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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를 처음 읽게된 것은 이진경 선생님의 교양 강의를 듣게 되면서였다. 그게 8년 전이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생님이 두 분인데, 철학으로는 이진경 선생님이고 문학으로는 서대경 선생님이다. 두 선생님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겉과 속, 말과 행동, 실체와 양태(?)가 항상 일치된 듯한, 어딘가 '스피노자적'인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마치 '카프카적'이라거나 '니체적'이라는 말처럼 수사법에 어울린다.
스피노자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본다. 개체 본연의 코나투스에 충실한. 다만 그 충실함이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위화감도 불편함도 그 발생량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게 자연스러운 삶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발생량을 최소화하지 말고 발생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의 한쪽 극단에 자살이 있다. 이 화제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께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배웠다. 말과 글과 삶이 합치된 듯한 분위기, 혹은 코나투스를 배웠다.
2주차 모임의 발제문에서 내가 스피노자의 개념을 사용한 방식은, 발제문 발표를 하면서도 밝혔듯, 스피노자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그 개념을 스피노자적으로 전유한 것에 가깝다. 내게 공부란 내가 읽고 싶은대로 읽고 이해하고 싶은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지인 중 한 명은 나의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너는 대학원 공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돈과 시간으로 여행을 계속 다니며 글을 쓰는 게 낫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코로나를 비롯한 여러가지 사정이 아니었다면 아마 노마드적 삶을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철학이나 미학이 아닌 문학을 선택한 것이 최선의 합의점이었으며, 내가 글쓰기를 통해 생산하려는 것은 픽션(시든, 소설이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픽션이 아닌 방식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 나의 독선과 편견은 꾸준히 사람들과 교류하고 나아가 변화해야만 그나마 봐줄 만한 수준을 유지할 것 같다. 나눴던 대화 중 여러 인상 깊은 것들이 있었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 도중, 보들레르의 시 <형편없는 유리 장수>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시의 화자는 왜 "삶을 아름답게! 삶을 아름답게!"라고 외쳤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그 대사 직전에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장면에 대한 간결하고 아름다운 묘사가 있다고 대답하며, 비산하는 유리들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장면을 떠올리고 설명했는데, 다시 시를 읽어보니 시 속에 그러한 시각적 이미지는 없었다. 유리가 깨지는 장면에 대한 보들레르의 묘사는 "수정궁 하나가 벼락을 맞아 파열하기라도 하는 듯 찬란한 소리가 났다"인데, 나는 이 시에 대한 이미지마저 내 방식대로 전유하여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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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 대해, 나는 모임에 다소 늦게 도착하여 앞부분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던 것은 데카르트에서 우리는 진리─윤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스피노자에서 윤리─아름다움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데카르트, 스피노자)이 도달한 종착점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공동체를 생각함에 있어서, 정치를 생각함에 있어서, 일관된 나의 주장은 진리─윤리만큼이나 그것들의 곁에 붙어있는 아름다움의 흔적을 생각하는 일의 중요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