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쪽~ 다수성은 권력에 의해 정의되며 소수성은 변이의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다수성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소수성을 수동적인 희생양의 자리에 놓지 않고, 오히려 변이의 가능성과 능력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늘 삶에 힘이 됩니다. 갈등상황에서 나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으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안주해버리는 그곳에서 헤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이 논의가 권력의 억압을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인정해버리거나, 정당화해버리는 방식으로 나아가면 안될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려고 하는 욕망은 아마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주는 정답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수성은 다수성의 희생량이 맞습니다. 그것조차 부인하면 안되겠죠. 다만 잉여, 즉 변이의 능력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27쪽~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이 부분을 읽을때 아슬아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마 삶에 대한 집착을 던져 버림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대한 공포, 즉 문턱에서 지금 내 삶을 멈추어야 하기에 죽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공포인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된다면 무한한 변이의 과정을 긍정하게 됩니다. 동시에 수많은 이질적인 삶을 긍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불사'라는 강한(?) 단어가 주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긍정하나 반대로 삶에 집착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죽지 않음에 집착하는 건 아닐까. 다양한 변이를 긍정한다는, 이질적인 삶을 위한 노력으로 가볍게 언급되어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을 공포가 아닌 방식으로 긍정한다는게 중요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