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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세미나후기]

팔랑 2012.12.03 08:30 조회 수 : 2800

우리의 하이데거는, 애증의 존재가 될 정도로 제게 가깝게 느껴지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호감남으로 등극합니다. 가끔 좀 깨긴 하지만.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독일어개념들, 하이데거식 어원론, 말장난은 완전 호감 ㅋㅋ

어찌되었건 혼자 읽으면 절대 못 읽었을 이 책을, 꾸준히 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 엄청 뿌듯합니다.

어차피 공부야 평생하는거니까, 조급하게 나의 '이해못하는 상태'를 몰아세우지 않아요ㅋㅋ

사실 이래저래 정신이 없고, 제 체력은 무릎이 귀를 넘는 노옹의 그것인지라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많아요(읽긴 읽으나 저퀄 리딩. )

그런데 제가 책을 읽을 때 주로 "대충 그런갑다" 고 넘어가는 타입이라ㅋㅋㅋ추상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는게 습관화되어있다보니

뭘 아는 것도 전혀 아닌데 별 궁금한 것도 없는 그런..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일까 왜 이런 말을 여기서 했을까를 궁금해하고 꼼꼼히 분석하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럽기도 하고, 촉발도 많이 받는답니다.

그게, 아무리 바빠도 <존재와 시간>을 다시 펴게하는 동력이 되구요. 

제가 <존재와 시간>을 집중적으로 읽는 시간이 일요일 오전이다보니 세미나에 오면 이미 지쳐있을 때가 많아서 때론 눈을 감고 있기도 하고

(졸고 있지 않아요. 눈만 감고 있는거에요ㅋㅋㅋ) 아는 것도 궁금한 것도 별로 없다보니ㅋㅋㅋㅋ 발언을 잘 안합니다만  

 

그래도,전- 나를 읽게 하는 이철교 세미나가 있어 참 든든합니다.

어제는 제 발제날이어서,(다행이 등산으로 2주가 있었기에) 텍스트를 세네번정도 읽을 수 있었는데,

확실히 여러번 읽으니 어렴풋이 이해되는 듯한 느낌은 좀 더 생기더라구요. 읽은 것을 글로 써내야 할 때 역시 소화가 잘 되나 봐요. 

다행히 제가 맡은 부분이 앞의 내용들에 비해 쉽기도 했고.      

 

아아. 그리고 우리 이철교 학인분들이 하이데거개념으로 드립치는 거 너무 좋아요 ㅋㅋㅋ

그런 드립에 같이 웃을 수 있는 공동세계가 형성되는 것도 좋고, 경직된 개념들을 일상으로 끌어들여서 살리는 것도 좋고. //

 

아무튼

길잡이 한샘님이 발제자는 발제문이랑 같이 후기 올리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ㅋㅋㅋㅋ 투척하고 갑니다.

담주에 보아요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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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이철교

<존재와 시간> 33-38절 발제

 

해석의 파생양태인 발언: 함께 나누며 규정하는 제시

그리스어 초온 로곤 에콘”. ‘말할 능력을 갖춘 생명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로곤즉 로고스였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때 이성으로 번역 되었던 것은 이 발언Aussage” 의 관점에서 파악되었기 때문이었다. 진리에 문제에서 일차적이고 본래적인 자리로 통해온 발언은 이제 하이데거를 통해 다른 방면에서 드러난다. 그는 이해와 해석을 구성하는 으로서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변양 가능한지를 발언에서 제시한다.

우선 발언이라는 명칭에는 세 가지 뜻을 부여할 수 있다. 

