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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안티크리스트]① :: 2020.10.26(월)

 

== 새로운 인간유형의 육성 (서문, #1~4) ==

 

1. 니체가 선택한 [안티크리스트]의 독자는 누구인가? 어떤 자격을 요청하는가?

[참고] 니체는 아무나 자기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니체는 자기 책이 자신과 동류의 정신에게서 읽히기를 바랐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독자를 선택하도록 하라! 니체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린다. 그래서 니체는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2. 니체가 말한 '사후에 태어나는 사람=죽은 후에 태어나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서문] 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 그들 중 아직은 누구도 생존하지조차 않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찌 내가 오늘날 이미 경청되고 있는 자들과 혼동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의 날은 내일 이후이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 태어난다.

나를 필연적으로(*필연적인 존재로) 이해하게 하는 조건들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나의 진지함과 나의 열정을 견뎌낼 수 있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에 냉혹할 정도로 정직해야 하며, 산에서 살아가는 법(*힘과 영혼의 높이)을 익혀야 한다. 정치와 민족이기주의의 천박한 시대적 헛소리를 자기의 발 아래의 것으로 내려다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진지가 유용한지,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 숙명이 되는지에 대해 무관심해져야 하며, 그런 질문을 결코 던져서는 안된다

누구도 물어볼 용기가 없는 문제들을 선호하는 강건함, 금지된 것에 대한 용기, 미궁을 향하는 예정된 운명 / 일곱가지 고독에 의한 한가지 경험 / 새로운 음악을 위한 새로운 귀,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위한 새로운 눈 /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진리들에 대한 새로운 양심 /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성을 추구하려는 의지 , 그 힘과 열정을 흩어지지 않게 한데 모으려는 의지 / ...... 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자유 ......

자! 이런 자들만이 나의 독자이고, 나의 정당한 독자이며, 예정된 나의 독자이다. 그 나머지는 뭐가 중요한가? 나머지는 한갓 인간일 뿐인데, 우리는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힘과 영혼의 높이(*거리의 파토스)에 의해서, 경멸(*무리에 대한 경멸)에 의해서......

 

3. 도덕에서의 '선-악'과 니체철학의 '좋음-나쁨'은 어떻게 다른가? 행복의 정의는 어떻게 다른가?

4. 우리는 약자와 실패자들의 몰락을 도와야 한다! 어떻게?

#1. 좋은 것은 무엇인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 나쁜 것은 무엇인가?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 행복이란 무엇ㅇ니가? 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만족이 아니라 더 많은 힘 ; 결코 평화가 아니라 싸움, 덕이 아니라, 유능함(르네상스 양식의 덕, 덕virtù, 허위도덕에서 자유로운 덕). / 약자들과 실패자들은 몰락해야 한다 : 우리의 인간애의 제일원리.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몰락을 도와야 한다. / 이러저러한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은 무엇인가? 모든 실패자와 약자에 대한 동정행위인 그리스도교.

 

5. [인류 전체의 진보(개선) vs 위버멘쉬의 육성]

   '인류를 존재자의 열에서 분리해내는 것'과 '어떤 유형의 인간을 미래를 확신하는 자로서 육성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다 높은 유형' 즉 인류 전체와 비교해서 일종의 '위버멘쉬인 유형'이란 어떤 존재인가?

#3. 내가 제가하는 문제는 '무엇이 인류를 존재자의 열에서 분리해해 내는가(인류의 어떤 점이 다른 존재자와 구별되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유형의 인간이 보다 가치있고, 보다 살만한 가치를 지니며, 보다 미래를 확신하는 자로서 사육되고 원해져야 하는지'이다. / 보다 가치있는 유형은 자주 존재했지만, 행운이나 예외자로서 존재한 것이지, 한번도 사람들이 원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가치있는 유형을 두려워했고, 지금까지 그런 자는 공포 자체였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 인해, 그와 반대되는 가치없는 유형이 원해지고, 육성되었으며, 달성되었다. 즉 가축, 군서동물, 병든 동물적 인간 - 그리스도인이....

#4. 보다 높은 유형은 실제로 제시되어 왔다. 인류 전체와 비교해서는 일종의 위버멘쉬인 유형이. 위대한 성공의 이런 행운적인 경우는 항상 가능했었고 미래에도 언제나 가능할 것이다. 심시지어는 전 세대가, 모든 종족과 민족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제시할 수 있다.

 

== 그리스도교적 감정: 데카당스, 동정 (#5~7) ==

 

6. 데카당스란 무엇인가, 데카당스-가치란 어떤 것인가?

