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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15 > [우상의 황혼]③ :: 2020.10.19(월)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아포리즘 구성

*주제 : 니체의 시대비판 (데카당스-현대성에 대한 비판)

 

(1) 현대도덕: 반자연적 도덕 비판

15. 심리학자의 궤변 / 25. 인간애의 두 유형 / 26. 언어의 한계 / 28. 비개인적인 자의 도덕 / 31. 섭생법의 문제 / 32. 비도덕주의의 이상주의 비판 / 33. 이기주의의 자연적 가치 / 35. 데카당스 도덕에 대한 비판 / 36. 의사들을 위한 도덕 / 37. 전통 도덕의 한계 / 42. 철학에서의 정직성의 결여 / 43. 도덕적 보수주의

 

(2) 현대사회: 자유주의, 평등주의 비판 

1. 내가 용일한 수 없는 자들 / 2. 르낭 / 3. 생트뵈브 / 4. [그리스도의 후예] / 5. 조지 엘리엇 / 6. 조르주 상드 / 12. 토마스 칼라일 / 13. 에머슨 / 14. 반(反)다윈 / 16. 독일인의 분별력 / 18 지적 양심 / 27. 속류 문인 / 29. 칸트와 문헌학 / 30 바그너와 예술 / 34. 그리스도교인과 아나키스트 / 38. 자유 개념 / 39. 현대성 비판 / 40. 노동 문제 / 41. 현대적 자유 / 44. 천재 개념 / 45. 범죄자 유형 / 46. 위대한 영혼 / 48. 진보와 평등의 모순 / 49. 유럽적 사건으로서의 괴테 / 50. 18세기와 19세기 진단 / 51. 괴테와 니체

 

(3) 현대예술: 현대예술론 비판

7. 심리학자들을 위한 도덕 / 8. 예술가의 심리학 / 9. 예술성과 반예술성 / 10.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 11. 예술과 위대한 양식 / 17. 고양된 정신력의 비극적 체험 / 19. 아름다움과 추함 / 20. 미학의 제1진리 비판 / 21. 쇼펜하우어 / 22. 쇼펜하우어의 문제 / 23. 플라톤과 에로스 / 24. 예술을 위한 예술 / 47. 아름다움의 조건과 비우연적 성격 

 

1. 현대도덕: 반자연적 도덕 비판

*주제: 현대의 '반자연적widernatürlich 도덕' vs 니체의 '자연적natürlich 도덕'

 

(1) 삶과 도덕은 어떤 관계에 있나? 

니체철학에서 삶과 도덕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삶이 모든 가치의 척도이며, 모든 가치는 삶의 광학 아래 평가된다." 도덕 역시 그 자체로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도덕이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삶이 도덕적 가치의 척도이다. 따라서 니체는 삶의 본능이 지배하는 건강한 도덕을 자연적 도덕(도덕적 자연주의)라고 정의하고, 반대로 삶의 본능에 적대적인 도덕을 반자연적 도덕으로 비판한다. 반자연적 도덕은 삶의 본능에 대한 매도적 유죄판결이며, 삶의 욕구들을 부정한다. 

삶의 가치라는 것은 평가될 수 없다. 살아있는 자는 논의의 대상이지 판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또다른 이유 때문에 안된다. [소크라테스의 문제 #2] / 삶의 가치라는 문제를 살짝이라도 건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삶의 외부에 위치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 모든 삶의 내용에 정통해야 한다. (*따라서) 삶의 가치라는 문제는 우리로서는 접근불가능한 문제이다. [반자연적도덕 #5. p110]

우리는 삶의 광학 아래서 가치에 관해 논한다.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한다.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5 p110] / 어떤 도덕도 그 자체로는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법이니까.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p174]

도덕에서의 모든 자연주의, 말하자면 모든 건강한 도덕은 특정한 삶의 본능이 지배한다. ...... 반자연적 도덕, 즉 지금까지 가르쳐지고 경외되고 설교되어온 거의 모든 도덕은 이와는 반대로 다름 아닌 삶의 본능들에 적대적이다. ― 그것은 삶의 본능들에 대한 때로는 은밀한, 때로는 공공연하면서도 뻔뻔스러운 매도적 유죄판결인 것이다. '신은 마음 속을 꿰뚫어본다'라고 말하면서 반자연적 도덕은 삶의 가장 깊은 욕구들과 가장 높은 욕구들을 부정해버리며 신을 삶의 적대자로 만들어버린다. ...... '신의 왕국'이 시작되면 삶은 끝나버린다.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4. p109]

 

(2) 반자연적 도덕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떤 점에서 데카당스적인가?

니체는 유럽도덕의 기능을 '인간의 반자연적 개선'이라고 단정한다. 즉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역행하여 인간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반자연적 도덕이다. 이런 반자연적 도덕을 약자들은 '덕'이라고 부르지만, 강자들은 '허튼 도덕'이라고 부른다. 이런 반자연적 도덕데카당스 본능(생명력의 퇴화와 본능의 타락현상)에 의해 출현하여, 다시 데카당스 본능을 조장한다. 즉 생리적 퇴화는 도덕적 개선으로 나타나고, 다시 도덕적 개선은 생리적 퇴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반자연적 도덕은 데카당스적 인간의 생존조건이다. 『우상의 황혼』은 반자연적 도덕으로, 이성적 행복주의, 감성에 대한 금욕주의, 이타주의, 동정, 그리스도교 도덕으로 지목한다.

