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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이 사람을 보라]③ :: 2020.11.30(월)

 

=== 성숙기-니체 시기의 작품비평 ===

참고③ [성숙기 니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철학자 / 어린아이의 시대 (생성의 정신) / 비시대성

- 생애 : 1881~1888(36~43세) / ‘영원회귀’의 영감 1881(36세), 1889(44세) 토리노에서 정신착란, 1900(55세) 죽음

- 작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4(38~39세).

            『선악의 저편』1886(41세). 『도덕의 계보』1887(42세). ‘힘에의 의지’(포기_1888 / 출판_1901유고)

            『우상의 황혼』1888 - 『안티크리스트』1888, 『바그너의 경우』1888 - 『니체 대 바그너』1888

            『이 사람을 보라』1889, 『디오니소스 송가』1889 (1888~1889년_43~44세)

- 철학 : 위대한 건강 / 새로운 개념ㆍ가치ㆍ철학의 창조 (권력의지, 영원회귀,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

 

1. '차라투스트라 유형:: 생리적 조건(위대한 건강) / 존재론적 과제(자기극복) / 심리적인 문제(긍정의 정신) (좋은 책. 차라투스트라 #2, 6)

2. 차라투스트라 / 위버멘쉬 / 디오니소스의 존재는 어떤 관계에 있나? (왜 이렇게 좋은 책. 차라투스트라 #2, 6)

#2. 위대한 건강 > 위대한 건강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생리적 조건이다. 《즐거운 학문》5부 (*#382) “우리 새로운 자, 이름 없는 자, 이해하기 어려운 자, 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새로운 수단인 새로운 건강(위대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위대한 건강은 계속 획득하고 획득해야 하는데, 위대한 건강은 계속해서 포기되고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위험한 이상 > 위험한 이상은 인간적-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이지만, 종종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지상의 진지함 곁에서,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은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과 더불어 위대한 진지함이 비로소 시작될 것이며, 진정한 의문부호가 비로소 찍힐 것이며, 영혼의 운명이 바뀌고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6.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존재론적 과제 :: 자기극복 > ① (위버멘쉬 - 자기극복) 어떻게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모든 이에게 호의적으로 말하는지! 어떻게 차라투스트라가 자기의 반대자인 사제와 함께 그들로 인해 괴로워하는지! 여기서 인간은 매순간 극복되고, 여기서 ‘위버멘쉬’라는 개념이 최고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껏 인간들에게 위대하다고 불리었던 것은 전부 위버멘쉬의 밑에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어느 누구도 차라투스트라 유형이 위대함의 본질이라고 꿈꾸지 않았다. 자기 공간이 넓다는 점에서, 대립적인 것에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를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최고유형으로 느낀다. ② (디오니소스 개념) 《차라투스트라》3부 <12.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긴 사다리를 갖고 깊은 심연까지 내려갈 수 있는 영혼, 자기 내면으로 뛰어드는 포괄적인 영혼, 우연 속으로 추락하는 필연적인 영혼, 생성 속으로 가는 존재하는 영혼, 스스로에게서 도망쳐서 큰 원환 안에서 자기를 따라잡는 영혼, 어리석음이 말을 거는 현명한 영혼, 내부에 흐름과 역류-썰물과 밀물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영혼” 그런데 이것은 디오니소스 개념 그 자체이다.

#6.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심리적인 문제 :: 긍정의 정신 > ① (긍정의 정신) 이제까지 긍정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전대미문의 부정의 말을 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부정하는 정신의 반대일 수 있는가! 가장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정신인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장 가벼울 수 있는가! 실재에 대해 가장 가혹하고 무서운 통찰을 하는 그가, 가장 심연적인 사유를 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에 대한 반박이나 삶의 영원한 회귀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긍정 자체일 수 있는가! ② (디오니소스 개념) 《차라투스트라》3부 <4.해뜨기 전에> “웅대하며 한없는 긍정과 아멘을 말할 근거를 ······ 모든 심연 속으로 나는 내 축복하는 긍정의 말을 가져간다” 그런데 이것은 또다시 디오니소스라는 개념이다.

