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세미나자료 :: 기획세미나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니체전집15 > [이 사람을 보라]② :: 2020.11.23(월)

 

=== 텍스트 참고자료 ===

니체의 집필동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지식》 등 니체는 여러가지 작품을 썼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읽혔더라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사람을 보라》를 쓰게 되었다. 니체 자신의 진면목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이 책은 그의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길이는 짧지만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이다.

니체의 철학적 자서전 > 코펜하겐 대학(덴마크)의 브란데스 교수가 니체철학을 강의하고, 독일 내에서도 니체작품에 대한 반향들이 늘자 니체는 자신의 영향이 후세에 이를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그는 자서전적 작품 이 사람을 보라를 쓰게 되는데, 이는 오랫동안 세간의 외면과 오해에 대해 스스로 해명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했을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철학적 자서전으로서 전대미문인 이 작품을 니체는 토리노에서 작성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나날들”이라는 표현으로 그 시기의 심경을 알려주고 있다.

니체의 마지막 > 1888년 말경. 그의 불행의 징조가 조금씩 눈에 띈다. 《디오니소스 송가》의 교정을 마친 직후 1889년 1.3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니체는 쓰러진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더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되는 긴 어둠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참고. 진리들 > 니체가 자신의 진리를 표현할 때, '진리들'이라고 쓴 것에 유의하자!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p375) "엄격하기만 한 진리들 속에서 기분 좋게 명랑함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자기 습관들을 엄격하게 대해야만 한다."

번역수정. 위버멘쉬 p377_24줄 >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되어있는 인간유형 존재유형(*eines Typus höchster Wohlgerathenheit)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 ‘선한,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독일어원문에도 인간이라는 표현은 없어요. '인간유형'이 아니라 '존재유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특히 위버멘쉬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인간적 특성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힘에의 의지'에서 '반동적인 힘' 예시 > 또 다른 현명함과 자기방어는 '가능한 드물게 반응한다'는 것, 자기의 '자유'(자기의 주도권)를 떼어내어 시약으로 만들게 하는 조건들(*자기를 반응적으로 만드는 조건들)을 피하는 것이다. 서적을 대하는 법을 비유로 들어보겠다. 서적을 그냥 '뒤적거리는' 학자(하루에 200권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는 문헌학자)는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그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할 때는 특정 자극에(읽는 생각들에) 응답하는 것이며, 결국 그는 반응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학자는 자기의 전 힘을 기존의 사고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데에 다 쏟아부으며, 스스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반동적인 힘). 자기방어 본능(*자기 취향)이 약할 대로 약해진다.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7. 자기방어기술)

왜 이렇게 좋은 책을 #6. 심정의 천재, 디오니소스 신 > 심정의 천재: 마음의 천재,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다루며 가장 기쁘게 하는 존재 (독)Das Genie des Herzens / (영)The genius of the heart / <선악의 저편>의 기술된 심리학적 경우 > 심리학자로서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선악의 저편>(*9장 고귀함 #295)에 나오는 심리학적 경우를 들어보겠다. 그 대목에서 내가 누구(*디오니소스 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측은 금한다.

 

=== 지난 시간 복습 ===

 

[1] 우연한 나쁜 경우들

"나는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영리한지 #2) 

‘우연한 나쁜 경우’에 대하여: 힘에의 ‘의지’ > ① (우연한 나쁜 경우) 모든 나쁜 경우는 ‘우연한’ 나쁜 경우이다! 나쁜 경우는 모두 우연히 발생하지, 의도적(나의 잘못이나 너의 잘못)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우연한 나쁜 경우에 대하여 ‘우연성’을 제거해버리면, ‘나쁜 경우’만 남게 된다. 그 때 나쁜 경우의 원인(나의 잘못이나 너의 잘못)을 추적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되어, 정작 나쁜 경우에 대한 대응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쁜 경우에 대한 ‘원한의 감정, 자책의 감정’만 제거하더라도, 그 경우는 훨씬 쉬운 문제가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처하기도 쉬워진다. 대부분 ‘나쁜 경우’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의지(부정적 종합)가 시도하기도 전에 ‘나쁜 경우’에 대처하는 힘(능력, 에너지)를 꺾어버린다. ② (니체의 긍정의 의지) 그래서 니체의 ‘긍정의 의지’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나는 우연히 발생하는 일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 나는 무례한 행위들을 겪어야 했지만 그 원인은 악의가 아니었으며, 내 삶에 폐를 끼친 것은 선의였고 이것에 대해 내가 불평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4.)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는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에 대해 희미하게라도 예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삶의 실책들마저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삶의 실책들마저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즉 때때로 옆으로 새거나 길을 잘못 들거나 주저하거나, ‘겸손함’, 자기과제에서 멀리 떨어진 과제들로 인해 진지함을 허비해버리는 것 등도(*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9.)

나쁜 경우를 ‘유용하게 만드는 능력’에 대하여: ‘힘’에의 의지 > ① (나쁜 경우를 유용하게 만드는 힘) 나쁜 경우는 없고, 그것을 바쁜 경우로 만드는 우리의 능력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태에 대한 ‘반동적 힘’(그것을 활용하여 유용하게 만들지 못하고, 그것에 굴복하거나 그것과 대결하려는 힘)이 그것을 나쁜 경우로 만든다. ② (니체의 ‘능동적인 힘’) 그래서 니체의 ‘능동적인 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내가 약자일 때 그것은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내가 강자일 때는 그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2.) “나로 하여금 반감을 품게 만드는 기술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반감을 품지 않는다. ...... 누구든지 나쁜 경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마저도, 내 경험은 예외없이 그것들에 유리한 말을 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4.) “내게 가장 의심스럽고도 가장 위험한 것마저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충분히 강하며, 또 그로 인해 더 강해지는 나이기에, 나는 바그너를 내 삶의 큰 은인이라고 부른다.”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6.)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는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에 대해 희미하게라도 예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삶의 실책들마저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삶의 실책들마저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즉 때때로 옆으로 새거나 길을 잘못 들거나 주저하거나, ‘겸손함’, 자기과제에서 멀리 떨어진 과제들로 인해 진지함을 허비해버리는 것 등도(*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9.)

자기 운명에 대한 사랑, 존재에 대한 순수긍정 > 삶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기의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로 표현된다.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거나(운명을 회피), 필연적인 것을 감당하려고 하거나(운명과 대결)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운명을 사랑)이다. “나는 몸에 나쁜 피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 오로지 내 존재로만 항거한다.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10.) 이러한 운명애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순수긍정으로 확장된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비극의 탄생 #2)

 

[2] 니체의 가치전환의 방법론

(1) 우리시대가 긍정하는 가치늘 부정하고, 우리시대가 부정하는 가치를 긍정한다. :: 전자는 부정적(약자적) 가치, 후자는 이것과 반대되는 긍정적(강자적) 가치로 쓴다. 그밖에, 민주주의ㆍ평등은 무리적 가치로 / 정의ㆍ박애는 약자적 가치로 해석한다. 

