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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자본 시즌1] 에세이

'자본주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질문 끝에 그려진 자본

이 상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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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부터 그는 흐릿한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훤해 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잠이 덜 깬 것임에 분명했다. 조용히 애무 하듯이 그는 꿀처럼 짙고 느린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대지, 물, 생각 그리고 인간의 전 우주가 먼 바다로 흘러 들고 있는것 같았다. 조르바는 저항도 질문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 그러나 나 자신도 햇살이 장미빛으로 들어오는 아침에 가만히 몸을 일으키며 행복감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70p)

그러나 일어나야 한다. 청록색의 짙푸른 저 바다 끝에서 일고 있는 파도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가는 저 지중해가 나를 삼켜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둘러싼 기운이 나보다 월등할 때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는, 어디에 어떤 형태로 끌려들어 있는지도 모른채 그냥 밀려 들어가 헤매며 살기 십상어서 의식을 넣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동화되어서는 안돼! 어제 밤늦게 도착한 해변 숙소에서 짐을 싸 안쪽, 바다가 보이지 않는 평야 그 한가운데 있는 나의 '마롱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 휩쓸려지기 전에..

시간이 동시대적으로 시계바늘 속에 묶여 같이 흘러가지만,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선택해 살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보는 한국도시의 상징들을 벗어나 다른 문화에 들어가 있을 때마다 갖는 생각이다. 우리는 핸드폰 네트워크에 들어가 살지만, 또 어느 곳에 가면 2022년이 아닌 다른 시대를 선택해 살 수 있다. 체계나 문화는 동시간대라도 장소에 따라 다르게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조캉사원 앞에서 오치투지를 끝마치는 순례자들이 건너온 티벳의 도로와, 이곳 몰타의 딩글리 절벽 쪽을 가면 만나는 말 달구지에 두건을 쓰고 지나가는 농부의 도로와, 서울의 소란 격렬한 도로를 생각하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시간을 살고 있지만 분명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다른 물적 토대 위에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이다. 그래서 생각하곤 한다. 내게 뛰어난 문화적응력과 합당한 자본이 있다면 시대를 선택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옮겨온 이곳은 몰타섬 안쪽지역에 위치한 대학 레지던스로 우리는 '마롱의 집'이라 부른다. 이곳의 총괄매니저인 마롱은 젊은 몰타인의 동글동글한 생김처럼, 유연하고도 평온하게 그리고 합리적 가격으로 지중해의 안전한 겨울 한철을 선물해준다. 내가 머무는 방 창문 너머에는 도로를 사이로 초등학교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표현하자면 르네의 그림 ‘빛의 제국'1) 그대로여서, 해가 지는 초저녁에는 매번, 도저히 ’빛의 제국‘이 초현실주의 그림이라는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내 눈앞에 불켜진 가로등과 어두운 나무와 건물 너머 분명히 푸르게 빛나는 하늘과 바삐 움직이는 구름이 그림에서 표현된 그대로의 빛의 대조를 보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등교를 시키며 인사 나누는 부모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차량소리에 엉켜 부산스러움을 건네온다. 그리고 상점의 80% 이상이 긴 셔터문을 내리는 오후 3시즘이 되면, 다시 차량소리와 아이를 데리러온 인사소리로 건물현관은 활기찬 공명을 가득채운다. 멜라~ 짜우~ 멜라!!. 도시의 상점들이 저녁 6시를 전후하여 다시 열리기 전, 오후나절 3시간 가량은 도시가 밤처럼 조용해지는데, 첫해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사암으로 만들어진 도시 건축물만큼이나 건조하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적응하고 나면, 이 보다 더 인간적인 시간의 활용이 없다 싶다. 잠시 근무현장을 외출한 부모는 풍요로운 지중해의 햇살을 공유하며 해가 떠있는 시간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고, 소일을 보다가 늦은 오후에 다시 일터로 가거나 상점문을 연다.