 

3. 위대한 것을 행한 자에게 내리는 '위대함의 원한'이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차라투스트라 #5)

위대함의 원한1. 위대한 것을 행한 자는 약해진다 > 《차라투스트라》를 쓰던 해와 이후의 해는 비할 바 없는 위기였다. 불멸하기 위해서는 비싼 보상을 치러야 하는 법, 불멸을 위해서는 살아 생전에 여러번 죽어야 하는 법이다. 작품이든 행위든 위대한 것이 한번 성취되면, 그것을 행한 자에게 주저없이 대항한다. 위대한 것을 성취함으로써 그것을 행한 자는 약해진다. 그는 자기가 해놓은 것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인류 운명의 매듭을 맺는 것, 이제 그 짐을 지는 것! 그 짐은 그를 으깨버린다.

위대함의 원한2. 주위에서 들리는 정적 >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하지만, 어떤 인사의 눈길도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갑자기 거리를 느끼게 하여 깊은 상처를 준다.

위대함의 원한3. 방어능력의 소멸 > 방어력이 허비되어 버렸기 때문에, 피부가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여 비소한 것들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방어력은 모든 창조적 행위가 전제로 하는 힘인데, 그렇게 해서 작은 방어능력이 소멸되어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소화도 잘못시키고, 움직이기 싫어하며, 얼어붙어버리고, 불심감에 개방되어 있다.

[니체와 악순환]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9장 토리노의 도취'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정신착란'을 영원회귀의 비밀을 폭로한 자에게 요구되는 신체의 파괴로 설명했다. 영원회귀의 비밀을 폭로한 니체의 '정신착란'이야말로, 위대한 것을 행한 자에 내리는 '위대함의 원한'일 것이다. "우연적 사례 그 자체는 창조적 충동들의 상호충돌일 뿐이다. 전반적인 해체와 미완료의 마비시키는 감정에 대항하여 나는 주장한다. 영원회귀를! ......  그는 우연한 사례를 체현할 것이다. 동시에 그는 우연들의 경합일 뿐인 세계를 복제/재생산할 것이다. ...... 니체는 신체 자체를 전장으로 만듦으로써, 그 생리학적 체질은 투쟁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 이 신체(이 도구, 이 육체)는 파토스의 대가였다. 신체 안에  깊이 새겨지기 위해서, 우주의 정의로서의 가능한 모든 개인화의 영원회귀의 법칙은 그것을 폭로한 기관 자체의 파괴를 요구했다. ...... 우리가 사기꾼 어릿광대의 언어를 말한다면, 사태는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이 부조리한 것을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은 회귀한다!" "나는 성자이기를 원치 않는다. 성자들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는 없기에. 차라리 어릿광대이고 싶다. 아마도 어릿광대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 #1)

 

4. [선악의 저편]의 섭생법은 [차라투스트라]의 섭생법과 어떤 관계에 있나? (왜 이렇게 좋은 책. 선악의 저편 #2)

이 책이 《차라투스트라》를 뒤따라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생겨나게 한 섭생법을 알아차릴 것이다. ① (가까이 있는 것을 보라) (*차라투스트라)멀리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나쁜 습관이 들어버린 눈은, (*선악의 저편)여기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 우리 시대-우리 주변을 예리하게 파악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② (본능으로부터 등돌림) 이 책의 형식면에서 《차라투스트라》를 가능하게 했던 본능으로부터의 ‘고의적인 등돌림’을 발견하게 된다. 형식과 의도와 침묵의 기술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고, 심리학이 뚜렷이 구사되고 있다. ③ (선의가 없음) 이 책에는 선의를 가진 말이 없고, 모든 것이 휴양을 취한다. 차라투스트라가 했던 것처럼 선의를 허비하는 일은 어떤 휴양을 필요로 한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일의 끝에 인식의 나무 아래 뱀으로서 누워있던 것은 바로 신 자신이다. 신은 이런 식으로 신적 존재로부터 휴양을 취했다. 악마라는 것은 제7일째의 신의 한가로움에 불과한 것이다.

