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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안티크리스트]② :: 2020.11.2(월)

 

== 사도들과 바울에 대한 비판 (#40~43) ==

*예수의 죽음, 부활의 교리, 불멸의 믿음, 심판의 교리

 

1. 예수의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왜곡시켰나? 예수를 어떻게 신격화시켰나? 

 

#40. 예수의 사도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왜곡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의문 > 복음의 운명은 죽음과 함께 결정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렸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바로 그 죽음, 예기치 않았던 치욕적인 죽음. 바로 그 십자가, 대개는 남을 해치고 속이는 천민에게 사용되었던 십자가. (*그런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았으니!) 사도들은 가장 끔찍한 역설에 맞닥뜨렸다.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저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마음 속 깊이 모욕당한 느낌, 그런 죽음이야말로 예수의 행적에 대한 반박으로 간주되었다. “누가 그를 죽였나? 누가 그의 당연한 원수인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왜곡 > 그때까지는 예수의 모습에 호전적이거나 부정적인 말ㆍ행동 같은 특징이 없었으며, 오히려 정반대였다. 예수의 그런 방식의 죽음이 보여준 모범(모든 원한감정을 넘어서 있는 자유와 능가라는 모범)을, 그 작은 집단(*사도집단) 알지 못했다....... 그의 사도들은 그런 죽음을 용서하는 데에서 멀리 있었다. 용서하는 것이 최고의미에서 복음적이고, 평안하고 평정한 마음으로 그런 죽음을 자청하는 것이 더 복음적이었을 텐데도, 가장 비복음적 감정인 복수심이 맨 위로 올라섰다. 그 죽음을 그대로 끝낼 수는 없었고, 사람들은 ‘보복’과 ‘심판’을 필요로 했다. (‘보상ㆍ벌ㆍ판결’ 보다 비복음적인 것이 무엇인가!)

예수에 대한 신격화 > ① (메시아에 대한 기대) 이렇게 해서 모든 메시아에 대한 대중적 기대가 전면에 나섰다. ‘신의 나라’가 자기의 적을 심판하러 오는 역사적 순간이 주목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오해되어버렸다. ‘신의 나라’가 마지막 장이요, 약속이라니- 예수의 복음은 그런 ‘나라’가 현재 존재하고 이루어졌으며 현실이라는 것! 예수의 그런 죽음이 바로 이런 신의 나라였던 것이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바리새인으로, 신학자로 만들어버렸다. ② (예수, 신의 아들) 한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런 영혼들의 광포해진 숭배심은 ‘만인이 신의 자식’이라는 예수가 가르쳤던 복음적 평등권리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의 복수는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예수를 치켜세우고, 그들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신의 아들: 이 2가지 모두 원한의 산물이다.

 

#41. 예수의 사도들: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리

예수의 죽음: 죄의 희생양 > ① (사도들_죄의 희생양) “신이 어떻게 그런 죽음(*자기 아들을 죽인)을 허용할 수 있었단 말인가?”라는 터무니없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작은 집단(*예수의 사도들)의 교란된 이상은 즉시 끔찍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답변을 찾아냈다. “신이 죄의 사함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주었다.” ② (예수_‘죄’ 없음) 복음이 단 한순간에 그렇게 끝장나버리다니! 죄의 희생양이라니, 그것도 가장 역겹고 가장 야만적인 형식의 희생양이라니! 죄지은 자의 죄를 위해 죄없는 자가 희생되다니! 진정 예수야말로 개념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야말로 신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부정했으며, 인간으로서 신과 그러한 통일의 ‘기쁜 소식’으로 삼고 살았다.

부활의 교리: 지복을 대체하고, 개인불멸을 약속 > ① (지복의 개념 ······> 부활의 교리 대체) 이때부터 구원자유형 안으로 단계적으로 들어오는 그것은: 심판과 재림에 대한 교리, 희생적 죽음으로서 죽음에 대한 교리, 부활에 대한 교리. 부활의 교리를 통해 지복개념 전체(복음 전체의 사실)가 요술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죽은 다음의 상태를 위해서! (*현실의 지복이 사라졌다!) ② (바울_개인불멸의 약속) 바울은 이런 외설 같은 이해방식을 다음과 같이 논리화시켰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이로써 단 한순간에 복음이 가장 경멸스러운 약속(개인의 불멸에 대한 파렴치한 교설)이 되어버렸다. 바울 자신은 개인의 불멸을 보상이라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2. 예수의 '복음'을 바울은 어떻게 '화음'으로 변조시켰는가? (바울의 화음: 불멸의 믿음, 심판의 교설, 만민평등권, 영혼의 구원)

 

#42. 바울, 화음을 전하는 자 (불멸에 대한 믿음, 심판에 대한 교설)

[참고] 바울의 영원한 죽음, 영원한 저주: ① (영원한 죽음) 기독교는 삶에 죽음의 이미지(죄의식, 무력감, 절망, 증오, 심판, 피로, 원한, 가책 등)를 도입하는 것에 영리한 수완을 발휘했다. 기독교는 로마에 퍼져있던 ‘지옥의 형벌’이라는 생각을 이용하여, ‘죄인에 대한 형벌로서 영원한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구세주를 통한 영생의 길을 제시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② (영원한 저주) 그리고 위협의 강도를 높여 ‘영원한 죽음’ 대신 ‘영원한 저주’를 도입했는데, ‘죄인은 죽지 않고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영혼의 고문’이었다.

바울, 화음을 전하는 자 > ① (예수_복음을 전하는 자 vs 바울_화음을 전하는 자)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 것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향하는 단초였다. 예수가 전한 기쁜 소식(*복음)의 뒤를, 바울이 전한 가장 나쁜 소식(*화음)이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반대되는 유형(증오, 증오의 환상, 증오의 냉혹한 논리를 만드는데 전채유형)이 바울 안에 구현되어 있다. 이 화음을 전하는 자가 무엇을 증오에 희생시켜버렸던가! ② (구세주의 삶과 복음을 제거) 바울은 구세주를 자기 십자가에 못박아버렸다. 구세주의 삶과 모범을, 구세주의 가르침과 죽음을, 복음의 의미와 권능을 못 박아버렸다. 증오에 찬 위조자가 이용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파악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실도 없어져 버렸고 역사적 진리도 없어져버렸다!

