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세미나자료 :: 기획세미나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청년인문지능-세계] 청인지 에세이

넝구 2018.10.13 11:21 조회 수 : 152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나에겐 동의어나 다름이 없었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쓸 자리에 이성적인 것이라고 써 넣어도 의미상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일상에서는 그 둘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성이라는 단어 안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그 의미들이 각기 다르게 쓰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포함관계로 보거나 둘을 동의어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구분하는 우리 교재(프랑스고교철학:지식과 이성-9과)의 시각은, 그래서 굉장히 새로웠다. 이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에 여러 철학자들의 논쟁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교재에서 제시한 견해를 충실히 따라가 보는 정도로 글을 쓰고자 한다.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모두 이성의 작용이며 이성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각각이 필요로 하는 이성의 속성(?)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합리적인 것은 이성적으로 ‘설명’가능한 것을 말한다. 지난 과들에서 다루었던 과학이나 수학을 떠올리면 적절한 예가 되겠다. 합리적인 것에서 중요한 것은 진술된 명제들을 형식적으로 틀리지 않게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에 필요한 이성은 연역적 이성, 추리하는 이성이다. 자연현상의 규칙을 ‘설명’하는 과학은 합리적인 것이다. 재미있는 지점은 합리적인 것이 인간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도 합리적일 수 있다. (자연에는 운행의 법칙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항상 합리적인 것이고 인간은 때때로 합리적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합리적인 것의 반대말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비합리적인 사유는 이성을 경멸하는 사유방식, 일반적으로 과학이전의 사유를 의미한다.

한편, 이성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보다는 더 좁고 특수한 의미, 더 넓고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성적인 것은 이성을 전유한 ‘인간’과 관련된 개념이다. 이성적인 것은 가치에 대한 직관, 가치의 선택을 포함한다. 이 때 요구되는 이성은 직관적 이성이다. 합리적인 것이 공리로부터 정확히 연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공리가 인간적 가치에 부합하는 가를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적인 것은 인간의 가치판단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것과는 다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 파스칼이 말한 ‘마음’, 직관 -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포함한 개념이라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성적인 것의 반대말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지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나 인간에게 악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이렇게 구분하고 보니 둘을 마냥 쉽게 동의어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합리적인 것을 모두 이성적인 것으로 볼 때 헤겔의 경우처럼 역사에서 자행된 극악무도한 일들을 정당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반면, 이성적인 것을 모두 합리적인 것으로 볼 때, 우리는 인간중심이라는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세계 전체가 우리 이성의 습관을 따라주길 바라지만 더 멀리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쓰나미가 닥쳐와서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해도 자연의 법칙으로 볼 때 쓰나미는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악이 되는 것(비이성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의 극단에 서면 인간은 그저 우주의 먼지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고 이성적인 것의 극단에 서면 인간은 이 우주의 척도로 스스로를 추앙할 수 있다.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주제의 논의 끝에, 합리적인 것이 인간에게 기여한 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날 유일하게 합리적인 사유를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과학이 인간에게 기여한 것은 인간중심적인 구심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원심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과학이전의 시대에 태풍이 불고 흉년이 닥쳤을 때, 일식이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신이 노하였다거나 왕의 덕이 부족했다거나 마녀를 처형해야한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던가 하는 그 시대의 ‘이성적인’ 해석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당대의 이성적인 해석들이 오류임이 밝혀졌고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성의 한계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합리적인 것에 그저 박수를 쳐주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한다. 합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설명될 수 없는 존재 자체와 과학 밖에 있다고 이야기되는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들은 부유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리들의 짓궂은 이성은 합리적인 것과 진리의 범주를 논하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것과 의미의 범주를 요청한다. 그 오묘한 줄타기 위에서 새로운 사유가 생겨나고 (푸코의 선언적 의미로) 인간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2북클럽자본 :: 자유의 파토스, 포겔프라이 프롤레타리아 [1] oracle 2022.12.22 205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0니체세미나 :: 비극의 파토스, 디오니소스 찬가 [2] oracle 2020.12.21 377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니체세미나 :: 더 아름답게! 거리의 파토스 [2] oracle 2019.12.19 683
921 [북클럽자본] 에세이 프로포잘 file 초보 2022.10.27 41
920 [북클럽자본_발제] 10권(1~3장) 자본의 재생산 [3] 용아 2022.10.27 81
919 [북클럽자본_후기] 9권(3~5장) 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 shark 2022.10.27 33
918 [청인지14발제] 칸트 발제문 file Jae 2022.10.21 43
917 [청인지14발제] 12장. 절대 이성의 목적론과 헤겔의 계략 file 시원 2022.10.21 25
916 [북클럽자본_발제] 9권(3~5장) 인센티브 따위는... [1] file 사이 2022.10.19 64
915 [북클럽자본_후기] 9권(1~2장) 근시성 난시 환자들 [1] 사이 2022.10.19 101
914 [청인지14발제] 10장 흄은 현대시대에서 어떻게 관념으로 우리를 지나갈까 박진우 2022.10.13 60
913 [북클럽자본_발제] 9권(1~2장) 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 [1] shark 2022.10.11 113
912 [청인지14-4주차 후기] 철학함은 이렇게 해야하는 것? [2] 이상진 2022.10.10 69
911 [청인지14-4주차 후기] 함께하는 우상 타파 [2] 네오 2022.10.10 61
910 [청인지14-4주차 후기] '철학함'의 쓸모 [2] 싸미 2022.10.09 48
909 [북클럽자본_후기] 8권(4~6장) 기계의 꿈 [2] 초보(신정수) 2022.10.08 115
908 [북클럽자본 8권] 미래 공병이 땅을 판 흔적 [4] file oracle 2022.10.07 145
907 [북클럽자본_발제] 8권(4~6장) 자본의 꿈, 기계의 꿈 [2] 손현숙 2022.10.06 133
906 [청인지14-3주차 후기] 라이프니츠, 단자론, 신의 법정 [3] 경덕 2022.10.06 138
905 [청인지14 _발제] – 제2부 8장 로크가 경험의 백지 밑에 숨겨둔 것 file 이상진 2022.10.05 52
904 [청인지14 _발제] – 제2부 6,7장 아이소포스와 베이컨 [1] 네오 2022.10.05 93
903 [북클럽자본_후기] 8권(1~3장) 자본의 꿈, 기계의 꿈 [3] 손현숙 2022.10.04 77
902 [청인지14-발제] 4, 5장 라이프니츠 file 권경덕 2022.09.29 6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