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_후기] 선악의 저편 4-5장
제4장 잠언과 간주곡
5장에서 '도덕'을 생각하며 4장을 다시 보니 아포리즘들 중 '도덕'과 연관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스로 자신의 부도덕함을 부끄러워하는 것 :이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도덕성도 부끄러워하게 되는 층계의 첫 계단이다."(95번)
도덕성이 부도덕성보다 오히려 높은 층위의 수치심을 유발하게 된다고 여겨지는 이 아포리즘에서 도덕에 대한 니체의 부정적, 상대주의적, 관점주의적 해석이 드러난다.
바로 밑에 보니 이런 말도 있다. "뭐? 위대한 인간이라고?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상을 연기하는 배우만을 볼 따름이다."(97번)
헤겔의 '역사의 꼭두각시'가 떠오르지만, 니체는 절대정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상'을 얘기한다. '위대한 인간'을 '배우'로 격하시킨 배후에서 역사의 단락마다 다른 연기를 해야하는 슬픈 개인의 운명을 본다. 하긴 니체가 아니라도 인생이 연기라는 생각은 수없이 나를 괴롭혀 왔다.
"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108번) 이 낯익고 손쉬운 댓구는 이제 약간 지겹기까지 하다.
"한 시대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보통 전에는 좋다고 느꼈던 것의 반시대적인 여운이다. - 낡은 이상의 격세유전"(149번)
이 아포리즘에 이어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156번)에 이르면서 니체의 '도덕'은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것임이 확실해진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데, 니체에게 시대의 광기는 비도덕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덧붙임) 괴물과 심연에 대한 토론을 보며, '지금 나에게' 괴물은 무엇이고, 심연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것 같다.
제5장 도덕의 자연사
▲ 5장은 '도덕'에 대한 얘기다.
1. 절대 도덕이란 없으며, 역사성과 상대성을 가지고 있다.
"도덕의 본래 문제들은 모두 많은 도덕들을 비교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186)…도덕의 유형학
2. 도덕은 충동을 나타내는 기호 언어일 뿐이다.
3. 도덕은 오랫동안에 걸친 강제다.
"모든 도덕은 방임과는 반대의 것이며, '자연'에 대한 폭압이고 '이성'에 대해서도 폭압이다:"(188)
4. 도덕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포에서 비롯됐다.
5. 현대 민주주의의 도덕은 무리 동물의 도덕이다.
6. 좀더 차원 높은 도덕이 필요하다. 이는 새로운 철학의 과제다.
※ 조금 더 축약하면…
'공포'에서 비롯된 도덕은 폭압이며, 충동의 기호이며, 역사성과 상대성을 가진다. 현재의 도덕은 무리 동물의 도덕이며, 더 높은 차원의 도덕은 새로운 철학의 과제다.
▲ 세미나 시간에 집중적으로 토론되지 않았던 것들 가운데 191번이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이성의 편에 섰지만, 결국 본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플라톤은 이성과 본능을 모두 하나의 목적(신)을 향하는 것으로 묶어버렸다고 지적한다. 플라톤 이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는 플라톤의 논리를 지켜왔다.
니체는 이에 대해 "말하자면, 도덕의 문제에서는 지금까지 본능이나 그리스도교인들이 부르는 것처럼 '신앙', 또는 내가 부르는 것처럼 '무리'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결론 짓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니체가 '신앙 vs 지식'에 '본능 vs 이성'을 등치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리스도교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분열시킨 오래된 도덕적 문제"라고 표현한다.
이 아포리즘에 따르면 신앙=본능, 지식=이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지식=이성은 이해가 가지만, 신앙=본능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추측컨대 이는 인간의 본능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부여한 것' 나아가 신앙의 문제로 본 것으로 니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 플라톤이 이성과 본능을 모두 하나의 목적(신)을 향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정신(본질)을 육체(현상)과 분리한 뒤 전자를 우위에 둔 서양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엇결'님은 무리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복종'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무리 도덕을 가진 자가 '복종'을 내면화하는 과정에는 '명령-복종'이라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입법'이 내재돼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무리 도덕에서 벗어나 '주인의 도덕'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텍스트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나간 사유의 결과로, 동의 여부를 떠나 새로운 문제 제기로 평가하고 싶다. 다만 이 명제가 더 많은 동의를 얻기 위해선 '복종'의 메카니즘 안에 정말로 '자기 명령'이라는 과정이 개입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야 할 것 같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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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결과순결
아포리아님의 훌륭한 후기 덕분에 지난 세미나 시간이 머리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 (이것도 영원회귀일까요? 근데 땀이 나는 건 또 왜일까요? ^^;)
아울러 오라클님의 답글 또한 저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하구요.