바울: 불멸에 대한 믿음, 심판에 대한 교설 > ① (구세주의 삶을 삶의 배후로 이동) 구세주 유형, 가르침, 실천, 죽음, 죽음의 의미, 죽음 이후까지도, 실제와 비슷하게라도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바울은 구세주의 삶의 중심을 간단히 이세계 삶의 배후로(부활한 예수에 대한 거짓말 안으로) 옮겨버렸다. ② (불멸에 대한 믿음) 근본적으로 바울은 구세주의 삶을 도대체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필요했던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 이상의 다른 것이었다. 바울은 구세주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환영을 꾸며냈다. 그 자신은 믿지 않았지만, 그의 교설을 전해들은 바보들은 믿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권력이었고, 그와 함께 사제가 또한번 권력을 원했다. 그는 대중들을 폭압하고 무리로 형성시키기 위한 교설과 상징들만을 이용했다. 후에 마호메트가 그리스도교에서 빌린 단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제의 압제와 무리를 형성하기 위한 바울의 수단이자 바울의 고안물인 불멸에 대한 믿음(‘심판’에 대한 교설)이다.

 

#43. 바울의 화음 비판: 불멸의 영혼/영혼의 구원/만인 평등권

‘개인의 불멸, 영혼의 구원’ 비판 > 삶의 중심을 삶에 두지 않고 ‘피안’(무)으로 옮겨버린다면, 삶에서 중심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개인의 불멸에 대한 거짓말은 모든 이성ㆍ본능의 자연성을 파괴해버린다. 본능에 있는 유익한 것, 삶을 증진시키는 것,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이제는 불신을 조장하고, ‘사는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이제 삶의 의미가 된다. 이때, 필요한 한가지는 이것이다. “모든 이가 ‘불멸적 영혼’으로 동등하다. 개별자의 ‘구원’이 영구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들을 위해 자연법칙이 깨뜨려진다.” 그리스도교는 개인의 허영심에 그런 식으로 가련한 아첨을 떨어 승리를 한다. 이렇게 해서 온갖 실패자, 반항자, 잘되지 못한 자, 인류의 찌꺼기와 쓰레기를 설득시킨 것이다. 영혼의 구원(*불멸의 영혼)이라는 것은 꾸미지 않고 말하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이다.

‘만인 평등권’ 비판 > ① (고귀한 인간성에 대한 암살) 만인 평등권 교설의 독소를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전파시켰다. 그리스도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경심과 차이감(문화의 상승ㆍ성장의 전제조건)에 대해, 사악한 본능의 은밀한 구석에서 사투를 벌여왔다. 그들은 우리(지상의 기쁘고 고귀한 것, 지상적 행복)에 맞서는 주요무기를 대중의 원한에서 만들어내었다. 모든 베드로와 모든 바울에게 귀속된 불멸성고귀한 인간성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암살행위였다. ② (거리에 파토스에 대한 액운) 그리스도교에서 정치로 기어들어간 액운(*불멸성)은 거리의 파토스를 느낄 용기(오늘날 특권ㆍ지배권을 주장할 용기, 자신과 동류를 경외할 용기)를 없애버린다. 우리의 정치는 이런 용기(*거리의 파토스)가 없어서 병들어버린 것이다! 귀족주의 성향은 ‘영혼들이 평등하다’는 거짓말에 의해 땅 속 깊숙이 묻혀버렸다. 다수의 특권에 대한 믿음이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 혁명은 오로지 피와 범죄로 바꿔놓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높이를 갖고 있는 것에 대적하는,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의 봉기이다. ‘천한 자’의 복음은 천하게 만든다.

 

== 복음서 비판 (#44~46) ==

 

3. 그리스도교인은 복음서를 통해 어떻게 인류를 유혹하고 어떻게 가치를 전도하는가?

 

#44. 복음서: 인류를 향한 유혹, 그리스도교인의 가치전도

*복음서: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한 네 가지 성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복음서를 읽는 방식: 니체 vs 그리스도교인 > ① (니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읽는) 전 인류가, 심지어 가장 뛰어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머리들마저도 기만당해왔다. 복음서를 무죄의 책으로 읽어왔다. 거기서 어떠한 대가적 기교의 연기가 펼쳐져왔었는지. 우리가 그 경이로운 위선자와 예술-성자들을 직시하게 된다면, 이들은 끝장나버릴 것이다. 나는 행동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런 도 읽어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끝장내버릴 것이다. ② (그리스도교인: 덕, 선에 대한 허위) 나는 그들이(*그리스도교인이) 복음서를 읽어내는 방식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 ‘판결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그들은 신에게 판결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판결을 내리고, 신을 영광스럽게 함으로써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 그들의 능력에 미치는 덕들만을(더욱이 자기네 우위를 지키는데 필요한 덕들만을) 그들은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덕을 위해 투쟁한다’는 ‘덕의 지배를 위해 싸운다’는 가상을 자기들에게 부여한다. “우리는 선을 위해 살고, 선을 위해 죽으며, 선을 위해 희생한다.” (‘진리’와 ‘빛’과 ‘신의 나라’를 위해)라고. 비열한 자가 자기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관철시키고,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으며, 음침한 곳에서 음침하게 생활하면서, 그들은 그런 것들을 자기들의 의무로 만든다. 의무로서의 그들의 삶은 순종으로 나타나고, 순종으로서 그들의 삶은 신앙심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아아, 순종적이고 순결하며 인정 많은 허위여!

복음서: 인류를 향한 유혹, 그리스도교인의 가치전도, 유대적 과대망상 > ① (복음서: 인류를 향한 유혹) “우리에게는 덕 자체가 증거여야 한다.” 도덕을 수단으로 유혹하는 서적으로, 복음서를 읽어보라. 도덕은 이런 비소한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들은 도덕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인류는 도덕에 의해 가장 잘 우롱당한다는 것을! ② (그리스도교인의 자기중심적 가치전도) 여기서 선민이라는 의식적인 오만이 겸허로 가장하고 있다. 자기네와 공동체선한 자와 의로운 자들을 한쪽 편에(진리의 편에) 놓아버리고, 나머지와 세상을 반대편에 놓았다. 이런 일은 지상에 존재했던 것 중에서 가장 숙명적인 유형의 과대망상이었다. 비소한 실패작들인 위선자와 거짓말쟁이들이 ‘신, 진리, 빛, 정신, 사랑, 지혜, 삶’ 개념을 독점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기네들과 동의어로! 정신나간 비소한 유대인의 최상급들은, 그리스도교인만이 의미이고 소금이고 척도이며 나머지에 대한 ‘최고법정’이라는 듯 가치를 자기네에 맞게 비틀어버렸다. 

 

#45. 니체의 복음서 비판

*그 비소한 자들(*그리스도인)이 자기네 머리에 집어넣었던 것, 그들이 자기네 스승의 입에 담아놓았던 것 중에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순전히 ‘아름다운 영혼들’의 고백들을!

① 그리스도교: 복수와 원한의 천민도덕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반대하는 증거로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최후의 심판에서는 저런 고장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더 낳으리라.” <마가복음 6장 11절> “나를 믿는 사람을 보잘것없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맷돌을 달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가복음 9장 42절> ······> 이 어찌 복음적이란 말인가!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빼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애꾸눈이 되더라도 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가복음 9장 47절> ······> 여기서는 단순히 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장 15절> ······> ‘아버지’라는 자의 위신을 아주 떨어뜨린다. (*푸하하하~~ 니체적 유머의 정점!)

