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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토요일

이진경쌤 강의 후입니다. (>_<)

 

안녕하세요~ 종윤이에요. ㅋㅋ 저번주 토요일 강의 후기를 올려보려 합니다. 이렇게 후기를 남기게 된 이유는.. 학교 보충수업 일정 때문에 2주간 토요일 강의를 못 듣는 아쉬움을 덜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한 인상 깊었던 강의를 후기로 남기면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 같아서요. 근데 제가 요즘 여기저기 일이 많아 정신이 없어서 상태가 좀.. 아름답지 않아요... 잉잉잉... 지난 토요일에도 상태가 살짝 메롱이었는데(지금도..T_T) 아마도 제가 잘못 노트 정리했거나 오해한 부분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후기 시작해 볼께욤.. 키키. 선생님의 언어를 최대한 저의 언어로 번역해보려 노력했습니다. 잘 읽어주세요~

[다써놓고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어요... 흙흙흙... 긴 글은 민폐라고 생각해서 왠만하면 그렇게 안 쓰려고 했는데 생각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계속 쏟아내다보니.. 흙흙흙... 일단 쓴 글이라서 전문을 올리기는 하겠지만 이 글 읽으시는 분들은... 우선 대개는 3번까지만 읽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저번 주 강의를 이끌어가는 전반적인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존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론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필요한가?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그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불온하고 도발적입니다. 불온하고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론이 추구하는 존재 자체, 존재 일반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길이 바로 거기에 놓여있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엄숙하고 진지한 철학자들, 진리의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죽음으로라도 달려 가보는 철학자들은 그것을 견디기 힘든 당혹감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네요“뭐? 심오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고작 그런 것들에서부터 찾기 시작한다고?” 존재 물음.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철학이 풀어 헤쳐야할 비밀상자 중의 비밀상자입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하듯 철학이 추구해야 하는 최초의 물음이자 마지막 물음일 것이고요. 따라서 그 물음에 끝에서 손에 쥐어야 할 궁극의 것은 성배와 같은 신성함 또는 지고의 아름다움과 비유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텐데 그들의 ‘고귀한’ 작업에 이 미미하고 미천한 것들이‘쌩까며’밀고 들어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겠죠.

물론, 불온한 것들이 주는 감응은 ‘그들’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불온한 것들을 통해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존재의 느낌은 때로는 땅이 꺼질듯한 현기증으로 때로는 심연으로 추락할 듯한 불안으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주는 ‘반감적 공감’과 매혹 그리고 통쾌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공부하기 위해 모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요.

 

