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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바그너의 경우] 추신, 두번째 추신, 후기 p54~70 / [니체 대 바그너]

 

0. 니체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 '비극' 혹은 '비극적'이란 어떤 의미일까?

- '소수' 혹은 '소수적' 그리고 이와 반대의미인 '무리' 혹은 '무리적'이란 어떤 의미일까?

- '디오니소스'란 어떤 존재이며, '디오니소스적'이란 어떤 의미일까?

- 신체적 생리(힘의 상승, 힘의 퇴화)와 철학적 가치(강자의 가치, 약자의 가치)는 어떤 연관이 있나?

 

1. [바그너의 경우] 추신 :: 바그너는 우리(*독일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가? 

*주제 : 바그너가 우리 독일인에게 끼친 영향

*의미 : 바그너 추종자가 된 독일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바그너 추종자가 된 독일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1)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바그너라는 질병 때문에, 독일인은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문화민족이 되었다!?

유럽이 전체적으로 데카당스 성격을 띰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람들 안에 일정한 건강이(유해한 것과 위험한 것을 알아내는 본능적 후각이) 있다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그너에 대한 무딘 저항이다.(*독일인들은 바그너에 대해 무딘 저항을 했어야 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런 건강함을(유해한 것과 위험한 것을 알아내는 본능을) 그렇게 많이 소모하지 않아야 했다. 역사상 지체된 자의 대표격인 독일인은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문화민족이다. (*독일인은 유해하고 위험한 것을 알아내는 건강이 있어서 바그너라는 질병에 저항했고,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문화민족이 되었다!?) 이는 나름의 장점으로, 바로 그 때문에 독일인은 가장 젊은 민족이다.

(2)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독일인에게 바그너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독일인은 바그너에 대한 두려움을 얼마 전에야 비로소 잊었는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이 기회만 있으면 찾아왔다. 그런데 옛 감정(*바그너에 대한 두려움)이 바그너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다. 구원자에게 구원을!”이라는 바그너의 비문은 유명해졌고, 모두 바그너 추종자들의 취향에 탄복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비문을 구원자에 의한 구원을!”이라고 고쳤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그너가 구원자임을 부정하는 독일인들!?)

(3)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문화에 끼친 바그너 추종자들의 영향에 의해, 예술 백치인들의 오만불손, 예술을 취미로 하는 태도, 극장주의를 키워냈다.

문화에 끼친 바그너 추종자들의 영향에 의거하여 그들을 평가해보자! 그들의 운동은 누구를 전면에 내세웠는가, 어떤 것을 점점 거대하게 키워냈는가? ① 먼저, 문외한의 오만불손(예술에 백치들의 오만불손)을 키워냈다. 이것이 협회(*바그너협회)를 조직하고 자기네 ‘취향’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음악과 음악가의 일을 심판하는 판관이 되고 싶어한다. ② 그들의 운동이 키워낸 두번째 것은 예술에 봉사하는 엄격하고 양심적인 교육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도록 했던 것이다. 뻔뻔스러운 딜레탕티슴(*예술을 취미삼아 하는 태도)인데, 이에 대한 공식이 <마이스터징어>에 나와있다. ③ 그들의 운동이 키웠던 가장 나쁜 것은 극장주의이다. 즉 연극이 우위를 점한다고 믿는, 연극이 제반 예술을 지배하고 예술을 지배한다고 믿는 난센스를 키웠다. 연극은 언제나 예술의 하부에 있을 뿐이고 언제나 두번째 것이며, 대중을 위해 잘 처리되고 잘 위장된 것이다. 바이로이트는 거대한 오페라이지만, 좋은 오페라는 되지 못한다. 연극은 취향문제에 있어서 대중숭배의 형식이고 일종의 대중봉기이며, 좋은 취향에 대적하는 국민투표이다. 이 점을 바로 바그너의 경우가 입증하고 있다. 그는 다수를 얻었지만 그는 취향을 망쳐놓았고, 오페라를 위해 우리의 취향 자체를 망쳐놓았다.

(4)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바그너(데카당스적 감성)에게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서 냉소자가 되어야 하고, 숭배하지 않기 위해 물어뜯을 수 있어야 한다.

