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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마리X기획세미나 후기]

시간이 쌓이면 인생이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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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놀던 겨울이 끝나고 봄, 딴짓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마저도 그리 건전한 시작은 아니었다. 세미나 이름부터 일은 때려치우고 딴짓이나 하자는 뜻으로, 지난겨울의 태만과 음주가무가 숙취처럼 남아있는 세미나였다. 일이라는 주제로 다섯 권을 읽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일은 XX같다. (『불쉿잡』), 일은 적게 할수록 좋다. (『오버타임』), 일하느니 노는 게 더 낫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우리 모두 제발 게을러지자.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를 권리』) 겨우내 미뤄둔 일에 덜미를 잡혀 일터로 끌려가던 나는 열변을 토했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달라고, 일하기 너무 싫다고. 그 항변이 쟁쟁 울리던 세미나실 밖엔 전시가 한창이었다. 일하고 싶다고, 일할 권리를 달라는 콜텍 해고노동자를 그린 전시, 전진경·치명타의 ‘멋진 하루였어’다.

지난 한 달, 한쪽에선 일하지 않을 권리를 한쪽에선 일할 권리를 말했다. 전시 일정과 세미나 일정이 맞아떨어져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이 난감한 공존은 일에 대한 나의 가장 정확한 감정이다. 지금이야 근무 태만이 목표지만,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내게 일은 삶이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이냐는 물음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라는 뜻이었고, 나는 고르고 고른 ‘내 직업’으로 ‘내 삶’을 펼칠 날을 기다리며 수십 장의 자기소개서를 썼다. 눈물 나게 일하고 싶었다. 그레이버의 뼈아픈 지적처럼 의미도 있고 생계도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 내가 갖고 있던 건 시대착오적인 낭만이란 사실을 깨달을 무렵, 나는 눈앞에 주어진 일자리를 붙잡았고 생계의 세계에 던져졌다.

그로부터 시작된 질병의 역사. 일을 시작한 첫 주, 목 디스크가 왔다. 생전 겪어본 적 없던 편두통이 찾아왔고, 날 부르는 소리에 신물이 났는지 외이도에 염증이 생겼다. 말 그대로 귀에서 피고름이 흘렀다. 일은 더는 생계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적성에 맞았다. 재미도 있었다.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일에서 얻는 재미는 드물고 짧았다. 잠깐의 도취 뒤엔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내고 부름에 답하는 긴 시간이 밀려왔다. 매일 8시간 매주 40시간. 이 시간을 버티고 나면 편안히 나이들 집 한 칸 구할 수 있을까. 이 시간을 버티고 나면 언젠가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 나는 일을 놓지도 끌어안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20시간째 일할 땐 당장에라도 때려치울까 싶다가도, 가족을 떠올리면 누구보다도 일할 권리를 부여잡고 싶어진다. 일을 둘러싼 그 혼란과 동요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갈증이 있다. 시키는 일이 아닌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 소모되는 삶이 아니라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 그러니 일할 권리를 말할 때도 일하지 않을 권리를 말할 때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간결한 한 마디를.

시간이 쌓이면 인생이 되는 법이니까. 다섯 권의 책에서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았던 문장이다. 시간이 쌓이면 인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돈과 일자리가 아니라 내게 삶을 달라고. 함께 웃고, 울고, 떠들면서 취기와 웃음소리로 고양되는 삶,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시간이라고. 지난 한 달 세미나실 안팎을 가득 메웠던 외침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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