- 무리/다수자/무리적/평균적 <······> 예외자/소수자/예외적/특이적 

- 약자(노예) <······> 강자(주인)

- 이타주의(동정, 연민, 이웃사랑) <······> 이기주의(자기배려) 

- 집단(전체, 공동체, 국가)  <······> 개인(주권적 개인, 자기입법자) 

- 진리(참된 세계, 정신, 이성, 본질)  <······> 오류(가상의 세계, 신체, 본능, 허위-위장-가면)  

(2) 다수적 가치를 부정하고 / 소수적 가치를 긍정한다. ::  ① (강자/약자와 다수적/소수적 가치) 우리시대의 강자는 다수적(대중적) 가치에 의해 정의된다. 즉 대중적 가치로 인정되는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진 자가 강자로 인식된다. 반대로 니체적 강자는 소수적(특이적) 가치에 의해 정의된다. 즉 대중적 가치와의 거리에 의해서, 대중적 가치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② (다수적 가치의 부정, 소수적 가치의 긍정) 종교ㆍ도덕ㆍ철학 같은 지배적 가치는 데카당스로 비판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지배적 가치(*다수적 가치)는 부정적으로, 모든 새로운 가치(*소수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 니체는 철학, 예술, 도덕 등 가치의 내용이 아니라 가치의 표현(지배적인가, 새로운가)에 따라 가치평가를 한다! 

*[참고] "나는 대중예술(*대중으로부터 지지받는 예술)을 싫어한다. 무대 위의 성공: 이로써 그 예술은 나의 경의를 잃어버리고 나는 그것을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무대 위의 실패: 내 귀는 곤두세워지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니체 대 바그너] 내가 반박하는 곳 

(3)  현대의 특정한 가치의 전환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전환이다 :: 동정, 보복, 원한, 싸움, 잡것에 대한 태도 / 독서에 대한 태도에서 니체의 퍼스펙티브 ([이 사람을 보라] 나는 현명한지 / 나는 영리한지 #3)

영리한지 #4. 동정에 대하여 > 내 경험은 내게, 소위 말하는 '사심없는' 충동들이나, 충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이웃사랑'을 불신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가 나약함이고, 자극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의 특수한 경우이다. 동정은 데카당에게만 덕의 일종이다. 나는 동정하는 자를 비난한다. 그들에게서는 수치심, 경이감, 거리를 느끼는 민감함이 사라졌다. 동정은 순식간에 천민냄새를 풍기고 무례한 태도와 혼동될 것이다. 위대한 운명에-상처입은 고독에-중대한 죄에 대한 특권에 동정의 손길이 뻗치게 되면, 그것은 즉시 파괴적이 된다. 동정을 극복하는 것이 고귀한 덕목의 하나이다.

영리한지 #5. 7. 보복/복수에 대하여 > (#5) 나의 보복책은 가능한 빨리 현명함이 어리석음의 뒤들 쫓아가게 하는 것이다. ...... 내게 나쁜 짓을 한번 해보면, 내가 그렇게 '보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즉시 '나쁜 짓을 하는 자'와 나쁜 행동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포착한다. 거친 말gröbste Wort, 거친 편지gröbste Brief가 침묵Schweigen보다 더 선의에 차있고 더 예의 바르다. 침묵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마음의 섬세함과 정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침묵은 하나의 반박이다. 깊이 삼켜버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쁜 성격을 만들고, 위를 상하게 한다. 침묵하는 자는 모두 소화불량증 환자이다. / (#7) 복수심과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인 것처럼, 공격적 파토스(*싸움적수)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는 복수욕이 있든데, 이것은 그녀가 약해서 그렇고, 그녀가 타자의 곤경에 민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영리한지 #7. 원한에 대하여 >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병든 상태가 지속될 때원한감정의 치료책으로서 ‘러시아적 숙명론’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때 병자의 자연스러운 성향인 원한감정(병을 어떤 잘못의 결과로 감각하고 원인을 찾아 죄를 묻는)으로 이끌리는 대신, 무저항의 숙명론(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다른' 자신을 원하지 않는 무저항의 숙명론)이 필요하다.) 누군가 병들어있다는 것이나 약하다는 것을 반대한다면(*거부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치유본능(인간의 저항과 공격본능)이 쇠퇴한다. ...... 병들어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 이(*원한이라는 병)에 대해 병자는 오직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숙명론(행군이 너무 혹독하면 결국 눈 위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군인의 무저항의 숙명론)이라고 부른다. ...... 이런 숙명론이 늘상 죽음에의 용기는 아니며, 오히려 무저항-숙명론의 위대한 이성은 가장 치명적인 상황하에서 신진대사를 감소시켜 일종의 겨울잠을 자게 만드는 의지로서 삶을 유지하게 한다. (*무저항의 숙명론은 항상 죽음에의 용기가 아니라, 한편 삶에의 의지가 된다.) ...... 원한은 병자에게 그 자체로 악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병자의 가장 자연적인 성향이기도 한다. ...... "적대는 적대를 통해서는 종결되지 않고, 우호를 통해서 종결된다." 도덕이 아니라, 생리학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 언젠가 우연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장소-집-사회 속에서 몇년간 끈질기게 버티고 있을 때, '러시아적 숙명론'이 내게 나타났다. 그런 우연한 것들을 바꿀 수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우연한 것들에 맞서 반항하는 것보다, 러시아적 숙명론이 더 나았다. 이런 숙명론에 처해있는 나를 방해하고 나를 강제로 깨우는 일을, 그 당시 나는 치명적으로 나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것은(*무저항의 숙명론에 처해있는 나를 깨우는 것)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했었다. 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런 상황들에서는 위대한 이성 그 자체이다.

영리한지 #7. 싸움에 대하여 > ① (싸움과 적수) 성장한다는 것은 좀더 강력한 적수를 찾는데서(좀더 강력한 문제를 찾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제 쉬운 적수, 웬만한 문제는 나의 전의를 자극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문제들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그의 과제는 적수를 이기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전 역량과 싸움기술을 힘껏 발휘하는데(그래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적수=대등한 적수를 이겨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대등함은 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번째 전제.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명령을 하거나 어떤 것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면 싸움을 이루어질 수 없다. ② (싸움의 방식)  첫째, 나는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나는 나를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일은 한번도 공공연하게 해본 적이 없다. 셋째, 나는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개인을 (*특정한 시대나 문화적 성향을 보이게 하는)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다. 넷째, 온갖 개인적 차이가 배제되고, 배후에서 나쁜 경험을 할 것이 없는 자만을 공격한다. 내게서 공격이란 거꾸로 호의에 대한 증거이며, 경우에 따라 감사함에 대한 증거이다.

