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질료 부분을 이해하고 싶었는데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손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후기를 담당한 김에 질료 부분을 제 나름대로 복습해본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공부는 저를 위해 하는 것이니까요.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자는 ‘만물은 하나 = 질료의 영원한 통일성 = 사물들의 변화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성’ 입니다. 일자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기엔 어려워서 제 주관적인 예시로 들어보았습니다. 바다, 나무의 생, 니체의 텍스트와 만나는 나의 니체공부. 라고 정해보았습니다.
또 일자는 다수자들과 관계해서 ‘다수자들의 영원한 흐름과 운동 = 다수자들의 영원한 생성 = 다수자들의 차이의 차이 = 다수자들의 차이의 운동’입니다.
일자가 바다라면 다수자는 파도입니다. 파도의 운동과 영원한 흐름이 바다가 됩니다.
일자가 나무의 생이라면 다수자는 나무의 성장이 됩니다. (씨앗부터 시작해 새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나무의 성장 그 자체) 운동성이므로 시간성이 포함되어 있네요.
일자가 니체공부라면 다수자는 매일 공부의 진도를 나가는 것입니다.
차이가 없는 것은 파도가 굳어있는 것이고, 나무가 정지해있는 것이고, 제가 공부를 안한 것입니다. 차이가 일정하다는 것은 파도가 일정하게 치고, 나무도 하루에 1센치씩만 자라고, 니체를 공부하는 저도 매일 특정 분량을 특정한 이해력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이가 없음’ 과 ‘차이의 고정성’ 은 자연적으로 봤을 때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차이의 차이’ 만 있습니다. 차이의 차이란 매회 다른 힘으로 파도가 치는 것이고, 어느 날엔 나무가 1센치만 자라다가 어느 날엔 나뭇가지가 태풍에 꺾여 자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느 날엔 공부를 1쪽 했다가 어느 날엔 공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차이의 차이만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차이만 있고 고정된 것은 없으므로 삶은 무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는.. 그래서 니힐리즘을 극복한다는 문장입니다. 공부한 텍스트를 내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럴거면 왜 태어났지. 여전히 불완전한 니힐리즘 상태입니다. 완전한 니힐리즘으로 좀더 다가가보겠습니다.
책에서 ‘다수자들의 차이’ 가 ‘힘’ 이고, ‘일자의 차이의 운동’ 이 ‘의지’ 라고 합니다. 이 둘을 합쳐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라고 합니다. 다수자들의 차이 (힘) + 차이의 운동 (의지) = 생성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입니다. ‘다수자들의 차이 + 일자의 차이의 운동’ 을 해석해보면, ‘파도 + 바다’ = 생성이고 힘에의 의지이고 영원회귀입니다. ‘나무의 생 + 나무의 성장 단계’ 가 만나 생성,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가 되고 ‘니체 공부 + 매일 진도 나가는 것’ 이 생성이고 힘에의 의지고 영원회귀입니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 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힘의 의지’ 가 아니고 ‘힘으로 향하는 의지’ 입니다. (의지가 힘을 의지합니다.) 예시로 보면 파도를 의지하는 바다, 성장을 의지하는 나무의 생, 진도 나가는 것을 의지하는 저의 니체공부입니다. 즉 일자가 다수자를 의지합니다.
보통 생각해보면 파도가 바다를 의지하고, 성장하는 것이 모여 나무가 되고, 조금씩 진도 나가는 것이 쌓여 니체공부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슷하게 내가 무언갈 노력해서 그게 모이고 쌓이면 내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은 뭔갈 더 추구해야 될 것 같은데. 내 인생은 뭔가 가치가 있을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불멸성과 고정성은 없으므로) 소멸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삶의 무구함과 유희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라는 말이 와닿지 않습니다.
운동과 작용이 거대한 목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성(바다, 나무의 생, 니체공부, 내 인생 등) 이 운동(작용)을 의지합니다. 이쯤되면 운동성과 목적이라는 것이 헷갈리기 쉬운데 운동성에는 목적이 없고 운동(작용) 만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의 니체 공부는 ‘니체 공부를 잘해야지, 마스터해야지’ 라는 목적성이 아니라 진도를 나가며 분량을 이해하는 과정의 유희와 쾌감만 있습니다. ‘내 인생은 소중하고 잘 살아야돼’ 라는 목적성이 아니라 내 인생이 의지하는 무언가의 작용이 있고, 그 작용을 하면서 힘의 증대로 인한 쾌감과 유희가 생깁니다.
힘이 큰 N은 니체 공부에서 제가 익혔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익혔기 때문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N-1) 얼른 다시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다른 부분들을 공부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차이의 반복에서 또 다른 쾌감과 유희를 느끼며 공부(작용) 하고 싶습니다. 저는 니체의 문장에서 무언가를 발견 할때마다 감동과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니체 공부에서 저의 힘의 증대이고 쾌감이고 유희입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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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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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런 식의 공부야말로 철학을 체험(신체의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개념은, 특히 철학적 개념은 구체적인 사례로 적용해보지 않으면 사변적이 되거나 언젠가는 먼지처럼 날아가버립니다.
무엇보다 자기 삶으로 해석하지 않는 지식은, 교양에 머물를 뿐 삶을 건강하게 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틀리든 맞든 철학적 개념을 구체적 사례로 해석하는 방식은 특히 니체철학에서는 중요합니다 ^^
또한 철학적 개념을 구체적 사례로 이해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 주는 좋은 방식입니다.
질료의 개념을 일자와 다수자의 개념을 거쳐, 바다와 파도의 사례로 이해한 것은 '적절한 해석'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니힐리즘을 연결하는 사유의 긴장감도 멋지다고 생각해요!!
먼저, 일자와 다수자의 개념은 잠재성과 현행화의 관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거대한 '잠재성'이라면, 그때그때의 파도는 바다가 '현행화'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다가 거대한 '흐름'이라면, 그때그때의 파도는 바다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시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지요.
한편, 이러한 일자와 다수자의 개념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실체)과 소산적 자연(양태들)의 관계와 일치하지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산출하는 자연)은 '실체로서의 자연'입니다. 모든 것을 생산하는!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산출되는 자연)은 '양태들의 집합으로서의 자연'입니다. 생산된 모든 것들!
바다와 파도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자연도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되는 자연은 하나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자연은 이렇게 ‘실체로서의 자연’과 ‘양태들의 집합으로서의 자연’의 결합입니다.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되는 자연이란, 능동적인 능력과 수동적 능력의 결합으로서
자연이 갖고 있는 생산원인의 특성과 생산결과의 특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존재의 원인이 외부(초월성)에 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내부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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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1월 16일에 쓰신 우림님의 후기를, 2월 24일에 다시 한 번 읽어보니까(그 전에도 한 번 읽었어요!) 또 다른 느낌, 생각들이 저를 스쳐갑니다.
니체의 문장에서 우림님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발견을 통해 기쁨을 느끼신다니! 부럽기도 하고 멋지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어렵고 낯선 느낌을 받지만 가끔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합니다. 아마 그런 순간들이
니체 공부를 어렵지만 계속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거 같습니다. 저도 우림님처럼, 제가 공부하고 이해한 걸 제 언어로 정리하고 표현하는 연습을 해봐야겠습니다.
멋진 후기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우림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우림의 사유속에서 충분히 우려진 느낌, 박수!!!!. 하지만 나는 또 나만큼의 설익음으로 후기를 준비해야겠네요.아, 공부는 이렇게 하는구나. 기분좋은 울림을 받아갑니다. 바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