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아의 철학과 코뮨주의
‘나’가 사라지면서 ‘함께’라는 것이 살아나는 것
1. 경이: “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가?”
근대 과학자들이란 당혹감에 빠지지 않는 존재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고 믿고 그 법칙에서 벗어나면 환상이나 환각, 착시로 치부한다. 그들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 〈솔라리스〉에서 과학자들은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솔라리스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들의 상식을 너무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2. 인식: “레아는 누구인가?”
레아는 10년 전 자살한 크리스의 아내다. 솔라리스에 도착한 크리스는 죽은 아내와 꼭 닮은 여인을 만난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고 괴로워하지만 나중에는 과학자로서의 합리성을 버리고 여인을 아내라고 확신한다. 이는 동료 과학자 사르토리우스가 여인을 중성미자로 이루어진 비인간으로 파악한 것과 대조된다. 아내가 아닐 터인 여인이 아내와 같은 모습, 같은 느낌, 같은 변용을 야기하고 아내와 같이 행동한다면 아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결론지었다는 점에서 크리스는 하나의 문턱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분석적 사유와 대비되는 이러한 변용적 사유는 과학자의 세계와 사뭇 다른 세계를 연다.
3. 존재: “솔라리스란 무엇인가?”
솔라리스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포함하는 하나의 거대한 실체다. 즉, 능산적인 자연이자 소산적인 자연인 자연이다. 솔라리스의 손님들은 솔라리스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자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과학자들 자신이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체를 만들어내는 마음이란 사방과 팔방,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이어지는 마음의 집합이다. 그 마음들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마음으로서 솔라리스는 존재한다.
4. 윤리: “솔라리스의 ‘손님’들은 상인가 벌인가?”
손님들은 과학자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에게는 벌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는 상이다. 좋고 나쁨의 분별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상일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와 상생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와 너 구분 없이 함께 어울려 사는 코뮨주의는 이러한 상생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한다.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상생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대극에는 오직 나만을 위하는 개인주의가 있다.
5. ‘나’의 죽음, 혹은 인간의 죽음
레아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다 못해 홀연히 사라진다.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완성하는 상생은 상생 윤리학의 극치다. 그에 앞서 물리학자 개버리언도 자살한 바 있다. 이는 한 과학자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밀어붙이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던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이라는 특권적인 이름을 내던지고 자연의 품인 솔라리스로 돌아간 셈이다. 한편 인간의 문턱을 넘은 크리스 역시 인간의 땅 지구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레아를 따라 솔라리스의 바다 한가운데로 간다. 그곳은 그의 마음이 만드는 세상이며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