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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우상의 황혼]② :: 2020.10.12(월)

 

1. 네가지 중대한 오류들 :: 니체가 비판하는 원인과 결과에 관한 4가지 오류란 무엇인가?

 

[참고] 생리적 인과론(생리적 인과율)에 대하여

니체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중대한 오류로 비판하는데, 이는 기존의 이성 중심주의 인과론을 뒤집는 생리적 인과론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과 종교가 원인-결과를 거꾸로 해석하는 전도된 인과론이라고 비판한다. 한편 니체가 제시하는 생리적 인과론에 따르면 생리적 질서와 상태만이 원인이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결과적 상태이다. 예를 들면 도덕적 행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행복하기에 도덕적 행위를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는 행위가 인간에게 행복감을 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행복하기에 그 행복이 주는 충만감으로 신을 찾게 된다. 여기서 니체가 사용하는 '행복'개념은 단순히 정신적 행복이 아니라, 신체 전체의 행복인 '생리적' 행복을 의미한다. 즉 의식을 포함하여 신체 전체에서 충만한 힘감정과 힘의 경험이 발생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니체가 이러한 생리적 인과론을 '가치전도'의 첫번째 사례로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 기존의 도덕적 종교적 해석의 오류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1)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

#1.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는 '종교'나 '도덕'이라는 명칭을 가지며, 종교와 도덕이 정식화하는 모든 명제를 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코로나로의 책에서 "소식 식이요법 때문에, 장수했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장수의 선제조건이란 느린 신진대사, 적은 소모이고,  이것이 소식 식이요법의 원인이었다. (*장수의 조건(느린 신진대사와 적은 소모) 때문에, 소식하게 되었다. 느린 신진대사는 소식을 요구했다.) 그의 간소함(*소식 식이요법)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마음 대로 적게 먹거나 많이 먹거나 하지 못했고, 더 먹으면 그는 병에 걸렸다. 반대로 보통 사람에게는 제대로된 식사가 필요한 일이다. 신경에너지를 급속히 소모하는 우리시대의 학자가 코르나로의 식이요법을 따르다가는 망해버릴 것이다. 

[코로나로] "소식 때문에, 장수했다."  VS  [니체] "코로나로의 생리조건=장수조건(느린 신진대사와 적은 소모)이, 소식을 요구했다"

 

(2) 생리적 원인(퇴화)과 결과(악습, 사치, 질병, 과오)를 혼동하는 오류: Q. 우리의 일상과 경험에서 찾아보자! 

#2. ① (행복의 정식) 모든 종교와 도덕의 일반적 정식 "이것과 이것을 행하라. 이것과 이것은 멀리하라. 그러면 너는 행복해 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것을 이성의 중대한 원죄, 불멸하는 비이성이라고 부른다. 내 입에서 그 정식은 반대로 변한다. 나의 '모든 가치의 전도' 첫번째 예. 좋은 체질을 갖추고 있는 자, '행복한' 자는 특정행위들을 해야 하고 다른 행위들은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 그가 생리적으로 제시하는 질서를 인간과 사물과 맺는 관계에 도입시킨다. 정식화하면 "그의 덕은 행복의 결과이다. '장수와 많은 후손은 덕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덕은 신진대사가 완만하다는 것이며, 이것의 결과가 장수와 많은 후손'이다."  ② (민족의 쇠퇴) 교회와 도덕은 말한다. "어떤 민족은 악습과 사치로 인해, 망한다." 나의 이성은 말한다. "어떤 민족이 망하고 생리적으로 퇴화하면, 그 결과로 악습과 사치가 생긴다." ③ (신체의 질병) 친구들은 말한다. "이러저러한 질병 때문에, 얼굴이 창백하고 생기를 잃어간다." 나는 말한다. "퇴락한 삶의 결과로, 그가 병들었다." ④ (정당의 쇠퇴) 신문 독자 "이 정당은 이런 과오로 자멸한다." 나의 정치론 "정당이 쇠퇴한 결과, 이런 과오가 나온다."

① 행복의 정식:  [종교.도덕]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멀리한) 덕의 대가로, 행복(장수와 많은 후손)해진다."  VS  [니체] "행복하기 때문에, 신진대가가 완만하고(덕), 그 결과 장수하고 많은 후손을 낳게 된다."

② 민족의 쇠퇴:  [종교.도덕] "민족은 악습과 사치로, 망한다."  VS  [니체] "민족이 생리적으로 퇴화하면(망하면),악습과 사치가 생긴다."

③ 신체의 질병:  [친구들] "질병 때문에, 그의 얼굴이 창백하고 생기를 잃었다."  VS  [니체] "퇴락한 삶의 결과로, 그가 병들었다."

④ 정당의 쇠퇴:  [신문 독자] "정당이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멸한다."  VS  [니체] "정당이 쇠퇴하고 있었기에 과오들이 나왔다."

