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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토론주제] 권력의지 > 2권 지배가치들에 대한 비판 > 1장 종교에 대한 비판

*분홍색글씨는 번역을 수정한 것!

 

 1. 종교의 기원 ::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1. [가치의 기원] 인간 일반의 관점에서 종교의 기원 :: 인간은 어떻게 종교를 발명하게 되었나? (#135~137)

(p112~114_#135) 교양이 없는 인간들은 노여움이 화의 원인이고, 정신이 사고의 원인이고, 영혼이 감정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별생각 없이 노여움, 정신, 영혼 같은 인격을 가진 심리적인 실체들을 원인으로 여기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압도당하여 황홀해지는 상태를, 어떤 인격체의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영향에 사로잡힌 상태로 보았다. (기독교도는 희망ㆍ평화ㆍ해방의 감정의 기원을 신에게서 비롯된 심리적 자극으로 돌리는데, 선척적으로 고통받고 불안한 유형인 이들에게 행복ㆍ헌신ㆍ평안의 감정은 자연스럽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힘의 감정이 갑자기 어떤 사람을 압도하여 격정에 사로잡힐 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의 인격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 그는 자신이 이런 놀라운 감정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보다 강력한 인격체(신성)를 원인으로 상정한다. 요약하면, 종교의 기원은 인간 외부에서 엄습한다고 간주되는 극단적인 힘감정에 있다. 종교는 '인격의 변형'을 보여주는 하나의 경우인데,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이 종교인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고양의 감정(*상승하는 힘감정)도 마찬가지로, 병든 사람들은 건강하다는 감정 하나만으로도 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에 충분하다. 

(p114_#136) 종교적 인간의 미숙한 심리에서, 모든 변화는 (*행위자의) 작용Wirkungen이며 모든 작용은 (*행위자의) 의지의 작용Willens-Wirkungen으로 여겨진다. 즉 '자연과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모든 작용은 행위자를 전제하는데, 인간이 원인이 될 수 있는 경우는 그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에 옮길 때뿐이다. / 그 결과 (*자신을 압도하는) 힘의 상태들이 그에게 "나는 그 힘의 상태들의 원인이 아니며, 그 상태들에 책임이 없다"는 감정을 안겨준다. 자유롭지 않은 의지(우리가 초래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변화)는 강력한 어떤 의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미숙한 심리의 결과, 인간은 강력하고 놀랄만한 감정을 절대로 자기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자신에게 강요된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종교는 인격의 실체에 관한 회의의 파생물이고 인격의 변형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위대하고 강력한 모든 것이 초인간적이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경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측은하고 허약한 측면과 강하고 놀라운 측면을 2개의 영역으로 분리시킨 다음에, 전자를 '인간'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신'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높고 숭고한 도덕적 상태를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거나' 자신의 인격이 '노력한 결과'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 종교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아래로 추락시켰으며, 종교의 최종적 결론은 '모든 선ㆍ위대성ㆍ진리는 인간을 초월하며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가치의 담지자] 성직자철학자에 의한 종교의 권력화 :: 이들은 어떻게 종교를 자기권력으로 만드는가? (#138~140)

(p116_#138) 성직자들은 이상, 신, 구세주,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연기하는 배우이다. 그들은 이 일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이것이 그들의 본능이다. 

(p116_#139) 성직자들은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려고 의욕(=의지)한다. 즉 자신은 최고유형의 인간이라는 것, 권력자까지 지배한다는 것, 공격당하기 어럽다는 것, 공동체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이라는 것이다. / 성직자들이 자기 존재를 각인하기 위한 수단은 성직자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성직자만이 교양있고 덕을 갖추고, 성직자를 지배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신이고 신의 중개자이고, 따라서 성직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의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성직자들이 자기 존재를 각인하기 위한 다른 수단은 진리가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성직자가 되는 길이라는 식이다. 사회ㆍ자연ㆍ전통에서 모든 훌륭한 것은 성직자들의 지혜와 연결된 것이며, '성경'은 성직자들의 작품이며, 선의 원천은 성직자들이다. / 그 결과 성직자가 가장 높은 유형의 인간이라면, 성직자가 이룬 덕의 등급에 따라 인간의 가치등급이 구성되어야 한다.(*1권 2장에서 강자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세상을 창조하는 것처럼!) 학문연구, 관능의 박탈, 무활동, 무감각, 무열정, 경건. 이 모든 것의 반대는 저급한 유형의 인간이다. / 성직자는 자신이 가장 높은 유형의 인간으로 간주될 수 있게 하는 도덕을 가르치는 한편, 정반대의 유형인 천민계급을 가장 경멸스러운 존재로 만듦으로써 계급질서를 요란하게 치장한다.

