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변증법
변증법이란 세계/사물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는 사유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곧 외부에 의한 사유, 외부성의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성의 사유는 유물론적 세계관입니다. 어떤 것도 정해진 본질은 없으며 외부(조건/관계/배치/편제)가 달라지면 본질도 달라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철학도 유물론적 인식론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연기적 조건에 의해 만물을 설명합니다.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변화 그 자체만이 본질이다 라는 불교철학적 관점과 거의 똑같습니다. 하지만 불교에도 여러 종파(학파)가 있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답변을 오라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요? 차이 그 자체만이 본질이잖아요. 왜 이렇게 다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걸까요?
맑스가 왜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고 했는지가 이번 세미나에서 저의 가장 큰 궁금증이었습니다. 정-반-합.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변증법인데요.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모두 세상이 변화/발전을 하며 나아간다는 말을 하기에, 언뜻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헤겔은 이 모든 것들이 절대정신이라는 목적을 향해 가는 변화/발전입니다. 그건 동일자(절대목적)을 향한 사유(성욱샘의 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이행의 사유, 과정의 사유입니다. 닫힌 결말이 아니라 열린 결말이라고나 할까요.(김피디의 말)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교, 화엄의 철학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불교철학(역사)에 관한 입문으로 추천도서가 있을까요? 불교철학의 전체적인 역사를 보고 싶어 졌습니다.
당파성(퍼스펙티브)
이번 세미나의 하이라이트 토론주제였습니다. 논쟁을 하다보면 끝에 가서 너도 맞고 나도 맞다라는 대책없는 상대주의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저만의 경험이 아닌, 많은 세미나원들의 공통 경험이었는지 ‘당파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우리가 읽는 고병권 선생님의 이 책에서도 저자 자신이 보편지식을 말하고 있다라는 제스처를 내려놓고 ‘나의 독서는 나의 독서다’라는 자신의 당파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판단은 내 판단이다’라고 말했던 니체를 패러디 한 고병권샘이라고 합니다. 나=고샘 광팬! 독자가 아니라 팬. 그러면 ‘종교성’인데 틀린 태도일까요? ^^)
오라클 선생님의 정리는 이렇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로 봐선 아니된다. 당파성(페스펙티브)에도 위계가 있다. 높은 위계 낮은 위계. 현체재를 개선의 관점에서 보는가, 이행의 관점에서 보는가. 세계를 존재의 관점에서 보는가, 생성의 관점에서 보는가. 그러면서 ‘기본소득정책’은 어떤 위계에 해당하는지 토론에 부쳐졌습니다.
여기서 ‘개선’은 수정주의, 절충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말과 상통하겠지요. 보수적인이유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일테고요. 세상이 전격적으로 바뀌는 걸 거부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행’은 다른 세계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역사적 이행의 긍정! 세계를 존재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은 불변의 본질을 찾는 <본질의 철학>을 말하는 것 같고요. 생성은 변화/차이/외부를 긍정하는 <생성의 철학>이 되겠지요?
오라클 선생님 강의안에 적혀 있는 니체의 문구들로 후기를 마칩니다.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선악의 저편]
오직 퍼스펙티브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도덕의 계보]
진리란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덕의 계보]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고, 이 세상의 기원은 우리 안에 있다 [힘에의 의지]
내 판단은 내 판단이다 [선악의 저편]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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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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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물론 혹은 외부성의 다양한 변주
불교철학 "변화 그 자체만이 본질이다" 혹은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만이 본질이다" 혹은 이진경의 "모든 것은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 혹은 외부성에 대한 다양한 변주입니다. 이들 사유가 공유하는 출발은 이것입니다. "어떤 것도 고정된 본질은 없으며, 오직 '본질 없음'을 자기 본질로 가질 뿐이다."
"왜 이렇게 다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걸까요?" 유택이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니체의 말처럼 유택이 능선을 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산줄기에서 가장 짧은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길(*능선)이다." [차라투스트라. 읽기와 쓰기] 산을 오르기 위해서 항상 산 아래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산의 봉우리에 올랐다면, 다른 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타면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산의 어떤 높이에 오르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산과 산을 잇는 능선도 발 아래 두게 되는 법이지요. ㅎㅎ '능선'에 대한 격려는 니체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고병권샘이 해주셨던 말인데, 이제 유택에게 전합니다.
2. 불교철학(역사)에 관한 입문으로 추천도서
이것은 이진경선생님이나 정화스님께 여쭤보시면 좋을 듯...! ㅎㅎ
일반적인 불교철학의 입문도서 : [불교를 철학하다] 이진경,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선불교) 이진경
3. 누구든지 처음에는 누구의 광팬이었다! 맑스도 니체도!
"나=고샘 광팬! 독자가 아니라 팬. 그러면 ‘종교성’인데 틀린 태도일까요?" 누구든지 처음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광적인 추종에서 시작합니다. 맑스도 그랬고 니체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청년 맑스, 청년 니체도 처음에는 기성의 사유에 의존하여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겔과 맑스의 관계, 그리고 바그너와 니체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맑스와 니체가 다른 추종자와 달랐던 것은 그들은 청년기 사유의 자양분이 되었던 헤겔과 바그너를 밟고 넘어섰다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헤겔과 바그너를 넘어섰다는 표식을 우리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맑스도 니체도 더이상 헤겔과 바그너를 적대하지 않는 어떤 시기를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헤겔과 바그너가 자신들의 사유 아래 존재하는 까닭에, 이제 적대할 필요가 없게 된 거지요. 맑스가 헤겔을 희극적으로 패러디하여 헤겔의 변증법을 허구에 도달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처럼, 니체는 바그너의 현대성을 철학자가 자기시대(*현대)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합니다.
(북클럽자본 1권. 9장) 맑스. 헤겔의 희극적 패러디 > 젊은 시절의 맑스가 헤겔을 비판하면서 비장한 결별ㆍ전복을 주장했다면, [자본]을 쓸 때의 맑스가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를 자처한 것은 패러디가 아닐까.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가장 멀어지는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패러디이다. 최고의 칭송을 최고의 조롱으로 만드는 역설. 다만 역사를 비극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은 그 역사에 매이지만, 희극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은 그 역사를 벗어난다. 맑스는 헤겔을 확실히 벗어난 사람이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와 가상을 폭로한다.)
니체. 철학자는 바그너 없이 살 수 없다 > 니체는 ‘자기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면서 시대를 넘어서는 것’을 철학과제로 삼고, 바그너음악을 그가 극복해야 할 시대성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바그너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자기철학을 위해 바그너를 활용할 만큼 니체의 힘이 커진 것으로, 니체와 바그너의 힘관계가 근본적으로 역전된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철학자가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바그너 없이도 지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학자는 바그너 없이 지낼 수 없다. 현대성은 바그너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가장 내밀한 말을 하고 있다. 바그너는 현대성을 요약하고 있다.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일단은 바그너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 [바그너의 경우]
개인적으로 북클럽 1권에서 사적영역의 먹고사는 문제가 공적영역의 자유를 밀어내고 전체화 되었고 개별화된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다 설명한 전반부를 이어, 마지막 장 도시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 자본을 범인으로 지목한 플롯에 감탄했습니다.
수업시간에서 주로 논의 되었던 당파성은 퍼스펙티비즘으로 설명되었는데 17세기 이후 절대이론에서 변화된 미에 대한 개념도 이와 비슷 한것 같아 덧붙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 만약 어떤 것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이다" 브루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