 

(3)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 '내적 사실들'(의지, 정신, 나)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오류: Q. 의지와 정신과 나를 행위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내적 사실' 원인론: 의지, 의식(정신), 나(주체) 등을 '내적 사실'로 상정하고, 그것을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는 이론

#3. ['내적 사실' 원인론] 어느 시대에서든 사람들은 '무엇이 원인인지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인을) 지금까지 증명된 바 없는 그 유명한 '내적 사실들'의 영역에서 얻는다! ① (내적 사실1. 의지) 우리는 의지작용에 있어서 ② (내적 사실2. 나 '주체) '우리 자신'이 원인이라고 믿었다. '우리 자신'을 행위에 작용하고 있는 원인으로 포착했다. (*"내가 의지한다.") ③ (내적 사실3. 의식 '정신')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의 원인들을 의식에서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행위의 동기로서 다시 발견할 거라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의식 '정신'이 없다면), 행위를 할 자유가 없을 것이고, 행위에 대한 책임이 없을 것이다. ④ (인과관계의 순서) 인과관계를 보증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3가지 '내적 사실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첫번째 인과관계는 원인으로서의 의지이다. 원인으로서의 의식('정신')원인으로서의 나('주체')는 의지에 의해 주어진 사실로서, 경험적인 것으로서 확립된 다음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 

['내적 사실' 원인론 비판] '내적 세계'란 망상이자 도깨비불이다. ① (의지 비판) 의지는 망상 중 하나이다. 더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더이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의지는 과정들에 수반될 뿐이며, 결여될 수도 있다. ② (의식 '정신' 비판) '동기'라는 것은 또다른 오류이다. '동기'는 의식의 표면현상이고, 행위의 선행조건을 숨겨버리는 행위의 부수물이다.  (나 '주체' 비판) 나라고 하는 것은 우화가 되었고, 허구가 되었으며, 말장난이 되어버렸다.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기를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따라서 정신적 원인이란 전혀 없다! ▶우리는 '경험영역'을 오용하여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세계를 원인의 세계, 의지의 세계, 정신들의 세계로 만들어냈다. ......

['내적 사실'의 외적 세계로 투사: 원인으로서의 사물-원자-물자체-신 개념 비판] ▶(내적 사실들의 외적 세계로 투사과정) 심리학에서 보면 생기현상은 행위이고, 행위는 어떤 의지의 결과이고 다수의 행위자들이 세계가 되며, 행위자('주체')는 모든 생기현상의 하부에 슬며시 끼여든다. 인간은 자신의 3가지 '내적 사실들'(의지와 정신과 나)을 자신의 외부세계에도 투사했다. ① (원인으로서의 사물) 먼저 나라는 개념에서 존재 개념을 끄집어내고, 원인으로서 나라는 자신의 개념에 따라 '사물'을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나중에, 사물들 안에 집어넣었던 것을 사물들 안에서 다시 발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사물 자체, 사물이라는 개념은 내가 원인이라는 믿음의 단순한 반영이다. (*원인으로서의 사물 개념은 원인으로서의 '나' 개념을 사물에 반영한 것이다.") ② (원인으로서의 원자) 기계론자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원자 안에마저 오류와 초보심리학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③ (원인으로서의 물 자체) 형이상학자의 추악한 치부인 '물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칸트의 물 자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현상이며, 물 자체Dingen an sich는 알 수 없다.”) ④ (원인으로서의 신) 원인으로서의 정신을 실재와 혼동하는 오류, 그것을 실재의 척도를 만들고 신이라 불렀다!

 

(4) 가상적 원인들이라는 오류: 가상적 원인을 만들어내는 오류 (꿈과 같이 실제에서도!) Q. '가상적 원인을 만들어내는 오류'를 우리의 경험에서 찾아보자!

#4. [꿈의 경우] ①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 우리가 꿈꾸고 있을 때, 멀리에서 울리는 포소리의 감각에 어떤 원인(ex.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배경인 꿈)이 나중에 끼어든다.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이 포소리 감각으로 하여금 전면에 나서게 할 때까지(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의미'로서 나서게 할 때까지), 포소리 감각은 기다린다. (*포소리가 오케스트라의 북소리로 체험될 때까지, 포소리 감각은 기다린다) ② (시간적 역행) 포소리는 인과적 방식으로 시간의 역행 안에서 등장한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더 나중의 것)이 섬광처럼 스쳐가는 수백가지의 개별적 사건들과 함께 가장 먼저 체험된다. 그리고 그 다움에 포소리가 따른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나중에 동기로서 부여된 것이지만 가장 먼저 체험되는 반면, 포소리는 그 다음에 오케스트라의 북소리로 체험된다.) ③ (원인/결과의 전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특정한 상태가 야기시킨 표상들이(*포소리가 야기시킨 오케스트라 연주회) 그 상태를 야기시킨 원인(*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야기시킨 북소리=포소리)으로 오해된 것이다. 

