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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 > 2권 지배가치들에 대한 비판 > 2장 도덕에 대한 비판① (2020.6.8)

*분홍색글씨는 번역을 수정한 것!

 

 1. 도덕적 가치평가의 기원  :: 도덕적 가치평가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 

 

1. 도덕적 가치평가의 본질 :: 신과 도덕, 혹은 신에 대한 믿음과 도덕에 대한 믿음은 어떤 관계에 있나?

(p200_#253) 이보다 더 순진한 생각이 있을 수 있나! 도덕에 허가를 내주는 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마치 도덕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도덕에 대한 신앙이 지켜지려면, '저편'(*내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앙의 이 전능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도덕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도덕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말하자면, 생명의 근본조건에서조차 도덕을 위한 것이 되면 잘못된 해석을 낳는다. 동식물에 관한 지식은 그러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존'은 이타주의 원리와 이기주의 원리를 조정하기 위한 다윈주의적 관점이다.)

(p213_#275) "행위의 가치는 영원히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이 가치평가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권위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만약 인간이 이 권위 앞에서 자존심을 다치지 않길 원한다면, 이 권위는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 높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말하고 있는 권위는 바로 신이다!

 

2. 도덕적 가치평가의 기원 :: 도덕적 가치평가(도덕적 선의 목록)우리의 삶은 어떤 연관을 갖는가?

(p200_#254) 우리의 가치평가와 도덕적 선의 목록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갖는가? 가치평가와 도덕적 선이 지배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또 어떤 것들과 관계가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삶을 위해서!"이고, "삶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삶'이 무엇인지 새롭게 다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삶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정식은, 삶이란 힘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 가치평가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또다른 형이상학적 세계를 배후에 인정하는가? 가치평가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도덕적 가치평가는 하나의 해석이며, 하나의 해석방법'이라는 것이다. 해석 자체는 특정한 생리학적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이며, 지배적인 판단의 특정한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렇다면, 해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우리의 욕망이다. 

 

3. 도덕적 가치평가의 기원 :: 도덕(가치)과 생리적 상태(신체)는 어떤 연관을 갖는가?

(p201_#255) 모든 덕의 생리적 상태 Alle Tugenden physiologische Zustände (*가치로서 덕신체로서 생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 모든 덕은 본래 세련된 열정이고, 고양된 생리적 상태이다. 동정과 연민은 성적 욕망이 발전한 것이고, 정의는 복수에 대한 열정이 발전한 것이고, 덕은 저항에 대한 쾌감, 힘에의 의지이고, 명예는 동류이거나 힘이 동등한 자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p201_#256) 나는 '도덕'을, 어떤 생명체의 삶의 상태와 관련있는 가치평가의 체계로 해석한다. 

(p202_#257) "도덕은 하나의 열매이다. 나는 그 열매를 바탕으로 그 도덕이 나온 토양(*신체, 사회)이 어떤지를 배운다."

 

4. 퍼스펙티비즘perspectivism :: 도덕적 현상 같은 것은 절대로 없으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p202_#258) 나는 모든 도덕적 판단을 징후나 신호들의 언어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도덕적 판단을 생리적 성공이나 생리적 실패의 과정을 드러내는 징후로 본다. 도덕적 판단은 본능들(종족이나 공동체, 젊음이나 쇠퇴 같은 존재의 다양한 단계에 고유한)에 의해 생겨난 선입견이나 점성술이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과 다름없다. / 이 원리를 기독교유럽의 도덕에 적용하면, 우리의 도덕적 가치들은 쇠퇴의 신호이고, 생명에 대한 불신의 신호이며, 페시미즘의 준비신호이다. / 나의 주요명제. 도덕적 현상 같은 것은 절대로 없으며, 단지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 이 해석의 기원은 도덕의 영역 밖에 있다. (#70 동일한 환경이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거기에 사실 같은 것은 전혀 없다.) / 다른 모든 가치평가 뒤에, 도덕적 가치평가가 군림하고 있다. 도덕적 가치평가가 정지된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또 그때 인식은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까?

 

5. 퍼스펙티비즘 :: 모든 가치평가는 항상 이미 퍼스펙티브적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유형의 인간에 대한 감각장치를 가지고 있는 가장 풍부한 모순이다!?

