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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자본_에세이] Lese drama: 인생은 미.완.성.

사이 2022.08.18 19:11 조회 수 : 282

에세이. 레제드라마(Lese drama)  2022.8.14. 사이

인생은 미.완.성

 

미생 웹툰.jpg

 

#1. [원퍼블리셔] 근처 곱창집

 

오상식과 장그래가 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오상식과 장그래는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기울이고 있다.

 

오상식 – 미안하다, 약속 못 지켜서...

장그래 – 괜찮습니다. 팀장님 잘못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원퍼블리셔가 바둑판이라고 하면 저는 바둑에서 진 겁니다. 단 한 집도 못 내고 진 셈입니다.

오상식 – 그건 너무 과한 해석 같은데...

장그래 – 석달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겠구나. 계가를 할 필요도 없겠구나.’ 이 안에서 돌을 둘 때마다 ‘사활문제’를 푸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집을 냈다 싶었는데 결국 한 집 밖에 못 내고... 매번 그랬습니다. 다음 수를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안 보이고... 결국 죽는구나. 사면초가였습니다. 돌을 두기도 전에 초나라 노래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느낌? 나갈 데도 도망갈 데도 없다. 귀퉁이 바닥이라도 돌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이미 백돌에 단단하게 막혔습니다. 온 사방에 백돌이 만리장성을 쌓은 형국! 상대방은 이미 다음 수, 그 다음 수, 다음다음 수까지 이미 다 막아놓은 것 같았습니다.

오상식 – 장그래!

장그래 – 상대방은 이미 바둑판 안에 있던 사람이고, 저는 바둑판 밖에서 기어 들어오는 도전자에 불과했습니다. 상대방은 시스템을 은근슬쩍 자신한테 유리하게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죠. 저는 이미 저한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던 겁니다.

오상식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냐?

장그래 –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근데 처음부터 감은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원퍼블리셔에 입사한 첫날, 그분의 눈빛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상식 – 어떤...?

장그래 – 이 바둑의 끝을 알고 있다는 느낌?

오상식 –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소주잔을 들이킨다.)

장그래 – 팀장님,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약속은 팀장님이 어차피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팀장님한테 그런 약속을 받아놓으려고 했던 제가 정말 순진했습니다.

오상식 – 아니야. 내 잘못이다. 적어도 우리팀에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장그래 – 바둑에서는 귀퉁이 한쪽만 산다고, 한쪽 변만 내가 다 먹는다고 이기는 게 아닙니다. 중앙과 나머지를 상대방이 다 먹어서 나보다 집을 많이 내면 내가 지는 거죠. 흑돌인 기획3팀이 한쪽 귀퉁이에서 집을 내도 나머지가 모두 백돌의 집이면, 백돌이 우세한 겁니다. 어차피 지는 싸움이었습니다.

오상식 – 할 말이 없다. (사이) 근데, 그래야, 천과장 미워하지는 마라!

장그래 – 천과장님은 천과장님의 바둑을 둔 겁니다. 제가 천과장님이 아는 바둑의 룰을 지키지 않은 것뿐이었죠. 바둑의 새로운 정석은 고루한 상식이 아니라 파격에서 생겨납니다. 어떤 기사가 창안해 낸 파격적인 전술이 실리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할 때, 그것은 더 이상 파격이 아니라 정석이 됩니다. 천과장님은 자신의 정석을 지켰을 뿐입니다. 저는 파격이었지만, 천과장님 눈에는 그저 객기에 불과했을 겁니다. 한 급, 한 급씩 올라가고, 한 단, 한 단씩 올라가는 게 바둑인데, 왜 아마추어가 프로로 바로 가려고 하나? 내가 명문대 나와서,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달고 과장 달고 그래서 겨우 익힌 정석인데... 너는 고졸 주제에...

오상식 – 이번 판은, 원퍼블이란 바둑판에서는 니가 졌을지 모르지만, 니 인생이라는 바둑은 아직 안 끝났다.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이제 니 바둑을 둬라?

장그래 – 제 바둑요? 제 바둑이 뭘까요?

오상식 – 니가 둘 수 있는 바둑.

장그래 – 제가 둘 수 있는 바둑요? 이 나라에서 고졸인 제가 둘 수 있는 바둑은 뻔해요. 비정규직이라는 바둑. 알바라는 바둑. 종잣돈이 있으면 자영업이라도 하겠지만...

오상식 –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인턴 때 보여줬던 그 기풍은 어디 갔냐? 그때는 조훈현보다, 이세돌보다 당당했는데... 인생이 바둑이라면 내 바둑은 이미 중반을 넘었지만, 넌 아직 초반이잖아. 바둑을 안 둘 거냐?

장그래 – 팀장님, 바둑 둘 줄 아시나요?

오상식 – 조금.

장그래 - 바둑에서는 두 집을 못 내면 죽잖아요. 두 집을 못 내면 ‘미생’이라고 하죠. 아직 살지 못했다는 뜻인데요. 제 삶이 미생 같아요. 처음 입사해서 원퍼블에서 제가 기획한 책들이 잘 팔릴 때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살아 있구나’ 싶었죠. 근데 저는 어차피 죽을 돌을 두고 있던 거였어요. 원퍼블에서 고졸사원의 끝은 뻔하죠. ‘나는 어차피 죽을 돌이었구나. 아직 그냥 목숨만 붙어있는 거구나.’

오상식 – 야 임마! 그럼 나도 미생이야. 이 나이에 만년과장인 나는 뭐, 완생이냐? 내 끝도 뻔해. 회사에서 임원이 된다고 행복할 줄 아냐?

장그래 – 그래도 팀장님하고 저는 다르지 않습니까?