우리 현대인은 유약한 인간성, 관용과 친절과 상호신뢰에 기반한 의견합일이 긍정적인 진보라고 믿어버린다. [⋯] 우리의 신경은 르네상스 실재성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근육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무능은 진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려로 가득찬 도덕을 발생시키는 더 약하고 더 섬세하며 더 상처받기 쉬운 더 말기적인 소질을 증명해 줄 뿐이다. 우리의 유약함과 말기성, 우리의 생리적 노화를 간과한다면(*특정 도덕은 특정 삶을 드러내는 징후학이므로), 우리의 '인간화' 도덕은 즉시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어떤 도덕도 그 자체로는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법이니까.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p174]

사실 우리는 우리의 근대적 '덕목들' 때문에 의도적이지는 않았더라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있다...... 적대적이고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본능들의 감소는(소위 우리의 '진보'라는 것) 생명력의 감소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준다 : 그렇게 제약되고 그렇게 말기적인 생존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백배나 더 많은 노고와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때 사람들은 서로 돕고, 그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병자이며 어느 정도는 간호인이 되는데, 이것이 '덕'이라고 불린다. ― : 하지만 다르게 사는 삶, 즉 더 풍부하고 더 여유 있고 더 넘쳐흐르는 삶을 알고 있던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아마도 '비겁', '비참', '허튼 도덕'이라고 불릴 것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p174-175]

데카당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 도덕은 : '가치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판단은 결국 엄청난 위험으로 남게 되고 전염되며 ― 사회 전체의 병든 토양 위에서 때로는 무성하게 자라, 개념이라는 식물의 우림을 형성한다. 때로는 종교(그리스도교)라는 개념-식물의 우림을, 때로는 철학(쇼펜하우어류의)이라는 개념-식물의 우림을, 경우에 따라서는 부패에서 자라난 그러한 독식물의 독기가 계속해서 수천 년간 삶에 해독을 끼칠지도 모른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5. p170-171]

 

(3) 도덕적 가치는 도덕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 도덕주체와 도덕의 관계

도덕에서의 생리적 인과율 > *강자: 생리적으로 건강한 상태 vs 약자: 생리적으로 병든 상태 ① 특정 도덕의 발생원인은 특정 주체의 생리적 상태이다. 즉 도덕은 그 결과다. '강자에 의해 강자의 도덕이 발생하고, 약자에 의해 약자의 도덕이 생겨난다.' ② 도덕은 언제나 특정 도덕주체의 생존조건이다. '강자는 강자의 도덕 속에서 강화되며, 약자는 약자의 도덕 속에서 보존된다. ③ 따라서 특정한 도덕주체가 특정한 도덕을 요청한다. '강자의 생리적 상태가 강자의 도덕을 요청하며, 약자의 생리적 상태는 약자의 도덕을 요청한다.' ④ 도덕주체에 따라 도덕적 행위의 가치가 결정된다. '강자의 행위가 강자의 도덕을 만들고, 약자의 행위가 약자적 도덕을 만든다.' 도덕적 행위 그 자체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갖지 않으며, 특정 행위의 가치는 오히려 그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곧 도덕가치는 파생적 가치일 뿐이다.

도덕주체의 생리적 조건 > 도덕을 크게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으로 유형화하면, 주인도덕은 주인적 존재가, 노예도덕은 노예적 존재가 요청한다. 여기서 니체는 주인적 존재와 노예적 존재라는 도덕주체의 생리적 상태에 주목한다. 도덕주체가 생리적으로 건강하면, 그래서 힘에의 의지가 상승하면, 이때 그는 행복감(힘감정)을 느끼고, 이 과정을 유지시킬 수 있는 도덕을 요청한다. 특정 도덕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주체의 행복한 생리적 상태가 특정한 도덕을 요청한다.

모든 종교와 도덕의 기초에 놓여있는 가장 일반적인 정식 : '이것과 이것을 행하라. 이것과 이것은 멀리하라. 그러면 너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도덕, 모든 종교가 이런 식의 명령이다. 나는 이것을 이성의 중대한 원죄, 불멸하는 비이성이라고 부른다. / 내 입에서 그 정식은 반대로 변한다. ― 나의 '모든 가치의 전도'의 첫 번째 예 : 좋은 체질을 갖추고 있는 자, '행복한' 자는 특정 행위들을 해야만 하고, 다른 행위들은 본능적으로 피해야만 한다. 그가 생리적으로 제시하는 질서를 그는 자기가 인간과 사물과 맺는 관계에 도입한다. 정식화하면 : 그의 덕은 그의 행복의 결과다. [네가지 중대한 오류들 #2. p114]

이기주의의 경우 > 이기심이나 이기적 행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심과 이기적 '행위주체'의 생리적 상태에 따라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결정된다. 그가 상승적 삶을 보여주면, 그의 이기심은 자신의 상승적 삶을 위한 도덕이 된다. 그가 삶의 하강곡선을 보이면, 그의 이기심은 자신의 하강적 삶을 위한 도덕이 된다.

이기심을 갖는 자가 생리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는지에 따라 이기심의 가치가 결정된다 : 이기심은 가치가 매우 클 수도 있고 무가치할 수도 있으며 경멸받을 수도 있다. 인간은 그가 삶의 상승선을 나타내는지 하강선을 나타내는지에 따라 평가되어도 무방하다. 이것에 대한 결정이 그들의 이기심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결정하는 규준이 된다. 그가 상승선을 나타내면 그의 가치는 실제로 뛰어나다. ―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삶의 총체는 한 발짝 더 전진하기에, 그에게 그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고 만들어주는 데 관심이 극단적으로 집중되어도 무방하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3. p167-168]

강자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동정 vs 약자의 이타심에서 나오는 동정 > 이타주의와 동정의 가치도 마찬가지로 도덕주체에 의해 달라진다! 이기심이나 이타심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선도 도덕적 악도 아니다. 즉 건강한 이기심병든 이기심이 있으며, 전자는 건강한 삶의 생존조건이고 후자는 퇴화된 삶의 생존조건이다. 마찬가지로 강자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동정은 건강한 사랑일 수 있지만, 약자의 이타심에서 나오는 동정은 동정하는 자나 동정받는 자나 자기극복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강자의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극복의 의지를 강화하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지만, 약자의 타인에 대한 동정은 결과적으로는 생명력의 총체적 손실을 가져오는 감정이다. 

"천성적으로 주인인 인간이 동정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이다! 이러한 동정은 가치가 있다." [선악의 저편 #293]

우리 현대는 자기에 대한 소심한 염려와 이웃사랑, 노동과 겸허와 공정성과 과학성이라는 덕을 가지고서 ― 수집적이고 경제적이며 기계적으로 의도하는 약한 시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덕은 우리의 약함에 의해 제약되고 요청된다. [어느 반시대적인간의 편력 #37. p175-176]

고통의 감각 >  고통의 주체(고통을 어떻게 감각하는가)에 따라 고통의 가치가 달라진다.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는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사치를 허용하며,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된다. 반대로 삶의 빈곤으로 고통받는 자는 온화와 평화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한다. 