 

5. [도덕의 계보]는 무엇에 대한 논쟁(논박)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도덕의 계보)

- 이 책은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한 심리학자(니체)의 결정적인 3가지 준비이다.

[첫째 논문] 그리스도교의 심리학_원한정신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 첫번째 논문의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심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정신에서가 아니라, 원한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반동이며,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맞선 거대한 반란이다.

[둘째 논문] 양심의 심리학_양심의 가책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 두번째 논문은 양심의 심리를 제공한다. 양심이란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인간 내부의 신의 음성이 아이라, 외부를 향해 폭발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자기를 향해 반전하는 잔인함의 본능이다. 잔인함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떨쳐버릴 수 없는 문화의 하부토대이다.(*인간은 원래 잔인함에서 행복을 느낀다.)

[셋째 논문] 성직자의 심리학_금욕주의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세번째 논문은 ‘금욕적 이상(성직자의 이상)이 전형적인 해로운 이상이고 종말의지이며 데카당스(*힘의 퇴화)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금욕적 이상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답해준다. 금욕적 이상은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신의 사제들이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금욕적 이상에 반대되는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자기극복)를 제외하고는. 금욕적 이상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이상이어서 그것의 경쟁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허무)를 원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욕망)

*[도덕의 계보]는 각각의 논문에서 대결하는 가치가 존재하는데, 결국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의 편견(선판단, 통념)에 대한 논박이다.

 

6.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통해 공격하려는 진정한 대상은 누구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바그너의 경우 #1~4)

(#1) 바그너 공격 vs 독일인 공격 > ① (바그너 공격: 결정적인 것을 보류한) ‘늙은 포병인 내가 바그너를 날카롭게 공박할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문제(*바그너를 공박하는 문제)에서 결정적인 것은 전부 보류해버렸었다. 내가 바그너를 사랑했었기에. Ich habe Wagner geliebt. 결국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노회한 미지의 사람에 대한 공격이 내 과제이다. ② (독일인 공격: 그 이상의 공격) 정신적인 사항에 점점 게을러지고, 본능은 빈곤해지며, 점점 더 솔직해지는 독일국민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공격을 해야 한다.

(#4) 내가 끝까지 가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독일인에 대한 탁월한 경멸자로 간주되고 싶다. 나는 26세에 독일적 특성에 대한 불신을 이미 표현(<반시대적 고찰3> p71)했다. 내게 독일인은 용인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내 본능에 역행하는 인간유형은 언제나 독일인이다.

(#1) 독일국민의 이상주의 공격: 독일미각ㆍ독일취향의 중립성, 몰아성

(#2) 유럽문화에 대한 독일의 책임: 독일중심주의 역사관 / 백치같은 역사관(르네상스와 독일적인 것의 결합) / 르네상스 말살, 그리스도교 재건(루터) / 라이프니츠와 칸트(유럽에 대한 독일의 제동장치)

(#3) 독일정신의 본능적 불결함, 깊이 없음, 심리적 타락

(#4) 독일인에 대한 경멸: 천민적, 뉘앙스와 에스프리가 없는.

 

===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

 

1. 니체가 '가치전도'를 자기과제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우상의 황혼 #2, #3 / 왜 하나의 운명인지 #1, 4, 7, 8, 9)

이렇게 좋은 책. 우상의 황혼 > (#2) 이보다 더 풍부하고 더 독자적이며 더 파괴적인 책은, 더 악의 어린 책은 없다. 내 이전에 모든 것이 어느 정도로 뒤집혀 있었던지, 이 에세이로 시작하라. (#3) 이 작품을 끝낸 후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나는 가치의 전도라는 거대한 과제(*[안티크리스트]에 즉시 덤벼들었다. ...... 9월 30일 대승리의 날: 가치전도가 완성되었다.