영리한지 #8. 잡것에 대하여 > 인간에 대한 구토, '잡것'에 대한 구토는 언제나 내게 위험이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잡것에 대한) 구토로부터의 구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나는 어떻게 구토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나는 어떻게 어떤 잡것도 얼씬거리지 않는 높은 경기에까지 날아올라왔던가? 나의 구토가 나에게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날개와 샘이 어디있는지 알아내는 능력을 주었다! 여기 더없이 높은 곳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여기에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겠다고 하지 않는 생명이 있다. ......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높은 경지이자 고향이다. 더러운 자들이 올라와 갈증을 풀기에는 너무 높고 가파른 이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의 육체와 영혼에게 우리의 행복은 차디찬 얼음동굴이 되리라. 우리는 거센 바람처럼 그들 위에 살고자 한다. ......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낮은 것들에게 거센 바람이다. 그의 적들에게, 침을 뱉은 모든 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리라. "바람 쪽으로 침을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

(4) 가치의 전환은 감각의 전환을 동반한다 :: 니체의 가치전환은 단지 정신적(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신체적(생리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의 전환은 곧 감각의 전환이고, 니체는 데카당, 그리스도교, 바그너 등 가치의 대척자들에 대해 '신체적 구토'를 느낀다. (ex. 바그너에 대한 가치전환 :: 바그너예술은 청년-니체로 하여금 [비극의 탄생]을 집필하게 할 만큼 긍정의 대상이었지만, 성숙기-니체로 하여금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를 쓰게 할 만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바그너예술이 독일적인 것에 대항하는 한에서 니체는 바그너주의자였고, 바그너예술이 독일적인 것으로 번역되는 한에서 니체는 그와 대척자가 된다!)

 

[3] 퍼스펙티비즘 연습 (*퍼스펙티비즘_관점주의 / 퍼스펙티브_관점)

퍼스펙티비즘 Perspectivism > 퍼스펙티비즘은 ‘관점에 따른 가치의 변화’로 정의되는데, 관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 퍼스펙티비즘은 무엇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 하나의 진리를 해체한다. 이것이 니체적 퍼스펙티비즘의 결정적 의미이다. 어떤 사물, 어떤 사건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생존조건, 힘에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① 먼저 퍼스펙티브(관점)는 개체의 생존조건(생명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개구리와 독수리의 생존조건의 차이는, 개구리의 퍼스펙티브와 독수리의 퍼스펙티브를 결정짓는다. 소금장수와 우산장수의 생존조건의 차이는, 화창한 날과 비오는 날에 대한 그들의 퍼스펙티브를 결정한다. ② 다음 페스펙티브는 개체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거대한 파도를 약자는 고통으로 감각하고, 강자는 대결로 감각하고, 위버멘쉬는 유희로 감각한다!

0. 거대한 파도를 어떻게 감각하는가? > 거대한 파도를 위협으로 감각하는가, 대결로 감각하는가, 유희로 감각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1. 모든 퍼스펙티브는 생존조건이다. > 퍼스펙티브(관점)는 개체의 생존조건(생명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개체는 특정한 퍼스펙티브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예를 들어, 거대한 파도에 맞설 수 없는 약자는 그것을 ‘위협’으로 감각할 것이다. 이때, 약자가 거대한 파도를 위협으로 감각하는 것은 그의 생존조건이다. 약자가 거대한 파도를 ‘대결’로 감각할 때, 그것은 약자로서 생존조건을 변화시킨다. 힘(역량)이 없는 상태에서 의지만으로 거대한 파도와 대결할 때 그는 원한의 감정에 휩싸이거나 심지어 생명 자체를 파괴당할 것이며, 반대로 거대한 파도에 맞서려는 의지를 가지고 힘(역량)을 키워나갈 때 그는 강자로 변화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약자로서의 그의 존재는 변화된다. 거대한 파도를 강자가 ‘대결’로 감각하거나, 위버멘쉬가 ‘유희’로 감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2. 퍼스펙티브에도 위계가 있다. > 퍼스펙티브(관점)는 개체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각 개체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감각한다. 예를 들어 각각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거대한 파도를 고통의 관점 ······> 대결의 관점 ······> 유희의 관점으로 감각한다. 이것이 니체적 퍼스펙티브의 위계이며, 힘에의 의지의 상승방향이자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방향이다. 유희만이 생성을 의지하며, 영원회귀의 바퀴를 굴릴 수 있는 추동력이기 때문이다!

니체적 퍼스펙비즘: 운명애를 긍정하고, 데카당스을 부정하는 > ① ‘모든 퍼스펙티브는 생존조건이다’는 명제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모든 삶을 긍정하게 된다. 심지어는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병든 상태가 지속될 때, 원한감정의 치료책으로서 ‘러시아적 숙명론’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때 병자의 자연스러운 성향인 원한감정(병을 어떤 잘못의 결과로 감각하고 원인을 찾아 죄를 묻는)으로 이끌리는 대신, 무저항의 숙명론(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다른' 자신을 원하지 않는 무저항의 숙명론)이 필요하다는 것! ② ‘힘에의 의지는 보다 높은 위계의 퍼스펙티브를 요구한다’는 명제로부터 우리는 힘에의 의지가 상승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며, 이것이 자연상태이며 병든 상태는 반자연적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힘의 상승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자연상태이며 힘의 퇴화의지는 반자연적이다. 생명이 혹은 사람이 ’생명력의 쇠퇴와 본능의 타락‘을 ’의지하는 힘(태도)‘를 데카당스라고 한다.

 

 ===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

#1~6: 자기작품과 집필작업 전반에 대한 니체의 태도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 청년-니체의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학문]: 이행기-니체의 작품

[차라투스트라],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성숙기-니체의 작품

 

1. [이 사람을 보라] 니체의 독특한 표현은 단지 '자기긍정'의 최대치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1, 3, 4) 

니체와 자기 작품의 관계 >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소제목) /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에 의해서도. ...... 누군가 내 책을 손으로 받쳐들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드문 존경의 하나다. (#1)

······> ① (작가≠작품, 작가≠논평자) 니체는 자신과 자기작품을, 작품의 작가로서의 니체와 작품의 논평자로서의 니체를 혼동하지 말라고 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기 생애를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한다. ‘니체’라는 작가는 어떻게 자라왔고, 누구의 책을 읽었으며, 어떤 날씨와 음식을 즐겼고, 어떤 스타일로 글을 썼는지. 그가 자기생애를 별도의 책으로 묶었다는 것은 자기생애를 또다른 작품으로 간주한다는 것! ② (그때의 나(책을 쓴 나) ≠ 지금의 나(논평자 나)) > 또한 니체는 책을 쓴 에 대해 말하고 있는 를 혼동하지 말라고 한다. 책을 쓴 나는 항상 그 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때의 ’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금의 는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나는 자화자찬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작가와 작품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의 관계 > 결국: ‘내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만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표현을 잘 할 수는 없다. (#3) / 문체가 언제나 전제하는 것은 문체를 들을 귀가 있다는 것, 문체와 동일한 파토스를 가질 수 있고 그 파토스에 적합한 자들이 있다는 것, 자기를 전달할만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차라투스트라도 우선 그런 자들을 찾는다. 아아, 그는 더 오랫동안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선 그의 말을 들을 자격을 갖추어야 하기에. (#4)