[깨어있을 때도 마찬가지!] ①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 우리의 감정 대부분(기관들이 펼치는 유희작용/반작용에서의 온갖 종류의 억제, 억압, 긴장, 폭발)이 원인을 만드는 충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우리의 좋은 상태, 나쁜 상태에 대한 이유를 갖고 싶어한다. ② (시간적 역행) 우리가 그 사실(*좋은 상태, 나쁜 상태)에 동기(*원인, 이유)를 부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실을 허용하며,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③ (기억의 역할) 그런 경우 우리도 모르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기억은 이전에 발생했던 동일한 상태(*좋은 상태, 나쁜 상태)를 불러내고 이것과 함께 생겨났던 원인-해석들을 불러낸다. 그것들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표상들이 수반되는 의식과정들이 원인이었다는 믿음은 기억을 통해 끌어들여진다. / ④ (습관의 발생) 이런 식으로 하나의 원인-해석에 익숙해지는 습관이 발생하고, 이 습관이 사실상 원인에 대한 탐구를 저해한다. 

[참고] 꿈의 가상성 : 꿈은 우리가 자는 동안 갖게 되는 감각에 대한 해석이다. ①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 그런데, 이 감각은 그것 자체로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서 체험된다. 즉 실제의 포소리는 꿈속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라는 배경 속에서 북소리로 체험된다. ② (시간적 역행, 인과적 전도) 또한, 체험되는 순서도 시간에 역행하여 등장한다. 먼저 오케스트라 연주회(*포소리가 울리는 동기가 되는)가 체험되고, 그 다음에 북소리로 체험되는 포소리가 따른다. ③ (기억과 언어의 역할) 한편, 이때 체험은 '기억'(이전의 경험)의 도움을 받는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꿈에 등장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할 때만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라는 언어를 발견할 때만, 북소리로 의식된다.)

[아침놀 #119] "우리의 꿈은 우리가 자면서 갖게 되는 신경의 자극에 대한 해석이다. 피와 내장의 움직임, 팔과 이불의 압박, 종탑의 종소리, 풍향계에서 나는 소리 같은 이런 종류의 사물들에 대한 극히 자유롭고 자의적인 해석이다." [힘에의 의지 #479] 우리의 꿈은 가능한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의 복합적인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떤 상태가 연결되는 것으로 짐작되는 인과관계가 의식으로 들어올 때, 그 상태가 의식된다.

[참고] 가상적 원인의 생성매커니즘 (인간이 가상적 원인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되는 과정) ① 의식화 과정:: 특정한 새로운 사태가 의식으로 들어오는 과정인데, 원인을 찾아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이 작동하는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의식화가 진행되는데, '시간적 역행'과 '인과적 전도'가 일어나며,  ② 기억의 작동:: 먼저, 낯선 것은 이미 경험한 친숙한 것 가운데 유사한 사태를 기억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낯선 것은 친숙한 원인으로 설명된다. 다음, 낯선 것이 친숙한 것의 범주로 통합되고 정돈된다. 니체는 이 과정을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Gleichmachen des Ungleichen' 과정이라고 부른다. ③ 습관의 형성:: 친숙한 것을 낯선 것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원인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정선되고 선호되는 원인이다. 그것이 낯선 것에 대한 공포심을 가장 빨리 효과적으로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특정한 원인에 대한 심리적 습관이 형성된다. 은행가의 이윤, 그리스도교인의 원죄, 소녀의 사랑처럼!

 

(5) 위의 사실에 대한 심리적 설명: 가상적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은 왜 생기는가?

① (심리적 필연성의 측면에서, 공포감을 제거하려는 심리가 특정한 원인을 만들어낸다#5.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환원하는 것은(*낯선 체험을 익숙한 체험으로 바꾸는 것), 마음을 편하게 하고 안심시키며 만족하게 하고 힘을 느끼게 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는 위험, 불안정, 걱정이 수반되는데, 첫번째 본능은 이런 불편한 상태들을 없애면서 사라져간다. 첫번째 원칙: 어떤 설명이든 설명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4. 우리는 우리를 이러저러한 상태(좋은 상태, 나쁜 상태)에 있게 하는 이유를 갖고 싶어한다. 단순히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는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사실에 동기를 부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실을 허용하며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설명해주는 첫번째 생각은 어찌나 좋게 작용하는지, '참으로 간주될' 정도이다. 이것은 기쁨('힘')이 진리의 규준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원인-충동(*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은 공포감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자극된다. '왜?'라는 물음은, 어떤 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원인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시켜주고 성가신 것을 없애주며 가볍게 해주는 특정 종류의 원인을 제공해야 한다. 이미 알려진 것, 체험된 것, 기억에 각인된 것으로 원인으로 설정해야 하며, 새로운 것, 체험되지 않은 것, 낯선 것은 원인이 될 수 없다. 

② (실용적 필연성의 측면에서, 공포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거하려는 심리가 습관적 원인을 형성한다) #5. 그러므로 단지 특정한 종류의 설명들이 원인으로 발견될 뿐 아니라, 정선되고 선호되는 종류의 설명들이 찾아진다. 이 설명들은 낯선 느낌, 새로운 느낌, 체험되지 않았다는 느낌가장 빨리 가장 빈번히 제거해버리는 설명들이며 가장 습관화된 설명들이다. 그 결과 특정종류의 원인-설정이 점점 더 우세해지고, 체계로 집결되며 결국은 지배적인 된다. 달리 말하면 다른 원인과 설명들은 간단히 배제되어버린다. 은행가는 즉시 '이윤'을 (*그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교인은 즉시 '원죄'를 (*그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소녀는 즉시 그녀의 사랑을 (*그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즉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그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6) 쾌감과 불쾌감에 대한:: 도덕과 종교적 해석 vs 니체의 해석

