤 한동안 뜨거운 여자 혜진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다시 그녀의 소식을 들은 것은 이후 4년만 이었다. 제대하고 돌아온 선배와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는 혜진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선배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고 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이 늘 그렇듯 처음의 사랑은 연기처럼 일상으로 사라지고, 남편은 자기 일에 바쁘고 아이를 키우는데 메여 자신을 잃어가는 보통 대한민국 주부의 삶만이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을 혜진이 잘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열정이 없는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진수의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한번 만나자고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 고지식하고 속 좁은 진수는 복수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제안을 거절했다고 자랑스럽게 으스대면서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부족한 놈아, 니 거절은 혜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도 나는 거실에 앉아 있는 혜진을 느낀다. 화장실 문밖에 앉은 그녀는 그녀의 뜨거운 삶을 그녀의 냄새로 그녀의 숨소리로, 그리고 그 아침의 생경함으로 나를 향해 벼락을 치고 있다. 너도 나처럼 삶을 향해 뛰어들어! 세상의 시선 따위 다 개나 줘버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렇게 계속 내 감정을 관찰하고 내 삶을 관조하며 ‘나’라는 드라마를 감상하듯이 살고 있다. 혜진 그녀가 내 삶에 뛰어든 그 날 이후 나에게 찾아온 변화는 타인에 시선에 대해서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관찰자이지만, 내 삶을 타인의 가치 기준에 가두어 두지 않는 것만으로 내 삶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다.

  어느 날 나에게 세상이 쓸데없이 과도한 책임감을 요구할 때면 나는 이렇게 소리친다!

  "굳이 세상에 잘 보일 필요 없어. 그렇게 잘 할 필요는 없어!"

 거실에 앉은 혜진이 깔깔대며 큰 소리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감고 있는 나도 웃는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4철학에세이_니체 :: 니체와 함께 아모르파티 [1] oracle 2024.06.01 81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2북클럽자본 :: 자유의 파토스, 포겔프라이 프롤레타리아 [1] oracle 2022.12.22 232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0니체세미나 :: 비극의 파토스, 디오니소스 찬가 [2] oracle 2020.12.21 390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니체세미나 :: 더 아름답게! 거리의 파토스 [2] oracle 2019.12.19 703
1097 [철학에세이_니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나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1] 모래두지 2024.05.11 39
1096 [철학에세이-니체] 한영시집 [아,아] 출간에 즈음하여 [2] file 박소원 2024.05.11 40
1095 [철학에세이_니체] 초월, 기억, 망각의 영원성 [1] spurezatura 2024.05.11 42
1094 [철학에세이_니체] 파괴, 변화, 생성을 무한반복한 피카소 [1] 흥미진진 2024.05.11 30
1093 [농경의 배신] 제4장 : 초기 국가의 농생태 모래돌이 2024.05.10 18
1092 [농경의 배신] 제2장 경관 조성: 도무스 복합체 file 누혜 2024.05.10 32
1091 [농경의 배신_발제] 3장 인수공통전염병 유택 2024.05.09 50
1090 [육후이의 기술철학과 사이버네틱스]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론에 대하여> 후기 채승우 2024.05.07 55
1089 [농경의 배신_발제] 서론. 누더기가 된 이야기 oracle 2024.05.03 48
1088 [농경의 배신]1장 발제 file 최유미 2024.05.03 63
1087 [석기시대의 경제학, 청동기시대의 정치학] 석기시대 경제학 6장 발제 file 담묵(상혁) 2024.04.26 38
1086 [석기시대의 경제학, 청동기시대의 정치학] 석기시대 경제학 5장 발제 file 흰꼬꼬 2024.04.26 42
1085 [육후이의 기술철학과 사이버네틱스] 재귀성과 우연성 - 서론 5-8절 질문 이곧 2024.04.24 44
1084 [육후이의 기술철학과 사이버네틱스] 재귀성과 우연성 1~4절 질문 백동엽 2024.04.22 50
1083 [철학에세이_니체] 영화 [밀크]와 니체 file 박소원 2024.04.22 32
1082 [철학에세이_니체] 니체 자녀 되기 프로젝트 니키 2024.04.20 31
1081 [철학에세이_니체] 잊혀지기 쉽지 않는 사람들 [1] 모래돌이 2024.04.20 24
1080 [철학에세이_니체] 사고는 이렇게 사건이 된다 [1] 흥미진진 2024.04.19 29
» [철학에세이_니체] 6주차 에세이 - 뜨거운 삶을 사는 여자, 혜진! [1] 하늘빛오후 2024.04.19 48
1078 [석기시대의 경제학, 청동기시대의 정치학] 석기시대 경제학 _3장 발제 file 해돌 2024.04.19 49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