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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틈입 혹은 감성 기대기? ㅎ

우성수 2012.07.09 08:38 조회 수 : 2296

어제 세미나에서 감성적 교류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여자분들이 많아 더 배울게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포틀래치라고 부르긴 빈약합니다만 용기를 내어 봅니다. 공동체의 나눔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 병리적 현상이 저 아래 출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게다가 막상 유용할 것이 없으니 제가 다음주에 가져갈 깍두기등속보다 한참 못한 것이겠으나 저로서는 나름 정성들여 모으고 - 어떤면에서는 계속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버리고 - 있는 '조개껍질' 입니다. 여러분들의 조개껍질.. 여러주를 걸쳐 보여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조급증' 3기정도를 앓고 있는 관계로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주 멋지게들 보내시고 주말에 뵙겠습니다. ^^ 아래글은 6,7월 분입니다.


1.(7/4)
운동을 나가 강변을 뛸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10km를 뛴다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난 결국 5km안에 맴돈다. 집을 떠나면 온전히 10km를 갈 수 있는 것이다. 길이 곧 집이었던 그 모든 위대한 유목의 정신은 거기에서 나온다. 지구가 원형에 가깝다고 하나 방향만 잘 잡으면 돌아올 일이야 있겠는가? 어차피 길어야 한 이삼십년 남은 것이고 찬란한 화석연료문명의 산물과 결별을 고하고 두다리와 몸통으로 걷고 꿈틀거린다면 지구는 충분히 넓을 것이다.

까치의 비행은 일종의 도약과 같아 지상으로 돌아올 채비를 위해 두발이 드러나게 난다.  기류를 타며 글라이더식 비행을 하는 새들은 가슴깃속 깊숙히 발을 접어 넣는다. 남극까지 일년에 7만km를 여행하는 북극제비갈매기는 도약 후 비행하는 동안 자신의 발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내가 시급히 잊어야 할 것은 돌아갈 집이다. 잊어야 할 또 하나는 돌아가 만나고파 자꾸 뒤돌아 보게 만드는 '따스한 품'들이다. 

뒤돌아 보면 소금 기둥이 될 것이란 각오로 떠나야 할 것이다. 전전전생에 롯의 마누라로 소돔을 떠나올 때 소금기둥되어 얼마나 아팠니. 모랫바람 소금기둥 긁어대면 얼마나 간지러웠니. 굳어진 소금손으로 긁어댈 수 없어 차라리 부서지고 싶었던 그 때를 기억해!! 

2.(6/27) 
마늘을 수확하고..

마늘

작년 겨울 전부를 삼켜 여섯쪽으로 뭉쳤다. 
입안에 겨울바람 분다. 
맴맴..
우리 마눌도 나와 살아온 세월 추운 겨울이었나보다. 
맵다.

3.(6/27)
거인은 유리산의 정상에서 가져온 둥근돌을 유리공주의 말대로 정성들여 갈아냈다. 하루에 잠자리 날개만큼씩 갈아내기 위해 특별히 부드러운 유니콘의 배쪽 가죽을 사용했다. 

돋보기가 완성된 첫날 오른쪽 무릎위에 단단히 기둥을 박아넣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안녕..' 인사를 나누고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로의 상념에 젖어 상대를 잊을 지경이었다. 

거인은 그 오랜 시간동안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몸의 여기저기서 찌르르 찌리리 전해오던 확실한 슬픔이 그녀가 자신과 함께 하기위해 피땀흘려 굳은살 깊숙히 박아넣던 기둥들 이었으며 그로부터 너무나 무디게 세상을 짖밟던 자신의 삶을 섬세한 것으로 바꾼것, 악몽에 시달리던 매일밤의 맹렬한 잠을 달콤하고 안정적인 것으로 바꾼 것이 그녀의 자장가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목이 메였다. 드디어 그가 자신을 샅샅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와 늘 함께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사냥터에서 동물들에게 하던 단 한마디.. "미안해" 뿐이었다. 그 말이 그녀에게 하는 것만 같아 그녀는 늘 기쁘며 동시에 한없이 슬픔에 빠지곤 했다. 그녀에게 오고 있는 중이라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인 것 같아 하루의 고달픔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외로움이 그의 몸보다도 더 커지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안스러웠다. 가장 슬픈건 "괜찮아" 라고 대답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 거인의 눈이 붉어졌다.
그녀는 목이메어 눈물을 한방울 흘렸다. 
둘은 곧이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