#6. 나는 인간의 타락이라는 고통스럽고 모서리쳐지는 광경을 의식하게 되었다. ...... 이제껏 사람들이 가장 의식적으로 '덕'과 '신성'을 열망했던 바로 거기가 내게는 가장 강하게 타락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타락을 데카당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현재 인류가 최고의 소망으로 통합해놓은 가치들은 모두 데카당스-가치(*쇠퇴의 가치)다. / 어떤 짐승이나 어떤 종이나 개인이 자기본능을 상실할 때, 가지에게 불리한 것을 선택하고 선호할 때, 나는 그것을 타락했다고 부른다. / 삶 자체가 성장을 위한 본능, 지속을 위한 본능, 힘의 축적을 위한 본능, 힘을 위한 본능이다.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는 곳에서 쇠퇴가 일어난다. 인류의 최고가치에는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쇠퇴의 가치들ㆍ허무적 가치들이,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힘에의 의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7. 동정은 어떤 점에서 삶과 생명력의 손실을 가져오는가? 동정과 허무주의, 동정과 데카당스는 어떤 관계가 있나?

#7. ① (동정은 삶과 생명력의 총체적 손실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교는 동정의 종교라 불린다. 생명감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강장적인 격정과 반대로, 동정은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동정을 느낄 때, 을 상실한다. 이미 고통이 삶에 끼치는 힘의 손실은, 동정으로 인해 더욱 커지고 몇배로 불어난다. 고통이 동정에 의해 감염되며, 동정에 의해 삶과 생명력의 총체적 손실이 이루어진다. (*삶의 충일에서 오는 고통은, 고통이 힘에의 의지에 감염된 경우이다.) 동정이라는 원인의 양과 터무니없는 비례관계를 형성하면서. (*동정의 원인(나사렛사람의 죽음)에 비하여, 동정의 결과(삶과 생명력의 총체적 손실)는 터무니없이 크다!) 

② (동정은 몰락하는 것을 보존한다) 동정이 초래하는 반응에 의해 동정을 평가한다면, 삶을 위협하는 동정의 성격이 훨씬 명백하게 드러난다. 동정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과 충돌한다. 동정은 몰락에 이르는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것과 삶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진 것을 위해 싸우며, 삶 자체에 음산하고 의문스러운 측면을 부여한다.

③ (동정은 허무주의의 실천) 사람들은 동정을 덕이라고 불렀지만, 고귀한 도덕에서 동정은 무능이라고 간주된다. (*자기 삶에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무능이, 타인에 대한 동정에서 가치를 찾으려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동정을 덕 그 자체로, 모든 덕의 토대이자 근원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삶의 부정이라는 문장이 박혀있는 방패를 든 허무주의 관점일 뿐이다. 동정에 의해 삶을 부정되고, 더 부정할만한 것이 된다. 동정은 허무주의의 실천이다.

④ (동정은 데카당스의 도구)  의기소침하고 전염적인 본능은(*동정) 삶을 보존하고 삶의 가치를 드높이려고 애쓰는 본능과(*힘에의 의지) 충돌한다. 동정은 비참함을 곱절로 만들고 비참한 것을 보존하는 데카당스를 증대하는 도구이다. 동정은 무(*허무)를 설득한다. 사람들은 '무'라고 말하는 대신, '피안, 신, 참된 삶', 니르바나, 구원, 지복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도덕적 특이성질에서 나온 수사법은 삶에 적대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에 적대적이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동정이 덕이 되었다. 병들고 위험한 동정의 축적에 구멍을 내는 수단을 생명본능에서 찾아야 한다. 축적된 동정이 터져버리도록! ......

⑤ (그리스도교적 동정) 병든 현대성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동정보다 병들어있는 것은 없다. 여기서 의사이고, 여기서 가차없게 되며, 여기서 칼을 들이대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우리방식의 인간애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철학자인 것이다. 

 

== 신학자 본능, 칸트철학, 철학자-사제유형 (#8~12) ==

 

8. 니체가 비판하는 신학자 본능이란 무엇인가? 

#8. 오늘날 사람들이 '이상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자신들의 높은 출신성분 덕분에 현실의 우위에 서고 현실을 낯설게 바라볼 권리를 가지려고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나는 오만이라는 신학자의 본능을 발견했다. 

#9. ① (신학자의 파토스: 신앙) 신학자-피를 몸에 갖고 있는 자는 처음부터 만사에 삐딱하고 부정직한 태도를 취한다. 거기에서 발전된 파토스를 신앙이라고 부른다. ...... ② (신학자의 광학: 독단성) 자기 자신의 광학을 '신, 구원, 영원'의 이름으로 신성불가침으로 만든 다음, 다른 종류의 광학은 더이상 어떤 가치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요구한다. ...... ③ (신학자의 의지: 종말에의 의지, 허무에의 의지) 신학자들이 군주의 '양심'을 통해 권력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 근본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의 의지, 허무에의 의지이다.