“여러분은 자신이 신의 성전이며, 신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신의 성전을 더럽히면, 신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신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 아무리 경멸해도 충분하지 않다.

“신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신의 지혜로운 경륜에 따르면, 세상은 자기 지혜로는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께서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 육체에 의거해서 지혜로운 자, 능한 사람, 가문 좋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 오히려 신께서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신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0절 이하> ······> 찬달라(*천민)도덕의 심리에 대한 최장의 증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도덕의 계보] 첫 장을 읽어보라. 거기에는 고귀한 도덕원한이나 어찌할 수 없는 복수심에서 나온 찬달라도덕 사이의 대립이 최초로 밝혀지고 있다. 바울은 모든 복수의 사도 중 최고였다.

② 그리스도교: 계산적인 약자도덕

남을 판결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결을 받을 것이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절> ······> 어떤 정의개념이고, 어떤 ‘정의로운’ 판관개념이란 말인가! (*계산적이고 약자적 정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친절하다면, 남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이냐?” <마태복음 6장 46절> ······> ‘그리스도교적 사랑’ 원칙: 결국 그들은 보상을 잘 받기를 원한다. (*보상받기 위한 사랑, 타인과 경쟁하는 친절)

여러분은 성도들이 세상을 판결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온 세상이 여러분에 의해 판결될 텐데, 작은 사건들조차 판결할 능력이 여러분에게 없다는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2절> 어떤 미치광이의 헛소리가 아니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끔찍한 사기꾼이 말을 계속한다. “우리가 천사들까지 판결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소한 사건을 심판할 수 없겠습니까!” (*판결하고 심판하는 도덕)

③ 그리스도교: 신의 나라, 십자가, 지옥, 최후의 심판 등 허위도덕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신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가복음 9장 1절> ······> 근사하게 속였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8장 34절> ······> 어떤 심리학자(*니체)의 논평. 그리스도교 도덕은 그 ‘왜냐하면’ 때문에 반박된다. 그래서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이다.

“너희는 먼저 신의 나라신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 겸손하게 표현하자면 이것은 오류이다. 그 모든 것이란, 양식, 의복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이 말 바로 앞에서는 신이 옷 만드는 자로 등장한다.

너희는 기뻐하고 춤추어라.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는 큰 상을 받으리라. 이와 같은 일을 너희의 아버지는 선지자들에게도 했다.“ <누가복음 6장 23절> ······> 파렴치한 무뢰배들! 이미 자기네를 선지자들과 비교하고 있다.

 

#46. <신약성서>, 초대 그리스도교인 비판

초대 그리스도교인 비판: 독단적 가치기준 >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모든 특권자에게 본능으로 대항하는 반항자이다. 그는 ‘평등의 권리’를 위해 살고 투쟁한다.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신이 선택한 자’가 되기를 원하면, ‘신의 성전’ 또는 ‘천사의 판결자’가 되기를 원하면, 다른 모든 선택의 원칙들(정직, 정신, 남성성과 긍지, 마음의 아름다움과 자유, 간단히 말해 ‘이 세상’을 선택하는 원칙)은 악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초대 그리스도교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거짓이고,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본능적 허위이다. 그의 모든 가치와 모든 목표는 해롭다. 하지만 그가 증오하는 자와 그가 증오하는 것들은 가치를 지닌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인-사제는 가치의 기준이 된다.

 

== 사제의 심리 (#47~49) ==

 

4. 그리스도교는 왜 세상의 지혜(학문)을 적으로 간주하는가?

 

#47. 그리스도교와 바울: 명령으로서 신앙, 의지로서 신, 학문에 대한 거부

우리를 구별짓는 점 > 우리를 구별짓는 점은 우리가 아무런 신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으로서 경외되었던 것우리는 신적으로가 아니라 가련하고 불합리하며 해롭다고 느끼는 데 있으며, 오류로서 뿐 아니라 삶에 대한 범죄라고 느낀다는 데 있으며, 우리가 신의 신임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바울의 적: 문헌학과 의학 > 바울은 거짓이-‘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후에 교회는 다시 바울을 이해했다. 바울이 고안해냈던 ‘신’, ‘세상의 지혜’를(모든 미신에 대한 2적수인 문헌학과 의학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신은 사실상은 바울 자신이 그렇게 하려는 결연한 결심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의지를 ‘신’이라고 명명하는 것, 토라Thora라라 명명하는 것, 이것은 원래 유대적인 것이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자 했다. 바울의 적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훌륭한 문헌학자와 의사들이었다. 사실상 문헌학자이고 의사이려면, 동시에 반그리스도교인이지 않을 수 없다. 문헌학자로서는 ‘성스러운 서적’의 배후를 보고, 의사로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생리적 타락상의 배후를 본다. 의사는 ‘치유불가’라고 말하고, 문헌학자는 ‘사기’라고 말한다.

 

5. 사제(신)은 왜 지식에 공포를 갖는가? 죄-벌개념은 지식에 대항한 사제의 지배수단이다!?

 

#48. 성서에 나타난 ‘지식에 대한 사제(신)의 공포’

지식에 대한 신의 공포 > ① (성경의 첫부분) 성경의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지식에 대한 신의 공포를 표현한다. 이 전형적인 사제의 책(*성경)은 사제가 갖고 있는 내적 어려움으로 시작된다. 사제에게는 단하나의 큰 위험이 있다, 따라서 ‘신’에게 단 하나의 큰 위험이 있다. ② (인간을 창조 ······> 동물을 창조 ·····> 여자를 창조) 모두 ‘정신’이고 대제사장이며 완전성인 옛 신이 그의 정원을 노닐다가 단지 지루해한다. 그는 신을 만들었다, 인간은 재미가 있다. / 그런데 인간 역시 지루해한다, 인간에 대한 신의 동정은 다른 동물들을 창조했다. / 신의 첫번째 실책: 인간은 동물들을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은 결국 여자를 창조했다. 여자는 신의 두번째 실책이었다. “여자는 본질상 뱀이다, 하와이다. 여자에게서 세상의 온갖 악이 나온다.” 사제라면 누구든 알고 있다. ③ (지식에 대한 신의 공포: 신의 존재조건을 부정하는) “따라서 여자에게서 지식도 나온다” 여자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식의 나무를 맛보는 법을 배웠기에. 무슨 일이 생겼던가? 옛 신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인간 자체가 신의 가장 큰 실책이 되어버렸다. 신은 자신의 라이벌을 창조했던 것이다. 지식은 신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지적이 되면 사제와 신들은 끝장난다! 교훈: 지식은 금지된 것 그 자체이다, 오직 지식만을 금지한다. 지식은 첫번째 죄이자 모든 죄의 씨앗이며 원죄이다. “인식해서는 안된다” - 오직 이것만이 도덕이다.