모든 예술, 모든 철학은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삶의 치유수단이나 보조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고통받는 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삶의 충일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을 원한다. 또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그는 안식과 고요, 잔잔한 바다 또는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예술과 철학에 요구한다. 삶 자체에 대한 보복, 이것은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걸맞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 삶을 비방하며, 그러기에 이들은 내 대척자들이다. ...... / 삶의 충일한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자, 디오니소스적 신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공포스럽고도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주시를 허용할 뿐 아니라, 끔찍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사치를 허용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 재배지로 만들 수 있는 넘쳐흐르는 생산력과 재건력의 결과로서,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된다. 자연에서 허락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로 그지 없이 고통받는 자, 삶이 가장 빈곤한 자는 사유와 행동에서 온화와 평화와 선의를 가장 필요로 한다. 오늘날 휴머니티라고 부르는 것을. [니체 대 바그너. 우리 대척자들 p529-530]

 

(4) 데카당스 도덕으로서 이타주의와 동정,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동정의 도덕은 어떤 유형인가? 

데카당스 도덕으로서 이타주의와 동정 > 먼저, 이타주의와 동정은 반자연적 도덕이다. 이타심은 자신의 이해와 무관하거나,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타심의 권유는 곧 이기심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기심이 약화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유용성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 또한, 이타주의와 동정은 데카당스의 산물이자, 데카당스를 촉진시킨다. 생명력이 약화될 때 이타심과 동정적이 되며, 이러한 이타심과 동정은 생명력을 다시 약화시킨다. 한편, 이타주의와 동정은 자기 가치를 생성할 수 없는 무능력의 결과로, 타인에게서 가치를 찾으려는 감정이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유용한 것을 찾을 수 없는 무능력에서 출발하여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자기회피적 태도로 귀결된다. 

이타적 도덕이며 이기심을 움츠리게 하는 도덕 ― 어떤 경우에도 나쁜 징조다. 개인에게서도 그렇고 민족에게서는 특히 그렇다. 이기심이 결여되기 시작하면, 최고의 것이 결여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 '이해관계 없는' 동기에 유혹되는 것은 데카당스 공식을 제공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생리적 사실을 숨기는 도덕적 덮개이다. "나는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 '나는 더 이상은 가치가 없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대신, 데카당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 도덕은 : '가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5. p170]

쇼펜하우어의 동정의 도덕 > 니체는 현대사회의 동정의 도덕에 대한 과대평가를 비판했다. 니체에 따르면, 동정의 도덕에 대한 과대평가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현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데카당스 현대성을 반영하는 문화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동정을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윤리학의 중심개념으로 만든 것은 쇼펜하우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삶에의 의지에 대한 부정이며, 반자연적 동정의 도덕으로 비판한다. 쇼펜하우어의 실천철학은 의지(욕구)가 초래하는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해결책으로, 고통받는 인간들에 대한 공감, 공감에 기초한 인류에 대한 동정을 제시한다. 공감적 동정의 소유자는 의지의 욕구로 인해 고통받는 개별성으로부터 탈피한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그들은 자신의 개별적인 삶에의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도덕에서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수단을 구했다. 이것은 동시에 자신의 안락을 원하는 동물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이기주의의 극복과 동정의 실천이야말로 인간의 도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내가 최초로 경고했었으며, 도덕적 인상주의라고 명명될 수도 있을 만한 우리의 동정의 도덕, 이것은 모든 데카당적인 것들이 갖추고 있는 생리적 과민을 표현해준다. 쇼펜하우어의 동정의 도덕을 수단으로 자신이 학적임을 표방해보려고 했던 그 운동은 도덕에서의 진정한 데카당적 운동이며, 이런 것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교 도덕과 아주 유사하다. 강력한 시대와 고상한 문화는 동정과 '이웃사랑'과 자아와 자의식의 결여를 경멸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적극적인 힘들에 의거해 측정될 수 있다. ― 이럴 때 르네상스라는 그토록 풍요롭고 그토록 숙명적인 시대는 위대했던 최후의 시대로 드러나고, 우리 현대는 자기에 대한 소심한 염려와 이웃사랑, 노동과 겸허와 공정성과 과학성이라는 덕을 가지고서 ― 수집적이고 경제적이며 기계적으로 의도하는 약한 시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덕은 우리의 약함에 의해 제약되고 요청된다. [어느 반시대적인간의 편력 #37. p175-176]

 

(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 자살(안락사) vs 자연사

죽음이 요구되는 조건 > 병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꼴사나운 일이다. 삶의 의미와 살 권리가 상실되어버린 후에 의사들과 의사들의 처방에 비겁하게 의존하여 계속 근근이 살아가는 것은 사회에서는 심한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 더이상 당당하게 살 수 없을 경우에 당당하게 죽는 것.

의사의 도움에 의한 안락사 > 의사들은 그들 나름으로 그런 경멸을 전달하는 자여야만 한다. ― 처방전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구역질을 한 움큼씩 자기들의 환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삶의 관심이, 상승하는 삶이 갖고 있는 최고의 관심이, 퇴화하는 삶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밀쳐내도록 요구하는 경우들을 위해서 ― 이를테면 생식의 권리, 태어날 권리, 살 권리.....등을 위해 의사들의 새로운 책임을 창출하는 것.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6. p171]

다른 방식의 죽음, 자살  > 더 이상은 당당하게 살 수 없을 경우에 당당하게 죽는 것. ① (자발적 선택, 제때에 죽음, 의식적 죽음)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제때에 자식들과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료한 의식상태에서 죽는 것 : 그래서 작별을 고하는 자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진짜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자신이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 ...... ② (삶에 대한 사랑에서 원하는 죽음) 삶에 대한 사랑에서, 사람들은 다른 식의 죽음을 원해야 한다. ③ (자유롭고 의식적인 죽음) 우연적이거나 돌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인 죽음을...... / ④ (잘못을 바로 잡는 자살) 마지막으로 염세주의자 제위와 다른 데카당에게 던지는 충고한 마디. 우리는 우리의 출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잘못을 다시 바로잡을 수는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없애버린다면, 가장 존경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이다 : 없애버리는 것삶을 획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⑤ (사회에 이득을 주는 죽음) 사회, 아니! 삶 자체가 그렇게 해서 체념하거나 빈혈증을 앓거나 다른 덕들을 갖는 '삶'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것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6. p171-172]