······> 니체가 자신과 맺고 있는 이 독특한 관계를 ‘니체와 차라투스트라!’라고 표현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해 니체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니체의 분신처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이면서 동시에 니체가 아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말한다. 니체는 때로 차라투스트라의 친구이며, 때로 차라투스트라 자신이다.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 8장 병자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광기), 9장 토리노의 도취(*영원회귀에 도취되어 광기의 신체성으로 넘어감)

(8장) 시뮬라크르의 창조자는 ...... 자신의 재현/표상을 위해 사용한다는 생각, 그것이 『이 사람을 보라』에서 특이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 (9장) 모든 진정한 예술가는 가짜인 무언가를, 즉 시뮬라크르를 만든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바그너는 거짓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릿광대일 뿐이다. 사실 어릿광대는 니체에게 있어서 비밀무기 제조법이다. ...... 배우의 현상은 니체에게 존재 자체의 시뮬라크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연극증(*감정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증상)은 니체에게 있어 인격의 해체라는 비밀스러운 고유한 작업과 밀접하게 관련있다. 이로부터 니체 안에서 가면의 환영이 성장한다. (*연극증 레퍼토리인 [이 사람을 보라]의 독특한 문장은 신체의 충동이 드러난 상태를 농담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

 

2. '위버멘쉬'는 당시 어떻게 오해되고 있었고,  아직까지도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1)

버멘쉬에 대한 오해 > ① (위버멘쉬의 의미)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되어있는 인간유형 존재유형(*eines Typus höchster Wohlgerathenheit)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 ‘선한,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도덕의 파괴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주 숙고할 만한 말이 된다. ② (위버멘쉬에 대한 오해) 그런데 모든 곳에서 그 말의 가치가 차라투스트라의 형상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반은 ‘성자’고 반은 ‘천재’인, 좀더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 유형으로서 말이다. ...... 또 다른 어떤 멍청한 학자는 나를 ‘다윈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위버멘쉬를 인간 진화의 다음단계로 이해하여, 니체를 다윈주의자로 의심함) ③ (위버멘쉬 = 영웅?) 부지불식간에 등장하는 칼라일의 대단한 허위 속에 있는 ‘영웅숭배’를 내가 그토록 악의에 차서 거부했었는데도, 이것을 심지어 <차라투스트라>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파르지팔 같은 자를 찾기보다 차라리 케사레 보르자 같은 자를 찾아야 한다’고 속삭였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토마스 칼라일 > 영국의 역사가.《영웅과 영웅숭배》(1841)를 통해 영웅은 우주의 질서를 깨달아 성실로써 대응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이라 주장

*파르지팔 > 바그너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주인공.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우역곡절 끝에 성배기사단의 왕이 되는 이야기.

*케사레 보르자 (체사레 보르지아) > 마키아 벨리의 저서 '군주론'의 모델이 된 인물, 니체가 '금발의 야수' 그리고 ‘축제 그 자체’라고 부른 인물. 르네상스시대 바티칸교황 총사령관. 한동안 피렌체와 밀라노, 나폴리의 점령군 사령관을 했는데, 이때 다빈치는 정보참모를 했다.

 

3.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독자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1, 2)

#1. 나를 오해하는 독자들 > 나에 대해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는 나에게서 자기의 상(*이미지)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었는데, 나와는 반대되는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내게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는 내가 도대체 고려할 만한 대상이라는 점을 부정해버렸다.

#2. 나를 이해하는 나의 비독자들 > 그리고 내가 고백하거니와, 내 이름을 들어보지도, 철학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나의 비독자들이 나를 더욱 기쁘게 한다. 예를 들어 이곳 토리노에서처럼 내 눈길이 닿으면, 모든 얼굴이 명랑해지고 즐거워한다. 지금껏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했던 일은 늙은 노점상 여인네들이 자신들이 가진 가장 달콤한 포도를 내게 찾아주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했던 일이다. 이 정도가 되려면 철학자가 아니면 안된다.

······> 니체연구자와 니체주의자는 동일하지 않다. 이는 '무엇을 읽는가'라는 문제와 '어떻게 사는가'라는 문제이다. 니체를 연구하면서도 니체주의자가 아닌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며, 니체를 읽지 않은 채 니체주의자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4. 니체의 문체가 가진 특이성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4)

*문체는 글이 가진 스타일(힘에의 의지)이다. : 생명_힘에의 의지, 윤리_덕, 예술_스타일(글_문체), 일상_취향

ex. 문체의 기법 : Kunst des Stils / art of style

내 문체의 기법에 대하여 > ① (문체의 의미) 기호(*글)의 속도를 포함해서 기호(*글)를 통한 파토스의 내적 긴장상태를 전달하는 것이 문체의 의미이다. 나의 내적 상태들이 특출나게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게는 수많은 문체의 가능성이 있다. ② (좋은 문체) 내적 상태를 전달하는 문체, 기호기호의 속도제스처(복합문의 규칙들은 모두 제스처기법이다)를 제대로 파악하는 문체는 좋은 문체이다. (*단지) 좋은 문체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물 그 자체’처럼 하나의 순진한 우매함이자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문체를 들을 귀(자격)에 대하여 > 문체가 언제나 전제하는 것은 ‘문체를 들을 귀가 있다’는 것, ‘문체와 동일한 파토스를 가질 수 있고 그 파토스에 적합한 자들이 있다’는 것, 자기를 전달할만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차라투스트라도 우선 그런 자들을 찾는다. 아아, 그는 더 오랫동안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선 그의 말을 들을 자격을 갖추어야 하기에.

 

5. 니체의 여성관에 대하여 : 거세당한 여성 vs 거세하는 여성 vs 여성 자신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5)

매혹적인 광란하는 여자 vs 복수에 불타는 여자 vs 친절한 여자 > ① (매혹적인 광란하는 여자 vs '해방된' 여자) 아이를 낳을 도구가 없는 ‘해방된’ 여자들(이런 사고를 당한 여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내 의지는 내가 갈갈이 찢기게 놔두지 않는다. 완벽한 여자가 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갈갈이 찢어버린다. 나는 이런 매혹적인 광란하는 여자들을 알고 있다. ② (맹수같은 여자 vs 복수에 불타는 여자 vs 친절한 여자) 아아, 이 어떤 위험하고도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지하세계의 작은 맹수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 어찌 호감을 주는지! 하지만 복수에 불타는 비소한 여자는 운명조차도 달려가 넘어뜨려버린다. 여자는 남자보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악하며 더 똑똑하기도 하다. 여자들의 친절은 이미 퇴화의 한 형태이다. (*여자의 친절은 강자적 배려가 아니라, 약자적 복종에서 나온 것이므로!) 소위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에게는 근본적인 생리적 지병이 있다.

