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대략 1882년 전후에 구상하고 발표하였다. 나이로 치면 37~8세이다. 비록 중년의 나이이기는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청년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나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즐거운 학문>은 니체 사상이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다리에 놓여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세미나 중에서도 꽤 많은 청년의 기운을 느끼는 편이다. 나이로 말하자면 30대 후반의 니체를 50대 중반의 나이의 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니체의 이 책은 나이든 내게는 어느 면에서는 대견하고 다른 면에서는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대견한 느낌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그 나이의 니체가 보이는 저 열정, 비장함, 거대한 혹은 과도한 희망, 거침없는 질주, 굴복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 살아가고자 하는 치열함 등이다. 스스로 불에 데이는 고통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 자신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지 등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좀처럼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동시에 위의 대견한 모든 이유로 인해 동시에 내게는 니체의 모습이 부담스럽다.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중년기의 후반에 이르고 얼마 후면 노년의 삶에 접어들어야 하는 당사자로서 니체의 모습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제4부 세미나에서 인상적인 것은 발제자인 쟈스민님의 모습이다. 너무나 젋은 그는 4부의 내용을 발제함에서 있어서 내가 책을 읽어 가며 중요하다고 줄을 치고 요약한 부분과는 매우 다른 부분에 집중하였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내용 이해의 수준 차이도 전혀 아니었다. 정말 그것은 생리학적 차이, 세월의 차이, 세포의 노화 정도의 차이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쟈스민님이 감명을 느끼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와 겹치는 정도는 20% 정도에 불과하였다. 아, 그렇구나! 이것이 인식의 본질이구나 싶었다. 니체는 제4부에서 '인식'에 대하여 말한다. 인식이란 의식된 사유 일반 자체가 아니라 충동들 상호간의 특정한 태도일 뿐이라고. 쟈스민님과 나의 인식은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책을 놓고 일정한 그룹을 이루어 공부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매우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다름이 아니라 쟈스민님과 나의 내부 충동돌의 특정한 태도가 다름에 기인하는 것이고 그 자체이기도 하다.
知者不言이란 말이 있다. 우리집 서재에 액자로 걸려 있는 말이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거나 확언하지 않는다는고 해석되는 말이다. 그렇다. 인식은 좀처럼 보편적이 되기가 어렵다. 인식이 내부 충동들의 특정한 태도라면 특정한 충동의 태도가 어찌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참으로 조심할 일이다. 제4부 세미나에서 나의 가장 큰 스승은 쟈스민 이었다.
댓글 5
-
정화
-
연두
역시 자기에게 정직한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인식을 신체적 조건의 배치라고 보신 점이 흥미롭고 저도 동의합니다만. 지난 번에 감각이직접적이고 정직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감각이 얼마나 우리를 속이는가. 인식이 얼마나 감각에 작용하는가. 하는 질문도 해야한다 생각해요. 맛이란 게 어떤 사회적 훈련이자 습관인 것처럼요. 규상님이 언급하신 신체감각이 감각인지 인식인지. 인식에 가깝지 않을런지 저는 조심스럽게 의심해 봅니다만. 쾌.불쾌는 어떻게 오는 걸까요. 피로함은 어디서 올까. 흠냐.
-
뮤즈
감각이 정직하다는 건 느끼는 대상에겐 그런 것 같아요. 그게 옳은 건 아니지만요...전 외식의 거의 모든 음식이 짜거든요^^
그런데 같이 간 사람들은 별로 못느껴요. 감각이 느끼는 주체에게 정직한거죠...근데 정직이란 말을 이런데 쓸수 있을까...다시 혼란이 옵니다. 미끄러지는 언어들...
-
엇결과순결
세미나 시간에 저는 위버멘쉬의 모습이 '담담함'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담담함이란 오랜 시간의 훈련과 경험 끝에 오는 달관의 경지랄까?
지나친 흥분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력하지도 않은 존재,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신념도 있지만
역시 그 신념에도 한계가 있음도 알고 있는, 그러나 한계가 있음에도 자신의 감각과 인식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닐까 합니다.
이규상님의 감상(청년의 의지의 힘에 대한 부담이라는 반응)과 자스민님의 충만한 열정,
참으로 반대 측면에 있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두분의 반응 사이 어딘가에서 니체가 알듯모를듯한 묘한 미소를 머금고 서있지 않을까
상상되기도 하네요.^^
니체 텍스트보다 참여하고 있는 세미나 회원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즐거운 학문과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살짝 흥분된 모습으로 뵈어요.^^
-
'신체성'은 니체철학의 Grount Text(근본텍스트)에 해당되는 거 같습니다.
먼저, 그것은 '자아나 인식'이라는 개념 역시 신체성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체가 힘들의 복합체라면, 자아는 힘들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중심으로 정의되며,
사유가 견해들의 복합체(신체)라면, 인식은 충동들 상호간의 특정한 태도로 정의됩니다.
또한, 규상님의 언급처럼 텍스트가 신체를 반영한다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텍스트에 내재하는 니체의 힘감정과 텍스트를 읽는 규상님의 힘감정의 차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쟈스민의 신체와 규상님의 신체의 차이 또한 그렇습니다.
규상님이 니체를 해석하는 방식이 삶과 신체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자의식'은 큰 쓸모가 없는 아닐까요?
노년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쓸쓸함' 같은 거, 어떤 '제한' 같은 것이 느껴져서 그런가 봅니다.
어떤 나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것을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 하는
힘에의 의지에 따라, 그 나이는 좋을 시기일 수도 나쁜 시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노년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 하는 '긍정적 종합'의 문제만 남는 게 아난가 하고요. ^^
규상님의 글 중에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불완전한 박테리아'의 비유가 특히 멋졌습니다.
박테리아는 박테리아로서 완전한 생명인데, 인간적 관점에서 서열화한다는 비판이지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지워버리면,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아름다운 박테리아'일 수는 없을까요?
그런 생명체에게 자기 수명을 의식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요. 헤헤
두분의 후기.......쓰으윽, 눈길만으로 스쳐가기가 아깝네요. 지난 셈시간의 열띤 모습을 되새기게 합니다. 저에겐 쉽지만은 일정들, 그러나 즐거움으로 채우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