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이 화폐로 탈바꿈 된 후 인간은 더 행복해 졌을까? 확실한 것은 귀여운 돼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던 나는 천진난만하게 즐거웠었다. 저금통 속이 꽉 차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것 만큼 신나는 일은 없었다. 한번도 그 돼지가 나쁘다고생각해본 적은 없다.
속터지는 대환장 뉴스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오늘은 속보가 뜨자마자 분노가 치밀었다. 사업실패와 카드빚1억, 코인투자 같은 이유가 자식의 목숨을 빼앗을 정당한 이유가 될수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 세상에 돈이 없다면 어차피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자신들의 무가치를 단정한 부모의 이기심에 비난의 댓글이 속출했다. 그 악플들을 읽다보니 오히려 나는 화가 차분히 가라앉고 냉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는 일상적 습관적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빨리 불릴 수 있을까에 대해 수다를 떤다. 어린시절엔 분명 은행 적금이 다였는데 요즘은 주식, 부동산, 코인, 사업투자 등 구체적 수익률을 따져가며 시드머니를 운운한다. 시드머니란 그 자체가 자본이다. 돈을 잘 굴리는 것은 능력이며, 몫돈을 가만히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다. 돈을 빨리 쌓고 불리는게 능력이기에 속도가 뒤쳐지면 실패나 낙오자라 느껴진다.
현대사회의 개별화된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여러가지 비용이 든다. 평균적 생활과 평균적 임금, 평균적 소비를 감당할 수 없으면 많은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어 투명인간이 된다. 오늘날 돈이 없다는 것은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외로움의 문제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사업투자에 실패한 남자는 사업가였던 나 이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만회하고자 코인에 손을 댔을 것이다. 남들에게 뒤쳐진 속도를 만회해야 때문이다. 가장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빚밖에 없다는 공포는 이런 비극을 낳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래를 위해 돈을 벌다 결국 그 실패할 미래가 무서워 나를 포기했다.
이 가장에게 삿대질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금새 자신의 스위치를 바꿔 주식계좌를 들여다 보고 부동산 카페에서 아파트값 동향을 읽고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친구들의 해외여행 사진과 외제차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질세라 새로 장만한 신상 가방이나 시계 사진을 업로드 중일 수도 있다.
파산한 그 부모는 어린 딸을 위해 처음부터 귀여운 돼지저금통을 설명해줄 생각을 왜 하지 못했느냐는 비난은 자본의 족쇄에 다 붙들린 오늘날 너무 무책임한 감정배설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금통의 미덕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슬픈 감정은 어쩔수가 없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돼지저금통을 탓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폭락한 주식계좌를 보며 한숨쉬는 내가 어찌 돼지저금통을 악이라 명명할수 있단 말인가.
댓글 5
-
해돌
어제 수업에서 자본사회 이전에는 저금통이 기능적 화폐이지만 자본안에서는 결국 시드머니가 되는 부분에서 차이를 이해했습니다. 저금통은 잘못이 없고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배치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어린시절 가치를 모른채 돼지저금통을 보던 나와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해 시드머니로 저금통을 보는 나는 변신에 완벽히 성공(!)했나 봅니다. 유택쌤의 권유대로 주식을 끊고 어린시절 나의 귀여운 저금통을 되살려 볼 날이언젠간 오겠지요... ㅎㅎㅎ
-
유택
상품이 화폐로 탈바꿈 된 후 인간은 더 행복해 졌을까?
왜 행복을 생의 디폴트값으로 놓을까요? 불교적 문제 설정은 생은 고(통)가 디폴트값이고 그래서 가끔 가끔 고(통)가 없어지는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인걸로 이해하는데요. 좀 더 억지스럽게 비판하자면 이게 더 나아가면 체제순응주의로 가게 되는걸까요? “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요~” 아니면 자기 삶의 평화로움으로 가게 될까요? 여기서 핵심은 욕심과 집착일텐데요. 어디까지가 삶에 있어서 욕심일지 따져보면, 사람들마다 다 다르고 할 말들이 너무 많을거 같아 피곤해요.