자연사에 대한 비판 > 온갖 비겁한 편견에 대항하여 자연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 생리학적 평가를 내리는 일이 필요하다. 자연사도 결국은 '비자연적' 죽음은 자살에 불과하다.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법인까. (*생리학적으로 신체기능이 멈추었을 때 죽게 되니까.) 자연사라고 하는 것은 가장 경멸스러운 조건들 아래에서의 죽음일 뿐이며, 자유롭지 않은 죽음, 제때의 죽음이 아니며 비겁자의 죽음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6. p172]

 

2. 현대사회: 자유주의, 평등주의 비판 

*주제: 현대의 '자유주의, 평등주의' vs 니체의 '힘에의 의지'

 

(1) 현대의 데카당스화(생명력의 약화, 본능의 타락)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 

현대는 데카당스의 시대이다 > 니체는 '데카당스décadence'생명력의 본질적 쇠퇴와 본능의 근본적 타락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18ㆍ19세기 현대를 데카당스의 시대로 규정한다. 현대의 데카당스는 결코 특정 국가나 특정 세대, 계급, 정당, 혹은 문학운동의 특징이 아니라, 현대 전체가 그 속으로 표류해 들어간 정신상태였다. 이는 현대를 쇠퇴와 타락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진보하고 현대는 진보의 정점이라고 보는 '진보사관'에 대한 반박이었다. 또한 생명력과 본능이라는 근본적인 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와 정신적 가치상실, 국가권력과 대중문화 등 현대사회에 대한 표면적이고 일반적 비판과도 구분되었다.

데카당스(생리적 상태)는 니힐리즘(허무적 가치)로 표현된다 >니체는 데카당스로 규정되는 현대성을 '생리적인 자기모순'이라고 한다. 생리적 자기모순이란 삶의 근본본능이 삶 자체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종말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력이 퇴화하는 데카당스(생리적 상태)는 종말을 의지하는 니힐리즘(허무적 가치)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데카당스를 니힐리즘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하는데, 데카당스-현대는 곧 니힐리즘-현대인 것이다.

현대성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생리적인 자기모순으로 규정했었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41. p182]

인간의 데카당화(도덕주체)가 현대의 데카당스화(도덕가치)를 만든다 > 니체는 현대사회의 데카당스화의 근본이유를 바로 현대인의 데카당화에서 찾는다. 도덕은 언제나 특정 도덕주체의 생존조건으로, 특정 도덕주체가 특정한 도덕을 요청한다는 것! 즉 약자는 약자의 도덕 속에서 보존되기 때문에, 약자는 약자의 도덕을 요청한다. 삶의 근본충동이 약화된 데카당-현대인이 자신의 생존조건으로 데카당스적 문화와 가치를 요청한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당스 현대의 원인은 인간의 데카당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근대적 '덕목들' 때문에 의도적이지는 않았더라도 더할 나위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있다...... 적대적이고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본능들의 감소는 ― 이것이야말로 소위 우리의 '진보'라는 것이다. ― 생명력의 일반적인 감소에서 나타나는 결과들 중 하나를 보여준다. […] 우리의 덕우리의 약함에 의해 제약되고 요청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p174-176]

그리스도교 도덕은 데카당스 현대성의 뿌리이다 > 니체는 현대인을 데카당으로 만든 결정적인 원인으로 그리스도교 도덕을 지목한다. 이제 니체의 데카당스-현대성에 대한 비판은 모두 그리스도교 도덕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즉 평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같은 현대이데올로기와 철학, 학문, 음악, 노동, 국가 같은 현대사회의 문제가 모두 그리스도교의 본능으로부터 자라났다는 것!  

 

(2) 현대의 이데올로기_자유주의: 시대적 자유 / 반시대적 자유 / 비시대적 자유

니체는 현대의 자유주의 이념을 데카당스 자유, 무리적 자유, 무책임의 자유라고 비판하고,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는 자유를 강자의 자유로 제시한다. 한편 니체는 시대의 자유개념을 받아들이는 '시대적 복종-자유' /  시대의 차별에 예속에 항의하는 '반시대적 저항-자유' / 다른 시대를 생성하는 '비시대적 생성-자유'의 사례를 제시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시대의 예속에 복종하거나 시대의 차별에 저항하거나 이것은 모두 '시대에 의해 정의되는 자유'라는 의미에서 약자의 자유이며, 이로부터 다른 시대가 생성되지는 않는다. 반면 더이상 시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비시대적인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는, 시대를 의식하지 않고 시대와 상관없이 시대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① 시대적 자유: 복종

[죄 지을 수 있는 자유, 책임을 묻기 위한 의지]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신학적 의미에서 인류를 '책임있게'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 의지에 관한 학설은 벌을 목적('죄 있다고 여기도록 원하게' 하는)으로 고안되었다. 이 의지의 심리학은 성직자들과 신이 판결하고 처벌할 수 있기 위해 ― 죄 지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자유롭다'고 생각되었다 : [네가지 중대한 오류들 #7. p121-122]

[무리동물로 만드는 자유] 자유주의적 제도들은 자유주의적이 되는 동시에 더 이상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 나중에는 그런 자유주의적 제도들보다 더 역겹고 더 철저하게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게 된다. 그 제도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 그것은 힘에의 의지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그것은 도덕으로 끌어올려진 산과 골짜기의 평준화 작업이다. 그것은 작게 만들고, 비겁하게 만들며, 즐길 수 있게 만든다. ― 매번 그것과 더불어 군서동물(*무리동물)이 개가를 올린다. 자유주의 : 이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군서동물로 만드는 것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8. p176-177]

[오늘만 사는 무책임한 자유] 전통에의 의지가, 권위에의 의지가, 수세기 동안 지속되는 책임에의 의지가, 과거와 미래로 무한한 세대의 연속이라는 연대성이 있어야만 한다. […] 서구 전체는 제도들을 자라나게 하고, 미래를 자라나게 하는 본능들을 더 이상은 갖고 있지 않다 : 아마도 그것만큼 서구의 '현대적 정신'에 거슬리는 것은 없으리라. 사람들은 오늘을 위해 살고, 아주 재빠르게 살아간다. ― 아주 무책임하게 살아간다 : 바로 이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부른다. 제도를 제도로 만드는 것은 경멸받고 증오되며 거절된다 : '권위'라는 말이 소리를 내기만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노예상태의 위험이라고 믿는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9. p178-179]