 

9. 칸트의 보편도덕(도덕의 정언명령)과 니체의 개인도덕(자기의 정언명령)은 어떻게 다른가?

[참고] 칸트의 물 자체와 참된 세계

칸트는 ‘(사)물’과 ‘현상’을 구별하고, 우리는 감각기관(거울)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고 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 눈에 비친 ‘현상’이며, ‘물 자체’는 알 수 없다[물 자체] ······[감각기관(거울)] ······> [현상(인식)]

칸트와 ‘물 자체와 현상’의 구분은 물 자체의 세계(참된 세계)와 현상의 세계(현실세계)의 이분법으로 재연된다. 따라서 우리의 현상세계의 근거는 바로 물 자체의 세계이며, 물 자체의 세계는 현상세계는 원인이다. 이처럼 칸트의 물 자체의 세계는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의 참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즉 칸트의 물 자체의 세계플라톤의 이데아 세계,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면서 우리의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칸트식 물 자체의 세계는 그리스도교처럼 신에 의해 약속되는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며, 플라톤처럼 원칙상 도달가능한 이데아도 아니다. 칸트식의 ‘물 자체’가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물 자체의 세계 역시 알 수 없으므로 도달할 수도 없고 입증될 수도 없고 약속할 수도 없는 세계이다. 다만 현상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참된 세계가 존재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참된 세계는 현상세계를 위해 요청Postulat되는 세계이다. 이제 참된 세계는 ‘믿음의 대상’이 되고,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의 대상’이자, 그것을 믿으라는 ‘명령의 대상’이 된다. 칸트의 '참된 세계'는 근본적으로는 옛 태양인 즉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것이지만, 좀더 지성적으로 창백해진다.

참된 세계는 이를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으며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으나) 이미 위안으로서, 의무로서, 명령으로서 생각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옛 태양과 같은 것이지만, 이제 안개와 회의를 통과한다; 관념이 숭고해지고 창백해지며 북방적이고 쾨니히스베르크적이 되었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꾸며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 #74. p103] (*쾨니히스베르크: 칸트의 고향)

[참고] 칸트의 정언명령(정언명법)

가언명령假言命令(가언명법)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적용되고 요구되는 조건부 명령이라면, 정언명령定言命令(정언명법) 상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요구되는 단언적 명령이다. 가언명령은 “행복을 얻으려면, 이렇게 행위하라” 혹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같은 형태이다. 정언명령의 전형적 형태는 십계명 같은 것. ①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 우상을 섬기지 말라. ③ 하느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부르지 말라. ④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둑질하지 말라. ⑨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칸트의 정언명령(정언명법)은 대표적인 보편도덕이다. “네 행위의 준칙이 또한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의 명령은 방법이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도덕 자신을 목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정언명령이다.

#10. [칸트의 참된 세계] 옛 이상(*플라톤의 이데아)으로 향하는 샛길이 열렸고, '참된 세계'라는 개념과 세계의 요처로서 도덕개념이 증명은 불가능하더라도 더이상 논박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실재가 '가상'이 되어버렸다. (*현상세계=현실세계가 물 자체의 반영이 되어버렸다.) 반면 날조된 존재자의 세계가 실재가 되어버렸다. (*참된세계=물 자체의 세계가 본질이 되어버렸다.) 칸트의 성공은 단지 신학자의 성공에 불과하다. 

#11. [칸트의 정언명령] ① (니체: 개인적 도덕) 덕은 우리의 고안물이어야 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정당방위의 필수품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조건이 아닌 덕은 삶을 해친다. ② (칸트: 도덕을 위한 도덕, 보편타당한 도덕) 칸트의 '덕' 개념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 덕은 해롭다. (*칸트 "도덕명령은 도덕 자신을 목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덕, 의무, 선 그 자체', 비개인성과 보편타당성이라는 성격을 갖는 선은 삶의 몰락과 삶의 최후의 소진이다. ③ (니체. 자기의 덕, 자기의 정언명령) 가장 심층적인 보존법칙과 성장법칙은 그 반대이다. 각자가 자기의 덕, 자기의 정언명령을 고안해야 한다. 어떤 민족이 자신의 의무의무개념 일반과 혼동하면, 그 민족은 몰락하게 된다. '비개인적인' 의무, 추상은 모든 희생보다 더 깊고 더 내적으로 파괴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삶에 위험하다! ④ (의무, 데카당스로 향하는 처방전) 삶의 본능이 강요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증거는 바로 기쁨이다. 내적 필연성도 없고, 개인적 선택도 없이, 기쁨도 없이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빨리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의무'라는 기계보다 더 빨리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데카당스로, 백치로 향하게 하는 처방전이다. 칸트는 백치가 되어버렸다. 