서론은 이쯤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저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대결하고 있는 (탁월함과 보편성의) 존재론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한 남자가 가로등 밑에서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이에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찾으십니까?” 그 남자는 “중요한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라고 답하며 다시 애타게 열쇠를 찾았다. 행인이 다시 물었다.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소?”그러자 남자가 다시 답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가로등 밑이 밝아서 여기에서 찾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존재론적 탐구에 대한 교훈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겠죠. 왜 남자는 가로등 밑에서만 자신의 탐구를 수행해야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위 글의 남자가 말하듯이 어쩌면 단순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어둠 속에서 탁월하게 빛을 비춰주는 가로등 아래에서이기 때문이겠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전기)하이데거가 현존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가 말하듯 우리는 존재에 직접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존재 물음을 던짐에 있어 물음이 걸려야할 것은 일단은 존재자일 텐데요. 그 중에서 (존재에 대해 항상 이미 이해하고 있는 탁월한 존재자인) 현존재를 통해 존재론적 탐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하지만 앞서 이야기의 웃음 포인트는 이 ‘탁월한’ 가로등 불빛이 가져오는 역설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로등 밑에서만 뒤져서는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겠죠. 이때, 오히려 가로등의 탁월한 불빛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그를 멀어지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가 시선을 돌려야할 곳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열쇠를 찾고자 한다면 가로등의 불빛아래에 머물며 그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겠죠.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의 미광을 통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는 능력을 키워야할 것이며 또한 무심코 발로 밟으며 지나치던 것들을 섬세하게 훑을 수 있는 예리한 촉각을 가져야 비로소 그는 그가 애타게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이와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제까지 의존해온 ‘탁월함’의 빛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보편성, 그것은 그저 위대하고 탁월한 존재자의 몇몇 고유성을 보편자의 초월적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일반성에 이를 수 없는 한, 보편성은 많은 철학자가 생각하듯이 모든 개별자를 포괄할 수 없는 특수자에 불과할 것이다.[p67]"“인간의 위대함이나 탁월함에서 시작하는 보편화란, 그것에 포함될 수 없는 것들, 그것에 의해 어두운 부정의 색이 칠해진 어떤 대상을 지우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포괄성을 완성하려 한다.[p69]"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의 특이성에서 출발해 탁월성과 위대성이 세운 벽을 허물고 경계를 해체하면서 거대한 일반성의 바다로 그 ‘탁월한’것들을 침수시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 탁월성의 빛을 지움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 우리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과 함께 이 길 위를 걸어감으로써 존재론적 평등성과 일반성의 평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과 함께 걸어갈 길은 죽음으로 달려가 보는 엄숙함이나 모든 실존을 내던지는 듯한 무거움이 짓누르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하는 산보나 혹은 학교가는 피노키오를 유혹하는 듯한 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이 ‘쉬운’길이나 ‘평이’한 길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으로 달려가 보는 결단’이 주는 무거움보다 때로는 더 무거운, 그런 깊이있는 가벼움일 수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가 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물음에 궁극적으로는 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물음을 제기하고 답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아를 지우고 잠식하며 찾아오는 비인칭적인 죽음일 것이기에. 자아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와해시키며, 우리가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와 ‘나’의 그 고유한 자리를 채우며 잠식해가는 그런 죽음. 니체라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의 서문에 독자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써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하지만 그럼에도 이 길에 우리가 반감적 공감을 느낀다면, 불온함과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눈에서 차마 지워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자아의 의지를 넘어선 곳에서 자아를 휩쓸어가는 매혹과 휘말림으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원할 때 찾아온다기보다 그것이 원할 때 나를 휩쓸어가는 그런 방식으로. 그래서 아래의 글도 인용해 볼만 한 것 같아요..

수수께끼란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 p7 재인용)

 

 

한편으로 저는 니체가 『서광』에서 분류한 철학자의 유형들을 통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의 작업을 하이데거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어요. [이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고병권 저, 그린비 참조] 플라톤이 동굴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철학자를 그린 반면에 니체는 반플라톤적인 몰락과 하강의 길을 이야기하며 철학자를 땅 파는 광부에 비유합니다. 쫌 길이가 있지만 텍스트를 직접 인용 해볼게요.

 

 

지하생활자는 그가 분류한 네 유형의 사상가들 중 하나이다. 첫 번째 유형은 표면에서 반응하는 피상적 사상가이다. 그들은 아무런 깊이도 없이 그저 반응하는 인간이다. 두 번째 유형은 깊이를 따지는 심오한 사상가다. 그들은 사물의 이면을 보려고 한다. 세 번째 유형은 아예 사물의 근거, 즉 바닥까지 내려가는 철저한 사상가들이다. 그런데 네 번째 유형은 지하생활자인 사상가로서, 그는 바닥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다. 그는 바닥을 파고 그 아래까지, 즉 근거아래까지 내려가는 사람이다. 그는 근거들 아래에서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낸다. 보통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어떤 근거에 따라 평가될 수 있지만, 그 근거 자체는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즉 근거들 밑에는 근거가 없다. 니체는 비판가의 사명이 ‘근거들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처럼 ‘근거의 근거 없음’이 드러날 때, 다시 말해 근거들이 몰락할 때, ‘심연’이 열린다. 니체가 말한 ‘지하생활자’는 바로 ‘심연의 사상가’인 셈이다. 심연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근거 없이 존재한다. 어떤 토대, 어떤 척도, 어떤 원칙도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운 영역, 그것들이 한계를 드러낸 영역이 심연이다. 거기서 모든 것들은 근거 없이 원초적으로 ‘평등’하며(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 아니라 ‘법 이전의 평등’, ‘법에 우선하는 평등’이다), 어떤 자격이나 조건 없이 서로 부딪히고 어울린다.[p26] 

