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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용수의 공과 니체의 영원회귀: 근대적 니힐니즘의 극복

 

논리적인 유럽은 끝없는 정신을 두 개의 끝이 달린 망치로 짓누르고서,

그 정신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숨 막힘이 극에 달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갑옷을 입고 빵 반죽을 해왔습니다.

정신은 정신보다 더 위대하며 삶의 변신은 다양합니다.

당신들처럼, 우리는 발전을 거부합니다.

자, 이제 우리의 집들을 부숴주십시오.

오십시오, 우리를 이 벌레들로부터 구출해 주십시오. 새로운 집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십시오.

-초현실주의자들이 불교 종파들에게 보내는 서한,『초현실주의 혁명』,제3호(1925)

 

Picture Prologe

 

불교와 니힐리즘

불교의 진리는 니체가 능동적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을 니체의 철학 이상으로 정치하고 풍부한 형태로서 보여준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는 세 종류의 경험을 가진다. 괴로운 경험, 즐거운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경험, 괴로운 경험은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고, 즐거운 경험은 그것이 사라질 때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경험 역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서 무상함의 괴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니체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기억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사유를 모색한다. 그는 이 새로운 사유를 영원회귀 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영원회귀 사상이 지닌 능동적 니힐리즘과 달리 불교는 수동적인 니힐리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매우 일반화된 편견에 근거한다.

 

불교, 무자성의 철학

구마라다에 따르면 즐거운 경험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게 아니다 즉 즐거운 경험은 무자성을 지닌다. 니체가 사용한 철학 개념으로 표현하면 비실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이나 옷도 허기나 추위라는 조건과 만날때만 즐거움의 원인이 되며, 필요 이상으로 주어질 경우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즉, 즐거움의 원인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변화의 문제를 고통이라고 표현했을까?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특정한 태도가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아비달마 불교도, 또는 인도의 책벌레들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날 때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질 때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불교의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지혜이다. 연기법은 그 진리를 듣는 순간 그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화할 만큼 놀라운 감응의 생산 능력을 지닌 이론이었던 것이다.

아비달마란 말은 다르마, 즉 “법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붓다의 교법에 대한 해석이 사람들마다 달랐기 때문에 “법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을 가진 불교 종파가 생겨났는데 이를 아비달마 불교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는 책들을 쓰고 서로간의 논쟁들을 기록했다.

 

용수, 반시대적 사상가

용수는 대승 불교의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들 중 하나였다. 아비달마 불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적인 논쟁들을 접하면서 치밀한 사유 훈련을 받았다.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반야부파의 직관주의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아비달마 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는 우리의 자아를 비롯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단지 변화하는 물질적.정신적.심리적 요소들의 복합체”라고 이해했다. 이들에게 연기론은 요소들의 이합집산 또는 인관관계를 뜻했다. 연기론을 통해 세계의 무자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설일체유부는 불변하는 실체의 존재를 비판하고 무아와 사물들의 무상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사물들을 구성하는 75개 요소를 가정하고 그 요소들의 연기관계를 설명했지만,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연기법에 스며든 실체론을 날카롭게 간파했다. 용수는 그들이 가정한 요소, 연기, 업, 열반의 자성을 부정하며 공 사상을 통해 불교에서 실체론적인 사유를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붓다---아비달마---용수

 

1. 니체와 불교의 만남

 

본격적으로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한 사상가는 쇼펜하우어이다.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바라본 불교는 니체에게 생의 의지를 부정하고 삶을 혐오하는 사상으로 비춰졌다. 니체의 불교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 양상을 띤다. 니체는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백배나 더 냉정하고 진실되고 객관적”이며 성숙한 종교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불교는 문명의 종말을 위한, 지쳐버린 문명을 위한 종교”라는 점에서 여전히 수동적 니힐리즘의 한계를 갖는 사유라고 진단한다.