(p202_#259) 통찰: 모든 가치평가는 개인, 공동체, 인종, 국가, 교회, 종교, 문화를 보존하는 특정한 퍼스펙티브이다. '모든 가치평가가 항상 퍼스펙티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한 개인 속에 모순된 평가와 모순된 충동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인간 질병을 표현하는 것으로, 모든 본능이 특정한 과제를 충족시키는 동물과는 대조적이다. / 그러나 이 모순적인 생명체는 인식이라는 위대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무수한 좋음과 싫음 너머 공정으로 고양되고, 선과 악의 평가를 너머 이해할 수 있다. /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유형의 인간에 대한 감각장치를 가지고 있는 가장 풍부한 모순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위대한 화합의 위대한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우연, 드문 사고 같은 것이다! 일종의 행성운동. (*각각의 행성이 자신의 본능에 따라 운동하면서도, 우주 전체는 화합을 이루는 위대한 우연)

 

6. 퍼스펙티비즘 :: 실험적인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에 의해 도덕의 자기극복)

(p203_#260) '의욕(*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의욕(*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하나의 관념으로서 가치평가를 수반한다. 가치평가는 어디서 기원하는가? 쾌락과 고통이 가치평가의 바탕인가? 그러나 무수한 경우에, 우리는 그 속에 가치평가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ex. 공무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도덕적 가치평가의 범위. 그것은 거의 모든 감각기관인상 속에 뒤섞여있다. 이것을 통해 세계는 우리에게 채색된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의 해석 이전에, 해석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 / 가치들을 비교연구한 결과, 서로 반대되는 것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많은 선의 목록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은 없다. =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은 없다.) / 개개의 선의 목록을 분석해보면, 선의 목록은 일부 제한된 집단의 생존조건으로 만들어졌다. / 현대인들은 다양한 가치평가를 이용하고 있으며, 더이상 거기에는 창조적인 힘이 없다. 오늘날 삶의 바탕인 '생존조건'에 도덕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존조건이 훨씬 더 풍요해지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생존조건은 자의적인 문제가 되었다. 카오스! / 누가 인류와 개인의 머리 위에 내거는 목표를 창조하는가? 더이상 도덕을 지키려는 사람은 없으며, 보존해야 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 목표를 설정한다는 실험적 도덕을 시도한다. Also eine versuchende Moral : sich ein Ziel geben.

 

7. 퍼스펙티비즘 :: 생존조건으로서의 도덕, 생존조건으로서의 오류란 무엇인가?

(*모든 도덕은 특정한 생명체의 생존조건이다.  거짓가치(오류)는 생존조건이다.  ······>  보편도덕이나 절대진리는 없다!)

(p204_#261) 도덕적 행위의 표지(기준)는 '이러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생존조건의 제1조건에 속한다'는 믿음이다. 비도덕적이라는 말은, '몰락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ex. 개구리의 생존조건과 개구리의 도덕)

(p205_#262) 거짓 가치들의 필요성. 어떤 판단이 조건부로 이뤄졌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 판단을 반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그 판단의 필요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 사물을 동일성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경우) 이성은 거짓 가치들을 근절하지 못하는데, 난시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짓가치가 존재할 필요성도 이해해야 한다. 거짓가치들은 추론(*이성적 추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몇몇 원인으로부터의 결과이다. 

(p206_#265) 도덕적 판단에 이미 얼마나 많은 역전이 존재했는지, 근본적인 의미에서 '악'이 '선'으로 불려졌는지 알려져있지 않다. (ex. 우리나가 시대별 산아정책) 이 변화 중 하나를 '풍습의 도덕'이라는 말로 지적했다.

 

8. 두가지 도덕 :: 데카당스를 방어하는 도덕과 데카당스를 강화하는 도덕이란?

(p207_#268) 2가지 유형의 도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건강을 계속 유지한 본능이 시작되고 있는 데카당스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는 도덕(*데카당스를 방어하는 도덕)과 바로 이 데카당스가 스스로를 정식화하고 정당화하고 퇴락시키는 도덕(*데카당스를 강화하는 도덕) / 전자는 스토아적이고 냉혹하고 압제적이며(스토아주의 자체가 그처럼 제동을 거는 도덕이었다), 후자는 도취적이며 감상적이며 비밀로 가득차 있고 여자들과 '아름다운 감정'을 두둔한다(원시 기독교가 이러한 도덕이었다).