오상식 – 정규직이 되는 것만이 바둑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다. 바둑은 수만 가지의 수가 통용되는 우주다. 바둑판은 원퍼블에만 깔 수 있는 게 아니다. 니가 이길 수 있는 바둑판을 니 스스로 깔아라!

장그래 – 바둑판을 깔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저 같은 놈은 깔아놓은 반상에 끼워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죠. 저는... 불계패를 선언하겠습니다. 계가까지 갈 필요도 없죠. 어차피 질 건데요. 돌을 던지겠습니다. 돌을...

 

장그래가 갑자기 털썩 상 위에쓰러진다. 오상식이 깜짝 놀라서 장그래를 깨운다.

 

#2. [동막꼼 공동주택] 회복실 

 

장그래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눈을 뜬다. 장그래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본다. 그러다가 침대 맡에 있는 마라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장그래 – (한껏 놀란 목소리로) 누구세요?

마라클 – 겁먹지 마세요. 잡아 먹지는 않으니까. 저는 그래 씨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에요.

장그래 – 도와줘요?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근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죠?

마라클 – 그래 씨 소지품을 보고 알았어요.

장그래 – 제 소지품을요? 왜 남의 물건을, 내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뒤지는 겁니까?

마라클 – 그래 씨를 돕기 위해서 한 일이에요. 그래 씨 물건은 (옷장을 가리키며) 저기 저 옷장에 다 있어요.

장그래 –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근데 여기가 어디죠?

마라클 – 여기는 ‘동막꼼’이라고 해요. ‘동쪽의 막스 꼬뮨(Marx Commune)’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에요.

장그래 – 뭐요? 동막… 동막골?

마라클 – 아뇨. 동막꼼! 꼼꼼하다 할 때 꼼! 저는 동막꼼 환대팀의 총괄을 맡고 있는 환대 코디네이터 ‘마라클’이라고 해요.

장그래 – 그건 그렇고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마라클 – 그래 씨는 전에 살던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이행(移行)’하셨어요. 영어로는 ‘Transition’이라고 할까요?

장그래 – 이행?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러니까 제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요?

마라클 – 이것저것 다 이야기하면 복잡하니,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어찌 되었건 그래 씨는 여기로 왔고, 여기는 그래 씨가 전에 살던 세상이랑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장그래 – 그럼 제가 죽은 건가요? 여기가 저승인가요? (혼잣말로) 천국인가? 지옥인가?

마라클 –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장그래 – 그럼 제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마라클 – 돌아가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정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나요?

장그래 – 당연하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저보고 여기서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마라클 – 알겠어요. 그 얘기는 천천히 하죠. 몸 상태가 매우 안 좋으시던데 일단 좀 푹 쉬세요. 여기‘건강 매니저’가 시키시는 대로 잘 드시고 잘 쉬세요. 건강 매니저는 그래 씨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몸 상태가 좋아지시면 제가 다시 찾아오죠.

장그래 – 저기요. 잠깐만요. 어디 가세요? 그냥 그렇게 가면 어쩝니까?

 

마라클이 조용히 회복실을 빠져나간다. 장그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마라클의 모습을 쳐다본다.

 

#3. [동막꼼 프로젝트 탐방센터] 상담실

 

작은 상담실 안. 한가운데 책상이 있고 오상식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곧 예니가 들어와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오상식과 마주 앉는다.

 

예 니 – 안녕하세요? 성함이 장그래 씨 맞으시죠?

장그래 – 예.

예 니 – 저는 여기서 ‘일 매니저’를 맡고 있는 예니라고 해요. 여기서는 일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 일 매니저를 붙여드려요. 이제 막 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는지 안내하고 새로운 일을 할 때까지 도와드리죠.

장그래 – 아, 그렇군요. 그럼 여기서도 일을 해야 하나요?

예 니 – 그건 자기가 하기 나름이에요. 일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죠.

장그래 – 일을 안 해도 된다고요? 그럼 어떻게 먹고 사나요?

예 니 – 무슨 말씀이시죠?

장그래 – 일을 안 하면 생활비는 어떻게 버나요?

예 니 – 생활비라뇨?

장그래 –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요.

예 니 – 아, ‘돈’이요! 이방세계(異邦世界. 줄여서 이방異邦)에서 오신 분들 중에 가끔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 ‘화폐’라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장그래 – 뭐, 그렇죠.

예 니 – 동막꼼에서는 돈이 필요 없어요.

장그래 – 돈이 필요 없어요? 그럼 생필품은 어디서 구하죠?

예 니 – 여기서는 물건을 사거나 그런 일은 없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배분소에 가서 가져오시면 돼요. 배분소에 없는 건 배분위원회에 말씀하시면 위원회에서 알아서 드릴 거예요. 자세한 건 ‘배분 매니저’한테 물어보세요. 아니면 필요한 건 직접 만드셔도 돼요. 옷이나 생활용품, 가구… 집도 지으실 수도 있어요.

장그래 – 배분 매니저요? 여기는 별의별 매니저가 다 있네요. 그리고 직접 만든다고요? 필요한 걸요? 저는 한 번도 그런 걸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만들라고……. 암튼, 여기서는 제 상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일이 많네요. 일을 안 해도 되면 일 매니저는 왜 필요한 거죠?

예 니 – 그래 씨가 일을 안 하고 쉬고 싶거나 놀고 싶으시면 계속 그러셔도 돼요. 이방(異邦)에서 오신 분들 중에 여기 오자마자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은 정말 계속 놀기만 하기도 하세요. 2년 정도까지 그러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근데, 좀 지나면 스스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여기 찾아오세요.