 

== 인간/신/종교/도덕을 보는 새로운 방법론 (#13~26) ==

 

10. 니체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존재자와 인간 자신의 삶에 어떤 효과를 갖는가?

#14. 우리는 달리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① (인간을 겸손하게 보는 법) 우리는 모든 면에서 더 겸손해졌다.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동물, 자연, 사물)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을 더이상 '정신'과 '신성'으로 소급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동물 가운데로 되돌려놓았다. 우리는 인간을 가장 교활하다는 이유때문에 가장 강한 동물로 간주하는데, 인간의 정신성이 그 결과이다. ② (인간의 허영심에 저항) 우리는 다시 소리를 내려고 하는 허영심에 저항한다. 마치 인간이 동물진화의 위대한 숨겨진 의도였다는 둣이 생각하는 허영심에. 인간은 결코 창조의 극치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인간과 나란히 있고 같은 단계에서 완전하다. ...... 인간은 상대적으로 보자면 모든 동물 중에서 최고이 실패작이다. 가장 병적이고 자신의 본능에서 가장 위험하게 벗어나 있는 동물이다. (*인간의 데카당스화) 물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장 흥미로운 동물이기는 하다!

③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로 이해했는데, 우리 역시 인간을 제외하지 않는다. 이전에 사람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좀더 높은 질서에 부여된 인간의 지참금이라고 하며 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에게서 의지마저 빼앗아버렸다. '의지'라는 낡은 단어는 수많은 자극들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 일종의 개별적 반응을 표시하는 데 쓰일 따름이다. (*인간의 '의지'는 외부적 자극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을 '인간 내부의 주체적인 무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의지는 더이상은 '작용'하지 않는다, 더이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의 데카당스화: 생명력의 퇴화와 본능의 타락) 

④ (인간의 의식ㆍ'정신'에 대하여) 이전에 사람들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 '정신' 안에서, 인간의 고등한 기원과 신성에 대한 증거를 보았다. 인간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간에게 충고하기를 "감관(*감각기관)을 거북이처럼 안으로 끌어들이고, 지상의 것들과 교제를 중지하며, 사멸하는 껍데기를 벗어버려라. 그러면 인간의 핵심인 '순수한 정신'이 남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의 생각은 "의식적이 된다는 것, '정신'이라는 것은 유기체의 상대적 불완전성의 징후로서, 시도와 모색과 실수로서, 불필요하게 많은 신경에너지가 사용되는 노력이다. 의식되게 만들어지는 한에서, 무언가가 완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부정한다. '순수정신'은 순전한 우매이다. 신경계와 감관을, '사멸하는 껍데기'를 빼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에 대해 오산하고 있는 것이다."

 

11. 그리스도교의 허구성: 실재성(실재 세계)이란 무엇이고 허구(허구 세계)란 무엇인가?

#15. ① (그리스도교의 허구성)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도덕도 종교도 실재성과 접촉하지 못한다. 공상적 원인들('신, 영혼, 나, 정신', '자유의지 또는 자유롭지 않은 의지') / 공상적 효과들('죄, 구원, 은총, 죄의 사함') / 공상적 존재들 사이의 교류 (신, 영, 영혼') / 공상적 자연과학(인간 중심적인고, 자연적 원인개념을 완전히 결여한) / 공상적 심리학(순전히 자기오해이고, 쾌와 불쾌라는 일반감정에 대한 해석들. 예를 들면 교감신경의 상태종교적이고 도덕덕인 특이성질을 가진 상징언어 '후회,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 신의 다가옴'의 도움을 받아 해석한다) / 공상적 신학('신의 나라, 최후의 심판, 영생') 

② (허구세계의 원인) 이런 순전히 허구인 세계는 꿈의 세계와 구별된다. 허구 세계가 실재성을 왜곡시키고 탈가치화시키며 부정하는 반면, 꿈의 세계는 실재성을 반영하기에, 이 구별은 허구 세계에는 불리한 구별이다. 허구 세계는 자연적인 것(실재성!)에 대한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살재성에 대한 깊은 불만족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해명되어버렸다. 어떤 자가 '실재성에서 나가라'는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하는가? 실패한 실재성으로 인해, 실재성으로 고통받는 자이다. 쾌에 대한 불쾌의 우세는 허구적인 도덕과 허구적인 종교의 원인이다. 그런 쾌에 대한 불쾌의 우세가 데카당스에 대한 공식을 제공한다.

 

12. 그리스도교의 신 vs 니체의 신 :: 어떻게 다른가?