 발언은 일차적으로 제시Aufzeigung를 의미한다. 이는 아포판시스로서의 로고스의 근원적 의미, 존재자를 그것 자체에서부터 보도록 함과 일맥상통한다. , 발언은 서술과 같은 뜻이다. “주어에 대해서 하나의 술어발언된다.” 전자가 후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 이는 우리의 시야를 망치 그 자체에 한정시키며 규정성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으로 발언은 함께 나눔[전달]Mitteilen, 밖으로 말함을 의미한다. 발언의 세 가지 뜻은 함께 작동한다. , 발언은 함께 나누며[전달하며] 규정하는 제시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발언해석이라는 본체에서 갈려 나와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발언은 필연적으로 해석 일반과 마찬가지로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에 실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언과 해석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발언은 특정한 실존론적-존재론적 변양을 거쳐서 해석에서부터 발원한다. 하이데거는 둘러보는 해석과의 비교를 통해 앞서 언급한 발언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준다. 해석의 으로서구조는 사용사태 전체의 가능성에서 한 가능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손안의 것, 즉 도구를 배려하며 둘러보는 시선을 갖는다. 반면 발언의 서술적 으로서에서 존재자는 발언의 대상”, 눈 앞의 것이 된다. 예컨대 내가 샤프로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샤프를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서 샤프 그 자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샤프심 구멍이 막혀 심이 나오지 않을 때, 내가 샤프 고장난 듯ㅠ라고 말을 한다고 해보자. 이 때 나의 발언은 샤프를 이제 도구가 아닌 사물로서, “그것 자체에서제시한다. 여기서 샤프는 고장이라는 규정성에서 서술되며, 우리는 이때 샤프를 그 규정성에서, 고장난 샤프로 보게 된다. 또한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샤프 빌려줄까?” 라던지 샤프심으로 뚫어라던지 반응을 할 텐데(설혹 침묵하더라도, 이 역시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발언이 함께 나눔을 가능케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샤프를 고장 난 물건으로 보게끔 했음을 드러낸다.

배려하는 이해 속에 완전히 잠겨 있는 해석눈앞의 것에 대한 이론적인 발언이라는 두 극단적 경우 중 서술적 으로서의 현상은 로고스의 구조에 대한 인식의 진전에서 눈에 띄게 된 양식이다. 철학적 고찰에서 로고스 자체가 하나의 존재자이며 고대 존재론의 방향 정립에 따라서 일종의 눈앞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시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발언은 결합이자 분리라는 점을 지적했으나 그 이상의 분석적 물음을 더 밀고 나가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질문한다. “어떤 현상이 로고스의 구조 안에서 모든 발언을 결합과 분리로 특징짓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요구하고 있는가?” 여기서 현상적으로 적중시켜야 했던 것은 바로 어떤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는 현상이었다. “으로서의 현상이 은폐되고, 무엇보다 그것이 해석학적 으로서에서 실존론적으로 유래함이 은닉된 채 남아 있기에, 로고스의 분석을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학적 단초는 피상적인 판단이론으로 와해된다. 로고스에 대한 존재론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해석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는 고대 존재론이 성장해온 방법론적인 토대가 근원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고대 존재론에서 로고스는 눈 앞의 것으로서 경험되고, 그러한 것으로서 해석되며, 마찬가지로 로고스가 제시하는 존재자도 눈앞에 있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존재의 의미는 다른 존재가능성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거기에-있음과 말. 언어: 초온 로곤 에콘은 발견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거기에의 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구성하고 있는 기초적 실존범주는 처해 있음과 이해이다. 이해는 자체 안에 해석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해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가능성이다.

이 절에서 하이데거는 말함의 현상이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라는 실존론적 구성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주제적으로 분석한다. 그에게 ,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는 언어Sprache(말이 밖으로 말해져 있음) 보다도 말Rede 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말은 인간 현존재가 세계-내에-존재하는 존재방식의 하나로서 만나는 존재자를 그의 세계의 의미전체성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어떤 것으로 말 건네 취하며 남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을 의미한다.(p.584) 하이데거가 이 그 안에 고유한 세계적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기할 만하다. 현존재에게 내던져져 있음이 본질적인 것처럼, 언어에도 내던져져 있음은 본질적이다.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실존론적 구성틀로서 말은 현존재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다. 말이란 세계--존재의 처해 있는 이해가능성을 의미부여에 맞추어 분류하는 것이다. 말의 구조에는 말의 거기에 대해서(대상)’, 말해진 것 그 자체(발언), 함께 나눔과 자기 표명이 있다.