① [도덕과 종교의 해석] #6. 쾌감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쾌감은 선한 행위들을 의식할 때 야기된다. 쾌감은 일의 성공적인 결말에서 생겨난다. 쾌감은 그리스도교 덕들에 의해 생겨난다. 쾌감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야기된다. /  불쾌감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존재에 의해 야기된다(악령들에 의해). 불쾌감은 승인될 수 없는 행위들에 의해 야기된다('죄'라는 느낌, '죄'가 된다는 느낌이 생리적 불안에 슬쩍 끼어든다). 불쾌감은 우리가 하지 말았어야 했고, 또 우리가 그런 존재여서는 안 되었던 것에 대한 벌로서, 그것을 갚는 것으로서 생겨난다. [⋯] 불쾌감은 경솔하고 나쁘게 끝난 행위들의 결과 생겨난다.(ㅡ 격정과 감각을 원인으로, 잘못이 있다고 설정한다)

② [니체의 해석] #6. 소위 이러한 설명들은 사실상은 전부 결과적 상태이며, 말하자면 쾌와 불쾌의 느낌을 잘못된 방언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 도덕과 종교는 전적으로 오류의 심리학에 속한다. 모든 경우에 원인과 결과가 혼동되어 잇다. 진리와 진리로 믿어진 것의 결과가 혼동되어 있다. 의식의 특정상태와 이런 상태의 원인이 혼동되어 있다. /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이유는 생리적인 근본 느낌이 다시 강력하고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쾌감의 경우)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충만과 힘의 느낌이 그를 안정시키기 때문이다.

[참고] 도덕주체에 의해 도덕이 결정된다. 특정한 주체가 특정한 도덕을 요청한다. 쾌감과 불쾌감은 도덕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주체의 쾌감과 불쾌감에 따라 다른 유형의 도덕이 요청된다. 쾌감이라는 생리적 상태가 원인인 것이지, 결코 도덕적이라는 것이 쾌감의 원인은 아닌 것이다. "즐거움과 자유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즐거움과 예속 사이에도 모순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인도 노예도 모순 없이 즐겁게 살 수 있다. 다만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세계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성공한 노예’가 되었을 때, 노예가 느끼는 환희를 자유인은 견딜 수 없는 치욕으로 느낀다. 그들은 마주 보면서도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두 개의 길, 즐거움은 어디에도 있다. 당신은 어디서 환희를 느끼고, 어디서 비참을 느끼는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언더그라운드 니체]

 

(7)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어째서 오류인가?

① ['자유의지'는 어떻게 생겨났나?] #7.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신학자들의 가장 악명 높은 작품으로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인류를 '책임 있게' 만들기 위해, 즉 인류를 그들에게 의존적으로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 의지에 관한 학설은 근본적으로 벌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즉 죄 있다고-여기도록-원하게 하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옛 심리학인 의지의 심리학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심리학의 창시자이며 우두머리인 성직자들이 벌을 규정하는 권한을 갖고자 했으며, 또는 신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고자 했다......판결하고 처벌할 수 있기 위해 ― 죄 지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자유롭다'고 생각되었다 : 따라서 개개의 행위는 원해진 것이어야만 했고, 개개의 행위의 기원은 의식 안에 있다고 생각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심리현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허위가 심리학 자체의 원칙이 되어버렸다......)

② ['자유의지'가 적용된 결과 어떻게 되었나?] #7. 책임이 찾아지는 곳 그 어디서든, 책임을 찾는 것은 벌을 원하고 판결을 원하는 본능이게 마련이다.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 의지나 의도나 책임 있는 행위로 환원된다면, 생성에게서 죄 없음이 박탈되어 버린다.

③ ['자유의지' 개념은 어떻게 폐기되나?] #7.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운동에 들어서고 있다. 오늘날 우리 비도덕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죄 개념과 벌 개념을 세계에서 다시 빼내고, 이 개념들에서 심리학과 역사와 자연과 사회적 제도 및 조처를 정화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적대자로 여겨지는 것은 신학자들이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개념을 가지고 생성의 죄 없음을 '벌'과 '죄'로서 계속 감염시키는 일인 것 같다. 그리스도교는 사형집행인의 형이상학이다. / #8. 도대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그런 상황과 바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 그의 존재의 숙명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특정 의도나 특정 의지나 특정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와 함께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에 이르려는 시도는 하게 되지 않는다. ―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니까. '목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고안해 낸 것이다 : 사실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 사람들은 한 조각 필연이며, 한 조각 숙명이다. 사람들은 전체에 속하며, 전체 안에 있다. ― 우리의 존재를 판결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전체를 판결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존재의 방식이 제일 원인으로 소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세계가 감각중추나 '정신'으로서의 단일체는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해방이며 ― 이로써 생성의 무죄가 비로소 다시 회복된다...... '신' 개념은 지금까지 인간 삶에 대한 최대의 반박이었다...... 우리는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책임을 부정한다 : 이렇게 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2.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1) 도덕에 대한 니체의 정의는 무엇인가?