하나의 운명인지. #1 > 나를 통해 진리가 말을 한다. 하지만 내 진리는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거짓이 진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내 안에서 살이 되고 천재가 되어있는 인류 최고의 자기성찰에 대한 내 정식이다. 내 운명은 내가 분별있는 최초의 사람이기를, 내가 나 자신을 수천년간의 거짓(*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 맞서는 대립자(*디오니소스)로 인지하기를 원한다. 나는 최초로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거짓을 거짓으로 최초로 경험했기에(냄새 맡았기에), 내 천재성은 내 콧속에 있다.

하나의 운명인지. #4 > 선한 인간ㆍ무리동물ㆍ아름다운 영혼 / 호의적ㆍ이타적 :: 의미 > 모든 것이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무리동물이 되어야 한다고, 푸른 눈을 가지고 호의적이 되어야 한다고,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야 한다고, 허버트 스펜서가 바라는 것처럼 이타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삶에서 위대한 특성을 빼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인류를 거세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류를 비참한 중국인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이 추구되어 왔다! 바로 그런 것이 도덕이라 불리었다!

하나의 운명인지. #7 > 그리스도교 도덕에 의한 가치전도 >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교 도덕에서 그들을 권력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을 간파했다. 인류의 교사와 지도자, 신학자 전체가 통틀어 데카당이었다. 그래서 모든 가치를 삶에 적대적인 것으로 전도시켰고, 그래서 도덕인 것이다. 도덕의 정의: 도덕은 삶에 보복하려는 숨은 의도를 갖고 있는 데카당의 특이한 성질이다.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 정의에 가치를 부여한다.

하나의 운명인지. #8 > 그리스도교 진리에 의한 가치전도 > (*그리스도적: 신, 피안, 참된 세계 / 영혼, 정신, 영혼의 불멸, 영혼의 구원 / 이기적이지 않은 자, 자신을 부정하는 자 / 선한 인간, 이상) 이 모든 것이 도덕으로서 믿어져왔다!

하나의 운명인지. #9 >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최고의 악)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최고의 선)

 

2. 니체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1~9)

*니체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도덕과 진리를  ① 데카당스 도덕과 가치로 알아차리는 (경험했다, 해명했다) 능력을 가졌다는 점 (최초의 심리학자라는 것은 하나의 저주일 수도 있는데, 어찌 되었던 이것은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 그리스도교 도덕을 해명하는 자는 하나의 불가항력이자 하나의 운명이다.) ② 그리고 자신을 그에 맞서는 대립자이기를 원하는 용기를 가졌다는 점 (나는 내 운명을 안다. / 내가 나 자신을 수천년간의 거짓(*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 맞서는 대립자(*디오니소스)로 인지하기를 원한다. /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③ 그것을 자기 밑에 두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그리스도교 도덕을 자기 밑에 두기 위해서는, 높이와 멀리 보는 시각과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심리적인 깊이와 심연성이 필요하다.) 

(#1) 나의 운명: 다이너마이트 >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 내 이름에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거역을 불러일으키는 결단의 회상)이 접목될 것이다. 지상에서의 전대미문의 위기에 대한, 양심의 깊은 충돌에 대한, 지금까지 믿어져왔고 요구되어왔으며 신성시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한, 거역을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관한 회상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1) 나의 진리: 모든 가치의 전도 > 나를 통해 진리가 말을 한다. 하지만 내 진리는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거짓이 진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내 안에서 살이 되고 천재가 되어있는 인류 최고의 자기성찰에 대한 내 정식이다. 내 운명은 내가 분별있는 최초의 사람이기를, 내가 나 자신을 수천년간의 거짓(*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 맞서는 대립자(*디오니소스)로 인지하기를 원한다. 나는 최초로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거짓을 거짓으로 최초로 경험했기에(냄새 맡았기에), 내 천재성은 내 콧속에 있다.