② 반시대적 자유: 저항

[데카당스 자유] "내 뜻과는 다른 자유"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자신의 본능들에 의존하는 것은 또하나의 숙명이다. ...... 어떤 강한 고삐라도 그들에게는 지나치지 않을 만한 자들이(*강한 고삐에 얽매인 예속된 자들) 독립과 자유로운 발전과 방임을 가장 열렬히 주장한다. ― 정치에서도 그렇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당스의 징후인 것이다 : '자유'라는 우리의 현대적 개념본능의 퇴화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41. p182]

③ 비시대적 자유: 생성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는 자유] 내 자유 개념. ......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책임에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 우리를 분리시키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노고와 난관과 궁핍과 심지어는 삶에 대해서까지도 냉담해지는 것. 자신의 문제를 위해 인간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자유는 전투적이고 승리의 기쁨에 찬 본능다른 본능들, 이를테면 '행복'본능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유로운 인간은 전사다. 개인에게서나 대중에게서 자유는 무엇에 의해 측정되는가?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서, 위에서 머무르기 위해서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 최고로 자유로운 인간유형은 최고의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 사람이 갖고 있으면서도 갖고 있지 않은 것, 사람이 원하고 사람이 쟁취하는 것으로서.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8. p177-178]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Already Free!] 항의와 직접행동에는 차이가 있다. 항의는 아무리 전투적이라 하더라도 당국에게 다르게 행동하라는 호소다. 직접행동은 공동체가 우물을 만드는 문제나 법을 무시하고 소금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회의를 거부하고 공장을 점거하며, 기존의 권력구조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다. 직접행동은 궁극적으로 이미 자유로워진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반항적 주장이다.[데이비드 그레이버. 1961-2020]

 

(3) 현대이데올로기_평등주의: 약자의 평등(루소.사회주의.아나키스트) vs 강자의 거리의 파토스(니체)

[약자의 평등 vs 강자의 거리의 파토스] 어떤 것이든 실제로 유사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평등권' 이론에서 그 표현을 얻는 '평등'은 본질적으로 쇠퇴에 속한다 :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성이다. 오늘날에는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과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7. p175-176]

[노예적 평등] '내가 천민이면 너 역시 천민이어야 한다' : 이 논리에 의거해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 자신에 대한 불평은 어떤 경우에도 쓸모가 없다 : 이것은 약하기 때문에 생긴다. 자신의 열악한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든 자기 자신 탓으로 돌리든 ― 첫 번째 경우는 사회주의자이고 두 번째 경우의 예는 그리스도교인이다. ―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양 경우의 공통점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점은) 누군가가 사람들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 요약하면, 고통받는 자가 자신의 고통에 맞서 스스로에게 복수의 꿀을 처방한다는 것이다. 쾌락욕으로서의 이런 복수욕의 대상들은 우연한 원인들이다 : 고통받는 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작은 복수를 식혀주는 원인들을 찾아낸다. [⋯] 그리스도교인아나키스트 ― 양자 모두 데카당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4. p169]

[사회주의적 평등] 그런데 그리스도교인이 비록 '세상'에 유죄판결을 내리고 비방하고 더럽힌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를 유죄판결하고 비방하고 더럽히는 사회주의 노동자의 본능과 같은 본능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 '최후의 심판'조차도 여전히 복수라는 달콤한 위안이고 ― 사회주의 노동자도 기대하는 혁명이며, 이것을 단지 조금 더 멀리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GD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4; KGW Ⅵ 3, 127. 한글판 169-170)

[아나키스트의 평등] 사회의 쇠퇴계층을 대변하는 자로서 아나키스트가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법'과 '정의'와 '평등권'을 요청한다면, 그가 교양의 결여에 의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정말 고통을 겪는지 ― 그가 어디에서 궁핍한지를 알지 못한다. 삶이 궁핍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원인-충동이 그에게서 강력해서 : 그가 열악한 상태에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불평과 자기불만은 이미 삶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이 자극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간다 : 모든 불평에는 복수심이 미세하게나마 들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열악한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열악함 그 자체를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려 그들을 비난한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불의를 범하고, 용인되지 않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듯이.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4. p168-169]

루소는 이상적 사회에서의 박애를 주장한다. 루소의 자유와 평등 및 박애에 대한 입장은 프랑스혁명의 정신에도 반영되어 있다. 니체는 루소의 이런 입장에 대해 '이상주의와 천민이라는 이중성'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아니라, 노예적 상태를 보존하고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니체가 루소사상을 프랑스혁명의 퇴락을 조장한 결정적 요소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에밀』에서 루소는 자유와 평등을 인간의 자연권으로 상정한다. 니체에게 이런 루소식 평등원칙은 불만인데, 그것이 결코 인간의 자연적 상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자연의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가 상승되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처럼 '자연으로의 돌아감'을 말하지만, 니체에게 그것은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가 '올라감'을 의미한다.

[루소의 평등개념] ― 나는 프랑스혁명에 내재해 있는 루소도 증오한다 : 그 혁명은 이상주의와 천민이라는 루소식 이중성에 대한 세계사적 표현이다. [⋯] 루소적 도덕 ― 혁명이 계속 영향을 끼치게 만들고, 모든 천박하고 평균적인 것들을 설득해대는 소위 말하는 혁명의 '진리'라는 것이다. 평등선언이라니! …… 이것보다 더 유해한 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나 역시 '자연으로의 돌아감'을 말한다. 이것이 본래는 돌아감(*인간문명에 역행하는 자연성)이 아니라, 올라감(*힘에의 의지로서 자연성)이지만 말이다. ― 즉 드높고 자유로우며 심지어는 섬뜩하기까지 한 자연과 자연성으로의 올라감, 큰 과제를 갖고 유희하며 유희가 허락되어 있는 자연과 자연성으로의 올라감이지만 말이다…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 내가 이해하는 한 나폴레옹은 한편의 '자연으로의 돌아감'이다. [⋯] '동등한 자에게는 평등을, 동등하지 않은 자에게는 불평등을 ― 정의에 대한 진정한 표현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동등하지 않은 자를 결코 동등하게 만들지 말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48. p190-191]

 