바그너는 대단한 기술을 갖춘 유혹자이다. 바그너예술은 지쳐있는 것, 죽어버린 것, 삶에 위협적인 것, 세계비방적인 것 모두를 보호하고 있다. ...... 그는 허무적인 본능에 아첨하며 허무적인 본능을 음악으로 꾸며내며, 그리스도교 정신과 데카당스의 종교적 형식에 아첨한다. 황폐해진 삶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모든 것, 초월과 피안이라는 날조된 모든 것은 바그너예술에게 가장 고상한 후원을 받는다. 바그너예술의 후원은 정신을 다시 허약하게 하고 지치게 만들어버리는 감성을 설득한다. 키르케(*그리스신화의 마녀. 마법, 유혹을 상징)로서의 음악! 이런 면에서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은 유혹하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최고걸작이다. 바그너의 영감은 말년에 가장 풍부했는데, 아름다움과 병을 연합시키는 세련됨은 가장 탁월하다. 그 작품들(*바그너의 마지막 작품들)은 너무나 밝고 너무나 건강한데, 건강과 밝음이 그늘로 작용하고 이의제기로 작용한다! 숨을 막을 듯한 성직자적 향기를 사용하는데 그보다 뛰어난 대가는 없다. ...... 늙은 마술사, 클링조르(*파르지팔의 마법사)! 어떻게 그가 현대영혼의 비겁에 마술소녀의 목소리로 자신의 뜻에 따르라고 말하는지! 여기서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냉소자가 되어야 하고, 여기서 숭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물어뜯을 수 있어야 한다. 자! 늙은 유혹자여! 냉소자가 네게 경고한다. 개를 조심하라 Cave canem. 

(5)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바그너라는 전염균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취향의 부패, 리듬감각의 퇴화, 개념의 타락, 신경의 타락이 일어난다.

나는 오랫동안 바그너라는 전염균에 방치되어 있던 젊은이들을 관찰했다. ① 첫 번째의 비교적 악의없는 효과는 취향의 ‘부패’이다. 바그너는 알코올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무감각하게 만들고, 위에는 점액이 차게 한다. ② 특별한 효과는 리듬감각의 퇴화이다. 내가 그리스식 상투어로 “늪을 움직인다”고 불렀던 것을, 바그너주의자는 ‘리드미컬하다’고 일컫는다. ③ 정말 위험한 것은 개념의 타락이다. 젊은이는 천치가 되어버리고,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그(*바그너)는 학문을 넘어가버리는데, 이점에서 그는 거장의 높이에 있다. 그런데 그가 철학자 흉내를 내는데, <바이로이터 블래터>를 펴낸다. 그는 모든 문제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거장의 이름으로 해결해버린다. (*<바이로이터 블래터> 바그너의 잡지.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위한 선동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바이로이트에서 일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바그너의 경멸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④ 가장 섬뜩한 것은 물론 신경의 타락이다. 밤에 대도시를 거닐어보면, 어디서나 장엄한 분노에 거친 고함소리가 사이사이에 섞여서 악기들이 폭행당하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이들이 바그너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바그너음악을 연주하는 풍경을 묘사한 것)

 

2. [바그너의 경우] 두번째 추신 :: 니체는 바그너 외의 다른 음악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 편지 [바그너의 경우]가 오해받고 있다! ······> 내가 바그너를 비판하는 것이, 다른 음악가들을 칭찬하는 것으로 오해받고 있다!

*바그너 외의 다른 음악가에 대한 평가 ······> 다른 음악가도 전체적으로 데카당스적이다. 전반적으로 열악하고 퇴락이 일반적이며 병이 깊어있다!

 

두번째 추신을 쓰게된 이유 > 내 편지 [바그너의 경우]가 오해받을 처지에 놓여있다. 다른 점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에서도 나는 이해받고 싶다. 

바그너와 다른 음악가들 > ① (전반적 퇴락, 전반적 데카당) 내가 이 글에서 바그너에게 싸움을 걸면서, (덧붙여 독일넉 ‘취향’에 싸움을 걸면서, 바이로이트의 백치병에 대해 신랄한 말들을 하면서,) 원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음악가들에게 축제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바그너를 비판하는 것이 다른 음악가들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바그너에 대적하는 다른 음악가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서문 “나는 바그너를 증오하지만, 여타의 음악은 더이상 참아낼 수 없다”) 전체적 상황은 전반적으로 열악하고 퇴락이 일반적이며, 병이 깊어있다. 베르니니가 조각술 붕괴의 범인이듯 바그너가 음악을 붕괴시켰다 하더라도, 그는 음악붕괴의 원인제공자가 아니라 단지 속도를 가속시켰을 뿐이다. ② (차이점: 데카당스에 대한 태도) 바그너는 데카당스의 단순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의 그의 탁월한 점이다. (*왜냐하면, 바그너는 현대성=데카당스를 요약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우물쭈물했었는데, 그는 데카당스를 믿었고 데카당스의 어떤 논리 앞에서도 머무르지 않았다. 바그너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이것뿐 다른 것은 없다. ③ (공통점: 데카당스적인 것) 바그너와 다른 음악가들의 공통점은, 조직력의 쇠퇴, 전승된 수단을 목적을 위해 정당화하는 능력은 없으면서도 오용하는 것, 위대한 형식을 화폐위조하듯 모방하는 것, 하찮은 것들에서 과도한 활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격정, 황폐해진 삶의 표현으로서 세련됨, 신경이 점점 살을 대신하는 것 등이다.