지식에 저항하는 신의 고안들: 인간의 불행(고난, 전쟁, 익사) > ① (고난) 신의 공포는 인간이 영민해짐을 방해하지 못했다. “지식에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해버리자!” 행복하고 한가로우면 생각하게 마련이다 – 모든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인간은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제 그 자체’인 신은 지식과 싸우는 수단으로 고난, 죽음, 임신 중의 치명적 위험, 온갖 종류의 괴로움, 뇌쇠, 노고, 무엇보다도 병을 발명했다. 고난은 인간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② (전쟁)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건축물이 우뚝 솟아올라 하늘을 휩쓸고 신성을 비추기 시작한다.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옛 신은 전쟁을 고안해냈다. 그들을 민족들을 갈라놓고, 서로 파괴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지식의 대 교란자! ③ (익사) 그런데 믿을 수가 없다! 인식(사제ㆍ신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증대하다니, 그리하여 옛 신은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인간이 지적이 되어버렸다, 어떤 것도 소용없다, 인간을 익사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 (*인간을 익사시키는 수단이 바로 ‘죄’)

 

#49. 죄-벌 개념: 지식에 대항한 사제의 지배수단

죄-벌 개념: 지식에 대항한 사제의 수단 > 성서의 첫부분은 사제의 심리를 포함한다. 사제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큰 위험은 지식으로, 건강한 원인과 결과 개념이다. 지식은 운이 좋은 상황에서만 번성하는데,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신이 넘쳐나야 한다. “따라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사제의 논리였다. 이런 논리에 따라, 이런 논리와 더불어 결국 무엇이 이 세상에 등장했는지! 그것은 ‘죄’이다, 죄와 벌 개념, ‘도덕적 세계질서’ 전체가 지식에 대항하여 고안되었다.

인간이 사제에게서 분리를 막는 방법 > 인간이 사제에게서 분리되는 것에 대항하여,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위를 보아서는 안되고, 자기의 내부를 보아야 한다. 배우는 자로서 인간은 현명하게나 조심스럽게 사물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 도대체가 보는 것은 안된다. 그는 고통받아야 한다, 게다가 언제나 사제를 필요로 하게끔 괴로워해야 한다. 의사들은 없어져라, 필요한 것은 구세주다.

죄-벌 개념: 원인-결과 개념의 암살 > ‘은총, 구원, 용서’에 대한 교설도 포함해서 죄와 벌 개념은 그 어떤 심적 실재성도 갖고 있지 않은 철두철미 거짓이다. ① (원인-결과 개념의 암살) 그것은 인간의 원인-감각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원인과 결과 개념에 대한 암살행위이다! 그런데 주먹ㆍ칼이나 솔직한 증오ㆍ사랑에 의한 암살행위가 아니라, 가장 비겁하고 가장 교활하며 가장 천한 본능에서 나오는 암살행위이다! 사제의 암살행위이다! 기생충들의 암살행위이다! 지하세계의 창백한 흡혈귀들의 흡혈미신이다! ② (인식전제의 파괴) 어떤 행위의 자연적 결과가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고, 미신의 유령 같은 영혼에 의해 초래된다고 생각되면, 한갓 도덕적귀결이자 보상징표교육수단이라고 생각되면, 인식의 전제들이 다 파괴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인류에 대한 가장 큰 범죄가 저질러진 것이다. 죄라고 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기모독 형식은 지식ㆍ문화와 인간의 고양ㆍ고결함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죄를 고안해냈기에 사제가 지배한다.

 

== 믿음’, ‘믿는 자’의 심리 (#50~53) == *신앙과 신앙인의 심리

 

6. 효력 증거는 어떤 점에서 비판되는가? 

#50. 효력 증거에 대한 비판

신앙과 신도의 심리분석 > ‘믿는 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믿음’과 ‘믿는 자’의 심리를 말하려고 한다! ‘믿는다는 것’은 품위없는 짓이며, 데카당의 표시이자 꺾인 삶의 의지에 대한 표시이다.

‘믿으면 복을 받는다’ 반박 >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는 ‘효력 증거’(*믿음의 효력에 대한 증거)라고 불리는 진리의 규준이 있다. “믿으면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진리이다.” ① (지복을 입증할 수 없다) 복되게 한다는 것(지복)이 입증되지 않았고, 단지 약속되어 있을 뿐이며, ‘신앙’이라는 조건과 결합되어 있다. - 믿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사제가 신도에게 약속하는 피안은 통제의 대상이 아닌데,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② (믿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효력 증거’란 믿음에 의해 약속된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다시한번 믿는 것에 불과하다. 공식화하면: ‘믿음이 복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따라서 그것은 참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미 그 끝에 이르렀다. 그리고 ‘따라서’란 진리의 규준으로서는 불합리 그 자체이다.

‘지복(쾌)은 진리의 증거이다’ 반박 > ① (지복=쾌는 진리에 대한 증거일 수 없다) 하지만 양보하여 ‘복되게 한다는 것이 믿음을 통해 입증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한갓 소망사항이거나 사제의 입을 통한 약속이 아니라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지복이(기술적으로 쾌가) 진리의 증거일 수 있는가? ‘무엇이 참인가?’라는 질문에 말참견하게 되는 쾌감은, 반대되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정도로, ‘진리’에 대한 최고양식을 제공할 정도로, 쾌(*지복)는 진리에 대한 증거일 수 없다. 쾌에 의한 증거는 쾌에 대한 증거일 뿐, 그 이상이 아니다. 참된 판단은 그릇된 판단보다 더 즐거움을 주고, 예정된 조화에 따라 좋은 느낌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사실에 어떻게 확립될 수 있는가? ② (진리와 삶에 대한 신뢰는 반대이다) 엄격한 정신, 심오한 기질의 정신은 그와는 반대로 가르친다. 진리는 한걸음씩 애써서 쟁취되어야 하는 반면, 삶에 대한 우리의 마음사랑신뢰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의 크기가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봉사는 가장 어려운 봉사이다. ③ (믿음은 진리(참ㆍ정직)의 반대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의 마음에 엄격하다는 것, ‘아름다운 감정’을 경멀한다는 것, 모든 긍정과 부정을 일종의 양심으로 만든다는 것! 믿음은 복되게 한다: 따라서 믿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고, 진리(참)에 대한 거부이다)

 

7. 그리스도교는: 어떤 점에서 병을 필요로 하는가? 어떤 점에서 데카당스 유형인가?