① "도덕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1. 도덕적 사실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도덕은 단지 특정 현상들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② "도덕은 증후학이고 기호언어이다" #1. 도덕판단은 징후학으로서는 대단히 가치 있다. (*특정 도덕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삶의 내용(개인들과 그 개인들의 삶의 모습)을 누설한다.) 도덕에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이미 알아야 한다. [⋯] 도덕은 단지 기호언어에 불과하다. (*도덕은 도덕주체와 도덕주체의 삶에 대한 '기호 언어Zeichensprache'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와 『선악의 저편』에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이렇게 말했다. "주인도덕Herrenmoral은 '주인적' 특징을 지닌 주체들의 가치평가 유형이자 삶의 조건이며, 노예도덕Sklavenmoral은 '노예적' 특징을 지닌 주체들의 가치평가 유형이자 삶의 조건이다.")

[참고] 삶과 가치(종교ㆍ도덕ㆍ철학)의 관계. [소크라테스의 문제] #2. 삶의 가치라는 것은 평가될 수 없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어떤 도덕도 그 자체로는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법이니까.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5. 우리는 삶의 광학 아래서 가치에 관해 논한다.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한다. (*삶이 모든 가치의 척도이며, 모든 가치는 삶의 광학 아래 평가된다. 어떤 종교ㆍ도덕ㆍ철학도 그 자체로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ㆍ도덕ㆍ철학이 삶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삶이 종교ㆍ도덕ㆍ철학적 가치의 척도이다.)

 

(2) '인류의 개선'은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인간을 '개선시키기'를 원했다 : 무엇보다도 이것이 바로 도덕이 의미하는 바다. 그런데 같은 단어 밑에 더없이 서로 다른 경향들이 숨어있다. 짐승 같은 인간을 길들이는 것 뿐 아니라, 특정한 인간 종류의 사육도 개선이라고 불려왔다.

① (야수 길들이기_길들임의 도덕) #2. 성직자가 '개선시켜' 길들여진 인간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실제로 교회가 동물원이었던 중세 초기에 사람들은 어디서나 '금발의 야수'의 가장 그럴듯한 표본을 찾아 사냥을 했으며 ― 예를 들어 고귀한 게르만인을 '개선시켰다.' [⋯]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 야수와 싸울 때 야수를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은 야수를 병들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을 망쳐버렸고 약화시켰다. ― 하지만 교회는 인간을 '개선'시켰다고 주장했다. 

② (특정인간의 사육_사육의 도덕) #3. 특정한 계급과 종을 사육하는 면을 보자. 마누법전에 나오는 인도 도덕. 여기서 설정된 과제는 성직자 계급, 전사 계급, 상인 및 농민 계급, 결국 노예 계급인 수드라까지의 네 계급을 동시에 훈육[사육]하는 것이다. 여기서 명백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은 조련사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마누의 체제 역시 두려운 것이 될 필요가 있었다. ― 그런데 이 경우에는 야수와의 싸움이 아니라, 부드럽고 이성적인 인간의 반대개념인 사육되지 않은 인간, 잡탕인간, 찬달라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체제 역시 찬달라를 병들게 만드는 것을, 그들을 위험하지 않게,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 그것은 대다수와의 싸움이었다.

③ (인류 개선의 심리학) 사육의 도덕길들임의 도덕은 그것들이 자신들을(*도덕) 관철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서로 완벽하게 어울린다 :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것(*반도덕적)으로 무조건 향하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이것이 인류를 '개선시키는 자'의 심리학이다. [⋯] 지금까지 인류를 도덕적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수단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도덕적이지 않았다. 

 

3.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니체는 독일인에게 어떤 것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나?

 

[참고] 니체의 독일 현대사회의 비판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은 니체의 독일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의 일부분이다. 니체의 독일사회에 대한 비판은, 초기 1873년 [반시대적 고찰]에서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1888년 [우상의 황혼]을 비롯한 6개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진행된다.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비스마르크의 군국주의에 의해 통일제국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독일의 민족국가 형성은 1862년 비스마르크의 군국주의 정책에 의해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그리고 독일의 공업화와 산업화로 인한 소시민계급에 의해 촉진되고 있었다.

니체는 당시 독일의 역사적 상황을 니힐리즘으로 진단한다. 민족주의와 화폐귀족주의의 등장은 정치적 현실을 전쟁의 위기로 몰고 갔고, 그 위기감과 불안 속에서 '대중'의 이기주의는 점차 가치의 상실과 문화의 퇴락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에 대한 우상숭배에 대해 니체는 특별히 위험한 경향으로 경고하고 있다. 독일 통일국가라는 정치적 목적은, 대중으로 전락한 독일인에게 민족적이고도 애국적인 성향을 강요했다. 독일의 모든 제도들, 교육이나 학문 그리고 철학은 모두 이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문화 전반이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가운데서도 니체는 긍정적 가능성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독일문화의 새로운 지향, 즉 인간의 성숙한 삶을 실천적으로 형성해주는 교양의 회복이다.