(4) 현대의 사회문제 : 데카당스 학문, 다윈주의, 노동문제

[데카당스 학문] 데카당스의 무의식적 효능이 개별학문의 이상마저도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회학 전체에 대해 그것이 단지 사회의 쇠퇴상만을 경험을 통해 알 뿐이며, 자기의 쇠퇴본능을 정말 순진하게 사회학적 가치판단의 규범으로 삼는다는 점 때문에 반박한다. 하강하는 삶, 조직하는 힘의 감소, 달리 말해 분리시키고 간격을 벌리며 아래와 위로 정돈해주는 힘의 감소가 오늘날의 사회학에서는 이상이라고 공식화된다......우리의 사회학자들은 데카당이며, 친애하는 허버트 스펜서 역시 데카당이다. ― 그는 이타주의의 승리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p37. p176]

[다윈주의] 반(反) 다윈 ― 그 유명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해 말해 보자면, 우선 그것은 입증되었다기보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발생하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것이다; 삶의 총체적인 면은 곤경이나 기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풍부와 풍요, 심지어는 불합리한 낭비이기도 하며 ― 투쟁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힘을 위한 투쟁이 일어난다. …… 맬서스와 자연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 그런데 이런 투쟁이 있다고 가정해보면 ― 사실 이런 투쟁은 발생하는데 ―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다윈학파가 바라거나 이들과 더불어 사람들이 바랄 수 있을 만한 결과와는 완전히 정반대일 것이다 : 즉 강자나 특권자들이나 운 좋은 예외자들에게 불리할 것이다. 종은 완전성 안에서는 성장하지 않는다 : 약자가 계속해서 강자를 지배한다. ― 약자가 다수이고, 더 똑똑하기도 하기에…… 다윈은 정신을 잊어버렸었다.(― 이것이 영국적이다!). 약자가 더 정신적인데 말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14. p153]

[노동문제] 근본적으로는 본능의 타락이자 오늘날의 모든 우매의 원인인 우매함은 노동문제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 이것이 본능의 첫번째 명령인데 말이다. ― 유럽노동자를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놓고 난 후, 사람들이 그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지를,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겠다. [⋯] 노동자를 계층으로 만드는, 독자적이게 만드는 본능을 가장 무책임한 무분별함이 철저히 파괴해버렸다. 노동자를 군인처럼 용감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단결권과 정치적 참정권을 부여했다. [⋯]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목표를 원하면, 수단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노예를 원하면서 노예를 주인으로 교육한다면 바보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40. p181]

 

3. 현대예술: 현대예술론 비판

*주제: 현대의 '순수예술론, 사실주의, 미적 염세주의' vs 니체의 '예술생리학'

 

[참고] 예술가-형이상학 vs 예술생리학

니체의 예술관은 초기 예술가-형이상학(Artisten-Metaphysik)에서, 성숙기의 예술생리학(Physiologie der Kunst)으로 상승한다. 『비극의 탄생』의 예술가-형이상학에서는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이 강조되었다면, 『우상의 황혼』의 예술생리학에서는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예술적 삶'의 스타일로 이동한다. 『비극의 탄생』에 의하면, 오직 예술에서만 삶을 미화하는 가상이 가능하며, 미적 체험이 창조적 삶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특히 몰락과 생성을 주제로 하는 비극적 예술은 ‘삶의 자극제’로 인간이 삶의 용기를 잃지 않도록 ‘형이상학적(*정신적) 위안’을 제공한다. 예술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으며, 예술이 쇠퇴하는 삶을 추구하는 데카당스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나타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입장은, ‘예술가의 형이상학(*정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예술이 우리를 데카탕스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니체는 예술을 매개로 한 삶의 구원이 아니라,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창조적 작업으로 관점을 이동한다.

 

(1) 미적 체험으로서 도취란 어떤 감정인가?

미적 체험의 전제로서 도취 > 미적 체험의 전제는 도취감Das Rauschgefühl이며, 도취란 힘의 상승에 대한 쾌감인 생리적 도취에 다름아니다! 다시말해 도취는 단순히 심리적 상태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신체(Leib) 전체의 흥분상태이자 신체 전체가 느끼는 '쾌감'의 상태다. 도취는 신체의 혈관체계와 신경체계와 근육체계 전체의 흥분이자 생동감이며, 이와 동시에 심리적 에스터시도 발생한다. 이런 전체적 도취상태에서는 인간의 공간지각 및 시간지각이 변화한다. 신체의 각 기관은 예민해지고, 그 어떤 실마리나 암시에도 민감해져 아주 작은 자극도 놓치지 않으며, 시야의 확대도 가능해진다. 인간의 생리상태는 최고도로 활성화된다. 이때의 쾌감을 니체는 충만과 완전성의 감정으로서 '힘 감정'으로 이해한다.

예술이 있으려면, 어떤 미적 행위와 미적 인식이 있으려면 특정한 생리적 선결조건이 필수불가결하다 : 즉 도취라는 것이. 도취는 우선 기관 전체의 흥분을 고조시켜야만 한다 : 그러기 전에는 예술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기원을 갖는 온갖 종류의 도취는 모두 예술을 발생시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의 느낌이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물에게 나누어주고, 우리로부터 받기를 사물에게 강요하며, 사물을 폭압한다. ― 이런 과정이 이상화라고 불린다. 여기서 편견 하나를 없애버리자 : 이상화는 보통 믿는 바와는 달리 자질구레하거나 부차적인 것을 빼내버리거나 제해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주요특징들을 엄청나게 내몰아버리는 일이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어서, 그 때문에 다른 특징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8. p147-148]

힘 감정으로서 도취 > ① (힘감정으로서 도취) 최고로 활성화된 인간의 생리상태에서 인간은 쾌감을 느끼며, 이 쾌감은 곧 힘의 상승감과 충만감과 완전성에 대한 감정이다. 도취는 정확히 힘감정에 대한 경험으로, 힘감정의 현저한 확대와 넘쳐흐를 정도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정이다. ② (도취의 효과) 이때 이러한 힘감정을 경험하는 인간은 자신의 힘감정을 경험대상에 부여한다. 즉 인간은 경험대상을 그 대상의 성질 그대로 경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상에 자신의 상태를 투사하고 전이시킨다. 그래서 대상을 자기 자신이 그렇듯 상승하고 충만하고 완전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대상을 변용시키는 것이다. 변용된 대상에 대한 체험은 그렇다면 곧 자기 자신의 충만과 완전성을 체험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니체는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예술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완전성 : 이것은 그 심원적 본능의 힘 느낌이 현저히 확대되는 것이고 풍요로움이며, 모든 언저리에까지도 필연적으로 넘쳐흐름이다. [니체전집Ⅷ p102]