 

9. 퍼스펙티비즘 :: 도덕의 광학(관점)을 향한 의지 Wille zu einer Opik란?

(p208_#269) 도덕화의 모든 과정을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의 수수께끼로 관찰해보자. 도덕적 현상은 나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나에게 나의 이웃의 행복이 나 자신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이웃이 자기 행복의 가치를 나의 행복의 가치와 다르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내 이웃의 마음에서 나의 행복에 맨꼭대기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철학자들조차도 '주어진'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당신은 해야 한다. Du sollst"는 식의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타인을 위한 행동을 자신을 위한 행동보다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사상, 그리고 이 타인도 똑같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상(그때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안중에 두기 때문에, 선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즉 착란된 사상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착란된 사상에서 개인보다 집합체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이같은 인식은 개인들이 어떤 지배적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집합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것은 특정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며, 자기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 - 광학에의 의지Wille zu einer Opik이다. / 나의 사상. 목표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 목표는 개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일반의 경향을 주시해보라. 어느 개인도 희생이며,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거리를 가다보면, 마주치는 것은 오직 '노예'뿐이다. 모두가 어디로 하는가, 목적은 무엇인가?

[ 정신의 3가지 의지]
"너 해야 한다." You should. Du sollst. : 낙타의 정신, 시대적 복종의 의지 
"나는 하고자 한다."  I will. Ich wille. : 사자의 정신, 반시대적 비판의 의지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I am. Ich bin. : 아이의 정신, 비시대적 생성의 의지

 

10. 독단주의적 도덕관 vs. 퍼스펙티브적 도덕관

(p210_#271) 독단주의적 도덕관. '도덕적 가치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도덕적 가치의 지배결과, 퇴폐가 생기며 이것에 기초한 숙명이 도처에 나타난다. 도덕적 가치가 지배한다는 것은, 도덕적 영역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 절박함을 말한다. 도덕적 가치가 영원히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책무가 동원되었다. 이제 도덕적 가치들이 내면의 명령으로서 본능적인 것으로서 생각되고 있다. (*도덕적 명령의 내면화) 도덕적 가치가 논의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는 이면에는, 사회의 보존조건이 표현되어 있다. 도덕적 분야에서 반성과 비판을 마비시키려는 온갖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칸트를 보라! 도덕의 영역을 '탐구하는' 자체를 비도덕적이라고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p212_#274) 유럽역사의 공통적 요소는 도덕적 가치를 다른 모든 가치의 지배자가 되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 때문에 도덕적 가치는 삶의 지도자요 심판자여야 할 뿐아니라, (1) 인식의 (2) 예술의 (3) 국가적 사회적 노력의 지도자와 심판자이기도 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p211_#272) 퍼스펙티브적 도덕관.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은 퍼스펙티브에 따라 결정된다! :: 나의 목표는 모든 사건은 절대로 동질하다는 점과, 도덕적 구별은 퍼스펙티브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도덕적인 것으로 칭찬받는 것도 모두 비도덕적인 것과 같으며, 도덕적인 것은 비도덕적 목적을 가진 비도덕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줄 것이다. (모든 도덕적 발달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반대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는 모든 것이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우월하며, 또 삶의 보다 큰 충실성을 향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비도덕성의 진보를 수반하게 되는 이유도 보여줄 것이다. '진리'란 이러한 사실에서 통찰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눈금과 같다

 

 2. 무리  :: 도덕의 힘에의 의지와 무리본능 

 

1. 도덕은 누구의 힘에의 의지인가? 현대사회에 무리는 누구이며, 예외적인 존재는 누구인가?

(p212_#274) 누구의 힘에의 의지가 도덕인가? 유럽역사의 공통적 요소는 도덕적 가치를 다른 모든 가치의 지배자가 되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 때문에 도덕적 가치는 삶의 지도자요 심판자여야 할 뿐아니라, (1) 인식의 (2) 예술의 (3) 국가적 사회적 노력의 지도자와 심판자이기도 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향상'이 유일한 과제로 간주되고, 그외의 모든 것은 '향상'을 이루는 수단(혹은 향상을 방해, 저지, 위험의 힘으로 따라서 절멸에 이르기까지 공격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 지금까지 지상에서 거대한 발전을 이룬 도덕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보면, 이 힘에의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 배후에는 3가지 힘이 감춰져있다. 즉 (1) 강하고 독립적인 자들에게 반대하는 무리본능(2) 탁월하고 행복한 자들에게 반대하는 실패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본능 (3) 예외적인 존재들에게 반대하는 평범한 자들의 본능이 그 힘들이다. 잔인성, 허위, 편협이 이 운동을 지속되도록 했을지라도, 이 운동에 따른 이점은 아주 컸다. (왜냐하면 도덕과 삶의 근본본능과의 투쟁의 역사가 그 자체로 지금까지 지상에 있었던 최대의 비도덕성이기 때문이다.)