  

좀 도식적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데카르트는 학문의 체계를 나무에 비유합니다.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의학, 도덕학이라면 줄기에 해당하는 것은 자연학입니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줄기와 가지가 존재하도록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뿌리로서의 형이상학입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근본에 대한 탐구입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시선에서 데카르트는 철저하지 못한 사상가입니다. 데카르트적 실체도 결국은 존재자였고 존재에 대한 물음은 던져지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거에로 한걸음 더!’를 외칩니다. 나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인 뿌리만이 아니라 뿌리가 근거하고 있는 토양으로까지 더 파고든다는 것이죠. 여기까지 놓고 보면 (좀 도식적이긴 합니다) 데카르트는 두 번째 유형, 하이데거는 세 번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네요.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물으며 그 바닥까지 파고 내려갔다는 점에서 철저한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니체가 말하는 심연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식적으로 세 번째 유형에 분류했습니다. 여기에서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통해 존재론은 비로소 네 번째 유형의 사상가가 출현하는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_@? (흐음...갑자기 거창해지네요..) 철저한 세 번째 유형의 사상가의 작업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모든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면서 어떤 탁월성의 척도도 위계도 삼켜지는 심연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진경쌤은 ‘지하생활자’?

 

 

앞서의 논의들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논의의 흐름을 되돌려 강의의 초반부 내용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 대하여 본격적인 언급이 있기 전에 제기되었던 것은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어떤 것이며 존재 자체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떤 존재론이 필요할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먼저,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에 대해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재미있는 비유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관점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고 여기에서는 제한적인 비유로 사용되어야 하겠지만)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의 양상이 어느 정도는 언어에서 나타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령, 한국어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죠. 한국어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뭐,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게 한국어이므로 한국어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은 한국어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한국어의 어떤 한 양태이자 표현일 뿐이죠. 즉 발화되거나 쓰이는 문장들은 한국어에 대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어 자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문장들은 한국어로서 존재하면서 한국어라는 전체 틀이 상정되는 한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한편 한국어 자체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발화되고 쓰인 한국어 문장이 없다면 한국어가 ‘있다’고 말하기가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죠. 한국어는 구체적인 한국어 문장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탐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양자 사이의 관계는 긴밀한 인접성 속에서 얽혀 있습니다. 이 비유가 재미있는 것은 한국어가 그것의 양태들을 넘어서는 면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한국어의 모든 단어와 문장을 모으고 문법을 쌓아놓는다고 해서 그것들 자체를 한국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어 자체는 그와 같은 양태의 집합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그것들의 무한한 변이가능성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어 자체는 ‘아직’ 구체적인 양태로서 현행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규정적이지만 반대로 그것들의 모든 규정성들로 가득 찬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또한 ‘단수로서의’ 한국어-자체는 모든 한국어 문장과 표현들의 만남과 갈라짐,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하구요. 아마도 언어에 대한 비유는 여기까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음.. 언어학 세미나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까요? 언어에 비유하다가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가 있어 이렇게 후기에 적어놓게 되었네요.