브람스: 동경하는 자, 불만족한 자, 비개성적인 자, 주변적인 자들의 음악가 > ① (브람스: 바그너의 대척자?) 바그너는 전체적으로 타락했었지만, 타락 안에 용기와 의지와 확신이 있었다. (*바그너의 탁월한 점) 사람들은 바그너의 대척자가 필요했고, 브람스를 바그너의 대척자로 간주했다. ...... ② (브람스: 동경하는 자, 불만족하는 자, 비개성적인 자, 주변적인 자들의 음악가) 이런 당파적 관심과 오해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 브람스가 도처에서 받은 공감은 내게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브람스는 특정 인간유형에 영향을 끼친다. 그는 우수를 지니고 있었는데, 충만해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을 목말라한다. 그는 모사의 천재인데, 그가 모방한 것을 (위대한 옛것이나 이국적이고 현대적인 양식의 형식들에게서 빌려온 것을) 제거해버리면, 그에게는 동경만 남게 된다. 온갖 동경하는 자, 불만족한 자는 이점을 알아차린다. 브람스는 너무 개성이 없고, 너무 중심이 없다. 이 점을 비개성적인 자, 주변적인 자들은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브람스를 사랑한다. ③ (브람스에서 오십보쯤 나아가면 바그너가!) 특별히 그는 불만족스러워하는 여인들의 음악가이고, 이들에게서 오십보쯤 더 나아가면 좀더 명백하고 좀더 흥미로우며 좀더 기품있는 여성 바그너주의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브람스를 지나 오십보쯤 더 나아가면 바그너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과 똑같다. 

다른 사람에게 속거나(바그너적) vs. 자신을 속이거나(브람스적) > 오늘날 음악에서 ‘위대한 양식’을 요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속이거나(*바그너적), 자신을 속이거나(*브람스적) 한다. 이 2가지는 가치에 대한 결의법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속인다’(*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 대다수 사람들의 본능은 이에 저항하는데, 그들은 속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이 유형(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을 다른 유형(‘자신을 속이는 것’)보다 선호한다. 이것이 내 취향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바그너적)’에 저항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브람스적)’에 저항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마태복음 5장 3절)를 위해 좀더 평이하게 표현하면, 브람스(*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면 바그너(*다른 사람에게 속거나)가 된다.

브람스, 배우가 아닌 음악가들 > 브람스는 배우가 아니며, 배우가 아닌 다른 음악가들 중 많은 수가 브람스라는 개념 아래 묶을 수 있다. ① (골트마르크) 바그너의 영리한 원숭이, 골트마르크(*헝가리의 바이올린 연주가ㆍ작곡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그의 오페라 <시바의 여왕>에 의해, 사람들은 동물원의 일부가 되며 자신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② (헨델과 로시니) 헨델 같은 강건한 종족이든, 로시니 같은 야수성이 넘치는 종족이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일 만한 전제조건을 더 이상 갖추고 있지 않다. 어떤 선생이라도 가질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헨델과 로시니를 선생으로 가질 권리가 없다) ③ (강건한 종족, 반시대적 인간: 음악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을 기대) 아직도 좀더 강건한 종족, 반시대적인 인간의 잔여가 유럽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서 음악에 대한 아름다움과 완전성을 기대해도 좋을지 모른다. 

 

3. [바그너의 경우] 후기 ::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는 니체철학의 핵심개념 중의 하나이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나 사회의 영역 뿐아니라, 세계의 원리와 사물의 존재원리이다. 

   즉 인간의 의지(개인의 의지, 삶의 원리) 뿐 아니라, 동물의 충동, 유기체의 기능, 사물의 운동, 자연의 법칙....의 근본원리이다. 

- 자연ㆍ생명 차원_힘에의 의지 ::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 2장 빛의 외투를 걸친 은둔자 > 04. 힘에의 의지

- 사회ㆍ인간 차원_힘에의 의지 ::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 > 3부 차라투스트라의 구성과 스타일 > 권력의지를 말하다 p364~369

▶힘에의 의지는 힘의 유형학에 따라 2가지 차원으로 설명된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힘-역량의 측면), 의지는 원하는 것(*의지-방향의 측면)이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먼저 힘은 능력ㆍ역량, 에너지, 잠재성을 의미하고, 의지는 충동ㆍ욕망, 방향, 현행성을 의미한다.