장그래 – 정말요?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는 있는데, 일하고 싶다고 제 발로 찾아온다고요?

예 니 – 예. 암튼 저는 일 매니저이니까 그래 씨가 여기서 일을 하고 싶으시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드릴게요. 일단 당분간 저하고 동막꼼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그 기간을 ‘탐방기간’이라고 해요.

장그래 – 그 탐방기간이라는 것이 몇 개월 과정인가요?

예 니 – 몇 개월 과정요? 아! 그 기간이 정해져 있나는 거죠?

장그래 – 예.

예 니 – 아니에요. 탐방을 하시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시면 그 일을 하실 수도 있고요. 그냥 탐방을 그만하시고 싶으시면 저한테 얘기하시고 그만두셔도 돼요.

장그래 – 여기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런 게 참 많네요.

예 니 –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가 있나요? (들고 있던 얇은 책자를 그래에게 건네준다.) 저기, 이거 좀 보시고 작성해주실래요?

장그래 – (책자를 받아들어 본다) 이게 뭔가요?

예 니 – 이건 ‘작업 선호도 체크 워크북’이라고 하는데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흥미를 느끼거나 주도성을 가지는지 따위를 체크해보면서 알아가는 워크북이에요. 급하게 쓰실 필요는 없고요. 다 쓰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다음에 뵐게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장그래 – (얼떨결에) 예.

 

예니가 상담실에서 나간다. 장그래는 고개를 갸우둥하면서 워크북을 신기한 듯 펼쳐본다.

 

놀이(PLAY)
깊게 빠져들어 몰입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어떤 놀이를 할 때 그런 경험을 했나요?
 
내가 보는 나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 5개를 골라보아요.
왜 그 단어를 선택했나요?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보아요.
 
타인이 보는 나
주변 사람 3~5명에게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5개를 골라달라고 해보아요.
왜 그 단어를 선택했나요?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보아요.
내가 하고싶은 일을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 동기와 영향력은 무엇인가요?
 
인생관
좋은 삶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내가 원하는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롤 모델이나 부럽다고 느낀 사람이 있나요? 어떤 점이 부러웠나요?
100세로 삶을 마감하는 당신은 현재의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요?
당신을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비명에 무엇이라 기록되면 좋을까요?
 
직업관
좋은 일은 어떤 것인가요?
무엇을 위해 일하나요? 경험, 성장, 성취와 어떤 관계인가요?
병원에 누워있는 당신에게 의사는 말합니다. “당신은 정확히 3년 후에 죽게 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3년을 지금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요?
직업관과 인생관은 일치하나요?
원하는 인생을 살면서, 의미있게 생각하는 직업관을 충족시킬 수 있나요?
현재에도 즐거우면서 도움이 되고, 미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잘하나요?
타인에게 칭찬받았던 경험
성취했던 경험
‘나라면~’ 경험 (예: “왜 계획을 짜지 않지? 나라면, 세세한 틀은 못잡아도 큰 틀은 잡을텐데)
 

 

#4. [만년의 상상 출판사] 회의실

 

한창기가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니가 장그래를 데리고 가다가 한창기를 보고 손을 흔든다. 한창기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예니와 장그래가 한창기에게 다가간다.

 

예 니 – (장그래 가리키며) 여기는 새로 오신 장그래 씨라고 해요. 출판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셔서 여기로 모시고 왔어요.

한창기 – 예. (오상식을 보며) 안녕하세요?

장그래 –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안녕하세요.

한창기 – 저는 이 프로젝트에서 ‘환대 매니저’를 맡은 한창기입니다. 저는 새로 오신 분들한테 이 프로젝트를 안내해드리고 어떻게 프로젝트에 함께 하실 수 있는지 알려드리는 일을 합니다.

예 니 – 그래 씨, 이제부터는 한창기 씨가 안내해주실 거예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장그래 – 예.

 

예니가 한창기과 오상식에게 인사를 나누고 왔던 길로 돌아간다.

 

한창기 – 이 프로젝트에 대해 궁금하신 건 저한테 뭐든지 물어보세요.

상 식 – (멋쩍어 하며) 아, 예. 근데 프로젝트라니요? 이게 프로젝트인가요? 책은 계속해서 찍는 거 아닌가요?

한창기 –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책은 계속해서 내죠. 근데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도 있어요. 여기서 책을 내는 것은 프로젝트로 진행해요. 책을 내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동막꼼에서는 모든 일들이 프로젝트로 진행돼죠. 그때그때 필요한 일에 따라 프로젝트를 만들어요. 프로젝트마다 지원자를 받아서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식이에요.

장그래 – 그럼 책을 내는 건 그때그때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참여하는 사람이 바뀐다, 그 말인가요?

한창기 – 예. 맞아요.

장그래 – 그럼 이 출판사는 누구 소유인가요?

한창기 – 출판사는 공동체의 소유입니다. 출판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출판사의 건물과 시설 따위를 빌려 쓰는 거죠. 출판에 필요한 모든 네트워크와 인프라는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죠. 출판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런 기반을 빌려 쓰는 거고요.

장그래 – 오너가 따로 없다는 말인가요?

한창기 – 모두 다 오너죠. 프로젝트를 할 때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이 모두 오너에요.

장그래 – 그럼 프로젝트를 할 때는 일하는 사람마다 직급도 없나요?

한창기 – 직급이요? 뭘 말하는 거죠?

장그래 – 과장, 차장, 부장, 이사... 뭐 이렇게 부르는 거 있잖아요.

한창기 – 여기는 그런 건 없고 각자가 맡은 역할은 있죠. 기획자, 작가, 편집자, 편집디자이너, 인쇄 담당자 뭐....