(#6) 나, 비도덕주의자 > ① (비도덕주의자, 나의 표지) 비도덕주의자라는 말을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표지이자 휘장으로 선택했는데, 나를 전 인류와 구분짓는 이 말에 나는 긍지를 느낀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자기 밑에 있는 것으로 깨닫지 않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높이와 멀리 보는 시각과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심리적인 깊이와 심연성이 필요하다. (*퍼스펙티비즘) ② (그리스도 도덕: 세계를 비방하는 이상) 그리스도교 도덕은 이제껏 모든 사유가의 키르케였고, 사유가들은 그녀를 위해 봉사했다. 나에 앞서서 누가 세계를 비방하는 이상理想의 독기가 용솟음치고 있는 동굴로 기어들어갔던가? 누가 감히 그것을 동굴이라고 추측하기라도 했던가?

(#6) 나, 최초의 심리학자 > 나 이전에 도대체 어떤 철학자가 심리학자였던가? 오히려 그들은 심리학자의 반대인 ‘고등사기꾼, 이상주의자’이지 않았던가? 나 이전에는 심리학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런 때에 최초의 심리학자라는 것은 하나의 저주일 수도 있는데, 어찌 되었던 이것은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최초의 사람이 경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구토는 내 위험인 것이다.

(#7) 그리스도교 도덕 > ①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인식) 나를 이해했는가? 나를 구별짓고 나를 나머지 인류 전체에 대한 예외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적 도덕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 그리스도교에서 나를 경악하게 하는 오류로서의 오류는 그리스도교의 승리에서 알 수 있는 정신적인 것에서의 수천년간의 선의지와 사육(*육성)분별(*거리)용기의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성의 결여이며, 반자연(*그리스도교)이 도덕으로서 최고명예를 부여받고 법칙ㆍ정언명법으로서 인류 위에 걸려있었다는 전율스러운 사실이다! ②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맹목) 그래서 나는 모든 이를 도발하는 말 하나가 필요했다.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해 미리 눈뜨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를 책임져야 하는 불결이고, 본능이 된 자기기만이며, 모든 생기와 인과성과 현실성을 보려하지 않는 의지이자, 심리적 사항에 대한 위조짓거리이다. ③ (인류에게 데카당스 가치를 가르침)  삶의 최고본능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는 것, 삶의 전제인 성에서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성장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강력한 이기심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반대로 무사와 무게중심의 상실과 탈개인화이웃사랑(이웃중독)’이라는 전형적인 하강과 반본능의 징후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아니! 가치 그 자체를 본다는 것! ...... 확실한 사실은 인류에게 데카당스 가치만이 최고가치로 가르쳐져왔다는 것이다.

(#8) 그리스도교 도덕을 해명하는 자 > ① (그리스도교 도덕을 해명하는 자) 나를 이해했는가? 나는 5년 전(*<차라투스트라>의 집필. 1883~1884)에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미리 말하지 않았을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도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자 진정한 하나의 대참사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을 해명하는 자는 하나의 불가항력이자 하나의 운명이다. ② (그리스도 도덕유형 부정) 이제껏 진리라고 불리어온 모든 것이 가장 해롭고 음험하며 가장 지하적인 형식의 거짓임을 깨닫는 것, 인류를 개선한다는 신성한 구실이 삶 자체의 피를 빨아 삶을 빈혈증을 앓게 만드는 책략임을 깨닫는 것. 흡혈귀로서의 도덕을 알아차리는 자는, 신뢰받고 있고 또 신뢰받았던 모든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도 더불어 알아차린다. ③ (그리시도교 인간유형 부정) 그는 가장 경외되었던 인간, 심지어 성스럽다고 말해졌던 인간유형에서도 더이상 존경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비할 바 없는 액운 같은 불구들만 보는데, 그들이 액운과 같은 이유는 그들이 현혹했기 때문이다.

(#9)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생성의 가치)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데카당스 가치)

 

3. 창조적 선(창조를 위한 파괴) / 디오니소스적 본성(긍정을 위한 부정)이란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2)

    우리 안에 디오니소스적 본성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언제 감각하는가?

