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에서 인상 깊었던 것 몇가지 간략히 적어보겠습니다.
시대에 따라 사회적 분업과 작업장 분업은 그 셩격이 다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형태들에서 사회적 분업과 작업장 분업이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에서 맺는 관계와 정반대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사회적 분업의 조직과 관련해서는 강력한 권위가 행사되는 데 반해 작업장 분업의 조직에서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고 우연적이며 산발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형태의 분업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였을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몰락한 현실 공산주의는 결국 ‘국가자본주의’였다.
손(manus) + 만들다(Factus) = 매뉴팩쳐(수공업)
’메뉴팩쳐’ 하면 바로 공장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와 대규모 생산이 떠올려진다. 그러나 아니다. 손을 뜻하는 라틴어 마누스(manus)와 만들다(factus)가 함쳐진 말. 즉 매뉴팩쳐란 ‘손으로 만들기’ 우리말로 옮기면 ‘수공업’ 정도가 된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매뉴팩처 분업이 가능해졌다
매뉴팩처는 분업을 기초로 한 협업이다
공동체에서는 단순협업이 이루어진다. 단순협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게 아니다. 사용가치의 양과 질 향상을 위해 분업을 하는 것이고,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리듬이 중요하다. 그러나 매뉴팩처 분업은 교환가치가 중요하고, 생산의 증대 즉 돈을 더 버는 게 중요해진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적 분업(매뉴팩쳐 분업)이 자연발생적 분업이 점차 발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매뉴팩처 분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한다. 분업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그 성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적 존재 & 유적 능력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포이어바흐가 언급했던 유적존재. 마르크스 초기작에서도 언급되는 유적존재.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적존재의 개념을 포기하고, 자본론에서는 인간의 유적능력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사실 인간이 유적존재/유적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면적 존재 일면적 능력만 가진 부분노동자(불구화/장애화)가 됨으로써 노동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체감상 그런 것 보다는 가처분의 시간이 늘어나야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전인격적인 노동이란 가능한가? 전인격적 노동을 하면 안 피곤한가? 글쎄다. 결국 노동시간이 줄어들어야 한다. 즉 동물의 시간으로 처해지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 인간은 행복해진다. ‘먹고/싸고/놀고’가 중요하다. 진정 동물이 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기계의 도래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여서 아무리 닥달해도 자본가의 통제에서 빠져나가는 부분이 생긴다. ‘’재수없게도” 살아있는 인간인 것이다’(고병권샘의 재미있는 표현) 그래서 자본가는 화가 난다. 말을 잘 안 들으니까. 매뉴팩처 분업 단계에서 자본가는 1)노동의 전과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1)숙련노동자들의 저항이 있다. 3)노동자의 절대복종이 불가하다. 그래서 다음권(8권)에서 기계제 대공업은 전격적인 기계의 도입으로 시작할거라고 한다. 기계는 생산수단으로써 노동도구가 복잡하게 발전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매뉴팩처의 전 생산과정을 담는, ‘생산 메커니즘’을 다 담아내는 그 무엇이다. 기계의 모델은 생산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이제는 노동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기계가 인간을 부리게 된다. 기계가 주체다. 인간은 이제 소모되는 하나의 대상물이 된다. 기계는 말이 없고 생명이 아니고 절대복종한다. 자본가는 기계를 도입하면서 노동의 외적/내적 모든 과정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전통적 노동가치설을 비판한다. 어떻게?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했다. 그리고 추상노동 개념을 생각해냈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추상화된 노동. 노동의 가치대로 자본가와 노동자는 공평히 시장에서 사고 팔았다. 그러나 나중에 웃는 사람은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무두질을 기다리는 소껍질마냥 등이 굽어 있다. 왜 그런가? 노동자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노동의 가치대로 지불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후불제니까) 일을 시작했지만, 노동의 가치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게 ‘살아있는’ 노동의 신비한 힘이다. 따라서 여기서 노동력의 가치가 나온다. 노동의 가치(월급으로 형상화 된다)와 노동력의 가치(잉여가치를 낳는 노다지로 형상화 할 수 있다)는 이렇게나 다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전통적인 노동가치설을 넘어서게 된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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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소리
이번 세미나의 내용을 잘 정리하셨군요!
특히 유적 존재에 관한 점은 저도 더 공부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어쩌면 전인격적인 노동이라고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 있는지는 저도 의문이 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흔히 이상화하죠!)
노동이라는 것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분명히 고되고 힘든 부분이 없지 않겠지요. 좀 과장된 것이지만, 우리가 다시 하루종일 농사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힘든 일이겠지요.(피곤해서 놀 수나 있으려나요?) 다만 소외를 극복한다는 관점에서는, 분명히 더 나은 노동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것은, 유택의 후기에 대한 [북클럽자본]의 응답 같은 것.... 입니다! ^.^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형태의 분업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였을까."
[북클럽자본 8권] "마르크스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고발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속에서 '현재를 넘어서는 것'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는 사람이죠. 물론 그것을 낙관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점에선 이 끔찍한 현재가, 그가 기대하는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낮을 수 있지요. 시간이 한없이 걸릴 수도 있고요. 마르크스는 그런 걸 점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현재에 들어와 있는 미래의 흔적을, 그 조짐을 찾을 뿐입니다."
······> 맑스를 따라 우리도 이 흔적, 이 조짐을 찾고 있나요? ㅎㅎ
"진정 동물이 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북클럽자본 5권 3장] "자본주의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자질을 발휘해 노동할 때(*합목적성), 동물보다 못하다는 것을 느낀며(*소외), 오히려 동물로 돌아갈 때 행복을 느낀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 기능들(먹는 일ㆍ마시는 일ㆍ생식하는 일 등, 기껏해야 자신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가까스로 자신이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느끼고, [노동과 같은]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 되고, 인간적인 것인 동물적인 것이 된다.” 노동자들은 일할 때는 짐승이 된 기분이 들고, 먹고 마실 때만 사람답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합목적적 노동의 인간만의 자질이고, 먹고 마시는 건 짐승들도 하는 건데!
······> '노동자가 동물로 돌아갔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 소외'의 결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