여성에 대한 구원은 임신이다 > ① (임신, 여성에 대한 구원) ‘여자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이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들을 필요로 하고, 남자는 한갓 수단일 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② (아이를 못낳는 ‘해방된’ 여자들) ‘여자들의 해방’은 여자로서는 실패작(아이를 잘 낳는 여자들에 대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의 본능적인 증오)이다. ‘남자에 대한 싸움’은 언제나 수단이고 구실이며 작전일 뿐이다. 그녀들은(*남자에 대결하는 여자들) 자기네들을 ‘여자 그 자체, 고등한 여자, 여자 이상주의자’로 끌어올리면서, 여자의 일반적 수준을 끌어내리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교육, 바지, 정치적 참정권보다 확실한 수단은 없다.

*여성의 구원은 임신이다!? > 니체는 학문과 교육을 도덕적 인간을 길러내는 수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세대의 육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가 학문을 하는 것을 비판하고, 아이를 갖는 것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았다! “여자는 학문을 해서는 안되고, 임신만이 여성의 구원이다.” 니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여성을 비하하는 것일까? (ex. 사람에 대한 우정의 선물로 ‘죽은 쥐’를 물어다주는 고양이!) “여자에게 공부는 사치이고, 시집가서 아이만 잘 낳으면 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전제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니체는 같은 관점인가?

 

 === 청년-니체 시기의 작품비평 ===

참고① [청년 니체] 기성의 가치에 의존한 철학자 / 낙타의 시대 (복종의 정신) / 시대성

- 생애 : 1864~1876(19~31세) / 1844(탄생), 1864(19세) 본대학, 1869(24세) 대학교수, 1876(31세) 바그너와 결별

- 작품 : 『비극의 탄생』1872(27세). 『반시대적 고찰』1873~1876(28~31세).

- 철학 : 부르주아문화 비판 /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통해 자기사상을 대변

            기성의 가치에 기반한 철학자 ······> 기성의 가치에서 해방으로!

 

6. 비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은 어떤 방식으로 염세주의(*비관주의)를 극복하는가? 비극적 철학자는 어떤 점에서 염세적 철학자와 대척자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비극의 탄생 #1, 2, 3, 4)

#1 이 책의 가치 :: 그리스정신과 염세주의 > ‘그리스정신과 염세주의’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 대한 제목일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를 잘 해결했는지, 무엇을(*비극) 가지고 염세주의를 극복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으로 염세주의를 극복했다!)

#2 진정한 대립 :: 삶에 대한 퇴화 & 삶에 대한 긍정 > 나는 진정한 대립을 최초로 알아차렸다. 삶에 대한 지하적 복수욕을 가지고 저항하는 퇴화하는 본능(그리스도교, 쇼펜하우어철학, 플라톤철학 등 이상주의(관념론) 전체가 전형적 형태다)과 충만과 과잉에서 탄생한 최고의 긍정형식(고통과 죄와 삶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없는 긍정)의 대립!

#2 삶에 대한 긍정 ······ 실재에 대한 인식 > ① (삶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즐겁고 충일한 긍정은 진리ㆍ학문에 의해 확인ㆍ유지되는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교인ㆍ허무주의자들에 의해 거절당한 삶의 측면은, 데카당스 본능이 승인했던 것들보다 가치서열상 무한히 높다. ② (실재에 대한 인식) 실재로부터의 도망인 이상이 약자의 필연이듯이, 실재에 대한 긍정인 인식은 강자에게 필연이다. 인식은 그들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데카당들은 거짓(*실재로부터 도망이라는 점에서 ‘이상’은 거짓)을 필요로 하며, 거짓은 데카당의 보존조건 중 하나이기에.

#3 비극의 심리학, 비극적 철학자 > ① (비극의 심리학) ‘비극적’이란 개념과 비극의 심리학에 대한 인식. <우상의 황혼>139쪽(번역 184~185쪽)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자기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이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고, 비극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이해했다.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위험한 감정을 방출시켜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도(*아리스트텔레스의 비극)아니다.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파괴의 기쁨도 포함하고 있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이기 위해서다.” ②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 이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로서(염세적 철학에 대한 대척자로서) 이해할 권리가 있다. 나 이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철학적 파토스로 변형시키지 않았었다. 비극적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미래 > ① (디오니소스적 미래) 이 책에서는 엄청난 희망이 이야기되고 있다.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파기할 이유가 없다. 한 세기 앞을 미리 내다보고서, 그때에 인류를 더 높이 사육육성시킨다는 위대한 과제를 떠맡아, 퇴화되고 기생충적인 자들을 파괴하는 삶의 새로운 당파가, 디오니소스적 상태를 다시 자라나게 하는 생의 충일을 지상에서 다시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② (비극의 시대) 나는 어떤 비극적 시대를 약속한다. 인류가 가장 가혹하지만 가장 필연적인 투쟁을 벌이면서도 그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은 채로 그 투쟁의식을 뒤로할 때, 삶에 대한 긍정에서 최고의 예술인 비극이 부활할 것이다.

[참고] 그리스 비극에 대한 퍼스펙티브 [힘에의 의지] #851, [우상의 황혼] 내가 옛사람의 덕을 #5
아리스토텔레스_카타르시스 ::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정화 / 윤리적 성격
쇼펜하우어_염세주의 :: 우울, 체념  / 행복, 희망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 쇠퇴의 징후
니체_에스터시 :: 도취, 관능, 잔혹 / 생성적, 긍정적

[참고] 니체의 비극적 영웅: 비극적 영웅은 누구인가?
그는 특이성과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다. 그가 영웅인 것은 무리적인 것들 중에 특이적 유형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비극인 것은 그가 자기몰락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7. 니체는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이라는 작품과 바그너쇼펜하우어의 관계를 어떻게 변호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비극의 탄생 #4 / 반시대적 고찰 #1,3)

비극의 탄생#4.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에세이 > (바그너 음악 & 디오니소스적 음악) 어떤 심리학자는 다음같이 덧붙일 수 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바그너음악에서 들었던 것은 바그너와는 전혀 관계도 없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에 대해 기술했을 때 내가 들었던 바를 기술했다. 내가 본능적으로 담지하고 있던 새로운 정신으로 옮기고 변형시켜야만 했다.” 그에 대한 증거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라는 내 에세이인데(*[반시대적 고찰4]), 이것은 너무 강력해서 단순한 증거 그 이상이다. (바그너······> 니체, 차라투스트라 / 열광적인 예술가들······> 차라투스트라의 선재적 모습) 이 에세이에서 심리학적으로 결정적인 곳에서는 내가 그 이야기의 대상이며, 그 텍스트에서 바그너라는 단어에 내 이름이나 ‘차라투스트라’라는 단어를 주저함없이 세워도 무방하다. 열광적인 예술가들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시인의 선재적 모습이며 그 모습은 심연적 깊이에 의해 그려지고, 바그너의 실재성은 한순간도 건드리지 않는다. 바그너 자신도 이점을 알고 있었고, 그는 이 에세이(*<바이로이트의 바그너>)에서 자기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 ③ (바이로이트 사상 ···> 위대한 정오) 이와 유사하게 ‘바이로이트 사상’은 <차라투스트라>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가 아닌 것으로 변형되었다. 가장 정선된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과제를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정오로 변형된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미리 고지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정신의 회귀가 가까이 있다는 것...... 이다.