이 곳 겨울은 반팔과 긴팔을 수시로 갈아입게 하는 구름과 바람, 엄청나게 쏟아붓는 소나기에 맘이 상하는가 하다가도 바로 파란 하늘과 햇살이 눈을 가득 채워주는, 허브향이 묻어나는 바람만으로도 하루가 그냥 흘러버리는 지중해이다. 그런데 이 날씨가 여름이 되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달아올라 해변이나 풀장을 옆에 끼고 꼼짝할 수 없게 한다고 하니, 이 노동시간이 물건너 온 옆 나라의 씨에스타의 모방본인지 연영방 시절의 노동법이 시초인지 알 수 없으나, 살아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채 한국에서 느리거나 게으름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보기 전에는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없으며 의식할 수도 없다. 일상생활에서 타인을 절대로 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 할 수 없듯이, 우리는 다른 문화도 우리의 눈으로 해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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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귀족과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비극을 이해하니까. 그들에게 비극은 하느님의 기본원칙이며 존재를 이해하는 열쇠이니까. 그들은 그런 점에서, 비극을 부인하고 그것을 견디려 들지 않고 비극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쾌함으로 여기는 부르주아 계급과 다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235p)

해가 질 즈음 중세도시 형태가 남아있는 동네길을 산책한다. 정각 6시면 양쪽의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오버랩되어, 경이로우면서도 낯설고 그래서 두려운 무엇으로 전해져 오묘한 시간을 갖게 한다. 어슬렁 걷다가 보면 여전히 전통 큰 화덕에 빵을 구워 내고 있는 빵공장과, 손으로 사암을 바르며 집을 짓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머리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 전해진다. 인적의존관계가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노동이나 생산물은 자신들의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2)고 하는 봉건주의 사회는 정말 굶주리는 이가 없었을 수 있었겠다, 권력의 상하가 있어 자유를 구속했을지언정,어떠한 힘의 보호도 함께 있어 쉽게 공동체에서 내쳐지는 일은 없었겠구나(물론 페놈입장은 다를테지만,)가 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느낀 것을 논리적으로 전해줄 수는 없다. 그냥 몸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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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크가 그렇게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는 사실부터 말하고 싶군요. 이 신나는 일이 일어날 즈음에만 해도 재크는 절대로 게으름뱅이가 아니었어요. 다만 재크는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 이런 식으로 일하며 살아왔을 뿐이었습니다. ... 그래서 부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았어요. ([재크와 콩나무], 래더교육 , 리차드워커)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이 전 인생목표인 내게 플레인이란 이름은 딱이다. 타인의 눈에 드는 어떤 특이점도 없이 그냥 살아내는 존재로 나의 필요에 따라 방해받지 않는 나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의 플레인이다. 그런데 요즘 세미나를 하면서 돌아보는 내 존재에 재크가 오버랩되면서 나의 닉네임을 ‘어슬렁’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ㅎㅎ.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이라는 부분에서 특히 내 어슬렁거림의 태도가 떠오르는데, 그것이 자발적 실업이었는지 구조적 실업이었는지 구분이 모호한 실업 이후 23년간 난 어슬렁거리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다. 난 오늘도 어슬렁 몰타 대통령궁 동네 아타드를 돌아다닌다. 엔틱샵을 근래에는 자주 가는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첫권의 중후반부를 시도하다가 멈춘 이후, 그 책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상상하다가 지친 어느날부터이다. 그러면서 들어오기 시작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삶이 응집되어 있는 많은 생활품에 눈이 멈추기 시작했는데, 19세기 초 영국지배 이후 영국정착민을 따라 들어온 장식품과 예술품들로 유난히 빅토리아 시대3)의 것들이 많아 어슬렁의 시간을 늘인다.

