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세미나에서 나온 주요 주제
[도덕] 강자의 생리적으로 건강한 상태의 도덕 vs 약자의 생리적으로 병든 상태의 도덕
[동정] 강자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동정 vs 약자의 이타심에서 나오는 동정
[자유로운 죽음] 자살/안락사 vs 자연사
[자유] 약자의 자유 vs 강자의 자유
[평등] 약자의 평등 vs 강자의 거리의 파토스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나누면서 그것들 사이로 흐르는 공통된 핵심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사는가 , 그 '나' 자신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그것은 진짜 나인가.
사회적 통념, 가까운 사람들의 기대치, 보고 배우고 자란 교육환경 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닌
니체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다던 내 안의 내재하고 있는 여러 모습들의 진짜 '나'.
여러번의 시행착오와, 좋든 싫든 어떤 한 분야의 깊은 곳까지 체험한 사람은 그 '나'를 찾는데 좀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단번에 젊고 어린 나이에 그 '나'를 한번에 찾아낸 사람들은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를 찾아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사람은
생리적으로 강한 도덕적인 사람이고, 강자이고, 강자로서 동정을 배풀수 있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예술과 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현실의 나 = 내 안의 '나' = 강자.
강자가 자신이 진정으로 즐거워서 하는 일(=공부,작업,운동,연주 등)을 하는데 남탓이나 상황탓을 할 새는 없을 것 같다. 강자에게 '이타심에 의한 동정' 같은 것 없지 않을까. 내가 내 것에 몰두하기도 바쁠테니, 모든 일상이 그 도취 속에서 살아갈테고 불합리한 상황이 있다면 탓을 하기보단 개선해내려는 힘에 의지가 발동할 것이고, 혹은 그 불합리한 상황 마저 초월해버리는 즐거움 혹은 도취가 자리할테니 말이다.
일례로 책을 쓰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작가가 있다. 유명세를 위해서 연구활동과 출판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는 그 공부가 재밌고 혼자 알기 아까워서 나누고 싶기도 하고 또 자신 혼자 공부하며 생각한게 혹시 한계는 없지 않을까 하면서 여러 사람과 나눈다.
그 나눔은 이타심에 의한 동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강자가 스스로 즐거워서 나눈 이기적 동정일 것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돈벌이가 적다는 시대적 도덕적 잣대로도 그 작가를 비판할 수 없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훌륭한 작품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깨기 위해 그 작가는 대가없이 노력할 수도 있고, 혹은 그러한 인정조차 웃어 넘기며 갈망하지 않는 초월의 도취가 있을 수도 있을것이다.
이렇듯 그는 강자이기에 자유롭다. 자유롭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 자신으로 살지 않을때 매일의 괴로움(살아도 죽어있는 삶)과, 실제 죽음에 의한 허망함. 이 둘중에 무엇이 더 두려운 일일까. 살아도 죽어있는 삶과 몸의 죽음은 무엇이 다른가.
강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살을 옹호한다는 것은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그 범주를 벗어나 논한다면 강자는 죽음으로부터 조차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는 예술을 야기할 수 할 수 있고, 예술을 해야겠다 마음먹어서 예술이 아니고, 그 자체가 예술이고 아름다움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또 세미나를 하면서 내내, 강자는 내 안의 진짜 '나'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관점에 매료되어서
너무 모든 주제에 다 연관 짓는 단순함을 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짦은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도 니체의 말처럼 그 많은 진짜 나를 빨리 더 많이 만나보고 싶습니다. ^.^
"강자는 자유롭다!" 승훈샘의 긍정적 태도와 밝은 미소가 보이는 즐거운 후기입니다. ㅎㅎ 니체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자기극복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평생동안 나는 나를 다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를 불러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방법 중에 하나가 '강자의 자유'일 것입니다. 니체는 강자의 자유를 '거리의 파토스'로 정의하는데, 그것은 무리적인 것(시대의 지배적 가치)과 거리(차이)를 확보하려는 열정을 말합니다.
시대의 지배가치란, 니체의 말대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우상'과 같은 가치들입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ㆍ도덕적 가치ㆍ정치적 이념에서, 이것의 일상버전인 데시데라타(바람직한 이상들)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우리시대 지배가치의 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자본중심주의. 자본의 이윤를 중심으로 돈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와 휴머니즘(인간 중심주의. 인간의 이해를 중심으로 동물, 자연, 사물을 도구로 여기는)을 들 수 있습니다.
우상이란 단지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우상을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못된 눈길, 나의 못된 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나의 삶과 결합된 절실한 우상일 경우 경우, 우상처럼 간주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우상은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못된 눈길'이자, 나의 '못된 귀'이다. ...... 이 책은 우상들에 대한 중대한 선전포고이다. 이 우상들보다 더 오래되고, 더 설득적이며, 더 뽐내는 우상들은 없다. 또한 더 공허한 우상들도 없다. 이런 점이 그 우상들이 가장 많이 신봉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가장 절실한 우상일 경우, 결코 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우상의 황혼] 서문
이처럼 지배가치는 마치 시대의 공기처럼 작동합니다. 먼저 지배가치들은 시대의 공기와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사유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내가 특별한 의식 없이 던지는 말이나 판단들은 대체로 지배가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지배가치가 시대의 공기와 같은 것은, 그것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사유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이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동의 없이 이미 내게 주어져있습니다. 이것을 푸코는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인 기반)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지배가치는 다수(무리)가 따르는 다수적(무리적) 가치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로 가족ㆍ친구ㆍ사회의 의견으로 내 주변에 존재하고, 때로 선입견이나 선지식같은 형태로 내 의식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배가치 안에 있을 때(가족ㆍ친구ㆍ사회의 가치에 동의하고,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생각할 때), 무리적 안정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약자 혹은 다수자'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지배가치와 갈등할 때는, 동시에 가족ㆍ친구ㆍ사회와 갈등하고 자신과도 모순관계에 있게 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 지배가치를 견딜 수 없는 부자유와 숨쉴 수 없는 압박감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강자 혹은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수자와 소수자는 '수'가 아니라 '가치'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입니다. 다수자는 지배적인 다수적 가치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반면 소수자는 다수적 가치에 저항하여 소수적 가치(*자기가치)를 창안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니체는 가치로 구분되는 이러한 존재를 강자와 약자라고 합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퍼스펙티브는 바로 여기 다수적 가치와 소수적 가치 사이에 존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가치는 상대를 자기의지 아래 두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대의 지배적 가치를 넘어서 자기 가치를 생성할 때, 시대의 도덕을 넘어서 다른 방식의 삶의 스타일을 시도할 때, 강자의 자유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내 자유 개념. ......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책임에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 우리를 분리시키는(*구별시키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거리의 파토스). 자유는 전투적이고 승리의 기쁨에 찬 본능이 다른 본능들, 이를테면 '행복'본능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유로운 인간은 전사다. 자유는 무엇에 의해 측정되는가?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서, 위에서 머무르기 위해서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 최고로 자유로운 인간유형은 최고의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 사람이 갖고 있으면서도 갖고 있지 않은 것, 사람이 원하고 사람이 쟁취하는 것으로서."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