[도취]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만사를 풍요롭게 만든다 : 무엇을 보고 무엇을 원하든 사람들은 그것을 부풀려서 보고 절실한 것으로 보며 강하고 힘이 넘쳐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물이 그의 힘을 다시 반영해낼 때까지 사물을 변모시킨다. ― 사물이 자기의 완전함을 반영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완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 바로 이것이 예술인 것이다. 그의 원래 모습이 아닌 것 전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기쁨이 된다 : 예술에서 인간은 자신을 완전성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 이와는 반대되는 상태인 본능의 특수한 반예술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은 모든 사물을 피폐하게 만들고, 희석시키며, 소모적으로 만드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반예술가들, 생명에 굶주린 자들은 역사상 아주 많이 있었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9. p148)

아폴론적 도취와 디오니소스적 도취 > 니체는 도취를 생리적 도취로 설명하면서, 도취를 다시 아폴론적 도취와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구분한다. 이것은 니체가 예술가-형이상학이라는 초기 사유에서 제시했던 아폴론적인 것Das Apollinische과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생리적 도취의 일종으로 재해석한다. / 아폴론적 예술충동은 환영을 만드는 예술충동이자 아름다운 가상을 만드는 예술충동이었다. 이 예술충동의 활동을 니체는 이제 생리적 도취의 결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하면 개별화와 형상화와 형식화를 통한 가상만들기 작업생리적인 도취상태가, (힘 상승의 쾌감과 충만과 완전성으로 인한 감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니체는 아폴론적 도취상태에서 우리의 신체기관 중 특히 '눈이 자극'되고 활성화되어, '환영'을 보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의 환영은 다름 아닌 개별화와 형상화와 형식화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인 것이다. /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 역시 생리적 도취상태를 전제로 한다. 개별화를 파기하고, 구분과 제한과 윤곽과 형태를 넘어서며, 차별 이전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디오니소스적 창조력은 생리적 도취의 결과인 것이다. / 그런데 아폴론적 도취상태가 눈의 기능을 활성화시켜 가상만들기 작업을 수행하게 한다면, 디오니소스적 도취상태는 신체의 이펙트 전체를 자극하고 고조시킨다. 그리고 이 이펙트들의 자극에 반응하여, 특정한 한 가지 형태가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종류의 표현 수단을 통해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을 표현한다. 물론 이것을 통해 자신의 변화도 이루어낸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적 도취상태는 '이펙트들의 총체적인 흥분이자 총체적인 분출'상태이며, 총체적인 변신과정인 것이다.

아폴론적 도취는 무엇보다도 눈을 자극시켜 환영을 보는 능력을 얻게 한다. 화가, 조각가, 서사시인은 환영을 보는 자들의 전형이다. [...]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는 그 반대로 아펙트의 체계 전체가 자극되고 고조된다 : 그래서 그 상태는 모든 종류의 표현수단을 한꺼번에 분출시키고, 재현과 모방과 변형과 변화의 능력, 모든 종류의 흉내와 연기를 동시에 내몰아댄다. 그 상태에서 본질적인 것은 능숙한 변신, 반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능력이다. 어떤 종류의 암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는 격정의 어떤 신호도 간과하지 않으며, 그가 최고단계의 전달기술을 갖고 있듯이,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데서도 최고단계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피부와 모든 격정의 내부로 들어간다 :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변모시킨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10. p149-150]

 

(2) 미적 판단은 미적 주체의 힘에의 의지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미적 주체에 있다: 미적 판단은 주체의 '해석'이다 > 니체는 도덕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하나의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일 수 없으며, 미 그 자체도 있을 수 없다. 도덕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예술주체에 따라 미적 가치가 결정된다. 곧 미적 가치 역시 파생적 가치일 뿐이다. 미적 판단은 미적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미적 주체의 판단이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름다운 속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미적 주체가 그렇게 판단(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의 종적 허영심'이라고 한다. 이 과정은 미적 판단과 미적 가치의 객관성을 의심하게 하며, 예술과 삶과의 순환적 유용성이라는 입장으로 이끌게 된다.

아름다움은 미적 주체의 힘의 상승을 전제로 한다미적 판단은 주체의 '힘감정'에 따른 해석이다 > (0.힘에의 의지에 따른 생리적 해석) 니체는 도덕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힘에의 의지'로 해석한다. 예술에서의 미적 체험ㆍ판단예술주체힘에의 의지에 따른 생리적 해석이다. 아름답다는 판단은 미적 주체의 힘의 상승을 전제로 하며, 추하다는 판단은 미적 주체의 힘의 하강을 전제로 한다. 즉 미적 주체의 힘에의 의지에 따라, 미적 판단이 달라지는데, 미적 주체의 힘에의 의지란 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리적 조건을 말한다.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생리적 조건이란 상승적 힘의 존재이고, 추하다고 판단하는 생리적 조건은 상승적 힘의 부재이다. 그렇다면 미의 판단은 힘에의 의지의 상승에 대한 징후(암시)이며, 추의 판단은 힘에의 의지의 퇴화에 대한 징후이다. "강한 힘은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강자는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강자는 사물을 아름답게 한다!" ① (미의 판단을 하는 미적 주체) 이때 주체는 도취상태에 있어야 한다. 주체가 도취상태에서 힘 상승을 경험해야 한다. 이런 힘의 상승은 대상을 미화하는 필연적 조건이다. 상승적 힘, 강한 힘은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는 판단을 한다. 이렇게 해서 미의 판단이 성립된다. ② (추의 판단을 하는 미적 주체) 주체의 상승적 힘이 대상에 자신의 충만함과 완전성을 투사하여 아름답게 만드는 변용력을 갖고 있는 반면, 주체의 하강적 힘에는 이런 변용력이 없다. 즉 그 주체는 이미 생명력과 힘의 퇴화가 일어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그는 충만함이나 완전성에 대한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 이 주체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추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추의 판단은 이미 주체의 퇴화상태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선 그 자체나 진리 그 자체가 없는 것처럼, 미 그 자체라는 것도 없다. 개개의 경우에서는 다시 특정한 인간 종의 보존조건들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니체전집Ⅷ p167]