#16. ① (민족의 신) 스스로를 믿고 있는 민족은 자기네 고유한 신을 갖는다. 신 안에서 그 민족은 그들을 정상에 위치시키는 조건들, 즉 그들의 덕을 숭배한다. / 그 민족은 자신에 대한 기쁨을,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그것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에 투사한다. 풍요로운 자는 베풀기를 원하는데, 긍지에 찬 민족은 희생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 그런 전제들 안에서 종교는 감사하는 형식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기자신에게 감사하고, 이를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② (신: 선하거나 악한 신) 그런 신은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어야 하며, 친구일 수도 적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선한 점으로나 악한 점으로 인해 반드시 경탄받는다. / 신에게서 반자연적인 거세를 가해, 한갖 선한 신으로 만드는 것은 여기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악한 신을 선한 신만큼이나 필요로 한다. 그들의 존재는 관용과 박애 덕분만은 아니니까. / 분노와 복수와 질투와 조소와 간계와 폭행을 알지 못하는 신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승리와 파괴의 황홀한 열정조차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도 그런 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왜 그런 신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③ (민족이 몰락할 때, 선한 신) 물론 한 민족인 몰락할 때, 미래에 대한 믿음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느낄 때, 복종이 가장 이로우며 복종한 자의 덕목을 보존조건으로 의식할 때, 그들의 신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그는(*신) 이제 음험한 위선자가 되고 겁도 많아지고 겸소해져서 '영혼의 평화'를, 더이상 증오하지 않기를, 관용을, 친구와 적마저도 '사랑'하기를 권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도덕화되고 모든 개인적인 덕의 동굴로 기어들어가, 모든 이를 위한 신이 되고, 사인이 되며, 사해동포주의자가 된다.

④ (신: 힘에의 의지 or 힘에의 무기력) 신은 예전에는 한민족의 강력한 힘, 한민족의 영혼에서 나오는 공격적인 모든 것과 모든 힘에의 갈망을 표현했었다. 이제 신은 한갓 선한 신일 뿐이다. 사실 신들에 대한 다른 대안은 없다. 그들은(*신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민족의 신들), 아니면 힘에의 무기력Ohnmacht zur Macht(필연적으로 선한 신)이다!

#18. 그리스도 신 개념은 병자의 신, 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이다. 그리스도교 신 개념은 신유형의 하향적 전개에 있어 바닥이다. 신이 삶에 대한 미화이자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디오니소스 신)이 되는 대신, 삶에 대한 반박으로 변질되었다! 신 안에서 삶과 자연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적대가 선언되고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온갖 비방의 공식이자, '저 세상'에 대한 온갖 거짓 공식이 신이다! 신 안에서 무Nichts가 신격화되고, 무에의 의지Wille zum Nichts가 신성시되다니! 

 

13. 이스라엘의 탈자연화된 역사는 신의 개념과 도덕의 개념을 어떻게 변조시켜버렸나?

#25.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연적 가치가 탈자연화된 역사의 전형이다. ① (근원적 신개념_자연적, 민족의 신, 정의의 신) 근원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시대에 만사와 옳은 관계(자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는 힘-의식에 대한 표현이었고, 기쁨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었으며, 그들 자신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었다. 야훼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승리와 구원을 기대하고, 야훼와 함께 자연을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특히 비) 주는 것으로 신뢰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이었고 따라서 정의의 신이다. 힘을 갖고 있으며, 그에 관한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는 민족의 논리. 한 민족의 자기긍정의 이런 양면성은 축제의식을 통해 표현된다. 그들은 그들을 정상에 서게 한 위대한 운명에 감사한다. 그들은 계절의 변화에 대해, 목축과 농경에서 얻는 모든 복에 대해 감사한다. ...... 

② (신개념의 탈자연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좋은 군인이자 강력한 판관이라는 왕의 상을 최고소망으로 견지하고 있었다. (*신이 아니라 왕을!) 특히 예언가의 전형인 이사야가 그랬다. 옛 신은 예전에 할 수 있었던 것을 더이상 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더이상 과거의 신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차라리 신을 버려야 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신 개념을 변경시켜 버렸다. '정의의 신' 야훼는 더이상 이스라엘과 하나가 아니고, 더이상 민족적 자존심의 표현이 아니다. 이제 신 개념은 사제 선동가들의 손아귀에서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제들은 모든 행복을 보상으로, 모든 불행을 신에 대한 불복종의 벌로, '죄'에 대한 벌로 해석한다. 이것이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 개념을 뒤집어버린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기만적인 해석방식이다. 보상과 벌에 의해 자연적 인과율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나면, 반자연적인 인과율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다. 요구하는 신도움을 주고 방도를 강구하며 용기와 자기신뢰의 행복한 영감에 대한 대명사인 신을 대체해버렸다.