 

#51. 그리스도교: 병을 필요로 하는, 데카당스 유형

그리스도교: 병을 필요로 하는 > 헬레니즘이 넘쳐나는 건강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 병들게-만드는 것은 교회의 구원절차 체계에 숨겨져있는 진짜의도이다. 교회의 궁극적 이상은 카톨릭적 정신병원이 아닌가? 지상 전체가 정신병원이 되는 것이 아닌가? 교회가 바라는 종교적 인간은 전형적인 데카당이다. 종교적 위기가 한 민족을 지배하는 시기에는 전염성 신경증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종교적 인간의 내면세계는 과민하고 소진한 자들의 내면세계와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유사하다. 그리스도교가 최고가치로서 인류의 머리 위에 걸어놓은 드높은상태들간질과 유사하다. 교회는 단지 미치광이 아니면 대단한 사기꾼만신을 경배하기 위한 성자로 간주했다.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교의 참회와 구원의 훈련을 방법적으로 산출된 주기적 발작으로 묘사했다. 누구나 마음대로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교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충분히 들어있어야 한다.

우리 다른 자들: 건강할 용기, 경멸할 용기를 가진 > 건강할 용기 그리고 경멸할 용기를 갖고 있는 우리 다른 자들은 육체를 오해하라고 가르쳤던 종교를 어떤 식으로 경멸할 것인가! 영혼-미신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 종교를! 충분하지 않은 영양섭취를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종교를! 건강을 적수ㆍ악마ㆍ유혹으로서 적대하며 싸우는 종교를! 죽은 시신 안에 ‘완전한 영혼’을 지니고 다닐 수 있다고 믿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완전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백하고 병들고 백지처럼 열광하는 본성을, 소위 ‘신성함’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던 종교를! 신성함이라는 것은 피폐되고 쇠잔해지고 치유가 불가할 정도로 부패한 육체의 여러 증후들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 운동: 데카당스유형의 집적 > ① (데카당스 유형들의 집적) 하나의 유럽적 운동으로서 그리스도교 운동은 처음부터 온갖 종류의 저질적 요소와 쓰레기 요소들의 총체적 운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운동이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권력을 원한다. 그리스도교 운동은 특정 종족의 쇠퇴의 표현이 아니라, 도처에서 밀려들고 서로 찾아오는 데카당스유형들의 집적된 모습이다. ② (병든 자의 앙심)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수가 지배자가 되었고 그리스도교적 본능의 민주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민족적이거나 종족에 묶이지 않았으며, 삶의 폐적자들에게로 어떤 종류든 가리지 않고 향했고, 도처에 자기편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에 병든 자의 앙심이 있었고 그것의 본능은 건강한 자와 건강함에 적대적이었다. 제대로 잘 되어 있고 긍지있고 원기발랄하며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귀와 눈을 특히 아프게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 그리스도교의 승리, 고귀한 성향의 몰락 > ① (바울의 공식) 바울 “하느님은 세상의 약한 자, 세상의 어리석은 자, 세상의 비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식이었고, 이 표적에 의해 데카당스가 승리했다. ② (십자가에 매달린 신)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상징에 숨어있는 끔직한 의도! ‘고통받는 모든 것, 십자가에 매달린 모든 것이 신적이다. 우리 모두가 십자기에 매달리고, 따라서 우리는 신적이다. 우리만이 유일하게 신적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승리였으며, 좀더 고귀한 성향이 그리스도교로 인해 몰락했다. 그리스도교는 이제까지 인류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

 

#52. 그리스도교 비판: 신앙 / 신학자 / 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비판 > ① (병든 신앙) 그리스도교는 제대로 된 정신적 성숙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그리스도교는 병든 이성만을 그리스도교적 이성으로 이용할 수 있고, 백치들편을 들며, ‘정신’과 건강한 정신의 드높음에 대해 저주한다. 병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앙 역시 병든 형태여야 한다! ② (인식에 대한 거부) 인식을 향하는 바르고 정직하고 학적인 길은 교회에 의해 금지된 길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의심도 이미 죄다! ‘신앙’이란 무엇이 참인지 알고자-하지-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들게 하는 것은 선하다. 충만과 넘침과 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악하다” 신앙인들은 이렇게 느낀다. (*비교 #1. 좋은 것은 무엇인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 나쁜 것은 무엇인가?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신학자에 대한 비판 > ① (신학자의 표지) 거짓에의 강박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되어있는 신학자들을 알아차리는데, 신학자의 또다른 표지는 문헌학에 무능하다는 것이다. ② (문헌학의 신학자 비판) 문헌학은 잘 읽는 기술인데, 해석에 의해 왜곡시키지 않고, 이해하려는 요구로 인해 신중함ㆍ인내ㆍ정교함을 잃지 않으면서 사실들을 읽어낼 수 있는 기술이다. 해석상의 신중성으로서의 문헌학: 서적이나 신문기사나 운명이나 날씨에 대해서도 그렇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신학자가 베를린에서든 로마에서든 신경쓰지 않고, ‘성서의 말’인지 체험된 것인지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나라 군대의 승리를 다윗의 시편처럼 높은 조명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뻔뻔스러워서, 문헌학자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 (*문헌학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따라, 사건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가를 해석하는 것! 그런데 신학자가 상황과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에, 문헌학자로서 비판하는 것!)

그리스도교의 신 비판 > 코감기를 제때에 고쳐주는 신, 폭우가 쏟아질 때 마차를 타라고 말해주는 신은 엉터리 같다. 그런 신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폐기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의 신, 우편배달부로서의 신, 일기예보가로서의 신, 우연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우연에 대한 대명사이다. ‘신의 섭리’라는 것은 신에 대한 가장 강한 반박이다.

 

8. 순교는 진리(옳바름)의 논거인가?

 

#53. 순교자, 순교에 대한 비판

순교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 순교자가 어떤 사태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자기가-참(*옳다고)으로-간주하는 것을 세상에 대놓고 말해대는(*순교) 순교자의 어조에는, 저급한 지적 성실성과 진리에 대한 둔감함이 표현되고 있다. 진리란 누군가는 가졌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갖지 않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 모든 선지자ㆍ종파신도ㆍ자유정신ㆍ사회주의자ㆍ고위 성직자가 이해하는 ‘진리’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교육과 자기극복이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교는 명예롭게 되는 오류이다 >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상 큰 불운인데, 유혹해왔던 것이다. 대중의 추론: ‘누군가를 죽음이 이르게 하는 것은 무언가 중요하다.’ 이런 추론은 신중한 정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물이 되어왔다. 순교자는 진리에 해를 입혔다. 보잘것없은 종파일지라도 명예로운 이름을 얻으려면, 조잡한 박해라도 박해만 있으면 된다. 뭐라고? 어떤 것을 위해 누군가가 목숨을 버리면, 그것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명예롭게 되는 오류(*순교)는 더 유혹적인 오류이다.

적대자에 대한 태도 > ① (우리가 신학자들에게) 우리는 신학자들에게 당신들의 거짓을 위해 순교자가 될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을 반박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얼음 위에 놓으면서 반박한다. ② (박해자들이 자기의 적대자에게) 모든 박해자들은 어리석게도 자기들의 적대자에게 명예로운 모습을 부여했는데, 순교의 매력을 선사했다. 대중은 오늘날에도 어떤 오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가 그 오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옳바름의) 논거란 말인가?