장그래 – 여기서 하는 일들은 들어도 들어도 신기하기만 하네요. 여기서 일하려면 수습기간이 있나요?

한창기 – 그런 건 따로 없어요. 한 일주일 정도 프로젝트를 함께 해보시다가 계속 할지 안 할지 결정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시면 더 쓰셔도 되고요.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일을 하기 전에 교육을 좀 받아야되겠다 싶으시면‘교육 매니저’에게 신청하세요. 그럼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장그래 – 그건 꼭 들어야 하는 거죠?

한창기 – 아니요. 안 듣고 싶으면 안 들으셔도 돼요. 그냥 해보면서 익히는 분들도 있으니까.

장그래 –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한창기 – 출퇴근이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얘기네요. 그 얘기 하시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저도 선생님이 살았던 곳에서 왔으니까요. 그때 출퇴근을 어떻게 했나 싶어요. 암튼, 여기서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그날그날 각자가 나오기로 약속한 때에 나오면 돼요. 그날 하기로 한 작업을 하고 작업이 다 끝나면 쉬면 돼요. 다른 작업을 더 하고 싶으면 더 하는 건 자유이고요.

장그래 – 그래요? 그럼 작업감독은 누가 하죠?

한창기 – 그런 것도 없어요. 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죠.

장그래 – 그렇게 해도 일이 돌아가나요? 누가 농땡이 치고 작업을 빵구내면요?

한창기 – 그런 건 회의 때 얘기를 하죠. 그 전에 멤버 가운데 누가 먼저 그 사람에게 가서 확인을 해요. 왜 그 작업이 진행이 안 되었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 사람한테 사정이 있었는지 뭐 이런 것부터 확인을 하죠.

장그래 – 빵구낸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한창기 – 아이고, 거짓말도 한 두 번이죠. 계속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다 알게 돼 있어요. 여기서는 신뢰가 중요한데, 멤버들한테 신뢰를 잃은 사람은 여기서 일하기 어려워요.

장그래 – 근로계약서는 언제 쓰죠?

한창기 – 근로계약서요? 그런 건 없고요. 그냥 프로젝트 기간에 이팀에서 정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서약서’같은 것만 쓰시면 돼요.

장그래 – 제가 출판쪽 일을 좀 하기는 했지만, 경력도 얼마 안 되고, 고졸인데요. 저도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요?

한창기 – 그래 씨, 아직도 그쪽 물이 안 빠졌군요. 여기는 정규직, 비정규직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프로젝트를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죠.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이 있고 안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장그래 – 제가 여기서 실적을 못 내면 이 프로젝트에서 빠져야 하나요?

한창기 – 아니요. 아니요. 절대 그럴 거 없어요.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요. 사람마다 다 능력이 다르잖아요. 누구는 기획을 잘 하고, 누구는 편집을 잘하고……. 일하다 보면 확실히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긴 하죠. 그분들이 일을 많이 해내면 고맙기는 하죠. 그렇다고 일을 잘 못한다고 여기서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아요. 어떤 작업이 그 사람한테 안 맞는 것 같으면 다른 작업으로 바꿔서 해도 되고요. 여기는 일을 잘하고 못하고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어요. 나 좋자고 일하는 건데, 누구 눈치 볼 필요가 뭐 있나요? (한쪽을 가리킨다.) 저기 보세요. 저기 저 휠체어에 앉아서 일하시는 분 보이시나요?

장그래 – 예.

한창기 – 저분은 베테랑이세요. 저분은 저렇게 휠체어 높이에 맞춘 베드 위에서 작물을 키우세요. 여기서 나오는 밭작물 중에 최고로 좋은 건 다 저분이 키우신 거예요. 노지에서 키운 작물보다 생산량은 확실히 적긴 하지만 품질이 워낙 좋아요. 그래서 특별히 저분이 키운 작물만 찾는 분들도 많아요.

장그래 – 그렇군요. (사이) 근데… 휴가는 어떻게 쓰죠?

한창기 – 아, 그런 것도 따로 없어요. 그냥 그래 씨가 하기로 한 작업만 알아서 하시고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 써도 돼요.

장그래 – 좀 길게 쉬고 싶으면요?

한창기 – 그것도 회의 때 이야기를 해서 멤버들이 동의해주면 그냥 그 기간에는 쉬면 돼요.

장그래 – 너무 오래 쉬면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지 않나요?

한창기 – 여기는 한두 사람 빠진다고 안 굴러가고 그러지 않아요. 그럼 아무도 쉬고 싶을 때 못 쉬죠. 누가 빠지더라도 그 빈자리는 다 채울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는 자기가 잘하는 작업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웬만하면 모든 작업과정을 다 해보고 겪어봐요. 그럼 잘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다 커버할 수 있죠.

장그래 – 근데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여기서는 돈도 필요없다고 하는데, 그럼 책은 왜 만드는 건가요? 어차피 팔 것도 아닌데...

한창기 – 사람들이 필요로 하니까요.

장그래 – 필요하다는 말은 수요가 있다는 말인가요?

한창기 – 예. 그렇죠.

장그래 – 그럼 수요 파악을 위해서 시장조사를 하나요?

한창기 – 우리는 그걸 시장조사라고 하지 않고 ‘수요 조사’라고 해요. 중앙출판위원회에서 공동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시로 ‘수요 조사’를 해요. 쉽게 말하면 공동체 사람들이 이런 책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면 그 의견을 수집하는 거죠. 출판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들은 그 수요조사에 나온 것 중에서 아이템을 얻어서 출판할 책을 기획하는 거고요.