확실한 것은 귀여운 돼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던 나는 천진난만하게 즐거웠었다. 저금통 속이 꽉 차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었다. 한번도 그 돼지가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돼지저금통에 모인 돈은 최소한 남을 착취한 돈은 아니기에 나쁜건 아닐 것 같아요. 모인 돈은 다른 상품을 구매(등가교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돼지저금통을 찢어서 과자 사 먹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네요.
속터지는 대환장 뉴스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오늘은 속보가 뜨자마자 분노가 치밀었다. 사업실패와 카드빚1억, 코인투자 같은 이유가 자식의 목숨을 빼앗을 정당한 이유가 될수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 세상에 돈이 없다면 어차피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자신들의 무가치를 단정한 부모의 이기심에 비난의 댓글이 속출했다. 그 악플들을 읽다보니 오히려 나는 화가 차분히 가라앉고 냉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오늘 고향 엄마와 이 뉴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론은 왜 자기의 죽음을 전국민한테 알리고 죽을까. 길거리에 그냥 나 앉지 죽긴 왜 죽냐. 뭐에 씌이면 그것밖에 못 보게 되는 것 같다. 아이의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결론은 여하튼동 살아야 한다 이고요. 한탕 하고자 했던 욕망의 문제점을 다시 짚어봐야지요. 우리안에 있는 한탕주의.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거기서 반대방향으로 얼굴을 돌릴 수 있을까? 삶을 전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상적 습관적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빨리 불릴 수 있을까에 대해 수다를 떤다.
‘우리’라는 표현으로 다같이 싸잡으려고 하는 김피디님, 실은 본인만 그렇다고 해야지요. ^^
어린시절엔 분명 은행 적금이 다였는데 요즘은 주식, 부동산, 코인, 사업투자 등 구체적 수익률을 따져가며 시드머니를 운운한다. 시드머니란 그 자체가 자본이다. 돈을 잘 굴리는 것은 능력이며, 몫돈을 가만히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다. 돈을 빨리 쌓고 불리는게 능력이기에 속도가 뒤쳐지면 실패나 낙오자라 느껴진다.
만약 적금만 하는 인간이 있더라도 그 인간은 자본주의형 인간이잖아요? 적금도 1년 만기 이자가 붙잖아요.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돈이 돈을 낳은거니까요. 적금도 이자의 양만 달랐지, 질적으로는 엄연히 주식 부동산 투기 코인 등등과 같은 다분히 자본가적인 욕망의 발로 입니다. 어린시절 우리는 작은 자본가인거겠지요? 자본주의 학교가 왜 필요할까 우습죠. 그냥 살아가면 자본주의 교육이 그대로 되는 현실인데. 참 유난스러워요.
현대사회의 개별화된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여러가지 비용이 든다. 평균적 생활과 평균적 임금, 평균적 소비를 감당할 수 없으면 많은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어 투명인간이 된다. 오늘날 돈이 없다는 것은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외로움의 문제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여러가지 비용이 드는건 사실이지만,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는 통념적 감각에 맞춘 소비가 비용을 올린다고 생각합니다. 평균 평균 하시는데 누구의 평균인거죠? 유유상종이라고 나만 봐도 나와 비슷한 경제적 수준의 인간군들밖에 만나지 못하거든요. 수유너머에 오는 인간들도 어느 정도 경제력이 되기 때문에 와서 공부라는걸 할 수 있는거라고 동의하실 것 같아요. 한 수업당 작게는 10만원대에서 30만원대까지. 이 정도 금액을 별 문제 없이 낼 수 있는 인간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는건,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거라고 이해가 되는데요. 언제까지 인정욕망에 시달려야 할까요. 사실 1달러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데 나의 연봉이 옆 동료에 비해 너무 작다고 울분을 토하는건 참 보기 민망스러워요. 체제에 순응하고 정신승리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뒤돌아서는건 왜 안되나요?(삶의 방향 전환). 왕이 있는 이유는 그 인간을 왕으로 우러러 봐주기 때문에 가능하듯이(짝 먹어서 작용) 자본주의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리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 고민 때문에 자본 세미나를 하는 거겠지요?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외로움의 문제로 봐야 마땅하다’에 공감합니다.