반시대적 고찰 #1 >  반시대적 고찰3(1874)과 반시대적 고찰4(1976)는 고급한 문화개념을 향한 힌트로서 자기자랑과 자기도야라는 2가지 상을 제시한다. 자기자랑과 자기도야는 반시대적 유형을 둘러싸고 있던 ‘독일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차 있다. 이 경멸들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혹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니체이다.

반시대적 고찰 #3 >  ① (반시대적 고찰3·4 ≠ 쇼펜하우어·바그너 이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이름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반시대적 고찰이 그들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는 벌써 바그너의 핵심적인 본성이 그의 수단과 의도에서 귀결되는 배우적 소질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에세이에서는 교육문제(가혹할 정도의 자기도야와 자기방어라는 새로운 개념, 위대함과 세계사적 과제로 향하는 길)에 대한 표현이 최초로 요청되었다. ② (기호학으로 사용된 쇼펜하우어, 바그너) 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몇가지 정식과 기호와 언어수단을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라는 두 유형을 포착한 것이다. ......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을 위한 기호학으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에세이들이 증거가 되는 그 때의 상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그 상태를 돌아보는 지금, 나는 그 에세이들이 근본적으로 단지 나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반시대적 고찰 #3 > ① (교육자로서의 니체) 이 에세이에서 나는 철학자를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시무시한 폭발물로 이해하고, 나의 ‘철학’ 개념을 아카데미의 ‘반추동물’이나 철학개념과는 아주 멀리 분리시켜버린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가 아니라, 그것의 반대 교육자로서의 니체가 표명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② (학자-니체) 그 당시 내 작업이 학자의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 에세이에서는 학자의 신랄한 심리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나는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위해, 많은 것이 되어보고 많은 곳에 있어 보았다. 나는 얼마동안은 학자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8.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반시대적 고찰 #4)

참고:: [반시대적 고찰] 작품개요

『반시대적 고찰』전체 : 19C기 독일사회의 근대성에 대한 공격

『반시대적 고찰Ⅰ』 :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 1873 출간

『반시대적 고찰Ⅱ』 :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공로와 과실, 이로움과 해로움) / 1874 출간

『반시대적 고찰Ⅲ』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 1874 출간

『반시대적 고찰Ⅳ』 :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 1876 출간

* 첫번째 논문이 문화비판이었다면, 두번째 논문은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

 세번째 논문은 교육비판, 네번째 논문은 예술비판의 성격을 띤다.

반시대적 고찰 :: 19C기 독일사회의 근대성에 대한 공격 > 4편으로 된 <반시대적 고찰>은 전적으로 호전적이다. 이것들은 내가 몽상가가 아니라 검을 빼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점을 입증하며, 내 손목이 위험하리만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도 입증하고 있다.

반시대적 고찰1 :: 문화 비판, 독일교양에 대한 공격 > 반시대적 고찰1(1873)은 의미도 내용도 목표도 없는 한갓 ‘여론’에 불과한 독일교양을 향했다. '독일의 대단한 군사적 성공이 독일교양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를 입증한다'는 것은 악의어린 오해이다.

반시대적 고찰2 :: 역사주의 비판, 학문경영 방식에 대한 공격 > 반시대적 고찰2(1874)는 우리의 학문경영방식의 위험한 요소, 삶을 갉아먹는 요소, 삶을 독살하는 요소를 폭로하고 있다. 학문경영방식의 탈인간적인 톱니바퀴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노동자의 ‘비인격화’로 인해, ‘노동분업’이라는 잘못된 경제학으로 인해, 삶은 병이 든다. 목적이 상실되고, 문화가 상실되어간다. 이렇게 만드는 수단인 현대적인 학문경영은 야만화된다. 두번째 에세이에서는 금세기의 긍지인 ‘역사적 감각’이 퇴락의 전형적 징후로서 간파되었다.

반시대적 고찰3ㆍ4 :: 고급문화를 향한 자기자랑ㆍ자기도야 > 반시대적 고찰3(1874)과 반시대적 고찰4(1976)는 고급한 문화개념을 향한 힌트로서 자기자랑과 자기도야라는 2가지 상을 제시한다. 자기자랑과 자기도야는 반시대적 유형을 둘러싸고 있던 ‘독일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차 있다. 이 경멸들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혹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니체이다.

 

=== 이행기-니체 시기의 작품비평 ===

참고 ② [이행기 니체] 기성의 가치를 비판하는 철학자 / 사자의 시대 (비판의 정신) / 반시대성

- 생애 : 1876~1882(31~37세) / 질병과 치유(병과 건강)의 반복.

- 작품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33~35세). 『아침놀』1881(36세). 『즐거운 학문』1882(37세).

- 철학 : 형이상학적 가치 비판, 모든 가치의 전환 / 관점주의(관점의 이동에 따른 가치(평가)의 이동)의 확립

 

9. 이행기-니체의 첫작품 [인간적인]에서 니체의 위기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나? (왜 이렇게 좋은 책 > 인간적인 #3, 4)

[참고] 니체의 위기는 악화된 건강상태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바그너와 결별로 인한 정신적 고독이었다. > 바그너와의 결별은, 기존 가치와의 결별-자기 사유 전체와의 결별이었고, 이것은 극심한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니체는 극심한 질병을 더 밀고 나가, 지배정서/가치를 해체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우상은 : (내용) 기존의 모든 가치를 의미하며, (표현) 기원, 근거, 도덕,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모두 나의 내부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따라서 바그너의 결별은 우상의 파괴를 의미했고, 자기입법자(주권적 개인)로서의 니체의 출발을 의미했다. 

[참고] 바그너와의 결별 (1876. 31세)바그너와의 결별은 바그너의 이름을 빌려 전개된 니체 자신의 사유 전체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는 바그너와 결별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니체와 결별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 그의 운명은 하나의 영토를 떠났으나, 도달할 곳은 모르는 배와 같았다.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고, 진부한 세계와 낡은 문화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용감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되었다.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에 의문을 던졌다. 자신의 시대가 올바르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모든 가치를 뒤바꿔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 아닐까?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거짓이 아닐까?" 