도록에서 보던 후기인상파 작가의 또 다른 경주마 그림을 만났을 때는, 가슴에 뜨겁게 차오르던 소유욕의 서릿한 눈끝을 내가 가졌다는 것에 스스로 떨리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냥 멍때리고 자연을 보듯 붓터치 안에 숨쉬는 자연과 그 것을 그려낸 화가의 시간을 사랑한다. 손놀림과 영혼이 한데 엉켜 매끈하지 않은 표면에서 일어나는 아우라를 한 없이 바라보게 하는 마력은,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감각적 욕구를 끌어들이는 힘과 같아서 한없이 서있게 한다. 그러다보면 화가보다 그림이 오래 살아 내 앞에 있는 시간의 흐름이 보이기에, 소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내 존재의 유한함을 시그너쳐의 숫자를 보며 확인하고 낮아진다. 어슬렁거림의 어느 해에는 시간에 손상된 인상화가 마음에 들었는데, 한달 이상 걸린다는 복원작업 후 작품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찢어진 캔퍼스를 기우듯 내 인생의 때 놓친 시간이나 실수도 회복가능할지 모른다는 바램이었는지, 국립 복원미술가에게 그림을 맡기고 기다리는 즐거움을 가졌던 어슬렁의 기억도 있다. 물론 [자본을 읽자] 이 후에는, 아기자기한 조각의 손길이 느껴지던 포셀린(도자기)인형에서 잠 모자란 고난의 노동자의 작업시간이 보여, 예술품이 고유의 신비성을 벗은 채 상품이 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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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외투가 없어 나갈 수 없다고 한 건 쌀쌀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이주한 후 런던박물관 열람실 이용권을 얻었는데요. 이때도 엥겔스에게 비슷한 편지를 보낸니다. 외투를 전당포에 맡겨 나갈 수가 없다고. 스탈리브라스에 따르면 런던박물관 열람실은 이용권이 있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외투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누추해 보이는 사람은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는 거죠. ([북클럽 자본 2권], 177p)

몰타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오기 전 마주칠 때마다 로자는 내게 정장을 챙겨 두라고 한다. 외투를 입되 안에는 가능한 두꺼운 본토 겨울옷이 아닌 가벼운 정장차림으로 준비하라고 강조하였기에, 코트 안에 준비해 간 원피스를 입고 메쎄4) 입구 티켓팅부스에 섰다. 습기 머금은 프랑크푸르트 겨울은 한국 겨울보다 더 스산한 외로움과 추위를 전해준다. 여러 지역에서 온 방문객들이 입구장을 지나자마자, 소지품 보관소에 3유로의 요금을 내고 코트를 벗어 맡긴다. 박람회장은 코트를 입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게 넓고 덥다. 대략 눈짐작으로 코엑스 박람회장의 13개동 이상 거대한 면적에, 자신의 섹터만 둘러보기에도 하루나절로는 불가능해서 보통은 4일에서 일주일을 머문다. 그래도 모든 건물 동들을 꼼꼼히 둘러보기에는 박람회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에는 어렵다. 지나가는데 영국인이 내 원피스를 보며 칭찬을 한다. 실크와 모의 소재조합이 미니멀 디자인에 매우 훌륭하게 매칭되었다고 한다. 한국제품이라고 이야기를 건네며 돌아서는데, 로자의 당부가 머리에 떠오른다. 꼭 화려하지 않되 멋지게 입고 와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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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상품더미로 표현된 부... 1851년 런던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습니다. ... 그런데 상품전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전시는 오랫동안 예술작품의 영역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우리는 상점이나 백화점의 어느 공간에, 유리로 둘러싸인 채 특별한 조명을 받는 상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나 조각처럼, 마치 대단한 작품인 듯 놓여 있는 상품들을 보는 겁니다. 작품에 아우라가 깃드는 것처럼, 상품에도 뭔가 깃들어 있어 보입니다. ([북클럽 자본 2권] ,32p)