사업투자에 실패한 남자는 사업가였던 나 이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만회하고자 코인에 손을 댔을 것이다. 남들에게 뒤쳐진 속도를 만회해야 때문이다. 가장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빚밖에 없다는 공포는 이런 비극을 낳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래를 위해 돈을 벌다 결국 그 실패할 미래가 무서워 나를 포기했다.
가면을 벗기면 또다른 가면이 나오듯, 내 안에도 여러가지의 내가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현자인척, 부자인척, 사랑한척, 거지인척. 척~척~박사만 되어도 인생의 문제 반은 해결이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죽는거, 죽을때까지 뭐라도 해보자 라는 생각이 대체적으로 받아지잖아요. 그런데 정말 죽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가 보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거죠. 누구는 그러기도 하더라고요.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기 싫다라고” 그 뉘앙스의 차이를 곰곰히 생각은 해보지만 그래도 어려워요.
이 가장에게 삿대질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금새 자신의 스위치를 바꿔 주식계좌를 들여다 보고 부동산 카페에서 아파트값 동향을 읽고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친구들의 해외여행 사진과 외제차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질세라 새로 장만한 신상 가방이나 시계 사진을 업로드 중일 수도 있다.
스토아 학파, 세네카님이 말했지요. 타인에 대한 관심 좀 끊으라고.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했던가요? 아.. 헷갈려. 책 다시 찾아보긴 귀찮고. 여튼 관심 좀 끊고 살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말들이 많아. 아무말 대잔치지.
파산한 그 부모는 어린 딸을 위해 처음부터 귀여운 돼지저금통을 설명해줄 생각을 왜 하지 못했느냐는 비난은 자본의 족쇄에 다 붙들린 오늘날 너무 무책임한 감정배설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금통의 미덕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슬픈 감정은 어쩔수가 없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돼지저금통을 탓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폭락한 주식계좌를 보며 한숨쉬는 내가 어찌 돼지저금통을 악이라 명명할수 있단 말인가.
돼지저금통을 왜 탓해요? 계속하셔요. 단 주식을 끊으셔요. ^^
-
해돌
손실율이 커서 못끊어요 ㅋㅋㅋㅋㅋㅋ ㅠㅠ(눙물이 흐릅니다)
-
해돌
어제 뒤풀이에 유택쌤이 안계셔 못들으셔서 글 남겨 봅니다. 저는 평균적 인간의 삶에서 크게 이탈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평균은 매우 엘리트적 계급적 발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자본을 공부하느냐 물으시는 분이 있으실텐데(어제는 먼지쌤이 궁금해 하셨습니다) 인생의 길이 하나밖에 없는건 아니라는건 아니까요. 행복이란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만족에는 끝이 없다는것을 느꼈기 때문에 삶을 다르게 보고 감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의 가치에 관심이 생기는 나이이죠: 그것이 비록 장식적 교양이라 할지라도요. ^^
어린시절 책상 위에 얹혀있던 귀여운 돼지저금통이야 '절약의 상징' 같은 거지요. 하지만 화폐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축장화폐는 자본의 출현을 위한 시드머니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껴쓰는 것으로서 '절약의 돼지저금통'과 각종 금괴와 달러, 어음 같은 것으로 가득찬 '화폐축장자의 금고'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ㅎㅎ 그것은 가치를 상품형태가 아니라 화폐형태로 보유하려는 욕망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맑스는 축장화폐를 사회적 힘을 사적인 힘으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축장화폐가 보여주는 바는 ‘사회적 힘’을 ‘사적인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ㆍ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부의 형태’로서 화폐는 사적으로 소유ㆍ축적할 수 있는데, ‘부’라고 하는 사회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사물’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은 화폐를 축적함으로써,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힘을 사유재산화하는 것이다." [북클럽자본3권] 6장. 6. 특별히 사랑스러운 화폐 - 화폐로서 화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