아름다움이라는 우리의 느낌보다 더 제약받는, 말하자면 더 제한되는 것은 없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에서 아름다움을 분리시켜 생각해보려는 사람들은 즉시 자기 발밑의 토대와 지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는 단지 말에 불과하며, 개념도 되지 못한다. 아름다움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전성에 대한 척도로 설정해 놓으며; 특별한 경우 자신을 숭배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런 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이 종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인 자기보존과 자기증대 본능은 그런 숭고함 안에서 빛을 발한다. [⋯]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만을 비추어보며, 그에게 그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것을 전부 아름답다고 여긴다 :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의 종적 허영심인 것이다. [⋯]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인간 외에는 : 모든 미학은 이런 단순함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미학의 제1진리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19-20. p157-158]

여기에 곧바로 제2의 진리를 추가해보자 : 퇴락한 인간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 영역의 경계가 지어진다. 생리적으로 고찰해보면 추한 모든 것은 인간을 약화시키고 슬프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쇠퇴, 위험, 무력을 상기시킨다; 이러면서 인간은 실제로 힘을 상실한다. 추한 것의 효력은 동력계를 가지고 측정해 볼 수 있다. 대체로 인간이 풀 죽고 우울해질 때, 그는 '추한 것'이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힘에 대한 그의 느낌, 그의 힘에의 의지, 그의 용기, 그의 긍지 ― 이런 것이 추한 것과 함께 사라지며, 아름다움과 함께 상승한다. [⋯] 추함은 퇴화에 대한 암시이자 징후로 이해된다 : 아주 어렴풋이라도 퇴화를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추하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킨다. 소진, 고난, 연로, 피곤의 모든 징표, 경련이든 마비든 모든 종류의 부자유, 특히 해체와 부패의 냄새와 색깔과 형식들, 이것들이 끝까지 희석되어 상징이 되었다 하더라도 ― 이 모든 것(*생리적 퇴화)은 동일한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즉 '추하다'는 가치판단을 말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0. p158]

 

(3)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활동이다!? 

예술과 삶의 근원적 통일성 > 니체에 따르면,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 세계-의미-형태-형식을 구성하는 창조력이다.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생명력이며, 이러한 힘에의 의지 안에서 삶과 예술은 근원적 통일성을 형성한다. 즉 삶은 예술에 의한 것으로, 삶의 근원적 생명력은 인간의 창조적 힘이 발휘될 때 느껴진다. 또한 예술은 삶에 의한 것으로, 인간의 창조적 힘은 삶의 근원적 생명력에 의해 도출된다. 그래서 예술은 삶을 위한 '위대한 자극제'이며, 삶은 예술적 활동의 장이다. 예술은 삶의 실천이고, 동시에 생성하는 삶의 스타일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예술의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예술론, 사실주의, 미적 염세주의는 모두 반박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 ― 예술 안에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항상 예술 안에 도덕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이는 것에 맞서는 싸움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것 : 그것은 '도덕 같은 것은 꺼져버려라!'이다. ― 하지만 이런 적대감마저도 여전히 편견의 우세한 힘을 누설하고 있다. 도덕을 설교하고 인간을 개선하려는 목적이 예술에서 배제되어도, 이것으로부터 예술이 도대체가 목적이 없다는, 목표가 없다는, 의미가 없다는, 간략히 말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는 어떤 벌레라는 ― 결론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도덕적인 목적을 갖느니 차라리 어떤 목적도 갖지 않으련다!' ― 단순한 격정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한 심리학자는 묻는다 : 예술은 전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예술은 칭찬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찬미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골라내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사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 특정한 가치평가들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거나 하는 것인데...... 이것이 단순히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우연이란 말인가? 이것이 예술가의 본능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 예술가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그 전제조건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은 예술을 향하고 있는가, 오히려 예술의 의미인 삶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삶이 소망할 만한 것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는가? ―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4. p161-162]

[사실주의] 있는 대로 본다는 것 ― 이것은 다른 유의 정신에 속한다. 이것은 반예술가적이고 사실적인 정신에 속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7. p147]

[쇼펜하우어의 미적 염세주의] 예술은 삶의 수없이 많은 추한 것, 강한 것, 의문시되는 것도 역시 등장시킨다. ―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 그리고 실제로 예술에 이런 식의 의미를 부여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예술의 총체적 의도라고 가르치고, '체념시키는 것'을 비극이 갖는 중대한 유용성이라며 경외했다. ― 그런데 이것은 ― 내가 이미 암시했듯이 ― 염세주의자의 시각이며 '사악한 시선'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4. p162]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 부정] 삶에 대한 허무적인 총체적-폄하에 이롭게 하려고 바로 그 반대의 것들, 즉 '삶에의 의지'의 위대한 자기긍정이나 삶의 풍요로운 형식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악의에 찬 천재적 시도로서 말이다. 그는 예술,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위대한 동정, 인식, 진리 의지, 비극을 차례차례 '의지'를 '부정'하는 데 따르는 또는 의지를 부정하려는 욕구에 따르는 현상으로 해석해 냈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1. p159]

[쇼펜하우어의 구원수단으로서의 예술] 그 개별적 경우를 하나 들어보겠다. 쇼펜하우어는 우울한 열정에 취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 결국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가 아름다움에서 하나의 다리를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기서 더 나아가거나 더 나아가려는 갈증을 얻는 다리를……그 아름다움이라는 다리는 그에게 '의지'로부터의 찰나적인 구원이며 ― 그 다리는 영원한 구원으로 유혹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2. p159-160]

[쇼펜하우어의 자연성의 부정] 특히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을 '의지의 초점'으로부터의 구원자, 성으로부터의 구원자로 찬미한다. ― 미 속에서 그는 생식충동이 부정되고 있다고 본다...... 기괴한 성자여! 누군가는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나는 그것이 자연이 아닐까 염려된다. […] ― 다행이도 그 역시 철학자인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그는 신과도 같은 플라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부른다)의 권위보다 덜하지 않는 권위에 의해 다른 명제를 주장한다 : 모든 아름다움은 생식하게끔 자극한다고 ― 이것이 바로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특징적 효능이라고......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p22.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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