장그래 – 그렇군요.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식이네요. 그럼 공동체 사람들이 만들어달라고 한 책이 아니면 책을 만들 수 없나요?

한창기 – 웬만하면 수요조사 결과에서 아이템을 얻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수요조사하고 상관없이 책을 만들 수는 있어요. 다만 책을 만들 때 공동체에서 정한 중요한 규칙만 지킨다면요. 그 규칙은 공동체에 필요한 책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원칙만 지키면 어떤 책이든 중앙출판위원회의 허가를 받으면 만들 수 있어요.

장그래 – 출판한 책은 어떻게 유통이 되나요?

한창기 – 출판한 책은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마을책방으로 보내요.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도 있고, 소장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마을책방에 가서 소장용 책을 가져가죠. 집에 있던 책 중에 더 안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다시 마을책방에 가져다 놓죠.

장그래 – 우리가 만든 책을 사람들이 얼마나 읽었는지 알 수 있나요?

한창기 – 예. 도서관이든, 마을책방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그 책을 찾아보았는지는 다 카운트가 돼요. 중앙출판위원회에 그 숫자가 집계가 되죠.

장그래 – 사람들이 어떤 책을 많이 읽어주면 그 책을 만든 사람들한테는 보상이 있나요?

한창기 – 많이 읽어주는 거, 그것 자체가 보상이죠.

장그래 – 예.

한창기 – 이상하시죠? 저도 처음엔 다 이상했어요.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하고. 살아보니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어요. 그나저나 여기 오셨으니 이제 출판사 건물도 둘러보실까요? 둘러보시면서 요즘은 어떤 출판 프로젝트가 있는지도 알려드릴게요.

장그래 – 예. 그러죠 뭐.

 

한창기가 이끄는 대로 오상식이 따라간다.

 

#5. [동막꼼 공동주택] 상담실

 

오상식과 마라클이 테이블을 앞에 놓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라클 – 출판일, 해보니까 어떠셨나요? 근데 왜 하필 출판일이었나요? 출판일이야 저쪽 세상에 있을 때도 지겹도록 한 거 아닌가요?

장그래 – 그래도 제가 바둑 그만두고 일이라고 해본 게 그것 밖에 없어서요. 갈 데가 거기 밖에 없었지만 일을 하면서 솔직히 재미가 있더라고요. 거기서는 실패했지만 다시 잘 해보고 싶었어요.

마라클 – 그렇군요. 다시 해보니 그때하고 다른 게 있었나요?

장그래 – 출판일 할 때, 제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어요. 근데 여기서는 책을 만드는 전과정을 볼 수 있더군요. 여기서는 기획, 섭외, 편집, 디자인, 인쇄, 출고... 있잖아요. 인쇄소도 여기서 처음 가봤어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받아보니 정말 감개무량했어요.

마라클 – 몸도 성치 않았는데, 힘드시지는 않았어요?

장그래 – 몸은 힘들죠. 근데 마음은 펄펄 나는 거예요. 일을 하는 동안 흥이 절로 난다고 할까요? 힘드니까 이만치만 하자 하다가도 더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다 몸살이 낫죠. 흐흐. 그러니까 멤버들이 전부 저보고 이제 제발 좀 쉬라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며칠 좀 쉬웠어요. 며칠 쉬는데도 공동작업실에 가보고 싶어서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한지. 그래도 쉬는 김에 여행도 다녀왔어요.

마라클 – 어디로 여행 갔다 오셨어요?

장그래 – 다른 지역의 출판 프로젝트와 협동조합들을 둘러봤어요.

마라클 – 좋은 관광지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거기를…?

장그래 – 출판일을 더 잘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곳은 어떻게 하나 배워보고 싶어서…….

마라클 – 과로사하기 직전까지 가셨던 분이, 고생을 사서 하시네요.

장그래 – 제가요? 과로사할 뻔 했다구요?

마라클 – 예. 여기 처음 왔을 때 상태가 그랬어요. 번 아웃(Burn Out)! 몸이 얼마나 일에 시달렸는지, 딱 죽기 직전이었어요.

장그래 – 그랬군요. 여기 오기 전에 그냥 술집에서 잠든 기억은 나는데…….

마라클 – 여기서 이제 뭐 더 해보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프로젝트라든가 여가생활이라든가.

장그래 – 하고 싶은 건 많죠. ‘막스의 <자본> 입문서’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보통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를요. 여기는 자본 해설서나 입문서가 수천수만 종이 되는 거 같은데요. 근데 대부분 경제학자들이 쓴 책이지 철학자가 쓴 책은 없더라고요. 저는 <자본>을 철학적으로 접근해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저자를 물색해봤는데 고병권이라는 분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분이라면 내가 원하는 책을 써줄 수 있겠다. 책의 분량이 워낙 방대할 것 같아서 저는 책을 잘게 나눌까 해요. 총 12권짜리의 세트로 내려고요. 출판 프로젝트 때 함께 했던 멤버들한테 이 기획이 어떠냐 물어보니 제가 하면 같이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마라클 – 일 하는 거 안 지겨우세요? 일만 할 건가요?

장그래 – 아뇨. 일이야 되는대로 하면 되는 거고. 책도 좀 많이 읽고 싶어요. 책읽기 동아리를 하나 만들어볼까 해요. 한 주에 한 권씩, 2년 동안 104권의 책을 읽는 모임이요. 책 이야기도 하고 공부가 끝나면 뒷풀이도 하고요. 제가 돼지수육에 막걸리 한잔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수육에 막걸리 한 사발! 흐흐. 동아리 이름도 미리 지어봤어요. <수육 너머 104>

마라클 – 일주일에 책 한 권요? 아서요. 책 읽다 죽겠네요.