다음날 거인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위해 세서미각(細書微刻)의 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행길 내내 그녀의 자장가는 더 밝고 아름답게 밤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의 여행은 그녀만큼 작아질 때까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4.(6/19)
마늘밭에 풀을 두어시간 메고 올라왔습니다. 오이소박이와 오리알 후라이와 된장찌게 어제 만든 카레와 아침을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아침 안개를 부수고 햇살이 벌써 눈부십니다. 산그늘이 남아있는 밭으로 피해다니며 김을 메러 나갑니다. 마지막 산그늘이 사라지면 땡볕을 맞으며 땀을 흘릴겁니다. 차가운 지하수로 흙과 땀을 씻고 맛있는 점심을 먹을 겁니다.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단정해지는 시골의 하루입니다. 길게 쓸 거리가 없는 삶이지만 향기롭습니다. 하루만에 눈이 밝아지지만 밝은 눈 쓸일도 없습니다. 풀뽑는 손에만 필요한 눈입니다. 깊이 보아내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삶을 뒤적거려 너덜거리게 했던 건 손이 비어서였나 봅니다. 흙을 쥐니 몸이 반가워 합니다. 오래전 떠나온 곳 이제 돌아갈 곳을 몸은 벌써 압니다.

5.(6/17)
사랑과 생활은 공존할 수 없는가? 사랑은 지나치게 어리석고 생활도 지나치게 어리석다. 현명한 자는 사랑도 생활도 피해갈 수 있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 놉스의 그것(그것이라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용서하시라)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자는 또 누구이겠는가? 

모든게 사랑이고 모든게 생활인데 우린 생활을 생활이라고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지겨워져 사랑과 생활을 나눈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한건 젊어선 사랑적 생활이 많고 나이 들어선 생활적 사랑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의외로 그 반대의 모습을 가진 경우도 많다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반복이 지겹지만 결국 생활과 사랑은 불가분의 것이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식었느니 따위의 뻔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집어 치우자. 언제 사랑을 끓인적이나 있었단 말이냐?

6. (6/10)
고백하건데..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요트를 배워 내 손으로 요트를 만들어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자유의지의 증명에 준할만한 자살을 한 얼마되지 않는 사람이라 지지하고 있는 쥘르르키에처럼 말이다. 

가끔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부득불 무리가 됨에도 불구하고 산의 정상을 오르고야 말게 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의지라는 것은 삶 그자체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한다. 우린 태어난 이상 살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걸 보면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은 그 의지를 누구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로 떠나는 시도 역시 뭍을 떠난 이상 죽음을 꼭 만날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하는 것이다. 

그런 내 욕망에 반하여 다 늙어 '공동체' '코뮌'이라니 ㅋㅋ 이건 마치 소설을 쓰며 드러나는 아이러니가 아니라 거꾸로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격이 아닌가? 변덕과 반대욕망 반대의 반대욕망.. 누가 망가진 자동인형 아니랠까봐 이재랄인가? 이래저래 피곤한 인생이다.. ㅜ

7.(6/10)
설혹 내가 한 십년 죽어라 공부를 해서 새로운 코뮌(commune), 탁월한 형태의 공동체에 대해 설계를 한다고해 그걸 가지고 다시 한 십년을 어데서 어찌어찌 시작했다고해 그러고 나면 난 그 코뮌의 양로원에 들어 앉아야 하는거 아닌가? ㅋㅋ 코뮌의 설계 단계에서 지나치게 노인 위주의 설계가 되는거 아닐까? ㅎㅎㅎ

사실 난 고등학교 2학년때 사진반원들 전체의 작품에 제목을 달아주고 그 작품을 축제를 보러온 타학교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구라'를 가르쳤었는데 (우리의 사진전은 전통적으로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여학생들을 꼬시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타 학교 사진반원들과의 설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는데 아트가 쾌락과 결합한 순수한 원형처럼 느껴지는 즐거운 추억이다. ㅋ) 한 노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에 '불필요 선'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노인이 공동체의 필요적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이차적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해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린 가장 생산적인 단계의 나이에서 조차 공동체에 의존하는 존재들임이 분명함을 알게 되었다. 떠남을 끝없이 생각하는 이 질기디 질긴 머무름의 강박이 나의 의존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아마도 난 코뮌의 설계에 노인의 위치를 가장 외부에 배치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그렇게도 떠나고 싶어한 이 지긋지긋한 공동체의 외각에서 곧 그들을 자유케할 죽음을 기다리기 적절한 자리에 말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그 노인들의 오랜 꿈으로 그 경계를 흐리게 될 것이니 어쩜 말캉말캉한 코뮌이 되는데 가장 딱딱한 노인의 관념을 껍질로 사용하는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벗겨내면 다시 가장 외각이 굳어지고 다시 저절로 껍질이 부서지는 이세상 유일하게 존재하는 금단의 열매처럼 말이다.

