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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0 수학의 모험 에세이

아침마루 2021.07.16 21:11 조회 수 : 71


이진경 선생님의 대중친화적 서술 방식에 관한 에세이
- <수학의 모험>을 중심으로

손효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사람이 진정한 무림고수다. 학자의 역할은 단순명료하다. 칸트를 10년 공부하고 칸트로 박사 학위까지 땄다면, 칸트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하여 먹기 좋게 내놓는 것이 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10년 공부한 칸트, 10분 만에 이해할 수 있게 내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변환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삭제/왜곡되는 맥락과 편의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경멸어린 시선을 나 역시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이런 작업은 오류를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독서는 창조적 오독이다. 내 어머니는 60대이신데, 그 어머니 세대에게 칸트의 원전을 읽고 이해하라는 건, 가혹하고 무례한 짓이다. 비록 수많은 단점과 곡해의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칸트 5분만에 알려드립니다, 같은 컨텐츠가 방편적으로 유익함을 나는 알고 있고 적극 지지한다. 학문적 소수자들 때문이다. 예수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이런 소외된 자들, 소수자들을 향했다. 예수는 예수의 역할이 있고, 제자들은 제자들의 역할이 있다. 스승의 말을 재해석하여 쉽게 풀어 세상에 내놓는 게 제자의 역할이다. 1%의 니체도 물론 존중하지만, 세상은 99%의 니체의 제자들이 만들어간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천재가 아닌 이상, 제자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누가 더 위대한가, 더 핵심적인가는 중요치 않다. 이미 공자와 제자, 소크라테스와 제자, 니체와 제자들은 유기체적 한몸이다. 사람들은 스승만 주목하는데, 이제 제자들을 주목할 때가 되었다. 사실상 제자들이 없었다면 스승도 존재 불가능했다. 제자된 자로써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렵다는 건 "싫다"는 감정과, 쉽다는 건 "좋다"는 감정과 연관된다. 쉬운 건 익숙한 것이며, 어려운 건 낯선 것이다. 따라서 어려운 것을 쉽게 변환한다는 의미는, 낯설어서 싫은 것을 익숙해서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쉬운 것들은 단지 우리가 자주 접해서 익숙해진 것들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의 투쟁은 이데올로기로 학습된 쉽고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낯설고 불편하고 두렵고 기이한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학습하고 변환하고 퍼뜨리는 과정이라 정리할 수 있다. "대중과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힐 것" 이것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마케팅의 주요 전략과도 일치하는 모든 낯선 것들의 사명이자 방향성이다. 코카콜라를 맛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게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코카콜라 광고를 수시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 모든 학문, 모든 학자들은 지금 대중과 최대한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틀즈가 위대한 게 아니라, 비틀즈를 많이 듣기 때문에 비틀즈가 위대해진 것 뿐이다. 비틀즈를 수 십 명만 알고 있었더라면, 결코 지금처럼 전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위대한 것들은 반드시 당대/후대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들뢰즈도, 니체도, 마찬가지다. 자, 이러한 인정투쟁의 전장에서 우리는 누구를, 어떤 것을, 널리 이롭게 퍼뜨릴 것인가?

수학은 어려운 게 아니다. 대한민국 공교육은 해당 학문이 싫어지게 만드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우린 분명 음악을 배웠는데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고, 국어를 배웠는데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영어를 배웠는데 영어로 대화하는 걸 두려워한다. 공교육도 해내지 못한 과제를 이진경 선생님은 <수학의 모험>에서 기어이 성공해내고야 말았다. (실상 이진경 선생님이 건드리고 있는 모든 분야들은 근대성의 초극에 목표가 있지만, 이는 해당 학문의 대중화, 즉 쉽고 재밌게, 와도 관계된다) "수학이 싫어서" - 국어가 좋았다기 보다는, 수학이 정말 싫다는 게 포인트다 - 문과로 전향한 나같은 사람도 수학을 좋아하게끔 만들었다. 어떻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진경 선생님께서 나라는 수포자(수학포기자)를 수학이 좋아지게끔 설득하는 그 전략적 글쓰기에 매료되었다. 그 디테일을 살펴보는 게 이번 에세이의 관건이라 하겠다. 10회에 달하는 수유너머 청인지 세미나에 참여하며 나는 1회부터 강한 의문이 들었다. 왜 내가 주목하는 이진경 선생님의 대중친화적 글쓰기 방법론은 아무도, 그 누구도,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가?

나는 이 정도 문제제기로 이 글을 닫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모든 글쓰기가 그렇겠지만, 여기서 내가 책의 1페이지부터 360쪽까지 일일이 주석을 달아가며 이진경 선생님의 글쓰기가 이 부분은 이래서 좋고, 저 부분은 저래서 좋다는 식으로 써봤자 지루하기만 하고 흥미도 반감되며 나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낭비될 게 빤하기에, 한가지 사례만 언급하고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내가 언급한 사례 이외의 이진경 선생님의 글쓰기 방법론이 궁금하시다면 다시 한번 이 책을 정독하시면서 직접 발견해내시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런 독서는 문학적 접근법에 가깝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만 이 책을 읽어온 것은 아닌지.) 2장을 펼쳐보자. 43쪽이다. "다음에서 과학적인 글은 어느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a, b, c, d의 각기 다른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능글맞게도 이진경 선생님은 "여러분은 c가 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시며, c는 "16세기 유럽의 가장 유명한 마술사(!) 파라켈수스가 쓴 글"이라고 말한다. 독자의 예상을 배반하는 것이다. 즉, 이진경 선생님은 독자의 반응을 부처님 손바닥처럼 훤히 내다보며 독자를 골리기도 했다가, 놀리기도 했다가, 당혹스럽게도 만드는 것이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 같은 서술방식이다. 이런 반전 영화들은 관객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한다. 요즘 관객들은 갈수록 영악해지고 머리가 비상해져서 왠만한 반전엔 놀라지도 않는다. 반전이 예상가능하면 오히려 감독을 비웃고 조롱한다. 어설프면 망한다. 트릭도 제대로 써야 성공한다. 이런 모진 세상에서 철학서를 저술하는 철학자는 기가막힌 반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책에는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글쓰기 전략이 꽤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흥미롭다. 실상 저자와 독자는 끊임없는 두뇌싸움을 매문장과 매단락마다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진경 선생님과 탁구치듯이 논리 대결을 주고받으며 이 책을 읽어서 더없이 유쾌하고 즐거웠다. (이러한 문장과 문장의 논리적 호응이야말로 수학적 서술 방식 아닌가) 그래서 수학이 즐거워졌고, 친근해졌고, 쉬워졌다. 그렇게 수포자는 수사자(수학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수학(에 관한) 책을 썼는데 수학이 좋아지게 만드는 것만큼 탁월한 성과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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