니체의 철학은 시대적 한계와 니체 자신의 오해를 넘어 불교적 사유에 매우 근접한 통찰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니체의 철학에서도 인과론에 대한 비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과론은 니체가 니힐리즘의 근대적 양상으로 파악하는 과학적 사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론 비판은 근재적인 의미의 니힐리즘을 비판하려는 니체에게 필수적 작업인 동시에 영원회귀라는 사유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2. 근대적 니힐리즘의 실체론 비판

 

1) 정교화된 실체론 비판의 필요성

 

훌륭한 적이 훌륭한 무기를 만든다

붓다 사후 그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아비달마 불교의 정교한 교학적 전통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실체론적 사유는 뿌리깊은 것이어서 불교의 이론 체계 속에서 또 다른 실체론적 경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용수의 철학은 매우 정교화된 반실체론의 성격을 띤다. 용수는 아비달마 불교의 연기개념에 세련되고 치밀한 형태로 침투한 실체론적 사유를 물리치기 위해서 보다 정교한 비판을 수행해야만 했다.

영원회귀 사상은 실체론적 사유와의 대결 속에서 그가 완성하고자 했던 생성과 차치의 철학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생성 철학은 철저한 반실체론적 입장을 견지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실체론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니힐리즘에 빠뜨림으로써 생성의 세계와 그 세계 안에 놓인 우리의 삶을 부정하고 증오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성을 긍정하려는 사유자는 반드시 실체론과 대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은 정말 죽었는가?

니체는 광인의 비유를 통해 이런 상황의 복잡성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신은 살해되었지만 신의 살해자들은 그들이 실행한 일과 그 실행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다. 광인은 신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말하면서 이 소식이 아직 사람들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한다.

만일 모두가 신의 죽음을 알고 있다면, 이미 잘 알려진 진실을 혼자 알고 있는 듯 외친다는 점에서 그는 광인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광인이 신의 죽음을 외치는 순간이 신의 죽음이 아직 전달되지 못한 때라면, 광인은 일종의 예언자 혹은 선각자를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신의 죽음을 전해 듣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이 점을 고려해볼 때, 광인이 신의 죽음을 전하는 시기는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무신론적인 근대 의식이 충분히 진행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광인의 외침은 이해되기 힘든 것으로 남는다.

 

2) 용수의 정교화된 반 실체론: 인과연기론 비판

 

연기법은 공하다

일반적으로 생성과 변화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이다. 이 두가지 반응이 고대 인도에서는 상주론과 단멸론으로 표현되었다. 상주론은 브라만교의 아트만처럼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자아를 상정함으로써 생성과 변화 자체를 허구로 간주하는 실체론적 견해이다. 반면 단멸론은 사후에도 존재하는 영혼인 아트만을 거부하며 모든 것은 생성,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리고 생멸하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고 간주한다. 이 점에서 단멸론은 염세적 견해이다.

붓다는 실체론적 사유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제거하고 생을 긍정하는 새로운 길인 중도를 모색하려 한다. 그 결과 그가 도달한 것은 상주하는 아트만을 거부하는 동시에 단멸론의 염세성을 제거하는 연기법이었다.

불교의 연기법은 붓다 입멸 후 아비달마 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적 발전을 거듭한다. 설일체유부는 붓다의 연기법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원자론적 사유를 도입, 설일체유부에서는 우리의 자아와 세계의 모든 사물을 “다수의......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본다. 세계에는 75가지의 “요소들만이 실재”하고, 따라서 모든 사물은 실체성을 띤 것이 아니라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요소들의 인과적 결합을 ‘연기’라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공하다

용수는 먼저 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미래를 낳는다는 인과적 시간관을 비판한다. 비판의 방식은 과거가 다른 두 시간대의 원인이라고 가정할 경우에 모순이 발생함을 보이고, 과거가 원인이 아니라고 가정할 경우에도 역시 모순이 발생함을 보이는 것이다. 삼세실유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찰나가 각각 시레성을 지니고 존재한다는 시간존재론이다. 이 삼세실유설의 근거는 법체항유에 있다. 즉 과거의 법들, 현재의 법들, 이래의 법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 한 찰나가 원인으로서 바로 이웃한 다음 찰나를 발생시킨다는 인간관계에 기반한 시간관을 용수가 거부한 이유는 업의 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시간관을 비판함으로써 연기법이 업의 인과적 결정론을 의미하는 듯이 오해되는 것을 막는다.

 

3) 니체의 반실체론적 사유의 재구성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거부

우리는 A: 용수의 공사상에 나타난 논점들을 통해 B: 니체의 반실체론적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교화할 수 있다.

