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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3논문의 목적이 금욕적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상의 배후에 아래에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니체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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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적 이상은 하나의 의지로 표현되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목표는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금욕적 이상을 위한 도구로, 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방편이자 수단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금욕적 이상은 자신에 의해 비로소 의미, 생존권, 가치가 부여된다고 믿고 있다.

이 금욕적 이상에 대한 대응물은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그 대응물이 없지 않다며 현대학문을 증거로 든다. 니체는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대학문은 심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외설, 남용,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현대학문을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의 반대가 진리라고 말한다.

오늘날 학문은 자신에 대한 이상도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학문이 아직 열정 사랑 격정 고통인 경우에도 그것은 저 금욕적 이상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장 새롭고 가장 고귀한 형태 자체이다. 학문이 금욕적 이상의 가장 새로운 현상, 형태가 아닌 경우 학문은 온갖 종류의 불만 불신 설치류 종, 자기멸시 양심의 가책 등이 숨는 은신처다. 즉 학문은 본의 아니게 분수를 아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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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혼자 지적 양심을 지니고 이를 구현한 이들은 인식에 관한 최후의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들, 이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은 실제로 자신이 금욕적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자유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 십자군이 복종규율이 철저했던 아사시 교단을 마주쳤을 때 조언을 얻게 되었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자, 그것이 정신의 자유였다. 그것으로 신앙은 진리 자체에 해약통고를 한 셈이었다. 한 가지 일에만 무조건 매달리는 자, 소위 이러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에게 자유와 해방보다 더 낯선 것도 없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 어느 누구보다 단단히 매어있고 무조건적이다.

금욕적 이상을 강조하는 것, 즉 진리에의 무조건적인 의지는 금욕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며 이 가치는 금욕적 이상 속에서만 보증되고 확인된다. 진리에의 의지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변명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의식이 모든 철학에 결여되어 있다. 이는 금욕적 이상이 모든 철학을 지배했기 때문이고, 진리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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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금욕적 이상의 일반적인 요소를 부정함으로써 그 이상 속의 생명을 다시 자유롭게 한다. 학문과 금욕적 이상은 하나의 지반 위에 서있다. 이 두 가지는 똑같이 진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두 가지 다 진리란 평가도 비판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거짓을 신성시하고 착각에의 의지가 양심의 가책을 곁에 두고 있는 예술이야말로 학문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으로 금욕적 이상과 대립되어 있다. 유럽이 낳은 예술의 최대의 적인 플라톤의 본능은 이것을 감지했다. 플라톤 대 호메로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진정한 적대관계이다. 전자는 최선의 의지를 지닌 ‘저편 세계의 인간’이자 삶의 위대한 비방자이고, 후자는 뜻하지 않은 삶의 숭배자이자 금빛 자연이다.

현대학문은 당분간 금욕적 이상의 최상의 동맹자이다. 그 이유는 학문이란 가장 무의식적이고 가장 뜻하지 않은, 가장 비밀스러운 지옥의 동맹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정신의 소모성 환자라고 불렀다. 금욕적 이상의 학문적 맞수의 이 유명한 승리! 이 승리에서 금욕적 이상이 더 강해졌고, 보다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보다 정신적으로 되었으며, 보다 위험한 것이 되었다.

인간은 전에는 자신을 거의 신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젠 동물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이제 중심점에서 점점 더 빨리 굴러떨어진다. 어디로? 無속으로? 인간의 무(無)라는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 속으로?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금욕적 이상으로 향하는 곧바른 길이 아닐까? 모든 학문은 오늘날 인간의 자신에 대한 종래의 존경심이 엉뚱한 자만심에 불과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것이 그의 소망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소망과는 어긋나게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 그 책임을 소망에서가 아니라 인식행위에서 찾아도 된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핑계인가! …“인식행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ㅡ신은 존재한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우아한 삼단논법인가. 이 얼마나 금욕적 이상의 대단한 승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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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전체역사 기술의 가장 고귀한 요구는 이제 거울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목적론을 거부한다. 어떤 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재판관 역할을 거부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확인하고 기술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금욕적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허무주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다른 종류의 역사가, 어쩌면 더욱 현대적인 종류의 역사가에 관해 말하자면 이들은 향락적이고 육욕적이며 삶이나 금욕적 이상에 똑같이 추파를 던지는 부류이다. 이들은 예술가라는 용어를 장갑처럼 사용하고 관조에 대한 칭찬을 독차지해 버렸다. 이들마저 금욕주의자와 겨울풍경에 대해 얼마나 갈증을 일으키는가. 이들을 악마가 잡아갔으면 좋겠다. 차라리 나는 저 역사적 허무주의자와 차가운 안개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 낫겠다.

나는 삶을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하얗게 회칠한 무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혜에 자신의 몸을 감싸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피로에 지친 자나 피폐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짚 묶음으로 만든 빗자루로 된 머리에 이상이라는 요술모자를 쓰고 영웅으로 치장한 선동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금욕주의자나 사제로 보이고 싶지만, 실은 비극적인 어릿광대에 불과한 야심만만한 예술가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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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이란 금욕적 이상의 마지막 발전과정의 하나에 불과하며, 2천년에 걸친 진리에 대한 훈련의 경외할 만한 파국인데, 그것은 결국 신에 대한 거짓 신앙을 포기하게 한다. 기독교 신을 이긴 것은 “점점 더 엄격하게 해석된 진실성의 개념인 기독교적 도덕성 자체이다. 자연을 마치 선의와 비호의 증거인 양 간주하는 것, 역사를 신적인 이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윤리적 세계질서나 윤리적 최종 목적의 항구적 증인으로 해석하는 것, 모든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안출되고 보내진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기독교적) 양심에 반하는 것이 되었다.

모든 위대한 사물은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지양의 행위에 의해 몰락해 간다. 삶의 법칙이, 삶의 본질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극복의 법칙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 자신이 발의한 법에 복종하라’라는 외침은 언제나 결국에는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교의로서의 기독교는 자기 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결국 가장 강력한 결론을, 즉 자기 자신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는데, 여기서 나는 내가 제기한 문제, 우리의 문제를 다루겠다. 우리 내부에서 저 진리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서 의식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리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될 때 도덕이 몰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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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어마어마한 틈새가 벌어져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금욕적 이상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설명하며 긍정할 줄 몰랐으며 자신의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시달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병적인 동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고 외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고통의 의미나 목적이 제시되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을 찾아다닐 줄 안다. 인류에게 광범위하게 내려진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었다.

그런데 금욕적 이상은 인류에게 하나의 의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고, 모든 점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에서 ‘더 나은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금욕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해석되었고,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불합리와 무의미의 노리갯감이 아니었다. 인간은 이제 무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무엇으로 의욕했는지 상관없이, 의지 자체가 구원받았던 것이다. 금욕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사실 표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무(無)에의 의지, 삶에 대한 반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無)를 의욕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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