순교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 >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오직 한사람-차라투스트라만이 이천년 동안 필요했을 말을 했다. “그들이 지나간 길 위에 그들은 핏자국을 남겼다. (*사제의 순교) 그들은 ‘진리를 피로 입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피는 진리에 대한 최악의 증인이다. 피는 더없이 순수한 가르침조차 마음의 망상과 증오로 중독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불길 속으로 걸어간다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입증해준단 말인가! 자기 자신의 불길에서 가르침이 나온다는 것이 더 참이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사제에 대하여

 

== 확신과 거짓의 심리학 (#54~56) ==

 

9. 거짓과 확신은 구별가능한가? (#55)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확신을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가? (#54)

   그러면 확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56, #58)

 

#55. 거짓과 확신의 구별불가능성

거짓과 확신의 구별불가능성 > 확신과 ‘믿음’의 심리학에서 한걸음 더. “확신이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수일 수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p331. 이번에는 결정적인 문제. “거짓과 확신은 정녕 대립관계인가?온 세상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온 세상이 무엇은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모든 확신은 나름의 역사와 나름의 시험적 모습과 실책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확신이 아니었던 시기 이후에, 확신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했던 더 오랜 시기를 거친 다음에, 그것은 확신이 된다. 아버지에게 거짓이었던 것이, 아들에게서는 확신이 된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 당파적 인간, 사제들 > ① (자신을 속이는 거짓) 보이는 것을 보려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려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나는 거짓이라고 부른다. 거짓이 증인 앞에서 행해지는가(*타인을 속이는가), 증인 없이 행해지는가(*자신을 속이는가)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가장 습관적인 거짓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인데,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예외의 경우이다. ② (당파적 인간들의 ‘확신’) 그런데 보이는 것을 보려-하지-않는 것, 보이는 그대로-보려-하지-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모든 당파적인 자들의 제1조건이다. 당파적인 사람을 필연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독일의 역사서술은 로마가 전제주의였고, 게르만인들이 자유정신을 세계에 들여왔다고 확신한다. 이런 확신과 거짓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모든 당파는 본능적으로 도덕에 대한 거창한 말들을 입에 담는다 - 도덕이란 것은 모든 당파적 인간이 매순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존속한다.

신의 계시를 활용한 거짓말: 사제, 칸트 > ① (사제들의 ‘신의 뜻’) 사제들은 목적에 필요한 허위이기에 원칙적인 허위인 그런 확신개념에 대한 반박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영민함을 전수받아, 그 대목에 ‘신, 신의 뜻, 신의 계시’ 개념을 밀어넣었다. ② (칸트의 정언명법) 칸트 역시 정언명법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었다. 그의 이성이 거기서 실천적이 되었다. “진리와 비진리를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최고의 문제들과 최고의 가치들은 인간이성을 넘어서 있다. 이성의 한계가 파악된다. 이것이 비로소 진정한 철학이다. 무슨 목적으로 신은 인간에게 계시를 주었던가? 인간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옳은지를 스스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참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이성의 규제적 사용 >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자기비판을 수행한다.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초감각적ㆍ초경험적인 것들을 인식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기존 철학을 비판하면서, 이성이 인식가능한 세계만을 다루려고 했다. 즉 칸트는 ‘이성을 인식가능한 세계에만 규제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의 규제적 사용!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물 자체’의 세계(초월적 세계, 신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대하여 인간이성은 결정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게 된다.

‘신성한 거짓말’: 철학적 사제적 권력수단 > ① (사제의 삼단논법) 1.교훈: 사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제가 말하는 것들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거짓을 허용하지 않는다. 2.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려면, 거기서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3.이로써 사제는 신의 대변자일 뿐이다. ② (신성한 거짓말: 철학적 사제적 권력수단) 이러한 사제-삼단논법은 결코 유대적이거나 그리스도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거짓을 말할 권리와 ‘계시’라는 영민함은 사제의 유형에 속한다. 이교도 사제에게 속하듯이 데카당스 사제(*칸트)에게도 속한다. ‘율법, 신의 뜻, 성서, 영감’ 이 모든 것은, 사제가 그것 아래에서 권력을 잡고, 그것을 가지고 권력을 유지시키는 여러 조건들에 대한 표현법이다.(*결코 진리가 아니라!) 그 개념들은 모든 사제조직과 모든 사제적이거나 철학적-사제적 권력구조의 기초에서 발견된다. ‘신성한 거짓말’ - 이것은 공자, 마누법전, 마호메트, 그리스도교 교회, 플라톤에 공통적이다. “진리가 여기 있다” 어디서 말해지든 이 말은 ‘사제는 거짓말한다’를 의미한다.

 

#54. 확신과 믿음의 심리학: 확신에 대한 2가지 태도: 회의주의자, 확신하는 자

(1) 확신으로부터의 자유, 수단으로서의 확신

회의주의자: 확신으로부터의 자유 >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독단)은 감옥인데, 충분히 넓게 보지 않고 발아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가치/무가치에 대해 말참견할 수 있으려면, 오백가지 확신들을 자기 발아래 굽어보아야 하며 자기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대한 것과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온갖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롭게-볼-수 있는 강한 힘에 속한다.

위대한 열정: 수단으로서의 확신 > 그(*회의주의자)라는 존재의 근거이자 힘인 위대한 열정은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계몽되고 훨씬 더 오만하다. 그의 열정은 그라는 존재의 지성을 자신에게 봉사시키며, 대담하게 만들고 지성에게 신성하지 못한 수단마저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경우에 따라서는 확신을 허용해준다.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을 수단으로 해서만 달성된다. 위대한 열정은 확신을 사용하지만, 확신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위대한 열정은 자신이 주권자임을 알고 있다.

(2) 믿음에 대한 욕구: 믿는 자, 확신하는 자, 광신자

믿는 자: 탈아와 자기소외 > 반대로 믿음에 대한 욕구, 무조건적인 긍정과 부정에의 욕구는 약한 힘의 욕구이다. 믿음을 가진 자, 온갖 ‘신앙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사람이다. 자신을 목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더욱이 자발적으로는 목적을 도대체가 설정할 수 없는 자들이다. ‘믿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수단일 뿐이며,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를 사용할 누군가를 그는 필요로 한다. 그의 본능은 탈아Entselbstung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를 부여한다. 모든 종류의 믿음은 그 자체로 탈아의 표현이고 자기소외의 표현이다.