③ (도덕개념의 변조) 도덕은 더이상 한민족의 생존과 성장조건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더이상 그 민족의 심층적인 삶의 본능이 아니라, 추상화되어버렸고(*보편도덕) 삶의 반대가 되어버렸다. 상상력의 철저한 악화로서의 도덕, 만사에 대한 '사악한 시선'으로서의 도덕이 되어버렸다. 유대적 도덕은 무엇이고 그리스도교적 도덕은 무엇인가? 순수함이 죽어버린 우연, 불행을 '죄' 개념으로 더럽히는 것, 양심이라는 벌레의 독에 중독된 생리적 불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과 복음 (#27~39) ==

 

14. 예수의 삶과 실천은 유대교회의 질서에 대항하는 하나의 봉기였다? 예수는 위계질서에 대항한 아나카스트였다!?

#27. ① (예수라는 이름의 봉기운동)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작은 봉기운동은 또하나의 유대본능이며, 사제(*유대적 사제)를 현실적인 것으로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사제본능(*예수의 본능)이다. 그리스도교(*예수의 그리스도교)는 교회(*유대교회의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② (유대사회의 질서에 대항하는 봉기) 예수가 주모자로 오해되었던 그 봉기는 유대교회에 대항하는 봉기였다! 그 봉기는 ‘선한 자와 의로운 자’에 대한 봉기였고, ‘이스라엘의 성자들’에 대한 봉기였으며,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봉기였다. 그것들의(*성직자)의 부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계급과 특권과 질서와 정식에 대한 봉기였다. 그것은 ‘더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었고, 사제와 신학자였던 모두에 대한 부정이었다.

③ (유대사회의 위계질서: 유대민족의 생존의지) 하지만 일시적으로 문제시되었던 위계제도는 ‘홍수’ 속에서 유대민족을 살아남게 한 수상가옥이었고 방주였으며, 살아남기 위해 힘들게 얻은 마지막 가능성이자 그들의 독특한 정치적 삶의 처지의 잔재였다. 위계질서에 대한 공격은 가장 심층적인 민족본능, 비할 바 없이 질겼던 민족-생존-의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④ (아나키스트 예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예수라는 성스러운 아나키스트는 하층민과 배제된 자와 ‘죄인’과 유대교 내부의 찬달라에게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을 호소했다. 그는 정치범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정치적인 사회에서 가능한 그런 형태의 정치범이었다. 이 점이 그를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십자가에 붙어있는 명패이다. (*INRI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많은 정치범이나 아나키스트들처럼, 예수 역시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때문에 처형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 (*인류의 원죄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15. 예수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인가?

#29. [예수 복음의 의미] 평화 안에, 온유함 안에, 적대하지 않을 수 있음에 깃들어 있는 '기쁜 소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된 삶이,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것, (이런 삶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런 삶은 거기, 너희 안에 있다,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서, 뺄 것도 제할 것도 없이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사는 삶으로서. 누구든지 다 신의 자신이다. 예수는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 서로 동등하다. 

#32. [예수 신앙의 특징] ① (획득하지 않음)  '복음'이란 더이상 아무런 대립자도 없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아이들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싸워서 획득한 신앙이 아니다. 이 신앙은 거기, 처음부터 있었다. ② (저항하지 않음) 그것은 정신적인 것에 아이 같은 천진함이 되돌아간 것이다. 그런 신앙은 노하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는다. 그것은 '칼'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③ (입증하지 않음) 그것은 자신을 기적에 의해서든, 보상이나 약속에 의해서든, 입증하지 않는데, '성서'에 의해서는 더욱 아니다. 신앙 그 자체가 매순간 신앙의 기적이고, 신앙에 대한 보상이자 증거이며 '신의 나라'이다. ④ (공식화하지 않음) 이런 신앙은 자신을 공식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고  공식들에는 저항한다.

#35 [그리스도의 복음: 신의 나라, 신의 자식] 십자가에 매달린 도덕에게 그가 한 말은 복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도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신적인 사람이었구나. '신의 자식'이었구나" 구세주가 대답하기를 "네가 그것을 느끼면, 너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너 역시 신의 자신인 것이다." (*참된 삶은 우리 안에 있다. 신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누구나 신의 자식이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 또한 악한 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 그를 사랑하라.