[참고] 1877~1881년(32~36세)까지의 질병 > ① 니체는 평생을 신체상의 통증이나 정신장애와 우울증을 겪었지만, 1877~1881년까지의 병은 다른 시기에 비해 정도가 아주 심했다. 바그너와 결별한 1876년 이후 악화된 질병은 1879년 극에 달했다. 한해 동안 118일이나 발작을 겪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과 마비를 겼었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② 니체는 자유정신의 방식으로 병에 걸렸다. 병을 염세주의에 대한 치료법으로 사용했다. 병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영토를 낯설게 만든다. 병은 자기의 습속을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 ······ 병은 지배정서에 대한 항거이며, 병은 우리 안에 있던 정서들 사이의 전쟁이다. 니체의 경우 인류의 습속에 대한 항거이다. 니체는 극심한 질병을 통해 지배적 정서/가치를 해체······> 다양한 정서/가치의 전환 ······> 새로운 정서/가치의 생성으로 나아갔다. 니체에게 병은 지배정서/가치를 해체하는 수단이었다. 

인간적인 #3 > ① (총체적인 길 잃음) 당시 내게 결정적이었던 일은 ‘바그너와의 결렬’이 아니라, ‘총체적인 길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나 자신을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고, 이때 나는 다시 내 정신으로 돌아오기에는 지금이 절호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내게서 정신의 영양섭취가 단절되어버렸으며(*시대의 사상으로부터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았음), 쓸모있는 것은 하나도 더 배우지 않은 채로 10년이 흘러버렸다. 완전히 메말라 있고 완전해 굶주려 있는 나 자신을, 나는 연민을 가지고 본다. ② (실재성과 이상성) 내 지식의 내부에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상성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생리학과 의학과 자연과학 공부에 전념했다. 본능에 역행한 ‘직업’과 황폐감ㆍ굶주림마취제 같은 바그너예술로 마취시키고자 하는 욕구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하나의 반자연(*바그너예술)두 번째 반자연(*자기상실)을 강요한다. 쇠약해지고 있는 독일인들은 바그너를 하나의 아편으로 요청하며, 자기 자신을 잊고 한순간 자기 자신을 놔버린다.

인간적인 #4 >  ① (무가치한 무사와 병증) > 내 본능은 굴복과 동행, 나 자신에 대한 혼동에 대해 무자비한 결단을 내렸다. 어떤 종류든지 악조건빈곤무가치한 무사(無私 *타성에 젖음 무사안일, 안정희구)보다 낫다. 무가치한 무사에 처음에는 무지 때문에 빠졌었고, 나중에는 ‘의무감’이라는 타성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때 병증이 무가치한 무사에서 서서히 나를 분리시켜주었다. 병증은 나에게 모든 난폭하고 충돌적인 행보를 하지 않게 만들었고, 나의 모든 습관으로 되돌아갈 권리를 주었고, 망각을 명령했고, 조용히 누워있는 것-한가로움-기다림-인내의 필요를 선사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외부로부터의 영양섭취가 아니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② (나로의 귀환) 나는 문헌학에 안녕을 고했는데, 책에서 구제되었으며 몇 년간 더 이상 독서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푼 최고의 은혜였다. 독서하는 자아의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했던, 가장 밑바닥의 자아가 깨어나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삶에서 가장 아팠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나는 가장 큰 행복을 가졌다. (*질병-건강 관점의 이동) 이것은 나로의 귀환이었고, 최상이 회복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아침놀], <방랑자와 그림자> 참조.

*무사Selbstlosigkeit(사심없음)의 도덕 ≒ 탈아Entselbstung의 도덕

 

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작품제목에 표현된 니체의 뉘앙스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제목. “너희가 이상적인 것들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것만을 본다.”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이 책은 형이상학에 대한 전쟁선포이며, 당시 형이상학의 모습을 한 이상주의를 비판하는 책인데, 니체는 이상주의의 본질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필요와 동경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한다.)

[참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제목. 『차라투스트라』 언젠가 더없이 위대하다는 사람과 더없이 왜소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적이 있다. 저들은 너무나 닮아있었다. 더없이 위대하다는 자조차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위대하다는 자조차 그토록 왜소했으니,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싫증이었다. ([차라투스트라] 3브 #13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 머리말’)

 

11. 니체는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전환을 수행하는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아침놀 #1)

이 사람 > 아침놀 #1. 1881년 >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화약냄새도 포격도 없는 전투가. 이 책으로 지금까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숭배되었던 모든 것과 작별을 고한다. ......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인도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있다. 이 책의 저자(*니체)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여는 붉은 빛을 찾는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 모든 도덕가치들로부터의 해에서, 지금까지 부정되고 의심되며 저주받아왔던 것에 대한 긍정과 신뢰에서 찾는다! 이 긍정하는 책은 자기의 빛사랑부드러움을 발산하여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들에게 영혼과 가책없는 양심과 삶에 대한 권리와 특권을 되돌려준다. 도덕은 공격되지 않는다. 도덕은 단지 더이상 고찰대상이 되지 않을 뿐이다. 

[참고] 이 사람 > 인간적인 #1. 1878년 > 자유정신은 횃불을 들고서 이상의 지하세계를 구석구석 날카롭게 밝게 비춘다. 그것은 화약도 연기도, 전투태세도, 파토스도 사지의 탈골도 없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오류가 차례차례 얼음 위에 놓인다. 이상은 반박되지 않고 얼어죽는다.

[참고]《즐거운 학문》 #304. 1882년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가 내버려두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둔다. (*능동적 힘, 긍정의 의지)

[해석] '공격하는 것, 반박하는 것'이 긍정의 의지이지만 반동적인 힘에 의한 방식이라면, '행동하므로써 내버려두는 것'은 능동적 힘과 긍정의 의지에 의한 방식이다. 

 

12. 도덕에 대한 생리학자와 사제의 처방은 어떻게 다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아침놀 #1, 2)

