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p. 474> 저자들은 프로이트의 욕망-쾌락의 연결을 끊고, 욕망을 기쁨이라는 스피노자적 감응(affect)에 연결시킵니다. 즉, 욕망의 내재성은 긍정적 욕망의 지속과정이며, 내재적인 기쁨을 위해 어떤 활동이나 대상을 생산하는 무한한 생산의 과정입니다.
-> 욕망이 긍정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뜻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파괴와 죽음으로 이끄는 파시즘적 욕망의 흐름, 혹은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는 것 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질문2>
- 기관 없는 신체는 지층화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질료고, 모든 지층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탈지층화를 통해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 (446). 하나의 실체를 표현하는 상이한 속성들처럼, 속성을 달리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은 하나의 단일한 기관 없는 신체가 속성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속성을 달리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은 하나의 단일한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의 내재적 변환이 취하는 최대영역이고, 욕망의 내재적 극한이며, 욕망의 내재성의 장 전체이다 (468).
-> 기관 없는 신체가 강밀도가 제로인 극한적 상태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라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기관 없는 신체가 기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정시키는 유기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상대적 탈영토화 역시 지층에서의 탈주가 결국 다른 지층으로 재영토화되긴 하지만 하나의 지층, 기관에 고정시키지 않고 변이와 생성을 거듭한다는 관점에서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왜 (죽음의 선을 그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