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 <창비시선>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중에서
11.17일 토요일 강의 처음에 이상이님이 청아한 목소리로 읽어주셨습니다. 히히
녹음된 파일은 수유너머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으니, 받아가시길 바랍니다. 후기는 좀 나중에 ;;; ㅋㅋㅋ
상이님의 목소리가 청아한 것은 아니었지요. 팩트는 살아있다. 녹음파일에도!
약간 졸리운, 그리고 약간 귀찮은 듯한 목소리죠, 그게 상이님의 매력인 걸요.
모든 목소리는 아름답다. 청아하든, 거칠든, 졸립든, 낮든 높든.... 모든 목소리는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