창조적 선: 창조를 위한 파괴 > “선과 악의 창조자이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파괴자여야 하며 가치를 파괴해야 한다. 이렇게 최고악은 최고선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이 창조적 선이다.” <차라투스트라2부-12.자기극복> [*창조적 선(생성적 선, 관점적 선) <······> 실체적 선(초월적 선, 독단적 선)]

디오니소스적 본성: 긍정을 위한 부정 > 나는 파괴의 즐거움을 내 파괴력이 상당하는 정도만큼 알고 있다. ...... 나는 부정하는 행위긍정의 말에서 분리시킬 줄 모르는 내 디오니소스적 본성에 복종한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그래서 나는 파괴자 중의 파괴자이다. (*나는 도덕의 파괴자이다!)

 

4.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

페르시아인(도덕의 창시자) <······> 나의 차라투스트라(도덕의 파괴자) > ‘최초의 비도덕주의자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내가 차라투스트라를 [차라투스트라]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 마땅히 질문을 던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 페르시아인이 역사상 독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도덕의 창시자)과 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도덕의 파괴자)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의 의미 > ① (도덕의 창조자)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을 움직이는 본연의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도덕을 형이상학적인 것(, 원인, 목적 그 자체)으로 옮긴 것이 그의 작품이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다. ② (도덕적 세계에 대한 실험) 차라투스트라는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그 오류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가 도덕에 대해 어떤 사유가보다 더 오래 더 많이 경험했을 뿐 아니라, 역사는 소위 말하는 도덕적 세계질서에 대한 실험적 반박이다. ③ (차라투스트라의 정직성) 보다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사유가보다 더 진실(*정직)하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만이 진실성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즉 실재성 앞에서 도피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비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유가 전체를 모아놓은 것보다 더 많은 용기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은 페르시아적 덕이다.

차라투스트라-자기극복의 의미 > 내가 이해되는가? ① (정직성-자기극복) 진실성(*정직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극복, ② (자기대립물-자기극복) 도덕주의자들의 자기의 대립물로의 자기극복, ③ (자신에 의한-자기극복) 내 안으로의 자기극복! 이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5. 비도덕주의자가 의미하는 2가지 부정(인간유형_선한 인간, 도덕유형_데카당스 도덕)이란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4)

비도적주의의 부정: 선한 인간, 데카당스 도덕 > ① (인간유형, 도덕유형) 비도적주의자인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이제껏 최고의 인간유형(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부정한다. 둘째, 도덕 그 자체로 행사된 지배적 도덕유형(데카당스 도덕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 도덕)을 부정한다. ② (선한 인간 < 데카당스 도덕) 둘째 부정(*데카당스의 부정)이 더 결정적인데, 선의호의에 대한 과대평가(*선한 인간의 부정)는 데카당스의 결과이며 약함의 징후로, 상승하고 긍정하는 삶과는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과 파괴는 긍정의 조건이다.

선한 인간의 존재조건: 거짓, 근시안 > 먼저 선한 인간의 심리에 머물러보자. ‘어떤 유형의 인간이 가치 있는지’ 평가하려면, 그의 보존비용을 계산해보아야 하며, 그의 존재조건을 알고 있어야 한다. ① (거짓) 선한 인간의 존재조건은 거짓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은 ‘현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려고-하지-않는다. 현실이 언제나 호의적 본능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이 언제나 근시안적인 선한 사람들의 영향력을 놔두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② (근시안적) 모든 종류의 위기를 도대체가 반박으로, 없애버려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나쁜 날씨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인해 아예 없애버리려는 의지가 그렇듯이, 크게 보아 그 결과는 진정한 재앙이고, 어리석음의 운명이다. 전체를 보는 거시경제에서는 실재성(정동=충동욕구힘에의 의지에서)의 무시무시함은 소위 선의라고 말하는 작은 행복보다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필연적이다. (*거시경제-실재성-무시무시함 <······> 작은-선의-행복) ...... 나는 낙관주의의 섬뜩한 결과들낙관적 인간의 나쁜 소산을 역사를 위해 입증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③ (차라투스트라: 데카당, 거짓) ‘낙관주의자가 염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데카당이며, 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파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선한 인간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선한 인간은 너희에게 거짓 해악과 거짓 안전을 가르쳤다. 선한 인간의 거짓 속에서 너희는 태어났고 보호받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에 의해 근본에까지 기만되고 비틀렸다.” <차라투스트라 3부-12.낡은 서판 새로운 서판>

