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필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필기를 해야만 기억에 남을 거라면 그것은 별로 와닿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선생님 눈치가 보여서 필기를 하기는 하지만요
이철교는 눈치 볼 게 없으니까요... 제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하이데거 강의와 블랑쇼 강의는 필기가 하고 싶더군요
워낙 처음 듣는 얘기이기도 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낱말들이 많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인 '무언가의 드러남', '연약한 표면의 문제' 등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말입니다
아, 특히 하이데거에서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결단'이라는 말이 참 멋있었습니다
이 문구가 좋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너에게 뭔가 전체주의적인 게 있는가보다" 라고 하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 안에 파시즘의 씨앗이 있을지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꼼꼼히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하늘과 땅과 귀신들과 죽을자들, 즉 사방세계의 합일'이라는 말은 오글거리기도 하면서 섬뜩하기도 합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이라는 익숙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 옆에 귀신들이 나와 합일해야 한다니 해괴합니다.
그리고 선술집에서 퍼 마시는 포도주가 왜 나쁩니까?
맛있으면 좋은 것이고, 마셔서 즐거우면 좋은 것이지!
포도주를 '사물화'하기 위해서 제사까지 지낼 건 또 뭐람!
19세기 말 러시아의 유명한 상징주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천상의 여성적 원리인 소피아가 지상에 하강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 소피아와 세 번이나 직접 만난 적이 있으며, 그 경험을 <세 번의 만남>이라는 시로 옮겨 적었습니다.)
"발정난 고양이의 울부짖음은 듣기 싫지만, 짝을 찾는 꾀꼬리의 노래소리는 예술이 된다."
하이데거의 얘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두 사람 모두 아름답고, 의미있고, 고결한 것, 신성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나는 포도주를 맛있게 마시면 안 되고
샘물과, 햇빛과, 이슬과, 바람과, 농부의 손길과, 그의 땀에 하나하나 감사하면서만 마셔야 하는 걸까요?
포도주에 포함된 여러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그 본연의 맛을 느끼기에도 포도주가 목 넘어가는 순간은 짧습니다.
포도주로 입을 훌렁이면서 사방에 절을 네 번 하는 거라면 몰라도...
그리고 블랑쇼...
사물의 구원, 사물과의 우정, 낮과 대립하지 않는 어둠 그 자체, 비인칭적 죽음, 무위의 독서 등등
그의 유일한 초상 사진 속 그의 눈빛처럼 아슬아슬한 단어들입니다
데자스트흐... 카오스라는 말보다 훨씬 더 살 떨리는 말입니다
집에 와서 <카오스의 글쓰기> 몇 쪽을 읽어보니 정말 아스트랄 하더군요
니체가 잠언 속에 들어 앉아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면(그도 사자자세를 알런지...)
블랑쇼는 속삭이고, 말을 하다 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주고 그런 거 같습니다. 얼마나 새침한지...
<문학의 공간>을 펼쳐보니 가장 눈에 띄는 말이
"나를 읽지 마세요(Noli me legere)!"
읽지 말라고 하니까 더 읽고 싶고
대답도 안 해 주니까 더 묻고 싶고
하도 속삭이니까 귀를 더 가까이 가져가게 됩니다.
블랑쇼를 한 번 파 보아야 하겠습니다.
종혀나.. 포도주 먹지말고 소주먹자. 그럼 절 안해도 된다.
블랑쇼는 소주먹고 읽으면 더 짱이다.
근데 블랑 형님은 포도주를 먹던 소주를 먹던 목넘김이 좋은게 짱이라고 할 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