Ambient는 세계최대 소비재 박람회로 모든 클래스들이 사용하는 상품들이 일년에 한번 이곳에 모인다.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의 소비재 무역업자, 생산자들의 한해 축제와 같은 행사이다. 서로 신상품을 소개하고 그간의 안부를 묻고 파트너쉽을 자랑하며 거래계약을 이룬다. 유럽쪽 부스는 동남아시아 원료공급지의 부스와는 다른 감각들이 살아있다. 부스를 구성하는 프레임 자체도 남다르고 박람회장 높이 벽을 둘러 고유한 공간을 만들고, 영국 왕실의 청녹색을 비롯해 유수한 컬러의 외장과 조명을 전시제품 쪽으로 집중시키며 다채로운 시각을 자극한다. 색상과 디자인뿐만 아니라, 성능 좋은 유럽산 스피커에 화려한 핑거푸드와 카다록이 모든 감각을 감미롭게 감싸준다. 물론 이런 감각을 일깨워주는 설치물들을 받쳐주는 공간면적도 사람들의 차림새도, 생산이나 원료공급이 주로 이루어지는 제3국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온갖 감각을 조용히 자극하는 세계적인 디자인과 고품질의 상품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르크스가 상품더미 앞에서 가졌던 그 충격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예술품이 접근을 망설이게 하고 바라보는 위치로 서있게 하는 아우라를 가졌다면, 상품은 매끈한 표면이 나의 손끝의 터치를 기다리는 듯하다. 어떤 사람의 영혼의 작업이 아닌 대량생산에 묻혀 생산자 개인이 보이기도 어려우며, 보인다 한들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그저 노동자들이다. 그러면 상품은 빌라에서 영혼이 묻어있지 싶어 적정거리로 바라보았던 예술품과는 달리, 사용가능하고 접근가능한 위치로 나의 몸을 바짝 당겨 만져보게 한다. 마르크스는 상품 속에서 사회관계를 보았지만, 나는 당장 표면에 붙은 사용가치를 감각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제품들로 내 레벨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품들이 대부분이지만, 구매력만 받쳐준다면 마음 편하게 사용가능해 보인다. 탁월한 재료의 손질과 디자인에서 커피머쉰도 예술품의 경지까지 올라가는 게 있구나 감탄을 자아낸다. 대량생산으로 쉽게 접근가능하고, 한 사람의 예술인의 인생시간이 느껴지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매혹적인 상품의 디자인 뒤로 생산자가 드러나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 유혹하는 상품 앞에서 감각의 뒤틀림, 그 문화적 충격은 이전의 내 생활에 젖어있던 내 육신의 모든 감각의 즙들을 다 일으켜세워 흡입해 버리는 힘이 느껴진다. 갖고 싶다는 소유욕을 흔들어, 이성을 정지시키며 온 몸을 빨아들인다. 지중해 해변에 넋을 놓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위기감이, 전시상품 앞에서 일어난다. 들어가지 말아야지. 동화되지 말아야지. 두 번째 외친다. 집앞의 모든 자연소재와 디자인과 과학이 붙어 훌륭한 상품이 탄생되어 대량판매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나의 감각을 자극한다. 과학이 붙어 상품이 되는 웨스턴들의 디자인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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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생산물에 상품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행태는 사회생활의 자연적 형태로 고착되어 버리는 성격을 취하는데, 이런 고착화는 사람들이 이미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 형태의 역사적 성격이 아니라 그 형태의 내용을 미처 해명해 내기 전에 이루어진다.... 이 상품세계의 완성된 형태인 화폐형태야 말로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과 개별 노동자의 사회적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실상 은폐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 강신준, 139p)

소비재 박람회에서 상품들을 둘러보면, 스칸디나비아 3국-네덜란드 -영국 - 일본 디자인 강국의 서열이 보인다. 내게 북유럽의 서열이나 부는, 스웨덴의 작가 린드그렌의 [삐삐롱스타킹](1941)5)을 영상물로 제작한 [말괄량이 삐삐](1969)를 보기 전이나, 벨기에 화가 Eugene Laerman의 ivrogne([술주정뱅이], 1898)6)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그냥, 의심 없이, 언제나, 당연히 부유국이었으니까 앞으로도 변함없이 부유국일 것이라고 인식되고 받아질 성질의 것이었다. Learman 그림에는 저 멀리 공장굴뚝 배경 뒤로, 노동자로 보이는 술 취한 아버지를 불안과 힘겨움으로 부축해가는 한 가족이 있다. 1969년 삐삐롱스타킹에는 2차대전 후 가난과 실업과 굶주림의 시기가 표현되어 있고, 그들도 곤궁의 시절의 20세기를 넘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나의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많은 경우 그냥 받아들인다. 태초에 행동만 있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창조디자인과 과학을 붙여 집앞 자연물을 조합해, 이처럼 사용가능한 아름다운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북유럽의 저력이 진정 탁월하구나! 하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찬찬히 들여다 훑어보면 의심하게 된다. 소비재 박람회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이 한자동맹기의 축적된 문화적 저력이고, 기후 탓에 집안작업이 발달하고 쉽게 산업화되었기에 경쟁력있는 상품이 나왔겠지 하고 인정하다가, 카리브해, 북극해의 유전개발의 소유국임을 떠오르면 질투하며 의심하게 된다.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이 수정자본주의 내지는 복지최국을 이루는 것이 그 유전자원의 재정 없이 가능했는가? 풍부한 자연개발 없이 저 복지최국 지위를 누리며 자신의 그리기 창조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시야를 이어가보면, 상품 원재료로 쓰인 자연물이 진정 그 추운 땅에서 나는 원료인가가 보여진다. 그러면 그 안에 제국주의로서의 북유럽이 보이고, 제3국의 원료와 노동 공급처가 보이고, 그러면 세계의 노동자는 과연 단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 논리대로 제품생산에 소요된 시간량으로 가치가 정해진다고 한다면, 밤새 분투하는 디자인실에서 그림을 그린 본국 노동자와 전달된 매뉴얼로 제품을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제3국 노동자의 시간가치가 전자에 비해 월등히 낮게 책정되는게 타당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일까? 디자인시간보다 직접 제품 제조시간이 절대적으로 짧다고 측정하여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가?