▶힘에는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이 있고, 의지에는 긍정의 의지와 부정의 의지가 존재한다.

  강자와 약자(주인과 노예)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인격화한 것이다.

  강자(주인)은 능동적 힘과 긍정의 의지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이고, 약자(노예)는 반동적 힘과 부정의 의지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이다.

▶데카당스는 힘에의 의지의 퇴화현상이다. 

  니체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감퇴시키는(반동적 힘, 부정의 의지) 모든 태도에 대해 데카당스로 비판했다.

  니체적 의미에서 데카당스는 '19세기말의 세기말적인 퇴폐주의나 예술사조'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의 퇴화현상'으로 일반화된다. 

 

3-1. 니체는 시대의 유형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시대유형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

*니체는 시대를 구분하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힘에의 의지'를 기준으로 상승하는 시대/하강하는 시대를 가장 근본적인 시대유형으로 보았다.

시대의 유형에 대하여: 상승하는 시대 vs 하강하는 시대 > ① (시대유형: 상승하는 시대 vs 하강하는 시대) 모든 시대는 자신이 갖고 있는 힘에 의거해, 그 시대에 허용할 수 있는 덕금지해야 하는 덕을 결정한다. 한 시대는 상승하는 삶의 덕들을 갖거나 하강하는 삶의 덕들에 저항한다. 아니면 그 시대 자체가 하강하는 삶인데, 그 시대는 하강하는 덕들을 필요로 하고 충만한 힘과 넘침으로부터 정당화되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② (미학유형: 데카당스 미학, 고전적 미학) 미학은 이러한 생물학적 전제들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데카당스 미학이 있고 고전적 미학이 있으며, ‘미 그 자체’라는 것은 관념론이 그렇듯이 하나의 망상이다.

 

3-2. 니체는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가치유형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

*니체는 도덕적 가치를 구분하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힘에의 의지'를 기준으로 강자의 도덕/약자의 도덕을 가장 근본적인 가치유형으로 보았다.

 흔히 강자의 도덕을 주인도덕('주인'은 힘에의 의지의 주인), 약자의 도덕을 노예도덕('노예'는 힘에의 의지의 노예)이라고 하는데,

 이때 강자(주인)은, 약자(노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대한 강자(주인)이라는 의미로, 힘에의 의지를 주도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한 약자(노예)는. 강자(주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대한 약자(노예)라는 의미이로, 힘에의 의지에 끌려가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① (가장 큰 대립: 그리스도교도덕 vs 주인도덕) 도덕적 가치라는 좀더 작은 영역에서는 주인도덕과 그리스도교도덕과의 대립보다 더큰 대립은 찾아낼 수 없다.

② (도덕의 토양: 병든 토양 vs 건강한 토양) 그리스도교도덕은 병든 토양에서 자라는데, 복음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생리적 유형들과 똑같은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반대로 주인도덕은 로마적 이교적 고전적 르네상스적이고, 제대로 잘되어 있다는 것의 표현, 상승하는 삶에 대한 표현, 삶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③ (의지의 방향: 부정 vs 긍정) 그리스도교도덕이 본능적으로 부정하듯이(‘신’_인간에 대한 부정, ‘피안’_이 세상에 대한 부정, ‘탈아’_자신에 대한 부정), 주인도덕은 본능적으로 긍정한다. (*약자의 도덕은 타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지만, 강자의 도덕은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다)

④ (힘의 에너지: 능동 vs 반동) 주인도덕은 자기의 충만함을 사물들에 나누어주는데, 그것이 세상을 신성화하고 아름답게 만들며 합리적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도덕은 사물의 가치를 빈곤하게 하고 창백하고 만들고 추하게 만들어버리며 세상을 부정한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욕지거리인 것이다.

*Einselbstung :: 탈아(나로부터 이탈됨. (바그너 경우>후기 p67) == Selbstlosigkeit :: 몰아(나를 잃어버림) (이 사람>바그너 경우 p447 / 니체 대 바그너>우리 대척자들p531)

 

3-3. 니체는 주인도덕/노예도덕이라는 두가지 유형의 도덕을, 참/거짓의 문제가 아닌 광학의 대립이라고 보았다!? 