 

2. '도덕을 문제삼는' 것은 왜 드문 일인가? 우리에게 익숙해서 문제로서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어떤 게 있나?

(p212_#275) 우리가 실제로 안주해있고, 친숙하게 길들여져 온 것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밖에 할 수 없는 드문 일이다. 우리 눈의 초점이 거기에 제대로 맞춰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볼때, 특히 우리 도덕에 관해 그렇다. / "모든 사람은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문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존경받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너는 해야 한다"는 문제. 이것은 성적 충동처럼 본질을 알지 못하는 충동인데, 이 충동은 단죄되어서는 안되고 거꾸로 다른 충동의 가치를 측정하고 심판하는 것이 되고 있다. / 평등의 문제. 우리 모두는 탁월함을 욕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꾸로 타인과 똑같은 것을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이것은 극히 몰취미이고 틀림없이 미친 짓이지만, 그것이 신성하고 고급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이성에 반하는 모순은 거의 무시된다. / 자기희생과 자기부정 뛰어난 일로 간주되고 있다. 도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려는 시도와 도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믿음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일로 간주된다. / 생명과 행복을 무시하고 포기하는 것도 뛰어난 일로 간주되고, 자신의 가치정립을 완전히 단념하고 모두가 동일한 단념을 하도록 엄격히 요망하는 것도 그와 같이 간주된다. "행위의 가치는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이 가치평가를 따라야 한다."

 

3. 도덕은 어떻게 정언명령자, 일원적 형이상학, 무리본능이 되었나?

(p213_#275) 우리는 여기서 어떤 권위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만약 인간이 이 권위 앞에서 자존심을 다치지 않길 원한다면, 이 권위는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 높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말하고 있는 권위는 바로 신이다! / 신은 자신을 심판할 존재를 갖지 않는 무조건적 구속력으로서, 하나의 '정언명령자'로서 필요했다. 혹은 이성의 권위가 믿어지고 있는 한에는, 이 같은 견해를 논리적으로 만들어줄 '일원적 형이상학'이 필요했다. / 그런데 신에 대한 믿음이 소멸하고 있다면, 다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말하는가?" 나의 대답은, 형이상학에서가 아니라, 동물생리학에서 얻어진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은 '무리본능'이다. 무리본능이 지배자가 되려고 욕구하고, 따라서 무리본능이 "너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무리 본능은 개인을 정체의 의미 속에서만, 정체를 위해서만 승인하려고 한다. 무리본능은 전체에서 이탈하는 자를 증오하고, 모든 개인의 증오를 그런 자에게로 돌린다.

 

4. 무리도덕은 예외적인 존재(강자. 자기입법자, 주권적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p214_#276) 보다 높고 예외적인 인간들의 불행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만드는 특징들(*강자의 특이성)이 모두, 그들의 의식에 '자신들이 왜소하고 터무니없는 존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강함이야말로 페시미즘적 우울을 낳는다. 무리처럼 평균적인 사람들은 의문도 양심도 갖지 않고 그냥 즐겁다. (강자의 우울의 예는 파스칼과 쇼펜하우어가 있다.) 무리에게 위험스럽게 보이는 자질일수록, 더욱 철저히 무리의 비판을 받게 된다.

 

5. 무리도덕 가운데 정직이 왜 지배적인가? '인지될 수 있는 존재' 혹은 '인지불가능한 존재'란 무엇인가?

(p214_#277) 무리안에서 '정직'의 도덕이 지배적이다. "당신은 인지될 수 있는 존재여야 하며, 자신의 내면을 분명한 신호로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위험스런 존재이다. 또한 당신이 악한 존재라면, 자신을 위장하는 능력이야말로 무리에 대해서는 가장 나쁜 것이다. 우리는 은밀하고 인지하가 어려운 자들을 경멸한다. 따라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인지될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신체를 숨기고 있어서는 안되며,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서도 안된다." 따라서 정직성의 요구는, 인격은 인지될 수 있는 것이자 고정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사실, 무리의 성원이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특정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문제(*목표)이다. 교육은 먼저 이 믿음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정직성'을 요구한다. 