나라가 다르고 문화수준이 다르면 평균노동도 달라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사회에서 그것은 주어져 있다7)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나라별로 노동가격이 주어져 있고, 현재 환율 경제체계를 감안하여 양국가의 노동자 임금차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그냥 논지를 받아 수용하기로 하자. 그런 경우 실재 잉여의 대부분은 본국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그런데 이 경우 북유럽 노동자는 같은 노동자이기에 제3국의 노동자의 가치를 착취하지 않고 복잡노동의 대가로 높은 임금을 받는 것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박람회장에서 세련된 부스와 치장을 유지하고 유수한 언어로 포장을 하여 사용가치의 상대를 찾아 교환가치를 형성하는 복잡노동 형태로 가치의 많은 부분을 북유럽 노동자가 생산해 낸 것이고 그에 따라오는 합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북유럽 노동자가 자전거를 빗대어 선진화된 시민의식으로 맑은 하늘을 만들었다고 할 때, 제3국 공장에서 완성되어 본국으로 가져오는 그들의 상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만국의 노동자는 진정 같은 처지의 노동자로 나란히 서서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는 것일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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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정령들 사이를 오가며 양자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로 또한 애니미즘의 평면 상에 존재한다. 샤만은 무엇보다 먼저 그 경로를 오가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자신의 영혼이 정박한 신체를 벗어나 동물이나 신들을 부르거나 정령들을 찾아 이동할 수 있고, 하늘이나 지하의 명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통해 통상의 인간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며 질병을 비롯한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이들, 역으로 자신의 몸을 비워 다른 정령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입이 되어 말하는 이들이 샤만이다. 이를 위해 샤만은 극도의 고통을 겪으며 신체적 분해와 강도적 재구성을 반복해야 한다 [김열규, 43~47] ([정령들의 유물론], 이진경, 2021)

상품을 향해 뿜어대는 나의 환상에 반사된 에너지로 온 시간을 소모하고 돌아오면, 걸음 수 만큼이나 몸은 무거워져있다. 유스호스텔은 이 박람회 시즌이 되면 미리 알고 선점해 놓은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예약으로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 방을 구하느라 카운터 앞에 한데 엉켜있는 백패커들과 그들의 짐은 ambient기간에 숙소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임을 말해 준다. 지난 며칠 밤 나 역시 원하는 방이 없어 4인실에 유럽인들과 묶었는데 이례적인 방배정이다. 보통 4인을 다 채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무엇보다 동서양을 섞어 배정하지 않는데, 유명 박람회기간이니 방을 구했다는 것을 다행으로 받아들인다.

같은 유럽인이라고 하기에는 북/서/동유럽인의 개별차가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의 북쩍이는 며칠 밤을 보내고, 오늘은 방문객들이 빠져나갔는지 2인실 방이 났다. 그들 눈에는 같은 동방이라고 고려되어서 인지, 투르키예인과 묶게 되었는데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용감하게 다가서는 룸메이트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나 영어가 너무 늦게 나온다. 정신치료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내용인즉 오! 심리치료에 우리나라에서 보는 굿판이 상상되는 그런 묘사들을 보여준다. 차이가 있다면 의사와 환자사이에 Atom이 전달되는 체계로 설명을 한다. 재미있군! 무속인이 사람을 위안해 주는 굿판에 실재 물리적 에너지의 이동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구나. 그것도 과학적 단어 atom의 양자간 이전이라 하니, 같아 보이는 현상을 보고 접근하는 시야가 재미있다. atom의 전달로 환자가 치료되는 것과 무속인의 춤굿이 있는 장면.