이 사람 > 아침놀 #1, 2. 데카당스 도덕의 지배 >  ① (도덕에 대한 전투)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 이 책의 저자(*니체)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여는 붉은 빛을 찾는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 모든 도덕가치들로부터의 해방에서, 지금까지 부정되고 의심되며 저주받아왔던 것에 대한 긍정과 신뢰에서 찾는다! ...... 도덕은 공격되지 않는다. 도덕은 단지 더이상 고찰대상이 되지 않을 뿐이다. ② (데카당스 도덕의 지배) 위대한 정오를 준비하는 과제는, ‘인류가 스스로 옳은 길을 가지 않으며 인류는 신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오히려 인류의 가치개념은 부정본능과 부패본능과 데카당스본능이 지배하고 있다’는 통찰에서 나온다. ...... 사제(철학자)가 특정 종교집단에 있지 않고, 전반적인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도덕이 데카당스 도덕, 종말에의 의지로 간주된다는 것. 이것에(*사제가 전반적인 지배자가 되고, 도덕이 데키당스 도덕이 되었다는 사실) 대한 결정적인 표시는 비이기적인 자에게 부여되는 무조건적 가치와 이기적인 자에게 표출되는 적대감이다. 이 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자를 나는 감염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온 세상이 내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람 > 아침놀 #2. 도덕에 대한 태도:: 생리학자와 사제 > ① (생리학자) (*반대로) 생리학자는 이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유기체의 내부기관이 자기보존이나 자기힘의 보충에 ‘이기주의’를 관철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유기체 전체가 퇴화하기 때문이다! 생리학자는 퇴화된 부분을 잘래내기를 요구하고, 퇴화된 부분과 어떤 연대도 부정하며, 일체 동정하지 않는다. ② (사제) 하지만 사제는 전체의 퇴화, 인류의 퇴화를 원한다. 그래서 사제는 퇴화된 부분을 보존한다. 이런 값을 치르고서야 사제는 인류를 지배하는 것이다. ③ (데카탕스로의 처방) ‘영혼, 정신, 자유의지, 신’ 같은 거짓개념이자 도덕의 보조개념의 의미는 인류를 생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의 자기보존이나 힘의 상승에 대한 (삶의 자기보존이나 힘의 상승에 대한) 진지함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린다면, 그리고 빈혈증에서 하나의 이상을 (몸의 경멸에서 ‘영혼의 구원’을) 고안해 낸다면, 이것이 바로 데카탕스로의 처방이다! ④ (무사의 도덕, 탈아의 도덕) 중심의 상실, 자연적 본능에 대한 저항, 한마디로 ‘무사Selbstlosigkeit(사심없음)’ 이것이 이제껏 도덕이라고 일컬어졌다. 《아침놀》과 더불어 나는 먼저 탈아Entselbstung의 도덕에 대한 전투를 시작했다.

 

13. [즐거운 학문]이 표현하고 있는 어펙트(감흥, 정서)로서 '프로방시즘'이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좋은 책 > 즐거운 학문)

<즐거운 학문>의 어펙트 > ① (심오함과 밝음) <즐거운 학문>은 <아침놀>과 마찬가지로 긍정의 말을 하는 책이며, 심오하지만 밝고 호의적이다. 이 책의 모든 문장에는 심오함과 장난기어린 좋은 기분이 정겹게 손을 맞잡고 있다. 내가 체험했던 가장 경이로운 1월(*새로운 생성)에 대한 시구가(이 책 전체가 1월의 선물이다) “어떤 심오함에 의해 학문즐거운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② (최고의 희망) > 여기서의 ‘최고의 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즐거운 학문> 4편의 말미에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본 사람이라면 누가 의아해하겠는가? 또는 영원을 위한 어떤 운명을 최초로 정식화했던 3편의 말미에 있는 화강암처럼 견고한 문장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가 의아해하겠는가?<포겔프라이 왕자의 노래> 프로방시즘 > 시실리에서 씌어진 <포겔프라이 왕자의 노래>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프로방스적 개념을 명백하게 기억해내고 있다. 즉 경이로운 프로방스 문화모든 애매한 문화와 구별해주는, 시인과 기사의 자유정신의 합일을. 특히 <미스트랄에게 부침>이라는 마지막 시는 도덕을 넘어서 춤을 추게 하는 자유로운 춤곡으로 완벽한 프로방시즘이다.

[참고] 프로방스, 프로방시즘

*프로방스의 밝고 활기찬 기후는, 프로방시즘으로 표현되는 긍정적이고 열정적 문화와 철학을 낳았다. 니체는 대지의 신체성(날씨ㆍ기후)을 문화와 철학의 토대로 해석한다.

프랑스 남방과 독일 북방. 『선악의 저편』8장 민족과 조국 #254 > 프랑스인에게는 프로방스나 리그아리아의 피가 넘쳐흐르는 남방으로 향하는 기질이 있는데, 이 기질은 북방의 잿빛 음울함과 햇빛을 받지 못하는 빈혈증에 빠지지 않도록 방지한다. 즉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본능은 독일적인 취미의 병을 방지하기 위해 피와 철이라는 큰 결단-큰 정책으로 처방되었다. (*독일철학은 무엇보다 춤을 출 수가 없다.)

귀족적 사고방식 & 노예의 덕성. 『선악의 저편』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60 > ① (귀족적 사고방식) 귀족적 사고방식은 경외하고 헌신하는 기술과 열광이 징후이다. ② (노예의 덕성) 반대로 노예의 덕성은 자유를 향한 갈망, 행복에 대한 본능이다. ③ (열성으로서의 사랑)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고귀한 유래를 가져야 한다. 이것을 발명한 것은 ‘즐거운 지식’의 인간들인 프로방스 지방의 기사시인이며, 유럽은 많은 것을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2북클럽자본 :: 자유의 파토스, 포겔프라이 프롤레타리아 [1] oracle 2022.12.22 203
공지 [에세이자료집] 2020니체세미나 :: 비극의 파토스, 디오니소스 찬가 [2] oracle 2020.12.21 376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니체세미나 :: 더 아름답게! 거리의 파토스 [2] oracle 2019.12.19 681
966 [청인지 15-7주차 발제] 8장 들뢰즈와 현대예술 : 추상과 추상적 선의 개념에 관하여 file 조성아 2023.02.03 37
965 [청인지 15-6주차 발제] 유목주의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 file 리베인데 2023.02.03 66
964 [청인지 15-6주차 후기] '혁명의 욕망, 욕망의 혁명'과'유목주의' 후기 진희 2023.02.02 44
963 [청인지15-5주차 발제]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후기 이상진 2023.01.25 51
962 [청인지15-5주차 발제]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file 경덕 2023.01.13 69
961 [청인지15-4주차 [후기] 권력의 미시정치학과 계급투쟁 두뷰 2023.01.10 76
960 [청인지15-4주차 발제] 권력의 미시정치학과 계급투쟁 file 바라 2023.01.06 72
959 [청인지15-3주차 후기] 푸코, 담론, 에피스테메 [1] 수진 2023.01.04 110
958 [청인지15-3주차 발제] 푸코의 담론이론: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file 진영 2022.12.30 94
957 [청인지15-2주차 후기] 상징계를 탈주하기 [2] 이희옥 2022.12.29 99
956 청인지 2강 발제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file 초보(신정수) 2022.12.23 72
955 [청인지15 - 1주차 후기] 라캉으로 시작! [2] 경덕 2022.12.20 186
954 [북클럽 자본_에세이] 포겔프라이(vogelfrei) file 손현숙 2022.12.19 82
953 [북클럽자본_에세이] SPC사건, 다시 보기 file 파도의 소리 2022.12.17 76
952 [북클럽자본_에세이] 인공지능의 침묵 file 사이 2022.12.16 90
951 [북클럽자본_ 에세이] 옥수수 연대기, 비누연습 file 용아 2022.12.15 68
950 [북클럽자본_에세이] 괴물 씨앗 file 에이허브 2022.12.15 125
949 [청인지 15] 1강 발제 file 감쟈 2022.12.14 171
948 [북클럽자본_에세이]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 [1] file 초보(신정수) 2022.12.12 175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