(p215_#278) 무리 혹은 집단 내부에서, 말하자면 동류 사이에서 '정직'이 과대평가받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있다. 자신이 속지 않는 것, 남을 속이지 않는 것, 그것이 무리도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일종의 상호의무이다. 밖을 향해서는 기만에 주의하도록 요구되는데, 그것을 위한 심리적 선결조건으로 안을 향해서 불신이 정직의 원천으로 요구된다. (*외부를 향한 정직의 요구 = 내부를 향한 불신의 요구)

 

6. 무리도덕에서 이런 가치들이 만연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p215_#279) (1) 확신 (2) 숭배 (3) 진리감각 (4) 동정 (5) 판단의 비당파성(방관적, 객관적) (6) 정직성 (7) 관용)

 

7. 다수자는 누구이며, 소수자는 누구인가? 무리도덕에서 평균인(평범성)은 왜 소중한 가치인가?

(p216_#280) 무리본능은 중간의 것과 평균적인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것은 다수자가 살아가고 있는 장소이며 다수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 그래서 무리본능은 모든 위계의 반대자가 되고, 아래로부터 위로의 상승대다수자로부터 최소수자로의 하강이라고 여긴다. 무리는 자기 이하의 것이든 자기 이상의 것이든, 예외자를 자신을 적대하고 위해할 그 무엇인가로 느낀다. 상위를 노리는 예외자, 보다 강하고 보다 힘있는, 보다 현명하고 보다 풍요로운 자들을 다루는 무리의 솜씨는 이자들을 설득하여 자신들의 수호자ㆍ목동ㆍ파수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무리는 위험을 이익으로 바꾸어버린다. 중간에 있으면 공포가 없어지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과 동료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호해받을 여지가 거의 없으며, 여기에는 평등이 있고,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비난받아야할 것으로가 아니라 정당한 존재로 자각되며, 여기에는 만족감이 지배하고 있다. 불신은 예외자에 관한 것이며, 예외자가 되는 것은 죄인으로 간주된다. 

(『도덕의 계보』 1:16) 다수의 특권이라는 원한의 낡아빠진 허위적 구호에 대해서, 인간을 저열하게 만들며 평균화시키고 몰락으로 가져가는 의지에 대해서, 소수의 특권이라는 무섭고도 매혹적인 반대구호가 강력하게 울려퍼졌다!  

 

8. 성직자들은 어떻게 무리동물을 병들게 하는가?

(p219_#283) 육체와 정신에서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 이것은 아름답고 긍지를 지닌 쾌활한 영혼에 대한 추잡한 영혼의 반역이다. 반역의 수단은 아름다움, 긍지, 환희의 경멸이며 '아무런 이익이 없다'거나 '위험이 극히 크다. 전율하며 불안을 느껴야 한다'거나 '자연성은 악이다, 자연에 반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성에 반항하는 것도' 등등의 주장이다. (반자연적인 것이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려진다) / 이런 상태를 이용하여 '민중'을 자기편으로 획득하는 것은 역시 성직자들이다. 신은 '의인'보다 '죄인'을 더 기뻐한다. 이것이야말로 '이교사상'을 상대로 한 투쟁이다. (양심의 가책은 영혼의 조화를 깨뜨리는 수단이다.) / 예외자에 대한 평균적인 자의 증오. 독립자에 대한 무리의 증오. '이기주의'와 반대인 '타인을 위하여'만이 가치를 갖게 된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지배욕망에 반대하고 대개는 '지배'라는 것에 반대한다. 특권에 반대한다.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 자유정신, 회의자에 반대한다. 철학(도구가 되어 만족하는 본능과 대립하는)에 반대한다. 철학자 자신에게도 '정언명렁'이 엿보이며, 도덕적인 것의 본질은 '보편타당'이라고 간주된다. 