  

 

끄아아아아아아....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워낙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강의여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제가 간결하게 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T_T 긴글은 민폐라고 생각해 이렇게 안쓰려고 했는데... 씐나게 쓰다보니 음청 길어졌여요. 이 다음부터는 간략하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6-1] 강의의 출발은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통해 ‘존재에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면서도 긴밀한 인접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닐 지라도 명사적 실체로서 표상되는(될 수 있는) 것. 한편 존재는 동사적이라는 것. 이정도로 첫 부분을 일단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전통적으로 우리는 ‘존재’를 명사적 실체로서 사유하고자 했고 쉽게 그런 유혹에 빠진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실체로서 표상되는 것으로서는 존재를 사유할 수 없으며 이를 ‘존재망각’이라고 비판했었죠. 여기에는 문법의 환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령 강의에서는 ‘비가 온다’라는 문장을 통해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셨었죠. 우리는 문법의 환상에 대한 니체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법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6-2] 존재자가 말을 할 때, 존재는 침묵하며 존재자가 즉각적으로 드러날 때, 존재는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고 합니다. 여기에 어쩌면 철학이 philosophy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philosophy는 philia(사랑함)와 sophia(지혜)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함. 사랑은 (이것도 사랑을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추구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므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칸트가 철학적 사유를 점근선과 같다고 어디선가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겠죠. 단지 가까워질 수만 있을 뿐 결코 닿지 못하는. 그리고 마치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끝으로 빠져나가버리기에 계속 찾아다닐 수밖에 없게 하는. 이런 점에서 ‘존재’는 정말로 밀고 당기기의 달인이 아닐까 생각해요. 완전히 잡히지는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오는. 사람 애타게 말이죠. 그러니까 철학자들이 2,500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철학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겠죠. philo-sophia .

“시는 침묵이다.”- ‘존재’에 다가기 위해서는 존재자에 대해 명료하게 말하는 언어들 보다는 시인들의 언어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존재자의 규정성들을 지우고 존재자로부터 시선이 멀어지게 하면서 그것들 사이의 공백을 우리가 마주하도록 하니까요. 시와 ‘존재’의 의미, 그 사이의 관계는 텍스트에서 블랑쇼를 통해 많이 이야기되었지만 저는 플라톤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플라톤이 시와 시인에 대해서 좋게 봐준 것은 아니지만요.) 플라톤도 시란 시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시인의 입을 밀려 자신의 목소리를(존재의 의미를) 알려오는 것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거죠. 비트겐슈타인도 철학은 시처럼 쓰여져야 하고 자신이 철학 저술을 할 때마다 시를 쓰는 것 같다고 했을 때 어쩌면 그 의미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6-3]‘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재미있는 것은 어떤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다른 길, 반대 방향의 길 또한 있지 않을까? 존재자의 침묵을 통해 말하는 대신, 존재자의 언어를, 그것이 지칭하는 세계를 따라가고 파고들면서, 그것을 더욱더 웅성거리게 하고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어 존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만드는 길이.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어떤 존재자의 말도 다른 소리들에 뒤섞여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그 백색소음 속에서 존재자를 향한 길, 세계로 쉽게 이어지는 길을 지워버리는 길이.[p49]”

 

 

길이제한이 없다 생각하고 쭉 늘여서 편하게 쓰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므로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절마다 다섯~여섯줄 정도로 쓸 줄 알았는데.. 역시 글쓰기는 글쓰기 자신의 흐름과 리듬을 따라 써지는 것 같네요. 뭐 이번 글쓰기는 자유로운 놀이에 가까운 마음으로 제가 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글이 쓰이기 시작하면, 글은 자신의 흐름을 따라 나아가고 자신의 리듬을 타고 쓰인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방향을 따라가기보다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틀며 그 자신을 이끌어간다. 글의 연쇄를 따라 다른 어떤 것들이 끼어들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궤적이 그려진다. 사유 도한 마찬가지다.[p.64]”이 점에서는 맑스가 한 말을 패러디해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이다. 하지만 어떤 글이 쓰여질 지는 저자도 알지 못한다.’ 또한 아까 들뢰즈봇이 제게 날려준 트윗이랑도 연결될 수 있겠네요. 대화가 대화를 하고 글이 글을 쓰면서 글을 쓰는 자로 하여금 어떤 다른 것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죠.“글은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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