 말하는 이야기함에는 그 이해가능성과 관련되어 들음침묵함이 포함된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했을 때, “이해하지못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들음은 말함을 구성한다. 듣는다는 것은 현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 대해서 본래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그가 이해하기에 듣는다. ,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들을 수 없다. (통상 우리가 영어가 안 들려!” 라고 말 할 때, 이는 그 음향의 감지나 음성의 지각의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러한 실존론적으로 일차적인 들을 수 있음을 근거로 귀를 기울임Horchen과 같은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소리를 우선 듣는다는 사실은 세계--존재로서의 현존재가 그때마다 각기 이미 세계내부의 손안의 것 곁에 머물러 있음에 대한 현상적 증거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현존재로서 우선 이해한 것 곁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우선 듣는 것은 음성화를 통해서 밖으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재미있게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 중 한 분은, 말을 할 때 ..…” 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안 들렸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그 교수님이 잔여적인 음성을 삼 초에 한 번 꼴로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구어를 기록했을 때 사람들이 당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모든 음성을 똑같은 강도로 듣지 않으며, 소리 그 자체를 듣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만이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침묵하는 자가 더 본래적으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1]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듯이, 공기가 없음으로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듯이, 침묵은 때로 말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시적 언어는 그래서, 이러한 침묵의 공백을 백분 활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의 본질을 초온 로곤 에콘이라고 규정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말하는 존재자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에게 소리를 발성할 가능성이 고유하게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세계와 현존재 자신을 발견Entdecken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 ‘거기에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빠져있음

그런데 현존재는 우선 대개 그들에게 몰입하고 그들에 의해서 지배되어 있다. ,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현존재는 내던져져 있는 세계--존재로서 우선은 바로 그들의 공공성 속으로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세계--존재가 일상적 세계--존재로서 그들의 존재양식 안에 머물고 있는 한에서 이 세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실존론적 성격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그들에게 고유한 특수한 처해 있음, 특별한 이해, 말함과 해석이 있는가?

 말함”, “”, “해석이라는 열어놓음Erschlossenheit그들의 경우에는 각각 잡담”, “호기심”, “애매성이라는 일상적인 존재 양식을 갖게 된다. “빠져 있음잡담호기심그리고 애매함의 존재 성격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일상성의 존재의 근본양식이다.

 

잡담Gerede : Things are said (by people).

잡담Gerede은 일상적 현존재인 그들이 하는 말이다. 여기서의 말은, Ge-rede로서 이미 말해진 것, 즉 완료된 상태로 눈 앞에 있는 무엇이다. 사람들은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에 따라서 함께 나누어진 말을 이해한다. 여기서 사람들의 관심은 그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된 것 그 자체(발언)만을 눈 앞의 것으로서 이해한다. 여기서의 말함은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에 대한 일차적인 존재연관을 잃어버렸거나 획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말함은 그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식으로 함께 나누지 못하고 그저 퍼뜨려 말하고 뒤따라 말하는 방법으로 나눌 뿐이다. 영어문장을 수동태로 만들 때, 우리는 행위자가 너무 뻔할 경우 by+행위자를 생략한다. 이 때 생략되는 행위자는 they, people, person, one 등처럼 같이 소위 말하는 그들das Man’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생략은, 평균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다. 평균적인 이해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인터넷상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많은 말들은 이 ‘they say’ 의 방식으로 유포된다. 누구든 긁어 모을 수 있는 잡담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로부터 면해준다. 여기서 행위자는 너무 쉽게 괄호 쳐진다. 말이 잡담이 될 경우, 잡담은 세계--존재를 분류된 이해 안에 열어놓기는커녕 오히려 닫아버리고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를 은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유비적인 사례로, 한국말의  안다는 표현이 일생생활에서 쓰이는 양태는 이러한 잡담의 성질을 잘 보여준다. “그거 알아?”로 시작되는 그들의 말’, 잡담은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믿으며 입 밖으로 나온다. “쟤 네 친구야?”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이야.” 와 같은 대화에서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잘 모르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라는 완료형은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하기에 그 이상의 이해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이렇게 잡담은 그것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의 지반으로 소급해가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못하게 한다.  특징지은 방식으로 닫아버리고 있는 잡담은 뿌리 뽑힌 현존재 이해의 존재 양식이다. 허나 이 뿌리뽑힘을 현존재의 비존재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외려 뿌리가 있기 때문에 뿌리 뽑힐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이 뿌리뽑힘은 현존재의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끈질긴 실재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평균적 해석되어 있음의 자명성과 자기 확신 속에서, 이 둥둥 떠 있음의 섬뜩함은 현존재 자신에게 은닉된 채 남아있다.