 ① (광학의 대립, 참/거짓의 문제가 아닌) 이 2형식은 가치라는 광학(*관점)에서는 대립하지만, 둘 다 필요하다! 근거나 반박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유형들이 있다. (*이 2가지 유형이 그렇다!) 사람들은 눈병을 반박하지 않듯이, 그리스도교를 반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생리적으로 병든 생태를 표현하므로!) 철학에 맞서 싸우듯이, 염세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학자적 바보행위이다. (*염세주의에 논리적로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다) ‘참’과 ‘참이 아님’이라는 개념들은 그런 광학(*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② (대립으로 보지 않는 오류: 바그너, 그리스도교 바그너주의자) 그런 대립을 대립으로 보려하지 않는 오류, 본능적인 표리부동이야말로 사람들이 저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바그너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데 대가다움을 보였다. 그는 아이슬랜드의 전설이라는 주인도덕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비천한 자의 복음이나 구원의 필요성이라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입에 올린다. 바이로이트로 향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바그너의 입에서 나오는 특정한 말들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ex. 일베, 태극기부대에 대하여 > 이들은 근거나 반박으로 이길 수 없다! 그것은 눈병처럼 생리적 병든 생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논리적으로 맞서는 것은 바보행위다.

 

3-4.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욕구'와 주인도덕의 '자신의 긍정'은 어떻게 다른가?

①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욕구’)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인이었다면, 리스트는 교부(*성직자)였을 것이다! 구원의 욕구라는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욕구에 대한 총괄개념은 그들 어릿광대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구원의 욕구) 데카당스에 대한 가장 솔직한 표현형식이고, 데카당스에 대한 섬세한 상징들과 실행방법에 의해 보여진, 데카당스에 대한 가장 설득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긍정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자아는 항상 가증스러운 것이니(*파스칼 <팡세>), 자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탈아_나로부터 이탈됨)

② (주인도덕의 ‘자신에 대한 긍정’) 반대로 주인도덕의 뿌리는 자기자신에 대한 승리의 함성을 올리는 긍정이며, 그것은 삶의 자기긍정이고 삶의 자기찬미이며, 숭고한 상징과 실행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기 마음이 너무도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아름다운 예술은 모두, 위대한 예술은 모두 이런 것이다. 이 둘의(아름다운 예술, 위대한 예술) 본질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런 예술은 데카당스에 대적하는 본능적인 적의, 데카당스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조소와 혐오이다. 데카당스에 대한 이런 태도가 아름다운 예술ㆍ위대한 예술을 입증해준다. 고귀한 로마인은 그리스도교를 혐오스러운 미신으로 여겼다. 최후의 독일인이 고귀한 취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괴테가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생각난다.

 

[니체 대 바그너] :: [니체 대 바그너]에서 다루는 핵심주제는 바그너와 니체의 대립적 관계이다. “데카당스와 디오니소스적 본성과의 대립은, 우리에게 명백하다.” 이 단편은 이전의 니체작품 [즐거운 학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디오니소스 송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바그너에 대한 것들을 그대로 수록하거나 약간의 변경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4. [니체 대 바그너] 내가 경탄하는 곳 :: 니체가 바그너에게 경탄하는 곳은 어디인가?

*출처 : [즐거운 학문] #87. 예술가의 허영심

예술가들은 종종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기에는(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그들의 허영심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감각은, 저 자그마한 식물들(새롭고 진기하고도 아름다우며 완전하게 자기의 땅위에서 자라날 줄 아는)보다는 더 자랑할 만한 것으로 향한다. ...... 그들은 자신의 정원과 포도원에서 요즘 수확하는 좋은 것을 폄하해버리며, 그들의 사랑과 통찰은 서로 같은 수준이 아니다. (*그들이 잘하는 것(통찰)과 하고자 하는 것(사랑)은 서로 다르다) 고통받고 억압받으며 탄압받는 영혼들의 영역에서 음조를 발견하고, 말 없는 불행에 언어를 부여하는데 대가인 음악가(*바그너)가 있다. ...... 온갖 은밀한 고통을 지닌 오르페우스인 그는 누구보다 위대하며, 이제껏 표현될 수 없었거나 예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왔던 많은 것을 예술로 편입했다. ...... 이래서 그는 진정 작은 것의 대가이지만, 그는 이런 존재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성격은 큰 벽들과 대담한 벽화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이 정반대의시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거기 숨어서 자신으로부터도 숨은 채, 그는 자기 고유의 걸작을 그려낸다. 오로지 이때에만 그는 아주 선하고 위대하며 완전해진다. 바그너는 깊이 고통받는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바그너가 음악 속에서 자기를 집어넣은 모든 곳에서 나는 바그너에게 감탄한다.

······> 바그너가 음악 속에서 자기를 집어넣은 곳에서 나는 바그너에게 감탄한다. 바그너는 작은 것의 대가이지만, 그의 허영심 때문에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대한 것들을 더 사랑한다.