확신하는 인간: 진리의 반대자이자 적대자 > 대다수 사람에게 그들을 묶고 고정시키는 외부규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고 강압이나 고차적 의미의 노예제가 어떻게 의지박약의 인간을 번성시키는 조건인지를 생각해보면, 확신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확신하는 인간에게 확신은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어느 것에도 공평하지 않고 철저히 편파적이며, 모든 가치를 엄격하고도 필요한 시각으로 보는 것만이, 확신하는 인간을 존재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진실한 인간의 반대이자 적대자이고, 진리의 반대이자 적대자이다. 믿는 자는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에 대한 양심을 자기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때 정직하면 그는 즉시 몰락해버릴 것이다. 확신하는 자의 시각의 병적 제약성은 그를 광신자로 만든다 - 사보나롤라, 루터, 루소, 로베스피에르, 생시몽처럼. 강하고 자유롭게 된 정신의 반대유형으로 만든다. 이런 병든 정신들의 거창한 태도는 많은 대중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광신자들은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인간은 근거를 듣기보다 체스처 보기를 더 좋아한다.

 

#56. 거짓말의 목적: 그리스도교_삶의 부정 vs 마누법전_삶의 긍정

거짓말의 목적_삶에 대한 태도 >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가’가 결국 문제인 것이다. ① (그리스도교_삶의 부정) 그리스도교에는 ‘신성한’ 목적이 결여되어 있고, 죄다 나쁜 목적들만 있을 뿐이다. 삶의 독살, 삶의 비방, 삶의 부정, 육체의 경멸, 죄개념을 통한 인간가치의 저하와 인간아 자기모독이라는 목적들, 따라서 그 수단 역시 나쁘다. ② (마누법전_삶의 긍정) 마누법전은 정반대인데, 진정한 철학을 배후에 두고 있고 그 안에도 두고 있다. 마누법전과 성서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핵심은, 고귀한 계층인 철학자들과 전사들이 마누법전을 수단으로 대중을 통솔한다는 것이다. 고상한 가치들, 완전성에 대한 느낌, 삶에 대한 긍정, 자기 자신과 삶에서 개가를 올리는 쾌감이, 태앙이 비추고 있다.

거짓말의 수단_생식, 여자, 혼인에 대한 태도 > 그리스도교가 악의를 부어대는 생식ㆍ여자ㆍ혼인에 대해, 마누법전은 경외심ㆍ사랑ㆍ신뢰로 다룬다. ①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탄생을 원죄없는 처녀잉태의 개념으로 더럽히고 있다!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사는 편이 낫습니다.” ② (마누법전) 마누법전은 여자에게 부드럽고도 좋은 것들을 많이 말하고, 백발 노인들과 성자들은 여자들에 대해 능가할 수 없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인의 입, 소녀의 가습, 어린아이의 기도, 희생제물의 연기는 언제나 순결하다. 태양의 빛, 암소의 그림자, 공기, 물, 불, 소녀의 숨결보다 더 순결한 것은 결코 없다.”

#58.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지하려고 거짓말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려고 거짓말하는가에 따라서.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인과 아타키스트는 완전히 같다. 그들의 목적과 그들의 본능은 오로지 파괴로만 향한다.

 

== 그리스도교의 로마제국 파괴, 바울과 루터의 그리스도교 재건 (#58~62) ==

 

10.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해서 세계종교가 되었나? #58, 59

 

[참고] 세계를 향한 유대의 유혹 - ‘십자가에 매달린 신’

십자가에 매달린 자 인류 전체를 죄의식에 빠뜨린 전율과 공포의 사건이었다.

유대의 원한도덕은 억압당한 자의 무력감이라는 복수심에서 출발하여, 비참한 자-가난한 자-무력한 자-비천한 자-고통받는 자를 ‘착한 자’로 보고, 고귀한 자-강력한 자를 ‘사악한 자’로 본다. 이것은 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 것에서 ‘좋음’을 보는 귀족적 가치등식에 대한 가치전도이다. 이러한 유대의 가치전환은 그리스도의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의 시작이었다. 유대가 로마의 지배에 품어온 200년에 걸친 증오는 로마(세계)와 죄를 하나로 느꼈던 그리스도교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그리스도는 유대의 원한정신을 위한 복수의 도구였으며, 유대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세계를 향한 유혹이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역설! 인간의 감정을 원죄의식으로 물들이며, 인간의 존재 자체를 죄인으로 만든 이 사건을, 니체는 세계를 향한 ‘가장 섬뜩하고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이라고 한다. 유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닮으로써, 유대적 원한도덕을 실현하고 세계를 향한 복수의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세계가 유대의 유혹을 주저없이 삼킴으로써, 유대의 원한도덕은 지금까지의 모든 고귀한 이상을 누르고 승리하게 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역설로부터 인간은 신을 살해한 영원한 죄인으로 전락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손에도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다! 인간은 이제 살아서는 결코 속죄 받을 수 없는 죄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상징은 인간을 존재론적 죄인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는 죽어 신이 되었지만, 인간을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희생된 ‘신의 역설’은 구세주를 살해한 인간이라는 ‘원죄의 역설’로 치환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된 그리스도는 이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위해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58. 그리스도교에 의한 로마제국의 파괴 / 바울의 천재성

그리스도교에 의한 로마제국의 파괴 > ① (그리스도교: 세상(로마)를 파괴하는 ‘깊은 신앙’) 그리스도교는 삶을 증진시키는 사회를 끝장내는 일을 자기의 사명으로 발견했다. 청동보다 오래 존속하는 로마제국은 가장 웅대한 조직형태인데, 그리스도교인은 이 ‘세상’(로마제국)을 파괴하는 것을 ‘깊은 신앙’을 만들어버렸다. 그리스도교인과 아니키스트, 둘다 데카당인데, 둘 다 해체시키고 오염시키고 쇠약하게 하며 흡혈귀처럼 작용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다. 둘다 세워져있거나 웅장하게 서있거나 지속적인거나 삶에 미래를 약속하는 것을 전부 격렬하게 증오하는 본능이다. ② (그리스도교: 위대한 예술작품-로마에 대한 찬달라 복수의 불길)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피를 빨았던 흡혈귀이다. 그리스도교는 시간이 소요되는 위해한 문화를 위한 지반을 얻으려는 로마인들의 거대한 업적을 밤 사이에 무효화시켰다. 위대한 양식을 가진 경탄스러운 예술작품으로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로마의 조직은 나쁜 황제들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견고했지만, 그렇게 건축된 조직도 가장부패한 종류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견고하지 못했다. 참된 것들에 대해 진지함과 실재성에 대한 본능을 빨아먹는 은밀한 벌레. 이 무리들은 거대한 건축에서 ‘영혼’을 소외시켜버렸다. 로마적인 것에서 자기 고유한 것과 고유의 진지함과 고유의 긍지를 느꼈던 것에서 말이다! 찬달라 복수의 불길이 로마를 지배해버렸다.