Consolidation 세미나를 (난 분명 화합이라 이해하고, atom이 마주한 두 사람 사이를 에너지가 움직인다고 이해했는데, 글을 쓰는 순간에는 consolation인가? 헷갈린다.) 적극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법구조를 머리 속에서 생각해내며 알려주는 느린 영어를 듣고 있기에는, 몸이 낮에 걸은 걸음수만큼 무겁다. '응, 대략 무엇인지 알것 같아'라며 대응하고 침대로 돌아와 누었다. 낮에 본 디자인들이 눈앞 시야에서 계속 잔상을 남기며 디자인을 확장해가는데, 추상적인 atom의 양자간 이동이 내게 흥미로울 리 없다. 무속신앙의 한 형태겠지 하고 치부해 버리면 미신으로 남고, 더 이상 과학의 영역이 아니므로 객관적 대화의 소재로도 유용하지 않다.

유럽에서는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정신과 의사가 치료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긴 하다. 그러면 원자를 내어주는 쪽은 다른 감각이나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샤만이 되기 위해, 극도의 신체적 분해와 재구성을 한다던 원리가 꿈에 섞인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소통의 열림의 자세를 쉽게 갖던데, 그런 것도 신체와 연관이 있을까?. ... atom의 이전이니...하며 한밤 꿈속으로 곯아떨어진다. 내일이면 박람회장을 마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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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에 대한 특징짓기에서, 감각적 대상자체에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어떤 것이 제식의 객체가 된다고 강조했다. 포이어바흐는...종교들의 신들 또한 인간의 생산물들, 인간의 머리의 생산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인간들은 그들의 이러한 생산물에 예속된다는 것이다. 맑스는 자신의 창조자에 맞서 자립화된 인간의 머리의 생산물들 (종교들의 신들)을 자립화된 인간의 손의 생산물들(상품들)과 비교하였다.....맑스가 상품물신주의에서 계몽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단순한 의식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오히려 물신주의는 특정한 사회적 실천의, 즉 상품생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 다음에 이 결과는 의식에서도 표현된다. 이 실천이 사라질 때야, 물신주의도 사라질 것이다. ..막스는 사람들이 상품생산에 근거하는 경제에서의 대해, 즉 사회관계의 형성에 대해 의식 못한다는 것을 가장 일반적인 지평에서 언급한다. ([맑스의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디투스, 237p)

맑스가 아주 빈번히 비밀들과 수수께끼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가 아니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자칭 투명성과 합리성이 단지 표면적인 외관이며 이 외관 뒤에 해독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은폐되어 있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법을 아주 의식적으로 이용한다. 맑스는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나 그것을 행한다'는 마지막에 인용한 문장에 각주 27번을 단다. (같은 책, 239p)

겉으로 들어난 대상성과 그 안에 실재하는 관계를 포착하는 어려움이 상품 물신성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전체적인 자본주의 내의 속성으로 이해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 아래에서 나는 나를 얼마나 보호하고 인간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당장 나의 노후를 위한 국민연금의 경우만 보더라도 연금을 매달 예치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 표피를 구성하며 살고 있다. 내게 노후의 안전한 생활을 보장해줄 현재의 예치금이 운용수익을 만드는 과정 어디에선가 항상 선한 자본으로 역할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저 약탈적 자본으로의 수익과정에서 어느 정도 적정선을 지켜주길 바랄뿐이다. 운용은 나의 뒤에서 이루어지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현재 예측대로 자본주의가 작동한다면, 운용수익은 미래 내 통장에 꽂힐 것이다.