8.(6/8)
돈이 없는 세상이 불가능할게 없지않을까? 고려 성종 15년(996)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원중보배면동국이 최초의 돈이라고 하니 달랑 천년밖에 않되었다. 그나마도 특정계층에서 사용하였던 것이고 대부분의 민중들이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쓴 것이야 백년안짝일것이다. 돈의 사용이 유전자에 반영되었을리는 절대 없다. 

작은 단위의 공동체로 모두 찢어져야한다. 근대이전의 마을단위로 쪼개진 크기에 속한 개인들이 돈이 뭐하는데 필요하겠는가? 삶은 작아지고 다시 향기날 것이다.

불가능하다면 나 홀로 떠날 것이다.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 집사람에게 다 양도하고 홀로 떠날 것이다. 떠돌며 노동하며 노동을 팔 수 없으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밥을 얻어먹을 것이다. 도시에서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내 이야기는 그제서야 자라날 것이다. 점점 더 커지고 무성해져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게 하고 싶다. 그러다 대륙의 벽지에 한 소로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소박한 사람들은 웅성웅성 모여들어 전날밤 들려준 내 마지막 고목의 이야기를 쪼개 집집마다 가져가 땔감으로 하룻밤의 방구들을 덥힐 것이다. 그들의 온기를 떠올리며 죽어가고 싶다. 운이 좋다면 그들이 강이 보이고 남쪽 내 고향의 하늘이 아득히 보이는 언덕에 묻어줄지도 모른다.

9.(6/7)
긴시간 페친들의 글을 읽는다. 관심을 가지고 읽고 한두개의 긴글은 프린트를 해서 읽는다. 그럼에도 좀처럼 영혼이 서로를 스쳐 화끈거리게 하는 글은 드물다. 내 영혼의 각질때문이라면 상대편의 영혼은 피났겠다. 그럼 그전에 내 화끈거림은 그 영혼의 가시때문이었나? 내 이 영혼을 당장.. 근데 누구였더라? 너무나 많은 페친이란 더미속에 바늘처럼 숨어버린 그대여.. 당장 나오시옷! 오래전 먼 남도의 푸른 바닷물에 던져버렸던 내 갈빗대 두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붉고 퍼렁색의 지남철이 아숩다.. ㅜ

10.(6/6)
남편이 악담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다.
당신은 문학을 제대로 하기엔 용기가 부족하고
정치를 제대로 하기엔 비열하지가 못해.

비열한 건 좀 어렵지만, 용감한 건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노혜경 샘 담벼락에서..)

..................................................................................................

문학하기에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속에서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투쟁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기를 극복한 포착 불가능한 감정과잉의 상태가 용기라고 생각해왔다. 문학이 투쟁일까? 투쟁의 대상은 무었일까? 내가 제대로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 글쓰기는 유희적차원이다. 난 내가 안스럽고 날 깊이 사랑한다. 내가 가끔 마구잡이 쌈박질을 하곤하는 것은 늘 날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개싸움을 벌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뒤돌아보면 내 뒤에서 보호받고 있는 나란 놈의 태연자약이 역겨워지곤 했다. 내 가장 큰 적은 나였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내 투쟁의 대상은 나란? 당황스러운건 상투성이다. 게다가 나와 싸우는데 가장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날 세상에 버려두는 매정함이다.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던 습관의 포기일 뿐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일종의 관조다. 좀 더 어려운 쪽으론 초월!

11.(6/5)
보국문에서 정릉으로 하산하는데 솜털 보송보송한 커플한쌍이 땀을 흘리며 올라온다. 참 이쁘기도 해라. 눈마주치자 묻는다. 
"위에 뭐가 있어요?"
....
...
..