장그래 – 책 읽다 죽기야 하겠어요. 책 읽는 것도 힘들면 좀 쉬었다 하면 되지 뭐.

마라클 – 그새 많이 변하셨네요. 혹시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장그래 – 예? 거기로 다시 가라고요? 어휴…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네요. 거기서 어떻게 살아요? 거기는 생지옥이에요. 아비규환(阿鼻叫喚)! 저는 여기가 천국이에요.

마라클 – 가족이나 친구분들은 다 거기 계시잖아요.

장그래 – 그렇긴 하죠. 가끔식 어머님 생각도 나고 그러더라고요. 여기 있는 게 너무 좋긴 한데…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님, 친구들 다 여기로 데려오고 싶어요.

마라클 – 이방에서 오신 분들은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아참, 제가 드릴 선물이 있어요.

장그래 – 뭐요?

마라클 – (그래에게 작은 책갈피를 건네준다.) 이거 책갈피에요. 요즘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 하셔서 준비해봤어요. 여기 적혀 있는 것이 ‘동막꼼’의 슬로건이에요.

 

장그래는 마라클이 준 책갈피를 받고 책갈피에 적힌 글씨를 눈으로 읽는다.

 

마라클 –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혁명 같은 큰일도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에요.

장그래 – 아하! 정말 좋은 말이네요. 선물 감사합니다.

마라클 – 공부 열심히 하세요. 요즘은 정말 딴 사람 같군요. 처음 오셨을 때는 곧 죽을 사람 같았는데……. 마치 좀비 같이…….

장그래 – 좀비요? 하하하. 제가 좀비 같기는 했겠죠. 하하하.

 

#6. 장그래의 방

 

장그래가 요 위에 누워 있다가 슬며시 눈을 뜬다. 장그래가 주위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장그래 – (머리를 감싸쥔다.) 아, 머리 아파. 뭐야? 여기는... 내 방이잖아. 그럼(생각을 한참 하다가) 에이, 된장. 좋다 말았네.

한석율 –  장그래, 오늘 저녁에 볼까? 한 잔 해야지. 백기 씨, 영이 씨도 올 거지?

안영이 – 당근, 가야죠. 오늘은 제가 쏠게요.

장백기 – 저는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꼭 갈게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쏩니다!

한석율 – 그래, 동기 사랑이 나라사랑이지. 장그래 올 거지?

장그래 – 콜! 대신 술 말고 밥 먹고 차 마시는 걸로!

안영이 – 예. 저도 콜!

장백기 – 저도...

힌석율 – 나도 콜! 오늘은 장그래 때문에 모이는 거니까 장그래 맘대로!

 

장그래가 일어나서 책상에 앉는다. 곧이어 공책을 꺼내서 한참을 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쓴다. 장그래가 자신이 쓴 글을 보며 혼자서 엷게 미소를 짓는다.

 

#7. [미생출판] 사무실

 

오상식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장그래는 오상식의 의식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오상식이 갑자기 눈을 뜬다. 장그래가 깜짝 놀라서 ‘오차장님!’하고 부른다. 오상식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오상식이 일어나려고 하자 장그래가 부축해서 의자에 앉힌다.

 

한석율 – 와, 처음 와보네. 여기가 죽은 사람도 팍팍 살아난다는, 파크, 파크, 서울혁신파크 맞아?

안영이 – 예. 죽은 사람은 못 살려도 한석율 씨같은 좀비 회사원은 살려줄 수 있겠죠.

한석율 – 뭐야? 그럼 내가 좀비야?

안영이 – 석율 씨, 솔직히 [원퍼블]에 다니고 싶어 다니나요? 다니기 싫은 회사 다니면 좀비죠 뭐.

한석율 – 역시, 안영이! 아니, 개그맨 안영미인가. 말로는 이길 수가 없네. 안영이 씨 자리는 어디야?

안영이 – 여기요.

한석율 – 그럼 우리 장그래 사장님 자리는...?

장그래 – 여깁니다. 그런데 사장은...? 저는 그냥 대표에요. 그것도 직함만!

한석율 – 아이고, 이렇게 사무실 차리고 상근직원 하나 두면 그게 사장님이지...

장그래 – 자꾸 왜 그러세요. 우리 다 파트너잖아요. 그러다가 안영이 씨한테 또 욕먹으려고...

한석율 – 미안. 전부 미안. 내가 그래도 오늘 선물을 가져왔잖아. 짜잔! 우리 삼촌이 중국에서 공수해온 술!

장백기 – 이렇게 보니까 [미생출판]이 회사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사무실도 생기고, 상근자도 두게 되고... 그 전에는 그냥 프로젝트 같았는데...

안영이 – 프로젝트는 프로젝트죠. 아직도 출판은 프로젝트로 돌아가니까.

장그래 – 이게 다 우리 동기들 덕분이죠. 이 구조는 영이 씨하고 백기 씨가 구상했던 거고, 석율 씨가 발로 뛰어서 번 돈으로 자본금을 쌓은 거잖아요.

한석율 – 그런 의미에서 축하나 하자고. 서두가 너무 기네. 일단 앉자, 앉자.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나?

장백기– [미생출판] 서울혁신파크 입주 개소식?

안영이 – 우리가 도원결의한지 3년 되는 날이기도 하죠.

한석율 – 다, 딩동땡, 땡! 땡입니다. 오늘은 바로 장그래 사장님, 아니 대표님, 아니 장그래 작가님이 내신 책 <불량회사>가 전자책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날입니다. 밤빠밤빠빠빰.

안영이 – 석율 씨, 정말 정보 빠르네요.