약탈적 자본이 아닌 거대 자본이 자본주의에서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모른척하지 않을 어떤 대책도 없다. 지중해 바다에 넋놓고 있다가 휩쓸려가는 작은 계곡물의 존재와 같이 이 자본주의 체계안에 생존하는 나의 삶의 방식은 자본주의를 사는 동안에는 받아들여야 하는 구조일 수 밖에 없고 많은 경우 의식하지 않은 채 태초의 행동으로 살아갈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주의가 나를 소외의 위치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내 의지와 다르고 내가 소외의 위치에 가 서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슬쩍 눈을 뜨면 바로 앞에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 * * * * 

상품세계의 모든 신비, 즉 상품생산의 기초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마법과 요술은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 옮아가는 즉시 곧바로 사라진다 ([자본], 강신준, 139p)

잠깐 재미있는 생각을 한다. 어슬렁거리며 내가 자주 즐기는 혼자 노는 놀이방식이다. 자연의 대상적 존재가 원료의 공급으로 보이기 시작한 이래 발달해온 자본주의 양태는, 이제는 줄여도 줄여도 감당할 수 없이 쌓이는 집안의 플라스틱 앞에서, 나를 무기력하게 세워 놓는다. 10년 동안이나 죄책감을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더 큰 무력함만 갖는다. 이제는 상품이란 개념 안에 들어있는 것이 추상노동이 아니고 프라스틱 용기인 것 같다. 이러다가는 소수의 자본가는 화성에 도착해 뺑이를 치며 살아내느라 발버둥치고, 우리 모두는 진짜로 시스템 안 기억으로 위치해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통해 데리다가 구사한 시제, 전-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설렘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 옆에 보이지 않는 시공간의 주머니로 달고 다니며 들락거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참! ^^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단락에 의해 넘을 수 없이 경계지어진 또다른 시간의 차원'으로써의 전-미래8) 개념을 슬쩍 [기계주의 철학입문] 수업에 들었던 메타버스의 세계로 옮겨태우며 자본주의 다음단계로 상상해 본다.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르는 사회발달의 다른 단계를 기다리느라, 반동 에너지로 현재를 사는 것은 내게 무모하다.

 

여기 보다 멀리

                                                             김 시 종

내가 눌러앉은 곳은
머나먼 이국도 가까운 본국도 아닌
목소리 움츠려들고 소망은 어딘가 흩어져버리는 곳
기어올라도 시야는 열리지 않고
빠져나가도 지상이라고는 내려서지 못할 곳
그런데 어떻게든 그날그날 살 수 있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이라고
한 해를 한데 묶어 일 년이 다가오는 곳

거기선 모든 것이 너울져 떠들어대고
소식 끊긴 여기에는 바람 한 점 없다
그래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은 나이기에
바람은 어쩌면 마음 밑바닥 살랑거림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내가 끝없는 희구의 요람인 것이다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며 기르는 나를 내가 기다린다
그렇게 시절은 내게서 멀지만
나에게서 지금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애당초 눌러앉은 곳이 틈새였다.
깍아지른 절벽과 나락의 갈라진 틈
똑같은 지층이 똑같이 푹 패여 서로를 돋우고
단층을 드러내고 땅의 갈라짐이 깊어진다
그것을 국경이라고도 장벽이라고도하고
보이지 않기에 평온한 벽이라고도 한다
거기에서는 우선 아는 말이 통하지 않고
촉각의 꺼림칙한 낌새만이 눈과 귀가 된다

...... (중략)

[화석의 여름] 도서출판b, 2019

 

티벳을 들어가게 되면서 마주친 생활양식들은 충격적이었고 ‘자본주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거대 호기심을 30세의 내게 던져주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나이에 내겐 이성이 없었으며 책 읽는 능력이 모자랐다. 그 해 출판된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시도 하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다. 낯선 환경이 내 앞에 던져졌을 때 의식은 혼돈의 세계로 질주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질문을 가졌던 초기, 같은 질문으로 스토리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담당 교수님이 씨~익하고 웃었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때 난 그 웃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ㅎㅎ 그러나 지금은 충분히 안다. 더 이상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 질문이 가끔 여행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표피에 붙은 목표로써 질문의 답찾기 정도의 핑계가 되어주었다.

돌아보면 간헐적으로 일어난 여행의 실제 이유는 현재 공간에서 삶이 너무 무거울 때 도망치듯 짐을 꾸린다. 조용히 여행의 패턴을 들여다보면 도피가 공간 이동의 가장 큰 동인이었다. 일단 너무 숨이 막혀 이곳에 두 발로 설 수 없다면 잠깐 공간을 옮기자. 그러다 운 좋으면 구씨9)처럼 도피에서 상경하는 날 지하철까지 마구 잡이로 뜀박질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을 얻을 기회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를일이니까. 그러나 행운은 한 순간 뿐이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의 구씨로 다시 돌아간다. 과거 술병을 현재의 연속으로 손에 들고 있는 구씨 일상이 된다. 예상치 못한 환경에 던져졌던 질문은 이제 내가 거처하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실천적 문제로 나를 세운다.

