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일에 쫓겨 제대로 된 후기를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순영님이 좋은 글들을 올려주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니체의 도덕에 대한 비판을 읽으며 계속 생각했던 부분을 짧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텍스트에서 제가 본 바로는, 니체가 '도덕'을 비판했을 때, 그 핵심은 '기독교 비판'인 것 같습니다. "도덕에 허가를 내주는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마치 도덕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253)에서 보듯 니체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도덕은 신(神)을 전제로 한 것이며,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신의 권능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당연히 기독교가 숭배하는 신입니다. 물론 니체는 신이 죽은 뒤에도 살아 남은 도덕이 신의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도덕이 살아 남은 것도 기독교의 잔재, 내지는 영향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는 만물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남는 것은 결국 '신'이라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 명제를 사실상 니체가 자신의 논거로 활용하는 셈입니다. '최종심급자'로서의 신에 대한 언급(#275)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니체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리주의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물론 비판만 하지는 않고, 때로는 그 가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실례로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유럽의 민주주의 도래가 초국가적이고 유목적인 인간형을 탄생시킬 상황을 만들어준다고 긍정하기도 합니다)도 그 사회정치 체제가 기독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니체의 민주주의 비판은 크게는 '기독교 도덕'에 대한 비판의 범주 안에 있고, 그건 어떤 면에서는 '니체를 위한 변호'의 작은 논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도대체 왜 기독교와 신을 비판했을까요. 이건 다시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절대 존재에 대한 불신을 떠나 니체는 기독교 도덕이 강자가 아닌 약자의 승리를 가져오는 도덕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비판의 핵심적 이유도 그렇습니다.
'모든 강한 감정에 죄스럽고, 유혹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낙인'
'약한 감정, 내면의 소심한 행위, 개인적 용기의 결여를 대단히 아름다운 단어로 치장'
'인간의 위대성을 모두 이타심으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한 희생으로 재해석'
'삶은 하나의 처벌로, 열정은 사악한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은 신을 지 않는 것으로 여김'(이상 #296)
이런 것을 기독교 도덕의 중대한 범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니체의 도덕 비판은 그 배후에 있는 제1원인으로서의 기독교와 신으로 향하며, 기독교와 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들이 철학적,종교적으로 '약한 인간'을 만들고 나아가 이를 '선한 인간'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니체는 '강자와 약자'라는 관계의 자장 안에서 기독교와 그로부터 산출된 도덕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지나간 옛날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니체는 이런 기독교 도덕이 현대적 가치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니체가 죽은 지 120년이 된 지금, 여전히 변하지 않은 도덕적 가치들(형이상학, 이성주의, 동일성)이 우리가 니체의 글을 읽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로 니체 세미나에 관심이 있고 꾸준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댓글을 남기게 되는게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니체의 책에서 광인이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것에서 중요한것은 신이 인간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근대과학의 발전으로 기독교적인 신의 죽음은 그당시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것은 인간이 기독교적인 신을 죽였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지?사람들에게 광인이 묻는 것에 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들이 나귀를 신으로 모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현대에는 수많은 나귀들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니체는 흔히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가서 새로운 가치를 과연 만들수 있는지? 그것이 광인이 근대인(현대인?)들에게 묻는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문제는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기를 흔쾌히 자처하는 안전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수 있습니다.
고작 성냥불 하나 켤수 있을 뿐인 소심한 저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전혀 가늠할수 없습니다.
매순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자만이 영원회귀의 허무를 견뎌낼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허무의 극단으로 갔을때 이러한 극단의 공포에서 다른 삶을 만들지 않고 삶 그자체로 대면할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랬을때 허무를 새로운 가치 창조로 만들수 있는 추동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꼭 니체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하는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의미를 생산하며 현대인들이 삶의 허무를 대면할 기회와 시간을 뺐고 있습니다.(대표적인 것이 TV이지요.)
니체가 우선적으로 고려한것이 근대인들의 개인적 삶의 복원이듯이 우리 현대인들도 끊임없는 의미 생산에 맞서서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공백과의 대면을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할 시기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 공즉시색이 생각납니다.
허무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어떤 허무주의 인지는 생각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갑자기 제가 댓글 남기는 것이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풍요롭고 치열한 니체 세미나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