제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가 세미나 시간에 언급한 내용 중에 복종이 내면화된 사람 그 자체로 자기극복이 된다고
언급한 기억이 없음에도 그 부분만을 강조하시는 오라클 님의 글 속에
아! 어쩌면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닌데, 내가 한 언어의 표현의 한계가
그런 반응을 이끌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저의 생각을 아포리아님과 같이 차분히 정리해볼까 해요.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려볼게요.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복종이 내면화되어 있는 사람의 현상태가
바로 자기극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타자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명령으로 '대체'할 수만 있다면,
이사람은 명령에 대해 복종 - 이때의 복종은 '자기훈련적 측면'을 의미합니다. - 의
훈련이 되어 있기에 더욱 자기극복에 이를 가능성이 더욱 있다는 것을
니체는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겁니다.
즉 저는 니체가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희는 그동안 도덕과 신앙의 명령에 충실히 수행하고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며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훈련해온 사람이 아니더냐.
이제 너희에게 명령을 내려왔던 도덕도, 신도 모두 죽었다.
이제는 너희 안의 군주를 스스로 깨워라.
너는 '기만'을 통해 타자의 명령을 자기 명령으로 바꿀 정도로
'명령'에도 약간의 재주가 있는 이들이 아니던가.
네 안의 새로운 군주를 깨울 수만 있다면
너의 복종능력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너 자신의 명령에 충실할 것이다.
나는 너희 도덕의 인간들에게서 '이러한' 미래철학자의 숨은 가능성을 본다."
글을 쓰다보니 세미나 시간에 타자의 명령을 [자기명령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저의 표현이 혹시나 타자의 명령을 자기내면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인가?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부디 이 추측이 맞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ㅎㅎㅎ)
저는 이번 선악의 저편을 읽으면서,
니체가 이제까지 전작들에서 주장해 온
모든 형이상학(도덕, 종교, 예술, 경건한 그 모든 것)들이 근거없다고,
이제 스스로 극복하라고 말해온 것을 넘어서
독자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니체가 제시하는 실천할 수 있는
첫출발점을 잡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요.
무엇이든 첫번째 단추, 첫번째 걸음, 첫번째 시도만 해낼 수 있다면
니체가 말한것과 같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선악의 저편에 가 있을 수
있다는 그 말을 한번 믿어보고 싶거든요.
다시 오라클 님의 댓글로 돌아와, 오라클님이 스스로 명령하라는
니체의 조언에 집중하셨다면,
저는 우리 안의 복종능력을 어떻게 하면 나의 극복요소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강조한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다시한번 반복해서(부디 마지막이기를.......ㅠ.ㅠ)
타자의 명령에 대한 충실한 복종자세 그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자기극복에 이르지 못함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타자의 명령을 자기의 명령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스스로
복종하는 나의 능력을 믿고 우리는 나아가자는 겁니다.
다 써놓고 보니 오라클님과 저의 주장이 무슨 차이가 있었던 것인지
저 스스로 무감해지는데......오라클님은 어떠신지요? ^^
마지막으로 고병권님의 다이너마이트 니체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p210입니다.
'그렇다면 희망을 어디에 걸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희망을 붙잡아야 하는가?
앞서 장들의 마지막 절에서처럼 니체는 새로운 희망의 주체를 호명한다.
그 주체의 이름은 '우리, 다른 신앙을 가진자들이다.
현대성이 하나의 도덕이고 하나의 종교라면 우리는 극복도 도덕과 신앙을 통해 열어야 한다.
이것이 니체가 여러차례 강조하는 자기극복이다.
도덕에 의한 도덕의 자기극복, 신앙에 의한 신앙의 자기극복
아울러 즐거운 학문의 한 구절을 인용해요.
'그대들 이주자들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면 그대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 또한
신앙일 것이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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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클님의 '자기입법과 복종의 내면화'에 관한 예시들을 보면서
이해가 좀 더 선명히 되는것 같습니다.
근데 엇결님의
'타자의 명령을 자기의 명령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스스로
복종하는 나의 능력을 믿고 우리는 나아가자는 겁니다.'
이 부분이 잘 와닿지 않습니다.
