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라는 사람에 대해, 니체의 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마음을 먹고 니체에 대해 공부한 것은 이번 수유너머 니체 세미나가 처음이었습니다.
니체 세미나를 처음 신청할 때, 혼자서는 읽기 힘든 니체를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첫 번째 책 읽기를 마치고
두 번째 책 읽기를 시작하려는 지금, 제 마음과 생각은 처음보다는 많이 복잡합니다. 그 복잡한 마음을 조그미나마 글을 통해 정리하고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첫 번째 책 읽기 과정을 매듭짓고, 다음 책 읽기 과정을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또, 그동안 다른 세미나 참석자분들께서 올려주신 후기를 읽으면서 저도 생각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나에게 묻는 질문1. 나는 왜 니체 세미나를 신청했을까? 니체 세미나, 니체 읽기(공부)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니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처음에는 니체와 니체의 철학에 대해서 더 자세히,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에 참석해서 책을 읽고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니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 나의 현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니체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끄는 니체 철학의 매력은 무엇일까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은 아마도 세미나를 하고 니체를 공부하는 동안 계속하게 될 거 같습니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순히 니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제 사유의 흐름, 사고방식, 그리고 삶의 태도를 점검하고
바꿔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니체 철학을 깊이, 정확히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석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 책(텍스트)과 제 삶 사이의 간극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하면서 "텍스트 기반 토론을 진행하세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텍스트에 기반한 토론은도대체 뭘까? 철학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
하는 게 가능할까? 때때로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좋고, 철학 텍스트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번 세미나 전반부 시간을 통해서 텍스트에 기반한 토론의 텍스트는 꼭 철학 텍스트가 아니라 제 삶이라는 텍스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철학 개념을 내 삶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보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철학 개념을 더 깊이, 풍부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다소 낯선 과정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개념을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을 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삶과 분리된, 관념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내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철학 공부를 위해 꼭 필요한 단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은 세미나 시간을 통해서는 니체의 텍스트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니체의 철학이 제 삶에 선물하는 울림을 온몸으로 느껴보려고 합니다.
## 비개체적, 비인격적 실험과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개념을 머리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삶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공부하면서, 저에게 '나'라는 독립적 개체, 실체로서의 '나'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끊임없이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구분하려고 하고, 나의 진짜 욕망과 주입되거나 부과된 가짜 욕망을 구분해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순전히, 100%, 진정한 나의 욕망을 찾고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니체는 그러한 집착이 다다를 수 있는 곳은 '수동적 니힐리즘'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저도 그 점을 지금은 '머리'로만 아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제가 중요합니다.
눈으로는 니체의 책을 읽고 머리로는 영원회귀라는 개념과 비개체성, 무구한 차이와 생성의 흐름을 생각하고, 입으로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저는 저라는 인간의 실존, 소멸,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두렵고 무섭고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니체를 공부하면서도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니체를 읽고 열심히 제 삶 속에서 그런 사유와 실천의 괴리,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욕망은 니체가 ‘거리의 파토스’라는 말로 표현했던 차이의 열정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차이의 열정은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의지하는 열정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과 다른 새로운 것을 욕망하는 것, 즉 욕망함 그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이론에서 순응주의를 제거하고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로서 욕망을 정의하는 것이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진은영), 208-209쪽
니체 공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가 욕망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 그 자체를 욕망하며 생성을 무한히 긍정하는 삶의 태도를 익혀가고 싶습니다.
니체를 공부하고 니체적 삶의 태도를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다른 모든 삶의 가치관이나 태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저에게 분명한 것은 니체 읽기가, 니체적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까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함께 배워나가면 좋겠습니다. ^^ 다음 세미나 때 건강하게 뵙겠습니다!
하하하 이런 자발적인 후기야말로, 주권적 개인, 자기입법자의 행위로서 '니체적'이라 할만 하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휴셈하게 된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그리고 해의 말대로 책 한권을 정리하는 의미로도 충분한 후기예요 ^^
1. "이번 세미나 전반부 시간을 통해서 텍스트에 기반한 토론의 텍스트는 꼭 철학 텍스트가 아니라 제 삶이라는 텍스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
해의 이런 생각은 니체의 근본텍스트(Grunt Text)를 연상시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7장 #230에서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것, '자연적 인간'을 근본텍스트"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도덕이란 근본텍스트에 대한 조잡한 해석이라고 합니다.
근본텍스트 - '자연적 인간'은 '도덕적 인간'과 대결하는 말이면서, 힘에의 의지(생명)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형상입니다. 즉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번역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나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가운데 하나로서 '힘에의 의지'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근본텍스트Grunt Text로서 '힘에의 의지'가 돌아오는 것이며,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에 대한 매번 다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도덕적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자연적 인간) 앞에 서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은 생소하고 미친 과제일 수 있지만, 왜 우리는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과제를 선택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인식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과제를 할 목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인식(학문, 철학을 포함하여)이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는 인식/학문/철학에 대한 니체의 분명한 태도가 있습니다! 니체에게 철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식론으로 변질된 철학에 대한 니체의 경고와 맞닿아있습니다. [선악의 저편 6장 #204, 205] 여기서 니체는 학문의 지배와 철학의 침몰을 말하고 있는데, 학문이 가치를 상실하고 철학조차 인식론으로 변질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철학자들의 최대위험이, 철학에서 가치가 분리되고 앎과 삶이 분리된 것이라고 합니다.
2. "하지만 여전히 저는 제가 중요합니다. ...... 그래서 때때로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니체를 공부하면서도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요." -해
니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텍스트 곳곳에서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이때 '현재의 나'를 넘어 '되기를 통해 만나게 되는 나'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0^ 그렇게 현재의 나를 넘어서려는 존재를 '강자'라고 부르고, 현재의 나를 넘어 새로운 나로 생성되는 과정을 '위버멘쉬-되기'라고 하지요. 이렇게 나를 넘어서 새로운 나를 생성하는 모든 과정에서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극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한 '자기극복'이지요. 여기서 니체의 '자기극복'이라는 철학적 테마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나를 넘어서는 출발을 현재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라고 해요. 부끄러움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정직함을 드러내는 표시인 거지요! 니체는 '정직'을 자기극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말하는데, 부끄러움은 이러한 정직의 처음감정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나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는, 자기한계를 인정하지도 자기극복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 해님이 니체공부를 하면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축하하고 싶어요. 특히 해님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