 

5. [니체 대 바그너] 내가 반박하는 곳 ::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반박은 생리적 반박이다!? (니체철학의 관계: 신체적 생리 vs 철학적 가치)

*출처 : [즐거운 학문] #368. 냉소주의자가 말한다

바그너음악에 대한 내 반박은 생리적 반박이다. 왜 이런 생리적 반박이 먼저 미적 형식으로 위장하는가? 미학이란 것은 응용생리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자그마한 진실’은 ‘그런 음악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나는 더 이상 편하게 숨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발이 곧장 그것에 분개하며 반항한다. 내 발은 박자와 춤과 행진을 필요로 하는데, 바그너의 황제행진곡은 독일의 젊은 황제(*바그너의 후원자, 루트비히2세. 바그너에게 바이로이트 출제와 바그너극장을 후원)라도 행진할 수 없다. 내 발은 음악에 훌륭한 걸음이나 발걸음이나 춤에서 느껴지는 황홀감을 요구한다. / 그런데 내 위도, 내 심장도, 내 혈액순환도 항의하고 있으며, 내 내장은 탄식하고 있고, 내 목소리도 돌연 쉬어버린다! 바그너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나는 안정제가 필요하다. / 도대체 진정 영혼이 아니라, 내 몸은 음악에 무엇을 원하는가? 영혼은 없는 것이니. 내 몸은 음악에 의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 내 우울은 완전성에 몸을 숨기고 완전성의 심연에서 편히 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는 음악이 필요하다. 하지만 바그너는 병들게 한다.

 

6. [니체 대 바그너] 내가 반박하는 곳 :: 니체는 바그너의 극장주의를 왜 비판하는가? (*소수적 예술 vs 다수적 예술)

*출처 : [즐거운 학문] #368. 냉소주의자가 말한다

니체의 취향(반극장적) vs 바그너의 취향(극장주의) > ① (나의 취향_반극장적) 극장이, 대중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만족해하는 바그너의 ‘도덕적’ 엑스터시(*바그너: 교훈적 엑스터시 vs 니체: 비극적 엑스터시)라는 경련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나는 천성적으로 반극장적 유형이다. 나는 극장을, 이 대중예술 중의 대중예술을 싫어한다. 무대 위의 성공: 이로써 그 예술은 나의 경의를 잃어버리고 나는 그것을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무대 위의 실패: 내 귀는 곤두세워지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 ② (바그너의 취향_극장적) 바그너는 정반대였다. 고독한 음악을 만들어왔던 바그너의 곁에는 연극인이자 배우이면서 모방자들이 또한 음악가로서도 버티고 있다. 바그너의 이론이 “드라마는 목적이고, 음악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라면, 바그너의 실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진 포즈(*극적인 몸짓)가 목적이고 드라마ㆍ음악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였다. 음악은 그에게 극적인 몸짓과 뚜렷한 배우기질을 강화시키며 내면화시키는 수단이었고, 바그너의 악극은 흥미롭고 꾸며진 다양한 포즈들의 시험장소인 것이다! 그는 위대한 배우의 명령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극장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 내가 극장을 비판하는 이유 > 몇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바이로이트에 있지는 않으니,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더 정직하라! 바이로이트에서 사람들은 오직 대중(*무리)으로서만 정직하고, 개인으로서는 자기 자신도 속이게 된다. 바이로이트에 갈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집에 놔두고 가니까. (ex. 예비군훈련에 갈 때, 남자들의 태도) 그들은 자기 발언권ㆍ선택권을 포기하고, 자기 취향에 대한 권리도 포기하며, 자기집에서는 가지고 있었던 신과 세계에 대한 용기의 권한도 포기한다. / 어느 누구도 극장으로는 자기 예술의 가장 섬세한 감각을 가져가지 못한다. 극장을 위해 일하는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더 그렇다. 극장에는 고독이 결여되어 있고 모든 완벽한 것은 증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대중이 되고, 여자, 바리새인,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 보호자, 바보가 된다. 바그너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거기서는 가장 개인적인 양심마저 대다수라는 평준화 마술에 굴복해버린다. 거기서는 이웃이 지배하며, 거기서 사람들은 이웃이 되어버린다.

 

7. [니체 대 바그너] 위험으로서의 바그너 :: 니체는 바그너 음악의 위험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출처 : [인간적인2]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134. 어떻게 새로운 음악(*바그너음악)에 따라 영혼이 움직이는가

*출처 : [인간적인2]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165. 음악의 연주원리에 대하여

1.