실체론의 철저한 제거를 위해선 제1원인과 함께 인과성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인과성 비판의 효과적인 전략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원자론은 인과성의 논리에 의존하여 성립되는 실체론에 불과하다.

변화와 생성의 사유는 인과의 상호의존성 논리에 입각해 구성되어야 한다.

 

힘에의 의지 개념과 상호의존성의 사유

다른 모든 힘들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에서 하나의 힘만이 변화할 수는 없다. 특정 힘의 감소나 증대는 언제나 모든 힘들 전체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힘과 힘 사이에는 우리가 원자들이나 혹은 사물들 사이에 있다고 가정하는 빈 틈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사물드 ㄹ각각을 독립적 존재로 상정하듯 아무런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힘들을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3.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1)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

 

상호인과의 두 가지 차원: 동시적 상호인과와 이시적 상호인과

공동작인은 불교의 상호인과성 개념을 참조해볼 때 두 가지 의미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1. 동시적 상호인과성과 2.이시적 상호인과성이다. 동시적 상호인과성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두 볏짚단의 경우에 성립한다. 두 볏짚단은 서로 상대를 서 있게 하는 원인이 되는 동시에 상대에 의해 서 있게 되는 결과가 된다는 점에서 상호인과적이다. 이것은 인과의 의존관계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이다. 이와 달리 이시적 상호인과성은 인과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시적으로 또는 계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원인도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인과성 또는 상호 의존성이다. 이 주장은 동시적 상호인과성 개념에 비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불교의 연기 개념을 숙명론이나 결정론과 명확히 구분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동시적 상호의존성과 이시적 상호의존성의 관계는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힘 개념은 원자 개념에 비해 세계의 상호의존성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힘 개념을 통해 시간적 생성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즉 힘에의 의지는 개별적 사물들의 실체성을 파괴하는 사유모델로는 적합하지만 그 개념만으로 영원히 회귀하는 생성의 시간을 포착하고 과거의 시간을 고정된 것으로 실체화하는 사유를 극복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영원회귀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우주론적 이해와 실존론적 이해

영원회귀에 대한 네하마스의 논의는 영원회귀에 대한 대표적 견해들을 정리하면서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네하마스의 구분에 따르면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에는 우주론적 견해와 비우주론적이고 실존론적 견해가 있다.

 

2) 이시적 상호의존성과 영원회귀

 

위대한 긍정과 위대한 부정의 시간

우리의 현존을 변화시키고 분쇄하기 위한 영원회귀의 물음인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위대한 긍정을 부르는 물음이다. 현존을 변화시키며 새로운현존으로 나아가게 하는 생성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수없이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이에 대히 ‘네’라고 대답할 때 우리는 생성을 철저히 긍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위대한 부정을 부르는 물음이다. 지금 현존하는 왜소한 것이 하나의 변함 없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우리는 위대한 부정을 행하는 것이지만 이 위대한 부정 속에서 진정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생성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다.

 

힘에의 의지는 자유의지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현재의 생성을 가져오는 의지는 자유의지와는 전혀 다른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다른 미세 원인들과의 상호관계와 무관하게 이성적으로 의지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자유의지의 자유는 이성이 다른 미세 원인들로부터 무관할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적 결단은 우리의 신체적 상태나 주변 상황의 미세한 변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 모든 미세 원인들이 우발적으로 형성한 사건이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은 모든 것들의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우리가 새로운 생성의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원회귀의 시간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상호의존성을 무시하는 생성과 창조의 자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은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 의존해 있으면서 바로 그 의존성으로 인해 열리는 생성과 창조의 자유시간에 대해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시적 상호의존성으로 이해된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애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애가 체념적 숙명론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준다.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가 운명애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삶의 태도에 접근하는 데 기여한다.

 

2) 비개체성과 영원회귀

 

생성이 개체의 차원을 넘어설 때 생성된 것의 소멸은 더 이사 ㅇ수동적 니힐리즘의 문제로 환원되지 못한다. 니체는 생성의 긍정을 통해 ‘인간을 넘어가는 사건’을 위버멘쉬의 탄생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은 곧 개체의 차원을 넘어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위버멘쉬란 바로 그 넘어감을 통해 개체적 소멸의 공포를 우주적 생성의 기쁨과 교환한 자이다. 그리고 그 교환을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시간의 상호의존성을 깨닫고 시간을 실체화하는 사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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