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다 읽었다. 세미나 구성원분들과 토론도 하고 발제를 준비하면서 관련 자료도 찾아봤다.
니체를, 도덕의 계보를 이해하고, 알고 싶었고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세지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니체는 나에게 느낌표가 아니라 수많은 물음표를 마구잡이로 던져주는 철학자다. 때로는 그 물음표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여전히 니체가 주는 그 물음표는 그 어떤 명쾌한 느낌표보다 나를 설레게하고 답 없는 그 물음들을 붙들고 늘어지고 싶게 만든다.
나는 아직 니체의 책을,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된 독자는 아니지만, 니체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그에게 가까이 가보고 싶다.
# 신을 위한 삶, 진리를 위한 삶, 그 무엇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의 삶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하여
니체는 무신론자, 과학자, 인식의 이상주의자들이 모두 다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자들이 아니라 금욕주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금욕주의자는 신을, 과학자, 인식의 이상주의자, 무신론자들은 진리를 섬긴다.
그 결과,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의 순간을 부정하고 신 또는 진리라는 고정불변하는, 저 너머의 가치를 지향한다.
그들은 '공허의 공포', '무의미의 심연'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내 삶에, 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해석의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는 불변하는 사실(진리) 또는 초월적 존재(신)에 대한 추구(진리, 신을 향한 의지)를 통해
그 공허와 무의미를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 공허와 무의미를 직면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 해석의 근거를 찾고 만들어내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긍정하고 이를 통해 자기극복, 자기성장을 지향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무엇을 위한 삶으로, 즉 삶을 수단화하는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경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니체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고통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견뎌내고 외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고통에 얽메일 수밖에 없고, 고통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고통의 노예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다.
나는 니체를 읽고 있는 지금도 고통의 충실한 노예다.
하지만 니체를 통해서, 나, 그리고 나의 고통에 대해 '다르게',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내 삶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그래서 말로 하는 철학, 머리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는 '몸'으로 하는, 삶으로서 살아내는 살아 있는 철학을 하고 싶다.
니체를 혼자 읽었더라면 알 수 없었을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세미나 구성원분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부족하고 서투르고 때로는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또 귀한 이야기, 통찰력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더 감사하다.
나의 니체 읽기와 공부는 이렇게 작은 끝과 함께 다시 새롭게, 재미있게 시작될 것이다.
1. 물음-문제 복합체, 제대로 문제설정을 하는 것
"니체는 나에게 느낌표가 아니라 수많은 물음표를 마구잡이로 던져주는 철학자다. ...... 니체가 주는 그 물음표는 그 어떤 명쾌한 느낌표보다 나를 설레게하고 답 없는 그 물음들을 붙들고 늘어지고 싶게 만든다." _해
우리가 제대로 문제설정을 할 수 있으면, 그래서 제대로 물을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사실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ㅎㅎ 우리는 문제설정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기도 전에, 해답으로 가는 빠른 방법에 익숙해져있지요. 하지만 해답을 지워버리면, 물음-문제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해답을 주는 철학보다, 끊임없이 물음-문제를 생성하게 하는 철학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니체처럼 말이지요!!
2. 금욕주의, 진리(신) 외의 다른 욕망을 금지하는 독단적 태도
"니체는 무신론자, 과학자, 인식의 이상주의자들이 모두 다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자들이 아니라 금욕주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금욕주의자는 신을, 과학자, 인식의 이상주의자, 무신론자들은 진리를 섬긴다. 그 결과,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의 순간을 부정하고 신 또는 진리라는 고정불변하는, 저 너머의 가치를 지향한다." _해
[도덕의 계보] 3논문에서 니체는, 금욕주의를 종교생활에 나타나는 태도에 제한되지 않는 인간심리(도덕감정) 일반의 문제로 제기합니다. 기독교에서의 금욕주의는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전제로 다른 욕망을 억압하고 적대하지요. 마찬가지로 인식(학문, 철학 등)에서의 금욕주의는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를 전제로 다른 의지와 욕망을 억압합니다. 니체는 이처럼 '신에 대한 태도'에 있어 금욕적인 것과 '진리에 대한 태도'에 있어 금욕적인 것은 서로 동형적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절대적 자리에 두고, 다른 욕망을 억압하는 어떤 태도도 금욕주의입니다. 따라서 금욕주의는 종교생활 뿐 아니라, 학문, 철학, 과학, 예술,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서, 즉 절대성을 추구하는 독단적 태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향한 믿음' 자체를 문제삼을 때, 종교가 몰락하는 것처럼,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를 문제삼을 때, 도덕이 몰락할 것입니다.
3. 지구, 금욕주의자들의 별
"멀리 떨어진 천체에서 읽는다면, 지구는 금욕주의적 별이다. 자신에 대해-지구에 대해-모든 생명에 대해 깊은 불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불만에 차고 오만하며 불쾌한 피조물의 은둔처일 것이다" [도덕의 계보] 3논문 11절
니체는 지구를 금욕주의적 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 지구에 대해, 모든 생명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금욕주의자들의 은둔처라는 것입니다. ㅎㅎ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억압하고 살아가며, 그것조차도 잊은 채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4. 허무주의, 의지에 대한 물음
그리고 이처럼 금욕주의가 우리의 삶에 거대한 힘을 갖게 된 것은, 금욕주의에 대항하는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만이 유일하게 금욕주의에 대항하는 이상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미 우리 생명에 내재하는 그것 '힘에의 의지'일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금욕주의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한 힘의 사용'이며, 생명의 본능인 욕망을 적대ㆍ억압하는 의지입니다. 금욕주의에서 우리는 힘의 2가지 유형 가운데, '능동적 힘'에 반하는 '반동적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충동(의지ㆍ욕망)은 그것의 실현을 목표로 합니다. 의지가 금욕주의(의지ㆍ욕망의 억압)에 의해 방향이 가로막혔을 때, 의지는 방향을 변경하여 허무를 의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금욕주의의 최후형태인 허무주의(의지ㆍ욕망)에서, 금욕주의를 극복하게 하는 ‘힘의 의지’를 발견합니다.
"인간에게 금욕주의가 그토록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사실, 즉 무에 대한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의지는 아무것도 의지(의욕)하지 않은 것보다는 차라리 무(das Nicht)라도 의지하려고 한다."
하나의 의지로서의 허무주의. 우리는 허무주의에서 인간적 본질인 ‘힘에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니체는 '허무주의에서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허무주의는 삶에 대한 적대이고 삶의 기본전제에 대한 저항이지만, 그 때조차 하나의 의지입니다. 인간은 그토록 인간은 의지의 동물이며, 힘에의 의지는 생명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