 

(1) 독일정신에 대한 비판

#1. (정치가 정신을 집어삼켰다) 오늘날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정신을 취해야만 하고, 자신으로부터 정신을 꺼내야만 한다. [⋯] 권력을 향해 간다는 것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권력은 우매하게 만든다…… 독일인들은 한때 사색가 민족으로 불리었다 : 오늘날에도 그들은 사색하고 있는가? ― 독일인은 이제 정신에 염증을 느끼고, 정신을 불신한다. 정치가 진정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진지함 일체를 집어삼켜버렸다. ― '독일, 천하의 독일', 이것이 독일 철학의 종말이 아니었던가 하는 우려가 된다. 

#2. (독일정신의 3가지 마약: 독일맥주, 그리스도교, 독일음악) 독일 정신이 무엇일 수 있는지, 우울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 민족은 거의 천년전부터 자의적으로 스스로를 우매하게 만들어왔다. 알코올그리스도교라는 유럽의 2가지 마약이 이렇게 까지 부도덕하게 오용된 곳은 없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세번째 마약이 첨가 되었는데, 정신의 섬세하고 대담한 모든 움직임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살해해비릴 수 있는 우리의 독일음악이다. 

#3. (독일대학의 탈정신화, 본능위축방식) 독일정신이 점점 조잡해지고 천박해진다. [⋯] 나를 근본적으로 놀라게 한 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 즉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 독일적 진지함, 독일적 깊이, 독일적 열정이 어찌해서 점점 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지,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한갓 지성뿐 아니라, 파토스가 변해 버리다니.  [⋯] 나는 여기저기에서 독일대학들과 접촉한다. [⋯] 17는 동안 나는 지치지 않고 우리 학문탐구의 탈정신적인 영향을 밝혀내고 있다. 학문의 엄청난 범위는 개개인을 혹독한 예속상태에 있게 했고, 이것은 좀더 완전하게-좀더 풍부하게-좀더 깊이있게 의도하는 본성의 소유자에게 적합한 교육과 교육자를 더이상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문화는 과다한 오만불손한 게으름뱅이와 휴머니티의 파편때문에 고통받는다. 우리의 대학들은 정신의 본능위축방식을 위한 온실이 되어 있다. 

 

(2) 독일정치에 대한 비판

#4. (문화와 국가는 대척자다) 독일문화가 하강하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누구든 자신이 갖고 잇는 것보다 더 많이 소모할 수는 없다. 권력이나 큰 정치나 세계 무역, 의회제, 군사적 관심에 힘을 다 써버리면 ―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오성, 진지함, 의지, 자기극복의 힘을 이런 방면에 다 주어버린다면, 다른 방면에서 그 힘은 결여되기 마련이다. 문화와 국가는 대척자다. '문화-국가'란 단지 근대적 이념일 뿐이다. 이 중 하나는 다른 것에 의존해 살아간다. 다른 것의 희생에 의거해 번성한다. 문화가 융성했던 시대는 전부 정치적으로는 하강기였다 : 문화적인 의미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정치적이었고, 심지어는 반정치적이기도 하다. ― 괴테의 마음은 나폴레옹이라는 현상에 대해 열렸다가 ― '해방-전쟁'에 이르러 닫혀버렸다. [⋯] 유럽 문화사에서 '독일제국'의 등장이 특히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 : 무게중심의 이동이다. (*문화에서 정치로 독일의 중심이동!)

 

(3) 독일교육에 대한 비판: 니체의 교육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평균적 교육 VS 소수적 교육)

#5. (독일 고등교육의 목적과 수단의 망각) 독일의 고등교육 제도 전체에는 핵심요소가 빠져버렸다. 목적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말이다. ① (교육목적의 망각) 교육과 교양 형성 자체가 목적이지 ― '독일제국'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 (교육수단의 망각) 그 목적을 위해서 교육자가 필요하다는 것 ― 그리고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의 식자들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 이 점이 망각되어 버렸다…… 자신들도 교육을 받은 교육자들(언제나 자기 자신을 탁월하고 고귀한 정신으로 입증하며, 말과 침묵으로 입증하고, 성숙하고 감미로워진 문화인들)이 필요한 것이지, 고등학교나 대학교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고급보모'로서 제공한 배워먹은 무례한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5. (독일문화가 하강하는 이유: 교육자들의 결여, 고등교육의 평균성 ) ① (교육자의 결여) 교육의 첫 번째 선결조건인 교육자들이 결여되어 있다 : 그래서 독일문화가 하강하는 것이다. [⋯] 독일의 '상급학교'들이 사실상 달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잔인한 조련으로서, 이것은 시간의 손실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면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국가의 봉사에 이용할 수 있도록,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평균성) '고등교육'과 다수의 사람 ― 이것은 처음부터 모순된 것이다. 모든 고급교육은 예외자들에게만 해당된다 : 그런 높은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특권자여야만 한다. 위대한 것, 아름ㄴ다운 것은 모두 결코 공유 재산이 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아주 소수의 것이다. (*[힘에의 의지 #783] Pulchrum est paucorum hominum. 라틴어. 로마시인 Horace의 명언) 독일문화의 하강은 무엇 때문인가? '고등교육'이 더 이상 특전이 아니고 ― '일반적'이고, 공통적으로 된 교양의 민주주의라는 점 때문이다. [⋯] 현재 독일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게 자신의 아이들에게 고급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의 '상급'학교들은 모두 교사나 교과과정이나 교과목표가 가장 애매한 평균성을 지향한다.