바그너 음악에 의한 생리적 전복 > ① (바그너음악: 헤엄치고 부유하는 것을 원하는 음악) 오늘날 바그너의 ‘무한선율’에서 새로운 음악이 추구하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바다로 가면 땅위에서의 안정적인 걸음걸이를 상실하고 무조건 자연의 힘에 굴복해버린다. 사람들은 헤엄을 쳐야 하는 것이다. (*바그너의 무한선율 속에서 사람들이 허우적거린다는 의미) / ② (예전의 음악: 춤을 추는 음악) 예전의 음악에서는 사람들은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은 장엄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빠르거나 천처히, 헤엄과는 다른 것, 사람들은 천천히 춤을 춰야만 했다. / 그런데 바그너는 기존 음악의 생리적 조건들을 전복시켜버렸다. 그는 사람들이 걷거나 춤추는 것이 아니라, 헤엄치고 부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무한선율의 위험성 > ‘무한선율은’ 시간과 힘의 균등을 깨버리고자 하며 멸시하기도 하고, 이전에 귀에는 리듬상의 역설이나 모욕으로 들리던 것을 고안해냈다. 이런 취향을 모방하면서, 이런 취향의 지배 하에서 음악의 위험(리듬감각의 완벽한 퇴화인 혼돈이 리듬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위험)이 발생한다. 그런 음악이 자연적이고 어떤 표현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으면서, 영향을 미치기만 원할 뿐인 연극나부랭이와 동작술에 의존할 때, 위험은 극도로 커진다. 어떤 값을 치르든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것과 꾸며진 포즈(*극한 몸짓)에 봉사하고 포즈의 노예인 음악 – 이것은 종말이다.

*무한선율 : 바그너가 1860 <미래의 음악>에서 사용한 말. 무한히 이어지는 멜로디. 단절감없이 떠도는 듯한 선율, 음악

2.

음악연주의 미덕 > 뭐라고? 지금의 음악연주가들이 그렇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연주행위의 제일가는 미덕은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두드러짐에 이르는 거란 말인가? ...... 모든 음악이 벽에서 뛰쳐나와 청중의 내장마저 흔들어 놓아야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8. [니체 대 바그너] 우리 대척자들 ::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 vs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

*출처 : [즐거운 학문] #370

2가지 유형의 고통: 삶의 충일에서 고통 vs 삶의 빈곤에서 고통 > "모든 예술, 모든 철학은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삶의 치유수단이나 보조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을 원한다. 또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 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 삶 자체에 대한 보복, 이것은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걸맞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 삶을 비방하며, 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에 상응하는 것이, 모든 예술과 인식에 있어서의 낭만주의다.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유명하고 두드러진 낭만주의자들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이다. [즐거운 학문] #370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원문)

2가지 유형의 존재: 디오니소스적 인간 vs 데카당들 > 삶의 충일한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자, 디오니소스적 신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공포스롭고도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주시를 허용할 뿐 아니라, 스스로 끔찍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사치를 허용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 재배지로 만들 수 있는 넘쳐흐르는 생산력과 재건력의 결과로소,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된다. 자연에서 허락되는 것처럼 보이 것과 마찬가지로. / 반대로 그지없이 고통받는 자, 삶이 가장 빈곤한 자는 사유와 행동에서 온화와 평화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한다. 오늘날 휴머니티라고 부르는 것을. 원래 병자들의 신인 구세주라는 신을 필요로 하고, 백치들을 위한 삶의 개념적 이해방식인 논리도 필요로 한다. ‘이상주의자’나 ‘아름다운 영혼’처럼 ‘전형적인 자유정신들’도 모두 데카당들이다.

2가지 유형의 예술: 삶에 대한 증오가 창조의 재료 vs 삶에 대한 충일이 창조의 재료 >모든 예술가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 구별을 한다. 거기서(*그의 예술에서) 삶에 대한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는가? 아니면 삶의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는가? 괴테에게서는 충일이 창조적이 되었고, 플로베르에게서는 증오가 창조적이 되었다."

 

9. [니체 대 바그너] 심리학자가 말한다 :: 위대한 존재들에게 위장과 가면은 어떤 의미인가? 왜 요청되는가?

*출처 : 선악의 저편] #269, #270

위대한 존재는 작품으로 위장한다 > 사람들이 어떤 신을 숭배했는데, 사실은 그 신이 불쌍한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위대한 작품이나 행위 같은 성과는 언제나 가장 거창한 거짓말쟁이였다. (작품.행위 =/= 창작자.행위자) 위대한 정치가ㆍ정복자ㆍ발견자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버려 미지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예술가의 작품이든 철학자의 작품이든, 작품이 존재를 꾸며낸다. 경외되는 '위대한 인물들'이란, 나중에 만들어진 미소하고 열악한 허구들이다. 역사적 가치의 세계에서는 위조짓거리가 지배한다.