"일단 이코스로 오르시면 북한산성 성곽중 보국문이란 곳이 나오고요. 그곳 부터는 좌우로 능선길이 이어져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 예 수고하세요"

뭐가 있냐는 질문 후 잠깐 동안 난 너무난 많은 장면이 입쪽으로 쏟아져 내려와 어금니를 물어야했다. 내 땀과 하늘 지평선까지 이어진 풍경들.. 무었보다 멀리 북동쪽에서 불어오던 백운대 꼭대기의 바람맛.. 그리고 타는 목을 축여주던 물맛.. 노적봉 아래 한적한 바위에서 혼자 먹던 도시락맛까지.. 

말로 전할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둘은 비록 서로에게 끌리는 시선에 조금은 놓치겠지만 곧 그 하늘과 그 산의 바람들과 풍경들을 온몸으로 만날 것이니 말이다.

12.(6/5)
미국에 이어 그리스 스페인으로 번지는 세계경제를 보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재편을 꿈꾼다. 세상은 당장 국가의 보더라인을 거두어야 한다. 모든 경제는 로컬로 돌아가고 수십만개의 공동체의 지구로 바뀌어야 한다. 한마디로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 공동체는 이미 깔려 있는 망에 의지해 자신들의 문화적 윤리적 생활상을 공개하고 수십만개의 타 공동체의 조언에 열린 구조를 가져야 한다. 세상은 독특한 지역사회로 개편되고 지역사회는 자체적 경제기반으로만 유지되도록 바뀌어야한다. 교역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들끼리만으로 이루어져야함을 원칙으로 하되 약간의 예외를 둔다. 하지만 그 예외는 부를 축적하는 양을 제한받아야 하고 공동체원들의 최소한의 필수적 소비에 연동한다. 당연히 국가의 보더라인 해제만이 아니라 거대 기업들도 해체되어 지역의 공동체로 흡수시킨다. 각각의 공동체가 조직을 가지되 모든 조직은 주변의 공동체를 통해 감사되어야 하며 언제나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움직이는 공동체를 인정하되 그들이 교역에서 특수하게 부를 권력화하지 않도록 각각의 공동체의 지역을 통과하며 이루어지는 교역도 공개되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공동체는 사유재산의 최소화를 지향한다.. 동의 하십니까? ㅎ

13.(6/4)
연애

몸소 걸어 네게 갔었어
네가 내게 걸어 오지 않아 속상한적 없었어
열걸음 열심히 걸어 널 안을때마다 
다섯걸음 멀어지는 네게 쉬지도 않고 다시 걸었었어

사랑하기전 난 늘 네게 걸어 갔었구나..
게으른 사랑으로 주저앉기 전
동동거리고 콩닥이며 쉬지 않고 걸었었구나..

내 사랑에 취해 오랜 노숙으로 난 더러워졌다.
내 사랑에 너 빠져나가는지도 모르게 심하게 취했었다.
몇번의 금지로 네 부재를 알아차리고도
식은땀 흘리며 다시 사랑에 코박았다.
네가 남긴 냄새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젠 고백한다.
그 사랑은 나와 눈맞춘 것이었고
그 냄새는 오래된 내 체취였음을 알고 있었다고

네가 떠난 날이 이제 막 기억나
넌 날 두고 떠나던 날 
만취한 내가 꼬부라진 혀로 물었을때
넌 날 찾아 떠난다고 했었지

넌 날 찾아 어딘가를 걷고 있는거니?
나 이제 널 찾아 떠날 결심을 했어
낡은 지도와 망가진 나침반을 챙겼어
하지만 단단한 허벅지와 종아리로 일어섰어

이제라도 기억해내서 다행이야
밤새 쉬지않고 네게로 걸어 또 반나절을 걸어도
피곤하지 않던 그 시절이 기억났어

산모퉁이 돌아 걸어가고 있는 네 뒷모습이 금방 보일것만 같아
그 산을 돌아 네가 없어도 난 멈추지 않을테야
다시는 사랑으로 실패하지 않을테야
네게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거야
살아서 천리 죽어서 만리를 오직 너만을 향해 걸어 갈테야

아.. 저기..

