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전, 나는 니체로부터 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읽기 어렵고 난해하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니체의 초대를요.
니체의 초대에 '또'라고 쓴 이유는, 사실, 수년 전 저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니체의 책을 읽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책에 줄만 잔뜩 쳤지 제대로 이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나봅니다. 그래도 니체는 굉장했습니다.
잘 이해는 안 가지만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굉장한 울림이 있었죠.
이번에는 줄이 안 쳐진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
나의 행복
추구하는 것에 지치게 된 이후로 나는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역풍을 만난 이후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ㅡ즐거운 학문, 책세상, 37쪽
그래요. 몇년간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다니면서 저는 뭔가를 몹시 추구했나봅니다.
나는 아마 지쳤을까요. 어느 순간 공부가 영~즐거운 학문이 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니체의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고귀한 천성은 더 비이성적이다.
고귀하고, 관대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의 충동을 따르며 이 최상의 순간에 그의 이성은 중지된다
ㅡ같은 책, 71쪽
공부를 한답시고 저는 엉뚱한 것을 추구했나봐요.
공부를 하면 이성적이 되고, 그러면 그 동안의 시행착오같은 건 안 하게 될거라는.
현명해지고 싶은 것을 '이성적'이 되는 것과 같은 걸로,
충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다스릴줄 아는 삶을 살아야하는 걸로 착각하면서.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 되었던 것에서 오는 절망감이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니체가 다시 내게 말하네요.
비이성적인 것이 고귀한 천성이라고. 최상의 순간은 충동에 따른 삶이라고.
잠시 잊고 있던 공부의 본질, 삶의 본질을 만져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저의 공부는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비이성'과 '충동'으로 산다는 것.
이것이 뭔지, 추구하지 말고 발견해야겠습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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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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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 이성의 세계에서 살다가 비이성을 접하고 그로 가려는 것은 참 힘들죠..ㅜㅜ 아주 동의합니다. 같이 읽고 행동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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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다들 초대장을 받으셨군요. 저는 불쑥 중간에 낑가들어왔어요. 니체씨 인적사항도 모르고요. 항간에 니체씨 이름이 나돌아다니니 그가 누군지 궁금하더라구요. 어쩐지.......ㅋㅋ 아직 니체씨의 대화스퇄일을 파악하지 못해 시간마다 겪은 니체씨와의 불화. 니체씨는 이렇게 방문객을 골려주나 싶을 때가 많네요. 구래도 즐거운 불화의 시간이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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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아포리즘 '나의 행복'은 저에게도 지난 시간에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은님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이성이 통합한 합리적인 나, 그 안에 무엇이 우글거리는지 함께 한 번 살펴보시죠. ^^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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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
'나'는 오만가지 충동의 도가니지만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네요...그렇지만 나는 나입니다 ^^ 나는 니체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 ㅋㅋ 적에게 주고 싶은 제자 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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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드네요.
추구하는 태도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추구하든 우리는 그것의 최상의 상태를 심상으로 그리게 될 텐데요,
우리는 언제나 완벽해질 수는 없으므로 좌절감으로 시도를 멈추게 되는 지친 상태에 이르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발견하는 것을 배우는 나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저는 그것이 '자기'인 것 같습니다.
지배하는 이성이 안개 속에 숨겨 놓았던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으로 아포리즘 2 '나의 행복'을 니체가 썼던 게 아닐까요.
자신을 계속해서 발견해 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
내가 가진 강인함, 합리성, 균형감, 기쁨, 환희, 충만, 유쾌함, 너그러움 이런 것 이외에도
짙은 안개 뒤에 있는 나약함, 비이성, 충동, 불안, 두려움, 불쾌감, 결핍, 질투와 옹졸함 이런 것들을
다 발견해 보라고.
그 후엔 우리가 그 모든 형이상학적 이분법들에 반기를 들게 되면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다른 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는 자기가 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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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한 천성은 말짱한(*충동적이지 않은, 이성적인) 정신으로 자신의 이득을 주시하고,
내면의 충동보다 목적과 이득에 대한 생각이 강하다. 그들은 충동에 의해 합목적적이지 않은 행동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고귀한 천성은 더 비이성적이다.
고귀하고, 관대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의 충동을 따르며 이 최상의 순간에 그의 이성은 중지된다."
아! 이 텍스트는 제가 지난 세미나에서 시간에 쫓겨 말하지 못했던 아쉬운 부분입니다. 지금은!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충동'이야말로 '힘에의 의지'로서 '능동적 열정'을 가리킵니다.
내면의 힘의 충동에 휩싸여 행동하는 자는,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나 이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기열정에 휩싸인 고귀한 충동은, 그런 의미에서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귀한 충동은 비속한 천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이득과 목적을 계산하는 비속한 천성은, 그런 의미에서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계산적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이러한 비속한 천성을 '반동적 과학으로서 공리주의'라고 비판합니다.
이득과 목적을 넘어서 내면의 충동에 우리를 내맡겼던 어떤 순간이 있어,
비이성적이면서도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어떤 순간에 대한 체험을 다들 가지고 있을 테지요?!
왜 니체일까.생각해보면.나와 니체가 만났을 때 .생성되는 그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아직은 어렵워서... 체계적으로 발언할 수는 없는 단계이지만.그가 나를 쉬게하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늦은 시간 우리가 수유를 찾아가는 이유입니다.따쓰한 햇살이 창을 똑똑 두드리는 정오입니다.쌤들 기쁜 오후 되세요.후기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