타자의 명령을 자기명령으로 어떻게 치환할 수있으며
어떤 명령을 내면화 하는 것과 치환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며
자신이 치환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명령자의 명령을 내면화 할 뿐일 수 있는 것과
어떻게 구별이 되는것인지 ........
다음 세미나에서 예시를 들어 설명해 주심이 어떠할까요?
# 괴물과 심연
'괴물과 심연'에 대한 아포리즘은 그것의 '유명세'에 비해 '의미'가 제대로 해석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괴물과 심연'이야말로 강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이며, 한편 신체의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만으로도 좀더 흥미롭고 풍부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만난 괴물과 심연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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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입법과 복종의 내면화
'복종본능이 내면화'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복종은 외적인 강제에 의한 것인데,
복종이 내면화될 경우 외적 강제 없이도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외적인 강제 없이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상태를 '자기입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리동물의 '복종의 내면화'야말로 니체적 의미의 '자기입법'의 반대편에 있는 도덕감정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입시소재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주인공은 부모의 강요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공부기계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심지어 열등감조차도 그것을 위해 투여합니다.
애초에는 부모의 희망에 '복종'하는 형식이었을 서울대 의대는 어느 순간 나의 목표로 '내면화'됩니다.
그리고, 2차대전 마지막에 있었던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의 경우, 스스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합니다.
물론 일제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죽음을 천황의 영광을 위해 산화해가는 벚꽃에 비유하여 미화합니다.
가미가제 자살특공대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복종'의 극단적인 사례이지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업화압력은 자본의 요구를 노동자의 욕망으로 내면화하게 합니다.
장시간 노동, 살인적인 노동강도,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등 자본이 요구하는 수많은 '복종'을,
죽음으로 수렴되는 실업의 고통은 노동자로 하여금 자발적 선택으로 '내면화'하게 합니다.
실업의 고통에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이제 자본의 요구(demand)는 노동자 자신의 욕망(desire)이 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 근면하게 하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노동을 강요당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계급사회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인민을 착취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착취와 억압은 지배계급의 '물리적인 폭력과 억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다수 인민들이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을 스스로 내면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복종의 내면화'가 의미하는 바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복종의 내면화'에 관하여, 이것과 다른 방식, 다른 사례가 있을 수 있을까요?
# 힘에의 의지와 복종의 내면화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힘을 표시하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 혹은 '창조적 충동으로서의 힘의 사용과 행사'로 정의했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스스로 힘을 발생시키고 그 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힘에의 의지를 발견합니다.
생명체는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에 명령을 내리며, 주변을 굴복시켜 자기 삶을 구성합니다.
니체는 ‘의지’를 ‘명령’과 동일하게 사용하는데, 그것은 힘의 방향이 그 힘이 마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어디에도 그것이 '복종 혹은 복종의 내면화'와 관련하고 있음을 찾기 힘듭니다.
니체는 5장 #199에서 복종본능의 내면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즉 '복종의 본능'이 어떻게 '명령의 형식'을 띠게 되는가(복종의 내면화), 그리고
복종이 극단화(내면화)되었을 때 독립적 인간은 사라지고 무리형 인간만 남는다는 거지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집단 역시 존재했으며, 소수의 명령하는 자에 비해 다수의 복종하는 자가 있었다.
복종이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잘 훈련ㆍ훈육되어 왔으며, 각 개인은 형식적 양심으로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욕구를 타고 났다.
명령의 욕구는 명령의 형식을 복종의 내용으로 채우고자 하며, 명령자(부모, 선생, 법률, 신분상 편견, 여론)의 말을 받아들인다.
복종본능이 극단까지 가는 경우 명령권자나 독립적인 인간은 없어지게 된다. 내면적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게 되며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 오늘날 유럽에서 무리의 인간은 유일하게 허용된 인간형이며, 자신을 온순하게 하고 협조적이게 하며 무리에 유용하게 하는 성질을,
인간적 덕목(공공심, 친절, 배려, 근면, 절제, 겸손, 관용, 동정)이라고 찬양한다."
니체는 5장 마지막 아포리즘을 통해 새로운 철학의 과제와 그것을 위한 미래의 인간을 제시합니다.
새로운 철학의 과제는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명령'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새로운 철학자와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명령하는 자'를 '주권적 개인' 혹은 '자기입법자'의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새로운 철학의 과제) 인간에게 인간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 것을,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 시도를 준비하는 것....
(미래의 인간) 이를 위해 언젠가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와 명령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