 

9. 무리도덕(평등을 추구)과 강자의 도덕(위계를 추구)

(p220_#284) 위계에 대한 무리의 불구대천의 적의. 무리본능은 평등을 만들어내는 자들에게 유리하다. 모든 강자(주권자들)에 대해 무리는, 적대적이고 부당하고 절도가 없으며 불손하고 뻔뻔스러우며 무정하고 비겁하며 거짓되고 냉혹하고 질투가 심하고 복수욕에 불탄다. 

(p220_#285) 나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무리는 하나의 유형을 견지하려고 시도하며, 스스로를 양쪽으로부터 방어한다. 무리유형으로부터 쇠퇴하는 자(범죄자 등)에 대해서도, 무리유형 이상 고양하는 자에 대해서도 맞선다. 무리본능은 정지와 보존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아무런 창조적인 것이 없다. / 선량하고 친절하며 올바른 자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쾌적한 감정(위대하고 새로운 인간이 낳는 긴장과 공포와는 반대인)은, 우리의 개인적인 안전과 평등의 감각이다. 그때 무리동물은 무리본능을 찬미하며, 이어서 자기 자신에게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의 판단은 아름다운 낱말의 가면을 쓰고, 이리하여 '도덕'이 발생한다. 그러나 무리가 모든 진실한 인간들에게 품는 증오를 관찰하라!

(p221_#286)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하자! 당신의 마음 속에서 도덕적 명령을 이타주의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무리에 속한 자이다. 반대로 사심없고 이타적인 행위에서 위험과 파멸을 본다면, 당신은 무리에 속한 자가 아니다.

(p221_#287) 나의 철학은 새로운 위계를 겨냥하고 있다, 개인주의적 도덕을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무리의 감각은 무리 속에서 지배해야 하며, 그 이상 손을 뻗쳐서는 안된다. 무리의 지도자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평가를 필요로 한다. 독립적인 개인이나 야수들이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3. 도덕적인 것의 일반  :: 도덕적인 것의 일반적 형태들 

 

1. '자유의지' 이론은 무엇이며, 니체는 왜 비판하나?

(p222_#288) 인간적 긍지를 회복하는 실험으로서의 도덕. '자유의지'이론은 반종교적이다. 이 이론은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높은 상태나 행위의 원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는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하려고 의욕한다. 그것은 계속 증대하고 있는 긍지의 한 형식이다. / 인간은 권력과 행복을 느낄 때, 권력과 행복 뒤에 어떤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덕(*도덕)이란, 강력하고 고양된 행복의 감정에 선행하는 과거 또는 현재의 어떤 의지를 가정하는 실험이다. 즉 어떤 행위를 하려는 의지가 의식에 나타난다면, 힘감정은 이 의지의 결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심리학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의욕된 것으로서 우리 의식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다'(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우리의 일이 아니다)는 잘못된 전제 아래 있다. 모든 책임론은 '의지만이 원인이며, 자신을 원인이라고 믿으려면 의욕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의지가 유일한 원인이고,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여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의도했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는 유치한 심리학에 기초해 있다. / 반대운동이 나타나는데, 도덕철학자는 '의욕(의도)한 것에 대해서만 사람은 책임을 갖는다'는 동일한 선입견에 붙잡혀있다. 인간의 가치는 도덕성이 제일원인이어야 하며, 따라서 제일원인으로서의 '자유의지'가 인간 속에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항상 저의가 숨겨져 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서 제일원인이 아니라면, 인간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으며, 따라서 도덕의 법정으로 소환되는 일도 없으며, 덕이나 악덕은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될지도 모른다.... / 요약하면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존경심을 품을 수 있으려면, 인간은 악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223_#289) '자유의지' 도덕의 결과로서 배우적 연기. 자기 자신이 높은 상태(완전성)를 가져온 원인이라는 믿음은, 힘감정의 발달에 있어서의 일보전진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이 상태를 의욕했던 것이라고 속단했다. / (비판. 모든 완전한 행위는, 무의식적인 것이며 더이상 의욕된 것이 아니다. 의식은 불완전한 종종 병적인 인격상태를 나타낸다.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의식성)으로서 변증적 추론으로 여겨지는 인격의 완전성은, 하나의 캐리커처이며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아무리 강한 의식이라도 완전성은 불가능하다. ...... (*완전성은) 배우적 연기의 형식이다. 