14.(6/3)
불화의 씨앗은 기실 우리속에 이미 있던 것이다. 관계로 싹트고 사랑으로 꽃피우지만 늘 말라죽고 결국 더 많은 불화의 씨앗을 떨군다. 난 속아내고 싹트지 않게 조심한다. 내 사막엔 천만개의 씨앗이 말라비틀어져 있다. 놀라운건 말라비틀어진 이곳에서도 어느날 귀퉁이 한개 혹은 두개의 싹을 틔어 올린다는 것이다. 이번 싹은 그 붉디붉어 한없이 불안한 꽃을 따내 냉동시켜야겠다. 

음.. 그런데.. 사시꼬미가 어디?? ;;;;;

15.(6/3)
내 공격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아는 분들이 있고 공격을 받아 이리 저리 굴려 무디게 하시는 분들까지 있다. 챠~ 사람들이란 이렇게 넓디 넓구나.. 세상이 여전히 살아볼 만한 이유는 각각의 인생이 무릅을 치고 감탄할만한 그들이 차고 넘치는 이 지구적 삶의 거대한 공통분모가 맘만 먹으면 합일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라는, 아직 난 홀로 고립되지 않을 수 있다라는 환상을 웅성웅성 키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6.(6/2)
노혜경 시인이 당신 담벼락에 써놓으신 글중 '통속에 성공하다'라는 말이 가시처럼 걸린다. 당신이 통속하려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속'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 것이니 그것이 궁굼하며 째리게 되는 것이고 나로서는 여전히 통속에 진저리를 치는 것이 내게 묶인 재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민중시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시던 시인이며 평론가였던 김진경 선생님께선 양정 고등학교를 다닐때 2학년 국어 선생님 이셨다. 당시 대학을 갈 이유를 알기전엔 대학을 가기위한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건방을 떨며 부모님 속을 태웠던 난 수업시간에 소설이나 철학서를 읽곤 했는데 여자친구에게 선물받은 미우라아야꼬의 '빙점' 속편을 읽다가 선생님의 경고를 받았다. 경고를 무시하고 책을 읽다 재차 적발이 되어 책을 빼앗기고 종아리를 맞았다. 시퍼런 멍을 해가지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을 찾아갔다. 책을 찾는 것보다 책을 빼앗을때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억울해서였다. "이런 통속소설을.." 나에게 미우라아아꼬가 끝없이 탐구하고 있던 인간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구멍, 어둠으로 채워진 그 메울 수 없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는 통속이 아니었다. 통속이라면 난 기꺼이 통속이 되고 싶었다. 통속에 대해 따지러 갔었다. "이게 왜 통속소설입니까?" 대답대신 선생님께선 "공부를 많이해야한다. 오래 해야한다."라고만 하셨다.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잊지 않으셨다. 슬퍼보이는 눈이 크고 맑던 선생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 이후 난 고전만 읽었다. 모든 통속을 피해왔다. 고전은 삼십년 이상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였고 때론 수백년을 우렁차게 호령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숭배해왔다. 성과는 있었지만 댓가로 내 펜은 너무 무거워졌다. 난 톨스토이의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고민에 너무 깊이 매혹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 시대의 통속이었을 것이다. 난 이제 그들이 선물한 화려하고 무거운 펜을 다락에 올리고 모나미 볼펜을 들어야겠다. 이 시대의 통속에도 성공하지 못한 글더미를 그 누가 어디다 쓰겠는가? 김진경 선생님은 80년대 가장 깊이 민중과 통속한 것이리라. 이제 그들의 시는 잊혀졌지만 그 통속의 흔적과 통속을 피해오던 오래된 습관으로 내게 이리도 깊이 배여있으니 그는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김지하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도 통속이었던 것이다. 2012년의 민중은 몰려다니지 않는다. 한번의 통속으로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없다. 이젠 백만명의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 백만번의 통속이 필요하다. 매일매일 날 떠나야 할것인데 하루에 두번을 떠나도 성에 차지 않을 판에 난 한계절 내내 날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한심한 일이다.. ㅜ

(*오월시 동인은 1집에 김진경, 이영진, 박몽구, 나종영, 박주관, 곽재구가 참여한다. 2집에는 윤재철, 최두석, 나해철, 고광헌이 추가로 참여한다.)

17.(6/2)
짙은 동굴의 어둠속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자신의 눈을 제거해버린 동물.. 맨처음 동굴로 피신한 그 동물의 선조가 어둠속에 반짝이던 눈동자.. 반짝임조차 볼 수 없는 칠흙의 어둠속에서 그는 안도했을 것이다. 서서히 눈꺼플이 두터워져 아예 닫혀버리는 수백만년의 세월동안 그는 단 한순간도 빛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맨처음 동굴로 피해들어간 그들의 선조가 느끼던 빛의 세계에 대한 공포의 크기였을 것이다. 