 

16. 그리스도 복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33. [복음의 심리, 복음적 실천] ① (복음의 심리: 죄와 벌, 보상, 지복의 약속이 없다) '복음'의 심리에는 죄와 벌의 개념이 없고, 보상이라는 개념도 없다. 신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죄'가 없어졌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되지 않으며, 조건들에 묶여있지 않다. 이것이 유일한 사실이다. 나머지는 이것을 말하기 위한 기호일 뿐이다. ② (복음적 실천: 그리스도교인을 구별짓는 것) 그런 상태의 결과가 하나의 새로운 실천, 진짜 복음적인 실천으로 투영된다. '신앙'이 그리스도교인을 구별짓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은 행동하고, 행동이 달라서 구별된다. "그에게 못되게 구는 자에게 그는 말로도 마음으로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과 토착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웃'이란 원래는 신앙의 동지, 즉 유대인을 말한다)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누구도 멸시하지 안는다는 것, 법정에 나서지도 않고, 나서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맹세하지 말라'). 그 어떤 경우라도, 아내의 부정이 입증된 경우라도 이혼하지 않는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명제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본능의 결과들이다.

#33. [구세주의 삶: 복음의 실천으로서] 구세주의 삶은 이러한 실천일 뿐이었다. 그의 죽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신과 교통하기 위해 어떤 공식도 어떤 의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기도조차도. 그는 유대적 회개교설과 화해교설과 담판을 지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적'이고 '복되며'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자식'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어째서 삶의 실천인지를 알고 있었다. 신에게 향하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의 기도'도 아니다. 오로지 복음적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 복음과 함께 없어진 것, 그것은 ', 죄사함, 신앙, 신앙을 통한 구원' 개념을 갖고 있는 유대교였다. 이런 유대교회의 교설이 '기쁜 소식'에서는 부정되었다. 

#39. [그리스도교인의 표지] ①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인) '그리스도교'라는 말 자체가 오해이며,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인(*예수)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으므로, 그 순간부터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수가 체험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미 '나쁜 소식' '화음 禍音나쁜 소식(ex.화를입다) dysangelium'이었다. ② (그리스도교인의 표지: 그리스도적 신앙 vs 그리스도적 실천) 그리스도적 신앙(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에서 그리스도교인의 표지를 찾는 것은 잘못이고,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실천(십자가에서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교적이다. ......

#39. [그리스도교의 일반성] ③ (그리스도적 삶과 그리스도교의 일반성) 오늘날에도 그런 삶은 가능하며,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어느 시대에나 가능할 것이다. 신앙이 아니라 행동이, 다른 식의 존재가 말이다! 그리스도인-임과 그리스도교성을 어떤 특정한 것을 참으로 간주하는 일(하나의 의식-현상으로 환원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④ (본능을 가리는 외투_그리스도적 신앙 / 배후의 본능_현실에 대한 본능적 증오) 사실상 그리스도교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신앙은 외투이자 구실이며 장막일 뿐, 그 배후에는 본능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신앙은 특정한 본능들의 지배를 가리는 교활한 눈가림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산앙'에 대해 말했지만, 항상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했다. 그리스도교인의 표상세계에서는 현실성을 건드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꾸로 현실성에 대한 본능적 증오 안에 동적 요소가 있다.

 

17. 예수의 적대하지 않는 본능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의 상징주의란 무엇인가? (예수에게 실재와 상징은 어떤 것인가?) 예수의 상징주의와 적대하지 않는 본능은 어떤 연관이 있나? 예수-구원자유형과 위버멘쉬의 동형성?

#29. [구원자의 심리유형] ① (예수라는 유형) 내게 문제되는 것은 구원자의 심리유형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가 행했던 것이나 그가 말했던 것이나 그가 어떻게 죽었던가’에 대한 사실여부가 아니라, ‘그라는 유형이 표상가능한가의 여부이다. (*예수를 하나의 유형으로 만들 수 있는가) ② (적대하지 않는 본능) '모든 싸움'에 대립하고,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느낌 전체'에 대립하는 것이 복음서에서는 본능적이다. 저항에의 무능력이 도덕이 된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복음서의 가장 뜻깊은 말이고, 복음서를 이해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③ (복음의 의미) 평화 안에, 온유함 안에, 적대하지 않을 수 있음에 깃들어 있는 '기쁜 소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된 삶이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것, (이런 삶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런 삶은 거기, 너희 안에 있다,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서, 뺄 것도 제할 것도 없이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사는 삶으로서. 누구든지 다 신의 자신이다. 예수는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 서로 동등하다. 

