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손현숙
데카당
바그너
현대성
반시대성 그리고 비시대성
충일과 빈곤 - 우리는 왜 안정을 추구하는가? 또다시 안정된 삶을 왜 불안해 하는가?
니체에게 데카당스는 사조를 넘어 '힘의 의지'가 약화되고 둔화되는것이다.
니체는 자신을 데카당의 본질적인 측면에 두고 기존질서를 데카당스를 통해 몰락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철학자라고 보았다.
현대성을 지닌 데카당의 대명사인 바그너를 넘어서기위해 니체가 어떻게 바그너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어떻게 비판하고 대결을 해나갔고 어떻게 바그너를 넘어서 극복하고 생성을 통해 비시대성을 획득하였는지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고있다.
그럼 지금 한국에서 우리의 시대성을 대표하는 오늘날의 바그너는 누구일까? 또는 바그너주의는 무엇일까?
철학을 필요로 하지않는 시대분위기에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얽매여 살아가는 쳇바퀴속의 인간유형들
시대의 바그너주의자이긴 커녕 아직 시대도 읽어내지 못하고 남의 시선에 휘말려 살아가고 삶의 빈곤으로 고통받는 자들? 한국에서 공무원을 제일 안정화된 직업으로 만들어 버린 안정지향주의자들 ?
그렇다면 바그너는 데카당의 면모만 있는것일까? 예를들어 그 시대에 잘 적응해서 명성도 얻고 시대를 대표하는 바그너의 음악과 인생의 업적은 어떻게 볼 것인가? 성공한 인생의 유형들 자본과 돈의 흐름을 잘 연구하여 금융자본가가 되고 또 건물주가되어 안정된 소득으로 경제덕인 편안함을 보장받길 원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선도하는 유형들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유형을 동경하고 모델로 삼고 싶어하는데~~
여러가지 의문들 속에서도 한가지 전제는 니체가 추구하는 철학자의 자세일것이다. 다른사람은 바그너 없이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학자는 바그너 없이 지낼 수없다. 시대를 읽어내고 그 시대를 극복하기위한 자기노력과 극복방안에 대해서 힘든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니체는 스스로 그 성공을 축하하고 자랑 스러워하고 있다.
니체는 철학자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니체의 노예적인 도덕을 정당화시키는 기독교적 도덕과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과 끊임없는 사고와 이런 노력들이 아마 현대철학과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자기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움을 엿볼 수있는 통찰력을 이끌어 냈을 것 같다. 우리도 그 혜택의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비시대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예술인들은 생계가 위협받고 존재감에 대한 위기의식들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있다. 이에 예술인 단체들과 정부.여당간의 간담회들이 준비되고있다. 예술인 고용보험및 기본소득에 관한 공청회들도 많이 열리고 제도화를 위한 방안들이 논의 되어지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란 무엇일까?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전 부터 고민해왔고 실행해왔던 프랑스의 예술인 소득보장및 복지정책에 관련된 제도들이 제일 주목 받고 있다. 역사를 보면 거의1871년 파리코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총연맹산하의 공연예술산별 노조들이 생겨나고 이때부터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 예술가들이 투쟁해왔다고 한다. 현대 자본주의 예술을 넘어 자유로운 창작행위와 활동들은 또 다른 유형 과 사회를 꿈꿀수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물감과 색깔을 여러 가지로 섞어 볼 수있는 사람들 어떤 빛깔로 나올지를 미리 그 세계를 넘어가 볼 수있는 것이 예술이 할 수있는 일과 영역아닐까? 그래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모두 공감하고 지원하는 방법들을 찾아왔고 또 예술인 스스로도 투쟁해 왔던 것일 것이다.
니체대 바그너를 공부하면서 삶의 충일과 빈곤의 고통을 배웠다.
삶의 충일한 더 없이 풍요로운자 디오니 소스적인 신과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공포스럽고도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주시를 허용할 뿐아니라 스스로 끔직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사치를 허용한다. 그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재배지로 만들 수있는 넘쳐 흐르는 생산려과 재건력의 결과로서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된다. 자연에서 허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학문]
위에서 처럼 삶에 대한 충일이 창조의 재료가 된다면 예술가들은 먹고 사는 최소한의 소득으로 자본에 얿매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예술들을 해나간다면 시대를 넘어 대안적인 생성을 해내고 비시대성을 획득해 나가는데 더 많은 노력과 집중력을 쏟아 부울 수있을 것 같다. 그럴때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공유하고 나눠줄수있을 거라 생각한다.
최근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자연환경에 대한 생각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등 시대에 대한 반성과 고민들이 많다. 니체의 지적대로 우리가 높은 곳에서 지금의 상황을 내려다 볼 수있는 눈을 갖는다면 시대를 더 잘 헤쳐나갈 수있고 시대의 위험과 문제들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다양하게 찾아나갈 수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댓글 2
-
'우리 철학자, 우리 심리학자, 우리 비도덕자' 니체가 말하는 이들 존재는 자신의 동류로서 자기와 함께 시대를 넘어설 자들을 말합니다. 즉 니체의 텍스트를 읽고 그런 방식으로 살기를 의지하는 모든 자들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어떤 철학자, 어떤 심리학자, 어떤 비도덕자'로 읽는 것은 니체적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철학자'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
"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도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서문에서 니체는 철학자의 과제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과제에 의해 정의된다고 할 때, 철학자는 '자기 시대를 초월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를 '자기 시대의 존재로 가두는 것'에 대해 대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를 시대의 아들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자! 나는 바그너만큼이나 이 시대의 아들이다. 내가 한 사람의 데카당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내가 데카당이라는 것)에 내가 저항했다. 내 안에 있는 철학자가 이것(*내가 데카당이라는 것)에 저항했다. 이런 과제를(*내 안의 데카당에 대한 저항) 위해서 나는 나를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현대적 ‘인간성’을 포함해서 내게 들어와있는 온갖 병증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니체는 '자신을 시대의 아들로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드러냅니다. 즉 자신이 바그너만큼 시대의 아들이며, 데카당이라는 반성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니체가 대결해야 할 대상이 분명해집니다. 바로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바그너나 데카당스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데카당스와 대결하는 것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현대적 인간성이 아 아니라, 이들을 포함해서 내 안에 들어와있는 온갖 병증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학자란 누구일까요?
그렇다면 니체적 의미의 철학자는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시대를 넘어 다른 시대를 생성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바로 철학자라는 존재의 '자기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자기 안에서 자기 시대를 넘어서야 하며, 자기 안에서 다른 시대를 생성해야 하는 것!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미래를 구성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다른 시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미래는 '현재 다음의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변화와 생성'일 것입니다.
*데카당스 : ‘힘에의 의지’의 퇴화현상 / 하강하는 삶의 징후 / 퇴화하는 이상, 퇴화하는 가치의 생리적 토양
현숙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