 

(4) 새로운 교육(새로운 인간의 육성)을 위한 니체의 제안: 니체가 제안하는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은 어떤 것인가?

#6. [새로운 인간육성을 위한 교육의 3가지 과제] 긍정하고, 부득이할 경우에만 간접적으로 반박하고 비판하는 내 방식으로 3가지 과제를 설정한다. 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 3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문화다.

#6.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 보는 것에 대한 2가지 유형] ① (강한 유형: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결정을 유예시키는 능력)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게 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번째 준비교육이다 :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비철학적 용어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약한 유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비철학적 조잡함'악덕'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부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일 뿐이다. 보는 법을 배웠다가 응용되는 경우 : 배우는 자로서 사람들은 대체로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어린 평정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는 것, 요약하자면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7.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작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 생각하는 데에는 기술과 교과계획과 뛰어나련느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 생각이 춤의 일종이다. ……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 이것이 독일적이다. 독일인들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 춤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

#7. [글쓰는 법을 배운다는 것] 춤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 사람들이 이런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독일 독자들에게 완전히 수수께끼가 되어버리리라......

 

4. 내가 옛 사람들의 덕을 보고 있는 것.

 

[참고] 니체는 [내가 옛 사람들의 덕을 보고 있는 것]에서 로마적인 문체, 투키디데스, 호메로스 이전의 옛 그리스비극과 그리스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내용들을 자신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소개한다. 특히 그리스문화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역할,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비극성과 동의어일 수 있는지를 밝힌다. 반면 소크라테스 이후의 그리스 철학은 다시 한번 데카당스 철학으로 선고되며, 플라톤 역시 데카당스 철학자로 구체화된다.

 

(1) 플라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어떤 것인가?

① [이성중심주의 철학] #2. 결국 플라톤에 대한 나의 불신은 심층적인 부분에까지 이르고 있다 : 그는 헬레네인의 모든 근본 본능들에서 너무 벗어나 있고, 너무 도덕화되어 있으며, 너무 그리스도교의 조상격이어서 ― 그가 이미 '선' 개념을 최상의 개념으로 갖고 있기에 ― 플라톤이라는 현상 전체에 대해 나는 차라리 '고등사기'라는 심한 말을, 또는 사람들이 더 듣기 좋아하는 '이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을 정도다. 

 [그리스적 본능의 부정] #2. 그리스인들에 이상(*Idea)이라는 색채를 뒤집어씌운 저 통탄스러운 미화는 '고전적으로 도야된' 젊은이가 고등학교식 훈련을 받은 대가로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 그리스적 본능의 데카당스로서의 그리스 철학.

③ [문체-데카당] #2. 한번이라도 그리스인에게서 글쓰는 법을 배웠던 자가 있단 말인가! 글쓰는 법을 한 번만이라도 로마인 없이 배울 수 있었을 것인가!......  [⋯] 플라톤은 내가 보기에는 문체의 모든 형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문체-데카당인 것이다 : [⋯] 플라톤의 <대화>. 이 무섭도록 자족적이고 유치한 변증법이 사람들에게 자극제로서 작용할 수 있으려면, 훌륭한 프랑스인들의 글(퐁트넬의 글)이 결코 읽히지 않았어야 했다. 플라톤은 지루하다.

④ [그리스도교의 플라톤주의] #2. 그리스도교라는 큰 액운 안에서 플라톤은 '이상'이라고 불리던 애매하고도 매혹적인 존재였다. 고대의 더욱 고귀한 본성의 소유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오해하게 하고, '십자가'로 향하는 다리에 발을 들여놓게 했던 존재였다...... 그리고 '교회' 개념, 교회의 구조와 체계와 실천에 플라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⑤ [투키디데스, 플라톤의 대척자] #2 나의 휴식, 나의 선호, 플라톤주의로부터의 나의 치료가 되었던 것은 언제나 투키디데스였다. 아무것도 속이지 않으며 이성을 '현실성'에서 보려고 하는 무조건적인 의지에 의해서 투키디데스와 마키차벨리의 <군주론>는 나와 가장 유사할 것이다. 이들은 이성을 '이성' 안에서 보려하지 않으며, '도덕' 안에서는 더더욱 보려하지 않는다. [⋯] 그의 글을 한줄한줄 보면서, 그의 말처럼 그의 배후 생각도 분명하게 읽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투키디데스만큼 배후에 숨겨진 생각이 많은 사유가는 드물다. [⋯] 그에게서는 소피스트의 문화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실재론자들의 문화가 완성된 표현에 이르렀다. [⋯] 투키디데스는 위대한 합계이고, 그 옛날의 헬레네인들의 본능에 놓여있던 강력하고 엄격하면서도 냉혹했던 현실성의 마지막 구현이다. 결국 현실성 앞에서의 용기가 투키디데스와 플라톤 같은 본성의 소유자들을 구별 짓는다 : 플라톤은 현실 앞에서 비겁했고, 그래서 그는 이상으로 도망쳤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을 지배하고, 그래서 그는 사물에 대한 지배력도 유지하는 것이다.