내가 애당초 눌러앉은 곳이 틈새였다. 나를 밀어내는 장소에서 더 어찌할 도리가 없이 살아내야 할 때 내 존재는 빛이 없는 어둠으로 빠져 도망 갈 새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공간의 밀어냄을 그냥 받다가, 그래도 살아 남아야 하니 촉각의 꺼림칙한 낌새만이 눈과 귀가 되어 머물러 있다, 촉감을 매번 드러낼 수조차도 없어서 촉감이 사라졌다 일어났다 하며 버텨있다. 밀어내는 공간이기에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인 촉각마저 연속해 세우고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면서 공간에 consolidation되기도 분열되기도 하면서 시간은 축척된다.

공간은 시간을 갖는다. 나를 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공간은, 나보다 더 먼저 종말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현재에는 시간이 들어있다. 공간 안에 불안정한 자리잡았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다. 현재 내가 내려앉아진 자리가 내 좌표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기에, 그냥 이 곳에 서서 시간을 축적한다. 때로는 공간과 색을 같이 하여 투명(consolidation)해지다가 그래도 나를 잊을 수 없으면 색을 들어낸다. 촉각을 뻗는다. 말하자면 내가 존재하는 한 통합과 분열의 투쟁은 계속된다. 어떤 바람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사라질 수 없는 존재기에 살아낸다. 살아있기에 흔들리고 흔들며 기르며 내가 나를 기다린다. 그 과정에 간헐적 공간이탈 여행이 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돌아와 어느날 우연히 쌓인 내 밑을 내려다보니 다행히 시간이 겹겹 공간을 채우고 있다. 행운이고 다행인게 인생의 처음과 끝일지도 모르겠다.

* * * * * 

바디우는 충실성은 수학적 연역의 엄격함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수학적 연역함은 어떤 해석이나 추론을 삼가한다. 충실성의 주체는 사건을 재현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것이며, 계산하거나 증명하 수 없는 공백 지점으로 충실함이 낳는 규율에 따라 자신을 밀어붙이는 자이다. 그는 오직 예 또는 아니요 라는 방식으로 사건을 승인하고 그 사건의 실존을 결정한다. (수유너머104, 천개의 유물론, 김효영, 2021)

자본주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아보겠다던 길 위의 생각은 20년을 건너 더 복잡한 이해불가의 세상을 내 앞에 던져놓고 있다. 마르크스가 명명한 자본주의는 다양하게 진화되어 여전히 모르겠고, 낯설며 때로는 늘어지는 몸 탓에 나날이 따라잡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저항이나 반동 에너지로 불안의 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여유있게 아무렇지 않은척 어슬렁거리다가, 기운찬 이행의 어떤 자본주의가 나타나면 그 위에 부드럽게 올라 타보려 한다. 재크가 커다란 소 데이지를 팔아 마법의 콩을 맞바꾸었듯이, 나도 한 눈에 알아채는 날 바로 바꾸어 콩을 심어버린다. 그러고서는 바디우가 알려준 주체의 연역적 충실성10)을 실험하며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낸다. (다만... 자본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다음에 도래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소외와 적극 소통하고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은 나와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이다. 나는 소통 가능한 사람으로 죽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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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1954작품

2) [자본], 강신준, 141p

3)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1837~1901

4) Messe, 박람회

5) [삐삐롱스타킹](1941), 린드 그렌, 폐렴을 앓는 딸을 위해 만든 동화

6) [The drunkard], Eugene Laerman(1864~1940, 벨기에 화가)

7) [자본], 강신준, 100p

8) [불가능성의 인문학], 최진석, 문학동네, 35p

9)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오는 남자주인공

10) 주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강렬한 무관심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능해지는 일어나는 것에 대한 적극적 인정, 즉 일어나는 것에 대한 망설임 없는 참여를 할 뿐이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가능성만 있는 것과 전여 무관한 상태로, 이미-지금 일어나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개입과 참여이다. (수유너머104 김효영, 천개의 유물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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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unkard, Eugene Laerman ,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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