 

6.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인간 유형은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5)

데카당스 유형의 상승 vs 강자 유형의 희생 > ① (차라투스트라) 선한 자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자인 차라투스트라는, 따라서 악한 자의 친구이다. ② (데카당스 유형, 강자 유형) 데카당스 유형의 인간이 최고의 인간유형으로 상승할 때, 반대유형인 강하고 삶을 확신하는 인간유형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③ (무리동물, 예외적 인간) 무리동물이 가장 순수한 덕의 광영으로 빛날 때, 예외적인 인간은 악으로 폄하되지 않을 수 없다. ④ (기만하는 자, 진실된 자) 기만이 자기들의 광학이 ‘진리’라는 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때, 진실된 자는 최악의 이름으로 다시 발견되지 않을 수 없다.

위버멘쉬의 인식 :: 선한 인간 vs 차라투스트라 > 선한 인간의 ‘최고 인간’의 인식이야말로, 차라투스트라를 인간에 대해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런 혐오로 인해 그에게는 ‘먼 미래로 날아오르는’ 날개가 생겨났다. 차라투스트라는 선한 인간과 비교하면 자신 같은 유형을 위버멘쉬라고 부르며, 선한 인간과 정의로운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를 악마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최상의 인간들이여! 나의 위베먼쉬를 너희는 악마라고 부를 것이다! 위버멘쉬가 선의를 갖고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는 그가 두려운 존재이리라.”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인간유형 :: 현실 자체 >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인간유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그 인간은 그를 수 있을 만큼(*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며, 현실에서 소외되지도 멀리 떨여져있지도 않다. 그는 현실 자체이며, 현실의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7. 그리스도교 도덕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7)

그리스도_도덕적 존재 / 그리스도교_반자연 > ① (그리스도: ‘도덕적 존재’) 그리스도는 이제껏 유일한 절대적인 ‘도덕적 존재’였으며, 최고로 불합리하고 기만적이며 허영기있고 경솔하며 자기자신에 대해서 유해했었다. ② (그리스도교: 반자연) 그리스도교적 도덕은 가장 악의에 찬 형식의 거짓의지이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키르케로서, 인류를 망쳐버린 바로 그것이다. 

인류에게 데카당스 가치를 가르침 >  삶의 최고본능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는 것, 삶의 전제인 성에서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성장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강력한 이기심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반대로 무사와 무게중심의 상실과 탈개인화이웃사랑(이웃중독)’이라는 전형적인 하강과 반본능의 징후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아니! 가치 그 자체를 본다는 것! ...... 확실한 사실은 인류에게 데카당스 가치만이 최고가치로 가르쳐져왔다는 것이다.

탈아의 도덕, 삶에 적대적인 도덕 > ① (탈아의 도덕) 탈아의 도덕은 전형적인 하강의 도덕이며, ‘나는 몰락한다’는 사실을 ‘너희 모두는 몰락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옮기는 도덕이다. 지금까지 가르쳐진 유일한 도덕인 탈아의 도덕은 종말의지를 누설하고 있는데, 가장 심층적으로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② (성직자) 여기서는 아직 인류의 퇴화가 아니라, 오히려 성직자라는 기생충 같은 인간만이 퇴화할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도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자기들이 ‘인류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속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도덕에서 그들을 권력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을 간파했다. 인류의 교사와 지도자, 신학자 전체가 통틀어 데카당이었다. ③ (삶에 적대적인 도덕) 그래서 모든 가치를 삶에 적대적인 것으로 전도시켰고, 그래서 도덕인 것이다. 도덕의 정의: 도덕은 삶에 보복하려는 숨은 의도를 갖고 있는 데카당의 특이한 성질이다.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 정의에 가치를 부여한다.