깊은 고통은 가면을 필요로 한다 > 자기가 겪은 고통 덕분에 깊이 괴로워하는 인간은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자들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많이 알 수 있다'는 /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멀고도 무서운 세계들에 대해 잘 알수 있다'는 / '한때는 그런 세계에 거주하기도 했다'는 등골이 오싹할 만한 확신에 배어있고 채색되어 있다. 이런 정신적 긍지, 인식을 위해 정선된 자, '정통한 자', 희생자라고 할만한 이런 긍지는 온갖 종류의 위장을 필요로 한다. 주제넘은 동정의 손길이 닿거나 그와 고통을 같이하지 않는 다른 자들 전체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깊은 고통은 고귀하게 만단다. 이것이 사람들을 구분한다. / 가장 세련된 위장형식 중의 하나는 에피쿠로스주의다. 이것은 고통을 가볍게 받아들이며 슬프고도 심각한 모든 것에 저항하는 허세적이면서 용감한 취향이다. 이들은 오해받기를 원한다. / 학문이 명령하다는 외관을 부여하기 때문에, 학문성이 인간은 피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기 때문에, 학문을 이용하는 '학적인 정신들'이 있다. 이들은 그릇된 추론을 하도록 유혹하고 싶어한다. 자기의 심장이 부셔저서 치유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부정하고 싶어하는 뻔뻔한 자유정신들이 있다. 햄릿의 경우. 바보스러움 자체는 싫지만, 너무나 확실한 지식을 감추는 가면일 수 있다.

 

10. [니체 대 바그너] 후기 :: 니체의 운명애, 위대한 건강이란 어떤 것인가?

*출처 : [즐거운 학문] 서문 #3

위대한 건강 > 어떤 때보다 내 삶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더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며, 거시경제적 의미에서 모든 것은 다 그 자체로 유용하다. 그것들을 사람들은 견뎌내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운명애,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나는 나의 건강보다 나의 오랜 질병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덕을 입었다! 자기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나의 위대한 건강은 그 질병 덕택이다. ([즐거운 학문] 서문#3삶이 우리의 모든 것이고, 우리가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모든 것이며, 우리와 만나는 모든 것이다. 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Life-that means for us constantly transforming all that we are into light and flame-also everything that wounds us; we simply can do no other.”)

위대한 고통, 다른 사람이 되는 > 내 철학 역시 내 질병 덕택이다. 위대한 고통이야말로 정신을 최종적으로 해방하는 자이다. 위대한 고통은 모든 U를 진정한 X로 만드는 위대한 의혹의 스승이다. 위대한 고통, 생장작이 시간을 끌면서 타는 것처럼 우리를 오랫동안 서서히 태우는 고통. 이것이 우리 철학자들에게 우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라고 강요하고,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상정했던 것(신뢰, 호의, 부드러운 가식, 온화, 중용)과 결별하게 만든다. 나는 고통이 우리를 더 낫게 만든다는 것에는 회의적이지만, 우리를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다. ... 우리는 고통에 직면해서 말 없고 경직되고 마비된 자기포기, 자기망각, 자기말소라는 무속으로 후퇴한다.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위한 이런 길고도 위험한 연습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을 넘어서는 위버멘쉬-되기)

*‘U를 X로 만든다’는 말은 :: 독일어로 ‘속이다, 사기치다’를 의미한다. U는 원래 5을 뜻하는 로마자 V로, 5을 로마자 X(10)로 만들어 속인다는 뜻. 니체는 기존 사유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통해 삶이라는 미지수X에 도전하는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삶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랑 > 이와 더불어 우리는 더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고, 이제까지 물어왔던 것보다 더 많이ㆍ더 심오하게ㆍ더 엄격하게ㆍ더 강인하게ㆍ더 악의적으로ㆍ더 조용하게 질문을 던지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삶에 대한 신뢰는 사라져버리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은 아직도 가능하다. 단지 다른 식으로 사랑할 뿐이다.

위대한 의혹의 심연으로부터 다른 취향 > 그 후로(위대한 고통 이후) 사람들이 다른 취향을 갖게 되었다. 그런 위대한 의혹의 심연으로부터 사람들이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껍질을 벗고, 더 과민하고 더 악해져, 기쁨에 대한 더 섬세해진 취향을 가지고. 더 유쾌한 감각과 기쁨 속에서도 또 하나의 더 위험한 순진함을 지닌 채,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전보다 수백배나 세련된 채로 그들은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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