 

(2) 새로운 철학,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디오니소스적이란 무엇인가? 디오니소스와 비극은 어떤 연관이 있나?

[참고]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 개념의 유래 :: 몰락과 고통에 대한 필연적 긍정

니체철학에서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개념은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의 운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어린 시절 티탄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하며, 아폴론에 의해 다시 부활한 신이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에게 죽음은 삶의 필연적 계기인데, 자신을 파괴하는 고통은 새로운 자신의 창조를 위한 필연적 계기다. 그래서 죽음과 파괴는 디오니소스에게 결코 부정의 대상일 수 없다. 디오니소스에게서 죽음과 파괴(몰락)는 부활(생성)을 위한 긍정의 의지이며, 디오니소스에게서 죽음과 몰락과정에서의 고통 역시 필연적 긍정의 대상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자신의 최고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곧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라는 니체의 생성에 대한 긍정철학의 수식어이자 설명이 된다.

① [그리스적 본능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 #4. 고대의 본능을, 아직도 풍부하고 넘쳐흐르기까지 하는 옛 헬레네적 본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의 그 놀라운 현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사람이 바로 나다 : 디오니소스적 현상은 오로지 힘의 과다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 디오니소스적 비의(*비밀스러운 의미)에서야, 디오니소스적 심리상태에서야 비로소 헬레네적 본능의 근본적 사실(삶에의 의지)이 표출되고 있다. 

[참고]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 vs 삶의 빈곤에서 고통받는 자 *_ [니체 대 바그너] '우리 대척자들'
"모든 예술, 모든 철학은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삶의 치유수단이나 보조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을 원한다.  
또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 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삶 자체에 대한 보복, 이것은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걸맞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 삶을 비방하며, 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② [삶의 의지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 #4. 헬레네인은 디오니소스적 비의에 의해 무엇을 보증하고 싶어 했던가? 영원한 삶, 삶의 영원회귀; 과거 안에서 약속되고 신성시된 미래; 죽음과 변화를 넘어서 있는 삶에 대한 개가를 부르는 긍정; 생식과 성적 신비를 통한 총체적 존속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보증하고 싶어 했다. […] 그 안에서 삶의 가장 깊은 본능인 미래를 향하는 본능, 삶의 영원을 향하는 본능이 종교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③ [성적 상징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 #4. 그리스인에게는 성적 상징은 신성한 상징 그 자체였고, 모든 고대적 경건성에 내재하고 있는 본래적인 심오함이었다. 생식과 수태와 출산시의 하나하나의 행위 모두가 최고의 감정과 그지없이 장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디오니소스적 비의는 고통을 신성하다고 가르친다; '산모의 통증'은 고통 일반을 신성하게 한다.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담보하는 것은 전부 고통을 전제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삶에의 의지가 영원히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 삶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즉 생식이 신성한 길로 체험된다....... 성을 처음 불결한 것으로 만든 것은 삶에 대한 원한을 토대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였다 : 그리스도교는 삶의 시작에, 삶의 전제조건에 오물을 들이부었던 것이다.

④ [비극적인 것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 #5. (디오니소스적 비극성) 그 안에서는 고통마저도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는 넘쳐흐르는 삶과 힘의 느낌으로서의 주신제의 심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특히 우리의 염세주의자들도 오해했던 비극적 감정이라는 개념을 이해 할 열쇠를 내게 주었다. [⋯] 자신의 최고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비극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파악했다. [⋯]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자체이기 위해서파괴에서 느끼는 기쁨도 역시 내포하고 있는 기쁨이기 위해서......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성)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를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 (쇼펜하우어의 비극성) 비극은 쇼펜하우어가 의미했던 헬레네인들의 염세주의를 입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비극은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와 반대절차로 간주되어야 한다.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 안에도 놓여있는 것이다.

[참고] [힘에의 의지] #85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은 삶에 위험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비극은 예술의 자기부정이 되는 한, 예술이 구상되는 셈이다. 그때 비극은 삶의 본능이 예술 자체의 본능 속에서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교, 니힐리즘, 비극적 예술은 생리학적 데카당스다. 서로 쇠퇴시키고 비극은 타락의 증후라는 셈이다. 이 점을 논박할 수 있는데, 역량계의 힘을 빌어, 비극적 정서가 야기하는 결과를 측정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알게 되는 것은 비극은 하나의 강장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일반적인 우울을 비극적 상태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편견 때문이고, 자기 철학 체계의 일관성(*염세주의 철학)을 지킬 필요성 때문이고, 체계주의자의 불성실 때문이다. 

[참고] 그리스 비극에 대한 퍼스펙티브 
아리스토텔레스_카타르시스
::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 윤리적 성격
쇼펜하우어_염세주의 :: 우울, 체념  / 행복, 희망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 쇠퇴의 징후
니체_에스터시 :: 도취, 관능, 잔혹 / 생성적, 긍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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