한석율 – 내가 생색정보통 아니겠어. 그래서 제가 자체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불량회사> 저자 사인회! 여기 장그래 저자의 친필 사인을 받고자 종이책 <불량회사>를 가져왔습니다. 이거 다 제 지인들이 받아달라고 한 겁니다. 작가님!

장그래 – 쑥스럽게... 이게 다 백기 씨 기획에, 영이 씨 광고에, 석율 씨 영업 덕분이죠.

한석율 – 이제 뭐 할 건데..

장그래 – 출판분야는 안영이 씨한테 일임하고 저는 새로운 사업을 맡아볼까 해요.

한석율 – 새로운 사업? 뭐?

장그래 – 사회적경제 분야 컨설팅요.

한석율 –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사회적협동조합? 그게 돈이 되나? 난 반댈세!

안영이 – 이게 얼마나 유망분야인데요. 거기에다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니까... [미생출판]도 협동조합이니까 사회적경제 덕에 사는 거잖아요.

한석율 – 사회적, 사회적 하니까 무슨 사회주의 같잖아. 나는 사회의 사자도 싫어. 꼰대들 밑에서 일하기 싫어서 [미생출판]에 끼어든 거지만, 회사에서 주는 돈만 받고 싶지 않아서 이 일 하는 거라고. 나도 오카네가 좀 많이 들어와야지.

안영이 – 석율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속물이네요.

한석율 – 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도 장백기 흉내 한번 내봤어. 장그래가 무슨 이야기하면 항상 장백기가 반대하잖아. 장씨끼리 무슨 라이벌 의식 있나?

장백기 – 뭘요. 제가 언제요?

한석율 – 왜 발끈해? 찔리는 거 있구나.

장백기 – 아니요.

장그래 – 그만하세요. 그래도 장백기 씨같이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사람도 필요하죠. 그런 균형감각이 있어야 조직이 오래 가는 거고요.

한석율 – 그건 그런데. 우리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거 너무 피곤하지 않아? 우리가 화백도 아니고...

안영이 –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결은 폭력일 수 있다.”누차 얘기했던 거잖아요. 저는 만장일치제 때문에 불편한 건 없어요. 내가 반대하면 정말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니까 아주 신중해지죠. 한 사람의 반대가 그만큼 무게감을 가지는 거죠.

한석율 – 알겠어. 그냥 해본 말이야. 이제 사무실도 생기고 자리도 남는 거 같은데 나도 상근으로 끼워주면 안 되나?

장백기 – 그건 제가 반대합니다. 이제 막 2년치 고정비 지출만큼 자본금이 겨우 쌓였는데, 아직은 무리에요.

한석율 – 아이쿠, 우리 백기가 이렇게 똑똑해요. 엘리트 아니랄까 봐. 너 학교 다닐 때 교복도 엘리트 교복으로 입었지? 다들 왜 이렇게 심각해? 그냥 분위기 좀 풀려고 해본 말이야. 왜 이래? 나 [원퍼블]에서 나가고 싶어도 원퍼블에서 나 안 놔줘.

안영이 – 말은 바로 하세요. 갈 데가 아직 없으니까 안 가는 거지.

장그래 – 이제 농담은 그만하고 올해 <미생야락> 행사 얘기 좀 해보죠. 이번에는 백기 씨가 총괄하기로 했는데, 아이디어가 좀 있나요?

장백기 – 그동안 ‘출판과 협동조합’,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을 주제로 했으니 이번에도 한 축은 협동조합인데... 다른 축은 뭘로 할까 생각해봤는데요. ‘청년과 협동조합’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안영이 – 오호, 구미가 당기네요.

장백기 – 영이 씨가 진단한 것처럼 지금 세상은 바둑으로 치면 ‘끝내기에 돌입한 형국’같아요. 먼저 바둑을 둔 기성세대들이 어차피 지을 집은 다 짓고, 나눠 가질 건 다 가지고, 지금 같은 끝내기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청년들이잖아요. 평생직장도 없고, 평생직업도 없고, 기댈 곳도 없고... 협동조합 같은 대안이 필요한 건 누구보다 청년들 아닐까요?

장그래 – 역시, 백기 씨의 분석력이란! 굉장히 시의적절한 주제인 거 같네요. 그리고 여기 서울혁신파크에 청년들도 많으니 네트워크로 진행하기도 좋겠네요.

장백기 – 그러고보니, 축하할 일이 또 있군요.

한석율 – 또 뭐, 뭐가 있는데?

장백기 – 안영이 씨가 기획한 <끝내기 세상에서 일하는 미생들을 위한 안내서>도 오늘 전자책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어요. 지금 추세라면 곧 1위도 달성할 것 같네요.

한석율 – 우와, 영이! 이름이 영이(02)라서 2위를 했나. 암튼 축하해요.

안영이 – (석율을 보며) 썰렁해요. (사이) 백기 씨, 고마워요. 나도 몰랐는데... 기획은 제가 했지만 이 책도 다같이 한 거잖아요. 저도 이제 상근자가 됐으니 출판분야에서 책 내는 거 말고도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요.

장백기 – 다른 일이라면...?