 

호기심Neugier: 멂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안의 있음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현존재의 밝힘이라고 명명한다. 이 밝힘 안에서 존재에 이르기

 위한 이 가능해진다.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Augenlust’ 이라고 말할 만큼, 인식함에서 은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존재와 시간> 에서 예로 들고 있는 들어보다’, ‘맛을 보다는 물론이고 해보다’, ‘볼 일 보다등의 한국말 언어사용에서 드러나듯(독일어에서 sehen동사는 영어의 see와 비슷한 방식으로 발화된다), “은 세계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가장 일차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앞서 세계--존재가 우선 배려되는 세계에 몰두해 있고, 배려는 손안의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것의 발견되어 있음에서 보존하는 둘러Umsicht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음을 보았다. 는 거리없앰, 즉 멂을 멀게함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호기심Neu-gier은 새로운 것Neu에 대한 욕망Gier으로, 멂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즉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nur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이 때 세계는 겉모양Aussehen 에서만 보이게 된다. 호기심의 세 가지 본질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 그리고 무정주성.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잡담은 호기심의 방향도 규제한다. 즉 잠담은 사람들이 읽었어야 하는 것, 았어야 하는 것을 말해준다. 네이버 검색랭킹을 클릭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런 것이다. 말의 일상적 존재양식이 잡담이었다면, 봄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호기심인 것이다. 닫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호기심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잡담은 그렇게 존재하는 현존재에게 추정상의 진정한 살아있는 삶을 보장한다.       

 

애매함 Zweideutigkeit: 이해 Verständnis 아닌 오해 Missverständnis를 만드는 애매함

일상의 현존재는 사람들(그들)’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타인들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이 내가 스스로 이해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어렵다. 무엇인가의 이해에 대해서 그것의 명백함Eindeutigkeit를 결정하기 힘듦을 애매성Zweideutigkeit”라고 한다. ‘그들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애매함은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 애매함은 일종의 메트릭스처럼 공공적으로 은폐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빠져 있음과 내던져져 있음

앞서 살펴본 잡담,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이라는 성격들이 드러내주는 일상성의 존재의 근본양식을 현존재의 빠져있음Verfallenheit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현존재는 빠져있는 현존재로서 이미 자기 자신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가 그의 존재에 속하는 세계에 빠져있다.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잡담과 애매함은 본래적인 처해 있는 이해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완전하고 진정한 을 이끌고 있다는 그들의 억측이 모든 것은 최상의 상태에 있고 모든 문은 열려 있다는 안정을 현존재 안으로 끌고 온다.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 은폐된다. 빠져 있는 세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이며 동시에 소외적이다. 이는 현존재가 스스로 자기 자신 속에 붙잡혀있게 만들어 자기 자신의 가능성들을 그것의 전체성 속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유혹, 안정, 소외 그리고 붙잡힘(갇힘) 등의 현상들은 빠져 있음의 특수한 존재양식을 성격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현존재 자신의 존재 속에서 이러한 현존재의 움직여 있음Bewegtheit”을 추락 이라고 이름한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자기 자신 속으로, 즉 비본래적 일상성의 무지반성Bodenlosigkeit과 무성Nichtigkeit 으로 추락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락이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 의해서 현존재에게는 은폐된 채로 있어서, 도리어 추락이 상승이나 구체적 삶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빠져있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비록 비본래성의 양태에서이기는 해도, 다름 아닌 바로 그 세계--존재-가능이라는 점이다. 현존재가 빠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에게 이해하며 처해 있는 세계--존재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빠져 있음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낸다.

  



[1] 우리,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라고 그가 서먹할 만큼 진지하게 말했다.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헤르만 헤세, <데미안>

실존주의자 헤르만 헤세의 소설 에서 싱클레어가 감화받는 데미안은 말을 별로 하지 않음에도(침묵함에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인간으로 형상화된다. 하이데거가 시를 짓는말의 고유한 목표를 실존을 열어 밝히는 것으로 삼았던 것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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