#32. [적대하지 않는 본능] ①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이 필요없고, 부정할 이유도 없다) 그의 '앎'은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순진한 바보인 것이다. 문화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문화에 대한 싸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문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국가, 시민적 질서, 사회, 노동과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상을 부정할 이유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교회적인 '세상'개념을 한번도 알지 못했다. 부정한다는 것, 그에게는 이것이 정말 불가능하다. ② (상반되는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변증술도 없고,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진리'가 근거에 의해 입증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없다. 그의 증거는 내적인 '빛', 내적인 기쁨이자, 자기긍정이며, 온통 '힘의 증거'이다) 상반된 판단들이 등장하면, 가슴속 동정심으로 인해 상반된 판단의 '맹목'을 슬퍼하지만, 자기가 '빛'을 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33. [적대하지 않는 본능 '신앙'이 그리스도교인을 구별짓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은 행동하고, 행동이 달라서 구별된다. "그에게 못되게 구는 자에게 그는 말로도 마음으로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과 토착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웃'이란 원래는 신앙의 동지, 즉 유대인을 말한다)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누구도 멸시하지 안는다는 것, 법정에 나서지도 않고, 나서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맹세하지 말라'). 그 어떤 경우라도, 아내의 부정이 입증된 경우라도 이혼하지 않는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명제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본능의 결과들이다.

#35. [그리스도의 실천: 저항하지 않는] ① (그리스도적 실천)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 재판관과 호위병과 고발자와 온갖 종류의 비방과 조소 앞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 ② (저항하지 않는) 그는 저항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았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사태를 도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32. [예수의 내적인 힘] ① (원시 그리스도교의 개념: 실재가 아니라 기호의 가치) 원시 그리스도교는 단지 유대적 셈적인 개념들은 어떤 기호언어, 어떤 기호학, 비유로서 보아야 한다. 그들은 '어떤 말도 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② (예수의 자유정신)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에게는 고정된 것은 죄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은 죽이는 것이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③ (실재_내적 사실_삶ㆍ진리ㆍ빛 vs 기호ㆍ비유_나머지_현실세계)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개념인 ''의 경험은 그에게는 온갖 종류의 , 공식, 법칙, 신앙, 교의와 대립한다. 그는 단지 가장 내적인 것(*힘에의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 또는 '진리' 또는 ''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그가 사용하는 대명사이다. 나머지 전부, 현실성, 자연, 언어마저도 그에게는 하나의 기호로서, 한가지 비유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상징의 그러한 전형성은 모든 종교, 모든 제의개념, 모든 역사, 모든 자연과학, 모든 세계경험, 모든 지식, 모든 정치, 모든 심리학, 모든 서적, 모든 예술을 넘어서고 있다.

#34.  [예수의 실재와 상징] ① (예수: 실재_내적 사실 vs 나머지_기호ㆍ비유) 이 대단한 상징주의자(*예수)에 대해 내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그는 내적 사실들만을 실재로, '진리'로 받아들였으며, 나머지 모든 것(자연적인것, 시간적인 것, 공간적인 것, 역사적인 것)은 단지 기호로서, 비유의 계기로서 이해했다. '인간 아들'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구체적인 인물(역사속의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영원한' 사실(시간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하나의 심적인 상징)이다. 이런 점은 그의 신에게도 '신의 나라'에게도, '천국'에게도 '신의 자식'에게도 최고의 의미로 적용된다. ② (이것에 대한 교회의 왜곡) 인격존재로서의 신, 앞으로 올 '신의 나라', 피안의 천국, 삼위일체의 제2격인 '신의 아늘'에 대한 교회의 조잡함은 비그스도적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얼토당토않게 복음을 망쳐버린 것이다.

#34. [‘아버지’와 ‘아들’의 기호] ③ ('아버지'와 '아들'의 기호) 상징의 조롱 안에 있는 세계사적 냉소주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기호에 의해 무엇이 암시되는가? '아들'이라는 말로는 만사가 총체적으로-변용하는-느낌(지복)으로서의 진입이 표현되고, '아버지'라는 말로는 이런 감정이 영원과-완성의-느낌이 표현되고 있다. ④ (이것에 대한 교회의 왜곡) 이런 상징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을 만들어왔는지, 그것을 떠올리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적 '신앙'에다 '원죄없는 정결한 잉태'라는 도그마를 덧붙였다! 그런데 교회는 이렇게 해서 잉태를 더럽혀버린 것이다. ⑤ ('천국', 죽음의 의미)  '천국'은 마음의 특정한 상태이며, '지상의 위' 또는 '죽은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음에는 자연사(*죽음)의 개념이 없다. 죽음이란 하나의 다리도 이행도 아니며, 죽음은 전혀 다른 한갓 가상적인 세계, 한갓 상징을 위해서만 쓸모있는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임종의 시각'은 그리스도적 개념이 아니다. '시각'이나 시간, 생리적 삶이나 이런 삶들의 위기라는 것은 '기쁜 소식'을 가리치는 스승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나라'는 사람들이 오기를 고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내일 이후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천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신의 나라는 마음 속의 특정한 경험이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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