에피쿠로스와 바울 > ① (에피쿠로스: 그리스도교와 맞선) 에피쿠로스는 이런 종류의 종교의 선행과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웠는데, 죄개념에 의한, 벌과 불멸개념에 의한 영혼의 타락에 맞서싸웠으며,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체와 맞서싸웠다. 불멸을 부정당하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 로마제국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② (바울: 그리스도교 운동으로 세계적인 불길을 일으킨 천재성) 그때 바울이 등장했는데, 그는 로마와 ‘세상’에 대한 찬달라적 증오의 육화ㆍ천재이며, 영원한 유대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알아차렸다, 어떻게 유대교 변두리의 작고 종파적인 그리스도교 운동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불길’을 일으킬 수 있을지, 어떻게 ‘십자기의 신’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하부에 있는 은밀히 반항하는 모든 것과 로마제국 안에 있는 아나키적 책동의 유산을 거대한 힘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온다.” 온간 종류의 지하적 제의. 오시리스제의, 대모신 제의, 미트라스 제의를 능가하는 것들을 뭉뚱그리기 위한 공식으로서 그리스도교. 바울의 천재성 – 그는 진리에 가차없는 폭압을 가하면서 찬달라적 종교들의 매혹수단이었던 표상들을 자신의 고안물인 ‘구세주’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리기 위해서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 ‘지옥’개념이라면 로마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 ‘피안’이 삶을 죽여버린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허무주의자Nihilist와 그리스도교인Christ은 운만 맞는 것이 아니다.

 

#59. 그리스도교에 의한 고대세계(그리스로마)의 파괴

- 몇 천년간 지속될 작업을 위한 기초로서 고대세계의 수고와 고대세계의 의미가 모두 부질없게 되었다. 그리스인이 무슨 소용이며, 로마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학적 문화의 모든 전제조건, 학적 방법론이 죄다 벌써 그곳에 있었다. 잘 읽기 위한 위대한 기술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 작업을 위한 모든 본질적인 것(방법론)이 이미 발견되어 있었다.

- 그런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되었다. 영혼의 게토-세계 전체가 단번에 위로 올라섰다.

- 그리스도교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성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잃고 있는 것이다.

 

#60. 그리스도교에 의한 고대문화의 파괴

-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서 고대문화의 수확물을 빼앗아버렸다. 이슬람문화의 수확물, 무어적인 문화세계

- 십자군원정은 고등한 해적질 그 이상이 아니다.

 

11. 루터는 어떻게 몰락해가던 교회를 재건했나?

 

#61. 르네상스의 그리스도적 가치전도의 시도 / 루터의 교회재건

르네상스의 그리스도교적 가치전도 시도 > 독일인은 르네상스라는 유럽의 최후의 위대한 문화적 수확물을 빼앗아버렸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전도이자, 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였다. 르네상스는 적의 정면과 중심을 돌파하는 본거지를 공격하는 것이었고, 거기서 고귀한 가치를 왕좌에 올리는 것이었다. ······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

루터의 교회 재건 > 하지만 루터라는 독일 수도승이 좌절당한사제의 복수심에 불타는 본능을 지니고 로마로 가서 르네상스에 대항하여 들고 있어났다. 루터가 본 것은 교황청의 부패였다. 옛부패, 원죄,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교황의 자리에 않아있지 않았고, 삶과 높고 대담한 위대한 긍정이 그 자리에 않아있었는데도! 루터는 교회를 공격하면서 교회를 재건했다. 르네상스가 의미없는 사건으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종교개혁, 라이프니츠, 칸트와 독일철학, 해방전쟁, 독일제국 이것은 기존의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수고이다. 독일인은 가장 불결한 그리스도교인 프로테스탄티즘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62. 그리스도교: 부패에의 의지, 거짓에의 의지, 기생주의

그리스도교: 부패에의 의지, 죄라는 벌레, 신 앞의 평등, 거짓에의 의지 > 이것으로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리스도교는 최고의 부패이며, 부패에의 의지를 지녔다. 그리스도교회가 부패의 손길을 재지 않은 것은 없는데,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를 한 가지 거짓으로, 모든 정직성을 영혼의 비열성으로 만들어버렸다. 교회는 자기를 영구화시키기 위해 ‘죄라는 벌레’를 비상사태로 만들었다. ‘신 앞에서의 평등’은 천한 성향을 지닌 모든 자의 원한을 위한 구실이 되었으며, 결국 혁명ㆍ현대적 이념으로 사회질서의 몰락의 원칙이 된 폭발성의 개념이며, 그리스도교적인 다이너마이트다. 인류애로부터 자기모순ㆍ자기도덕의 기술ㆍ어떤 대가를 치르든 거짓에의 의지를 길러냈으며, 선하고 정직한 본능에 대한 반감과 경멸을 길러냈다.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생주의, 피안, 십자가 > 교회의 유일한 실천으로서 기생주의는 자기의 빈혈증이상과 ‘신성함’이상을 수단으로, 피와 사랑과 삶에의 희망을 전부 마셔버려 고갈시켜버린다. 모든 현실성을 부정하는 의지로서 피안, 가장 지하적인 모반을 의식하게 하는 표지로서 십자가는 건강과 아름다움과 제대로된 성장과 용기와 정신과 영혼의 선의에 맞서는, 삶 자체에 맞서는 모반이다.

그리스도교: 인류의 단하나의 영원한 오점 >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액운이 시작되었던 불행한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기원전 BC_Before Christ / 기원후 AD_Anno Domini 라틴어.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 그리스도가 시작한 첫날을 기점으로! /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 오늘을(니체가 안티크리스트를 쓴(완성한) 날)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 모든 가치의 전도!

 

그리스도교 반대법

제1년의 첫날, 구원의 날에 선고되었다. 1888.9.30.(니체가 [안티크리스트]를 쓴날)

그리스도교 범죄와의 사투

1조. 사제: 반자연을 가르치는 > 모든 종류의 반자연은 악덕이다. 가장 악덕한 인간은 사제로, 그는 반자연을 가르친다.

2조. 위험한 신자: 프로테트탄트 신자, 철학자 > 카톨릭 신자보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엄하게 대해야 하며, 맹신자보다 급진적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더 엄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에 있는 범죄적 요소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 증가한다. 따라서 범죄자 중의 범죄자는 철학자다.

4조. 순결에 대한 반자연적 설교 > 순결에 대한 설교는 반자연을 공공연히 도발한다. 성생활에 대한 모든 경멸, 성생활을 ‘불결하다’는 개념으로 더럽히는 것은 삶의 성령을 거스르는 진정한 죄다.

6조. 신, 구세주, 성자: 범죄자에 대한 표지 > ‘성스러운’ 역사를 빌어먹을 역사라고 명명해야 한다. ‘신, 구세주, 구원자, 성자’라는 말들은 욕설이나 범죄자에 대한 표지로 사용해야 한다

7조. 이것들로부터 > 이것들로부터 나머지 것들은 귀결된다.

안티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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