안영이 – 출판 관련 라운드테이블을 해보면 어떨까 해요. 기간은 6주 정도로 하고요. 출판계는 20년째 불황이라는데, 지금도 90년대 성공모델과 크게 달라진 게 없잖아요. 작은 출판사들을 한데 모아 지속가능한 출판모델을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작은 출판사들의 지속가능성은 출판의 다양성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요. 작은 출판사들은 대부분 책을 소개할 곳이 없어요. 이런 출판사들을 묶어서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독자와 계속해서 만나는 채널을 만들면 어떨까요? 이 행사를 기점으로 작은 출판사들의 연합 모델을 실험해보려고요. 이 연합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장백기 – 작은 출판사들의 협동조합이라... 나쁘지는 않는데, 출판사들의 마음을 어떻게 잘 모으느냐가 중요하겠네요. 출판사들끼리 갈등이 심해지면 그게 리스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안영이 – 연합하는 회사가 많아질수록 갈등의 여지는 커질 수는 있겠죠. [미생출판] 멤버들이야 워낙 일반적인 공동체하고 분위기가 달랐으니까 큰 갈등 없이 왔지만...

장백기 – 우리는 어떤 점이 일반적인 공동체하고 분위기가 달랐다는 거죠?

안영이 – 개인의 욕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저는 그게 맞는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개인이 자발적으로 즐거움을 찾아야 일하면서도 재미가 있으니까. 우리 멤버들이 대체로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성향이에요.

한석율 – 거기에 나는 끼지 말아줘. 나는 E야. 당신들이 다 I지.

장그래 – 제가 봤을 때 한석율 님도 알고 보면 내향적인 사람 맞아요.

한석율 – 그런가. 그래 대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사이) 그나저나 우리가 같이 한지 벌써 3년이나 됐네. 각자 200만원씩 내서 돈 떨어질 때까지 우리가 만들고 싶은 책 만들어보자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근데 안영이 씨는 이거 왜 같이 하기로 했어? [원퍼블]에서 우리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대리 달고, 우리보다 잘 나갔잖아.

안영이 – 여자가 [원퍼블] 같은 큰 회사에서 승진 빨리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요? 어차피 결혼하고 애까지 낳을 생각이면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뻔한데...

한석율 – 그런데 말야. 왜 우리는 굳이 출판업을 같이 한 거지? 책 만드는 거야 [원퍼블]에서 토할만큼 많이 해봤고, 다른 일을 해봐도 좋았잖아.

장백기 – 저는 인문학 전공으로 제일 돈 많이 벌 수 있는 게 출판 같아서 원퍼블에 들어가긴 했지만요. 어릴 때부터 사실 책을 좋아했어요. 근데, 회사에서는 ‘너 이거 몇 쇄 찍을 수 있어?’라는 말 한마디에 기획안을 접어야 하잖아요. 우리끼리 재밌게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한석율 – 오호. 다들 대단하시네. 나야 뭐 원퍼블 꼰대들한테 벗어나는 게 일차 목표였는데...

장그래 – 저는 뭐 원퍼블에서 두 번이나 나왔는데요.

한석율 – 그나저나 장대표님, 다음 목표는 뭡니까?

장그래 – ‘버티기’입니다.

한석율 – 버티기? 확장이 아니라?

장그래 – 예. 버티기요. 현재 상태로 1년 동안 계속할 수 있느냐가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척도라고 생각해요. 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면에서도요.

한석율 – 나도 빨리 [미생출판] 상근자가 되고 싶어. 그럼 빨리빨리 사업을 확장해야지. 돈도 더 많이 벌고.

장그래 – 물론 살아남으려면 돈도 많이 벌어야지요. 재미로 시작하긴 했지만 영이 씨나 석율 씨처럼 이제는 본업으로 하려는 사람도 많아졌고요. 그럼 책도 잘 팔아야지요. 근데요.

한석율 – 근데, 뭐? 왜 그래, 불안하게...

장그래 – [미생출판]의 지속가능성은 방점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둬야 할 것 같아요. 미래가 아니라 바로 현재를 지탱할 힘이 있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각자의 상황을 조율하면서 오래 함께 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편이 아닐까.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 보다, 어떻게 해야 잘 버티냐를 함께 고민해야 불안하지 않겠죠? 지금이 ‘끝내기 세상’이라면 끝내기의 징후는 ‘불안감’이에요. 돈이 많을수록 불안감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루한 일상이 쳇바퀴처럼 반복될 뿐이죠. 그럴 때 일과 직장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불안감을 없애려면 적게 벌어도 굶지 않고 잘 사는 다양한 삶의 유형들이 나와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공유해야죠.

한석율 – 철학자 나셨네, 철학자 나셨어. 잘 들었습니다. 테스 형, 막스 형이라고 해야 하나?

장그래 – 바둑에서는 두 집을 못 내면 죽어요. 두 집을 못 낸 상태를 ‘미생’이라고 해요. 아직 살지 못했다는 뜻인데, 제 삶이 미생 같았어요. 고졸에 비정규직.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살아있는 것도 아닌. 원퍼블에서 두 번이나 나오게 됐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미생은 ‘아직까지만 살아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아직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다.’ 지금도 제가 미생 같아요. 근데 지금은 그때하고 해석이 달라요. 두 집을 확실히 내서 완생하면 좋겠지만, 미생이라고 살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아직 확실히 죽은 건 아니니까. 미생이라도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도 있으니까. 내가 미생이 되고 싶어서 미생이 된 건 아니지 않나. 이 사회시스템에서는 내가 미생이지만, 다른 배치 속에 들어가면 나도 두 집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전에는 비굴한 미생이었지만 지금은 당당한 미생으로 살고 싶어요.

안영이 – 제가 들어본 말 중에 제일 멋진 말이네요. 당당한 미생이라...!

장백기 – 그래 씨 말이 장밋빛 환상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장그래 – 한잔 하시죠.

한석율 – 이제 우리 비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니까 한잔 하자고. 건배사는 내가 할게. 다 잔 들어.

 

모두 잔을 든다.

 

한석율 – 미생이지만 완생과 성장을 위하여 – 미완성!

모두 – 미완성!

 

모두 웃으며 잔을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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