(p223_#290) 도덕적 가설의 허구성 :: 신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한 도덕적 가설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악은 자유의지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며(이것은 단지 선이 자유의지에 기초한 것임을 믿도록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재해와 고통은 구원의 목적이 있다.' / '죄책감' 이라는 개념은 생존의 궁극적 원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처벌'이라는 개념은 교육적 은총, 따라서 선한 신의 작용으로 여겨진다. / 도덕적 가치평가는 그밖의 모든 가치평가를 억누르는 절대적 지배이다. 즉 '신이 악일 수는 없으며, 어떤 유해한 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의심되지 않았다. 바꿔말하면, '완전성'은 단지 도덕적 완전성으로만 이해되었다.

 

2. 행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p224_#291) '행위의 가치는 의식 속에서 그것에 선행하는 것(*기원, 의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허위인가! 또한 도덕은 범죄성과 마찬가지로 이 가정 위에서 평가되었다. / '행위의 가치는 그 결과(*유용성)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공리주의자는 말한다. 행위의 가치를 기원에 따라 측정할 경우, 그 기원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드러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다섯걸음 정도까지는 그러하리라. '무엇이 어떤 행위에 불을 당겨 타오르게 하고 반발하게 만드는가'를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공리주의자는 유치하다. 결국 우리는 먼저 '무엇이 유용한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재해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커다른 경제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재해: 공항, 상품파괴 등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자본주의 경제) / 기원을 알 수는 없다, 결과를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행위는 애초에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 남아있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이다. 행위에 수반되는 의식상태들(*감정), 행위의 수행에 따르는 긍정 또는 부정, 행위의 가치는 그 행위에 수반되는 주관적 의식상태에 있는가? (이 경우, 음악의 가치를 그것이 우리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작곡가에게 안겨주는 쾌나 불쾌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행위에는 예컨대 힘감정이나 강제감이나 무력감이라는 가치감정이, 자유라든가 경쾌가 명백히 동반된다. 물음을 바꾸면, '행위의 가치는 과연 그 행위가 완전한 삶의 표현인가, 저지된 삶의 표현인가'라는 생리학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행위에 수반되는 감정 가운데에는 행위의 생물학적 가치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 따라서 어떤 행위가 행위의 기원, 행위의 결과, 행위에 수반되는 감정에 따라서도 평가될 수 없다면, 행위의 가치는 미지수x가 되어야 한다....  

(p225_#292) 행위를 인간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도덕의 자연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죄'에 증오나 경멸을 보이는 것도, 그 자체로 선이고 '악'인 행위가 있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 '자연'의 회복. 행위 그 자체는 가치면에서 비어있으며, '누가 행위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동일한 '범죄'도, 어떤 경우에는 최고의 특권이며, 어떤 경에는 치욕이다. 행위(실행)를 자신과의 이해관계에서 해석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의 이기심이다. 

(p225_#293) '비난받을 행위'라는 개념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대게는 발생하는 모든 것 중에 그 자체로 비난받을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하고 바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느 것도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잇으므로, 무언가를 배제하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대체로 세계를 비난하는 것과 동일하다... / 그런데 그 때조차도, 비난받을 세계 속에서는 비난한다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 될 것이 틀림없다. .... 따라서 모든 것을 비난한다는 사고방식의 귀결은, 실제로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생성이 하나의 거대한 고리라고 하면, 어느것도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영원하고 필연적이다. 예와 아니오, 선호와 혐오, 사랑과 증오의 모든 상관관계 속에는 삶의 특정유형의 어떤 퍼스펙티브와, 관심이 표현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것 자체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das Ja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미덕이 지배하게 되었는가?  :: 무리의 미덕Tudend과 강자의 비르투Virtu 

 

1. 미덕은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나?

(P235_#310, 311)

 

2. 도덕성은 비도덕성의 한 형태이다!? (*진리는 오류의 한 형식이다.) 이러한 통찰은 왜 해방감을 주는가?

(P234_#308) 도덕은 지상의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비도덕적이다. 도덕성 자체는 비도덕성의 한 형태이다. 이 통찰이 가져오는 커다란 해방감. 사물 가운데서 대립은 멀어지고, 모든 사건에 있어서 동질성이 구원되고 있다. 

 

3. 무리동물의 미덕Tudend과 강자의 비르투Virtu ​는 어떻게 다른가?

(p239_#317) (p244_#327)

 

4. 미덕의 정당화, 미덕에 의한 미덕의 자기극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p244_#326) (p245_#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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