 

8. 그리스도교 진리(개념)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8)

*신, 피안, 참된 세계 / 영혼, 정신, 영혼의 불멸, 영혼의 구원 / 이기적이지 않은 자, 자신을 부정하는 자 / 선한 인간, 이상

그리스도교 진리(개념) > ① (신) 개념은 삶의 반대개념으로서 고안되었는데, 이 개념 안에서 해롭고 독성있고 비방적인 모든 것이, 삶에 대한 불구대천의 적개심이 하나의 경악스러운 단일체가 되었다! ② (피안, 참된 세계) 피안개념, ‘참된 세계개념이 고안되었는데,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 세상을 탈가치화하기 위해, 지상의 현실을 위한 아무런 목표도-아무런 이성도-아무런 과제도 남기지 않기 위해! ③ (영혼, 정신, 영혼의 불멸) 영혼개념, ‘정신개념, 결국에는 영혼의 불멸개념도 고안되었는데, 몸을 경멸하고 몸을 병들게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삶에서 당연히 중요한 모두를 (영양섭취, 주거지, 정신적 섭생, 병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들에) 형편없이 경솔하게 대처하도록 하기 위해서! ④ (영혼의 구원) 건강 대신 영혼의 구원 참회의 경련과 구원의 히스테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조울증 광기이다! ⑤ (죄, 자유의지) 개념은 그에 따르는 자유의지개념이라는 고문기구와 함께, 본능을 혼란시키기 위해, 본능에 대한 불신을 제2의 본성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⑥ (이기적이지 않은 자, 자신을 부정하는 자)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개념이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라는 개념 안에서는 진정한 데카당스의 표지가 (해로운 것들에 의해 현혹됨, 자기에게-이로운 것을-더이상-찾을 수-없음, 자기피괴가) 가치의 표시 일반으로, 인간의 ‘의무’와 ‘성스러움’과 ‘신적인 것’으로 되었다. ⑦ (선한 인간, 이상) 가장 끔찍한 일인데 결국에는, 선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몰락해야만 하는 모든 것(약자와 병자와 실패자와 자기 스스로 고통받는 자)의 편을 들고, 도태의 법칙이 여기서는 어긋난다. 이상은 긍지에 차있고 제대로 잘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긍정하는 인간과 미래를 확신하며 미래를 보증하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나왔다. 이런 인간을 지금은 악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도덕으로서 믿어져왔다! 이 파렴치한 것을 분쇄하라!

 

9.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정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9)

가치전도의 정식 >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못 박힌 자 :: [그리스도교] 최고의 악 vs 최고의 선 ······> [니체] 생성의 가치 vs 데카당스 가치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 3장 악순환인 신 > 05. 영원히 돌아오고 영원히 태어나다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 2가지 신의 죽음 >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신의 죽음’이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 인류 전체를 죄의식에 빠뜨린 전율과 공포의 사건인 반면, 디오니소스 죽음은 삶과 세계의 무구함을 긍정하는 사건이다. 디오니소스에게서 삶 자체가(삶의 영원한 풍요로움과 회귀가) 고통ㆍ파괴ㆍ절멸을 향한 의지의 조건이 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에서는 고통이(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삶에 대한 단죄형식으로 간주된다.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 고통과 죽음에 대한 퍼스펙티브 > 디오니소스와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결정적 차이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퍼스펙티브에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고통과 죽음은 죄의식을 심어주고, 그의 부활은 죄에 대한 심판을 수반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고통과 죽음은 세계와 삶의 무구함을 긍정하는 단련ㆍ파괴이고, 그의 부활은 무구한 세계와 삶에 대한 영원한 약속이다. “비극적 인간(디오니소스적 인간) 가장 쓴 고통도 긍정하는데, 그는 충분히 강하고 충만하며 신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하는데, 그는 삶 때문에 고통받을 만큼 약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은 삶에 대한 저주이며, 그의 죽음은 삶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표시이다. 반면 토막으로 잘린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며,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되돌아온다.” <유고(1888초~1889.1월초)>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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