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노동’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나는 내 일터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오랜 기자 공채에 지쳐 얼마전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했다. 사무실 맨끝, 프리랜서란 이름으로 얻어낸 칸막이 책상 하나. 책상 앞에 설 때마다 지난날 내게 쏟아졌던 ‘노동자’의 조언들이 다시 생각났다. 친한 오빠는 정말 걱정스럽게 말했지. “네가 100을 할 줄 알면 회사에선 80만 해야 하는 거야”
문제는 내가 20을 덜어내려 애쓰는 데 더 스트레스 받는 인물이라는 거다. 빈 곳을 보면 채워야 직성이 풀리고, 할 일이 없으면 뭘 빠트렸나 불안하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내버리긴 싫다. 차라리 속편히 100을 하는 게 낫지. 결국 나는 자발적 착취의 길을 택했다. 다행히 방송작가 일은 재밌었고, 나는 일과 라이프의 경계를 맘껏 지워버리며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달을 쏟아부은 첫 방송이 올라가던 날. 나는 술을 진탕 마시고 펑펑 울었다.
서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낯설었다. 취재란 단어도 정식 작가란 이름도 없이(막내니까) ‘보조작가’란 이름으로 올라가는 자막과 지난 한달간 살을 씹어가며 입에 문 단물 같은 시간의 괴리감. 깨지고 가다듬고 다시 부딪쳐가며 쌓아온 시간과 최저시급을 겨우 맞추는 용역계약서. 그 격차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도대체 이게 뭐지, 도대체 이걸 어쩌지.
그리고 지금 나는 마음에 은근한 울화를 품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빛나는 내 열정이 몽땅 저 거대자본의 잉여가치로 넘어갔겠구나. 사무실을 걸어다니는 관리직의 뒤태를 노려보며, 아 저 자본의 기생자. 이젠 나도 80이 아니라 60만 하는 영리한 노동자가 되리라. 하지만 결국 또 100을 하고야 말고, 방송이 나갈 때마다 화병만 심해지고 있다.
일에 빠져들면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될까 늘 불안한 마음. 이 일을 계속해볼까 싶으면서도 월급만 보면 솟구치는 탈출욕구. 조금 더 나은 위치로 올라 보겠다고 여전히 놓지 못하는 공채 준비.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책상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내 진심도 모두 마모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텅빈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열병처럼 앓고 있는 첫 ‘노동’을 세미나에서 풀어내고 있다. 내 마음속 노동과는 아득히 멀어보이던 ‘노동’, 이해할 수 없던 그 까마득한 격차를 이 책을 덮고 나면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권을 끝내고 나면 또 두꺼운 수수께끼집을 던져버리는 게 수유너머인지라 기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이어질 한 움큼의 문장을 쥘 수 있길, 함께 읽는 선생님들의 의욕에 기대, 어쩔 줄 몰라 멈췄던 그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뗄 수 있길. 그러다보면 언젠가 100을 쏟고도 울화 없이 살 수 있는 노동의 자리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