지금 막 어둠속으로 사라지려하는 당신! 잠깐! 뒤돌아 보아요.. 잠깐의 동굴탐사일 뿐이라고 말해줘요.. 당신이 어둠으로 떠나면 난 여기서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우리 눈감고 원한다면 안대를 쓰고 서로의 몸을 더듬어 보아요. 가상 동굴에서 가상의 도피를 위해 제 몸을 기꺼이 당신께 드릴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빛을 참아 보아요.. 

그는 나와의 삼박사일동안 수천개의 촉수를 만들어 기어이 어둠으로 떠났다.. 난 그가 떨구고 간 촉수 한두개를 만지작 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난 어둠속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었지만 떠나지 못하고 있다. 눈때문이다. 눈은 너무나 오래된 내 습관이기 때문이다. 망설임이란 눈의 속성이다.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리고 있는 이 세상의 수수께기는 떨치기 힘든 중독. 하지만 그가 떠난 그 순수한 어둠의 세계는 이면이 없고 상징이 없다. 당분간은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가짜란게 드러나면, 눈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면 나도 그를 따라갈 것이다. 어둠속에서 눈이 사라진게 아니다. 눈이 필요없어 어둠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내게 아직 눈이 필요한 것은 당신때문이다. 당신에 대한 사랑이 채 식지 않았다. 자기야.. 이리와 내게 안대를 해줘..

18.(6/1)
흔들린다 생각되면, 생각말고 흔들려라라고 스님이 말했다. 
술고프다 생각되어, 생각없이 마셔왔다. 
스님이 말했다.
술고픈게 너인가 너의 생각인가?

온전한 내가 있나요.. 술고픈게 술이 있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어 그런것이죠.. 술 안마신다고 또 온전한 내가 되나요? 그때도 여전히 술이 있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을 뿐이죠.. 다만 술이 내게 들어오기 전일 뿐.. 완전히 끊는 것이란 없다고 하죠.. 그 禁止의 시간이 시험받고 깨질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이 그만큼 충분히 살지 못하기 때문인거죠.. 


불교는 현대에 유용한 여러가지 논리를 가지고 있다. 지구가 육체의 세상이 된 이후 욕망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요즈음엔 정말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왜 불교는 자신들조차 지키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는가? 그것은 작금의 '욕망'이 불교가 포착하고 있는 '욕망'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적(욕망)은 이제 놀랍게 변신했고 적은 모든이들의 친구가 되었는데 그 친구를 무찌르겠다는 불교가 이 시대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내 친구의 적은 나의 적이다. 산중과 선방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념을 수호하고 있던 그들은 아직 존재하는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념을 수호한다는 것은 가장 래디컬하게 현실을 인식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순수하다란것이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렇다. 오랫동안 행복을 위해 욕망은 다스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더 이상 욕망을 자신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잘 데리고 키우고 가꿔야할 친구가 되었다.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선명하던 욕망의 모습이 이제 투명하게 우리들에게 영혼처럼 스민 욕망을 다시 분리해 내야할 것이다. 

어떻게? 잘~ ㅋㅋ 

부처님이 그것도 모르시겠어? 성철스님처럼 잠들지 않고 눕지않고 찾아봐~ 분명히 찾을 수 있을껄~ 뭐 찾기엔 우리의 삶이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말이야.. 그래도 우린 반짝이는 '業'이란 창이 남았잖아.. 그것만이 아직 녹슬지 않았자나.. 업은 나하나로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분노의 역류거든.. 난 나로 끝나지 않아서 용감할 수 있는거야.. 그게 인류의 깡다구야.. 하기사 그 깡으로 욕망을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지만.. 자 맞짱떠 보자구.. 욕망을 우리에게 주입해서 자신들의 더 큰 욕망의 하수인으로 쓰고 있는 넘들하고 말야.. 민중은 대중은 언제나 씹혔지만 사라진 적은 없자나.. 존나 한번 살지 두번사냐고? 무슨 수억번을 살아.. 계속 맞짱떠봐 바위가 당할 것 같애? 계란한번이 아니자나.. 별만큼의 계란이 울산바위도 깬다니까!! 두고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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