(p117_#140) 철학자는 성직자 유형이 추가적으로 발전한 존재이며, 성직자의 유산을 피속에 가지고 있다. 철학자도 최고의 권위를 갈망한다. 물리적 권력이 없는 철학자들이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물리적 권력보다 강한 권력(자신이 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확립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꼭 필요한 중재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철학자들의 존재조건은 (1) 사람들이 신 자체를 믿어야 한다. (2) 신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다른 방법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조건은 '이단'이라는 개념을 낳고, 첫번째 조건은 '무신앙자(다른 신을 믿는 자)라는 개념을 낳는다. 

 

3. [가치의 수단] 성직자ㆍ철학자 권력의 지배수단으로서 신성한 거짓말 (#141~142)

(p118_#141) 신성한 거짓말에 대한 비판 :: 신성한 거짓말(신성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거짓말도 허용된다)은 성직자들의 모든 활동에 등장하며, 철학자들도 인류의 지도자를 추구하는 경우 스스로 거짓말의 권리를 정당화한다. / 성직자와 철학자의 신성한 거짓말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가? 첫째, 그들은 권력과 권위와 절대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둘째, 그들은 자연의 전체과정을 지배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 그들의 율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셋째, 그들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는 광대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권력의 한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후의 벌칙과 축복에 이르는 길도 알고 있다. / 신성한 거짓말은 행위의 목표이며(이성이라는 자연스런 목표가 사라지고, 법의 준수 또는 신을 위한 봉사라는 도덕적 목표가 나타난다), 행위의 결과이다(자연적인 결과초자연적인 결과로 해석되고 통제불가능한 초자연적인 다른 결과들이 예언된다) / 이런 식으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창조되고, 이 개념은 자연적인 개념들('유익한, 해로운', '생명을 촉진하는, 생명을 지체시키는' 같은)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나타난다. 또 다른 삶이 상상되고 있는 한, 성직자들과 철학자들이 말하는 선/악의 개념은 자연 속의 선/악의 개념과 적대적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마침내 '양심'이 창조되었는데, 이 내면의 목소리는 행위의 가치를 행동의 결과에 따라 측정하지 않고 '율법'과 일치하는지에 따라 결정한다. / 따라서 신성한 거짓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창조했다. (1) 처벌하고 보상을 내리는 , 성직자들의 법률서를 인정하고 지키는 신, 성직자들을 자신의 대변자로 세상에 보내는 신 (2) 거대한 처벌기계만이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후세계 (3) 인간 내면의 양심 (이 양심은 '선/악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양심은 성직자의 가르침과 일치할 때마다, 신이 직접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4) 도덕 (모든 자연적 과정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모든 현상을 도덕적 질서에 종속시키고 도덕적 질서의 효과(처벌/보상의 개념으로)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모든 변형의 유일한 권력과 창조자로서) (5) 진리 (주어지고 계시되고 성직자들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으로서,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누릴 구원과 행복의 조건으로서) / 요약하면, 도덕적 개선의 결과로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 이성의 기능을 훼손시키고, 모든 동기를 공포와 희망(처벌과 보상)으로 바꿔놓고, 성직자들의 후견에 의존하도록 하고, 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 예배서에 의존하도록 하고, 경험과 실험 대신에 '양심'이라는 거짓과학을 확립한 것이 그 대가이다. 아것은 마치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모두 정해진 것처럼, 탐구하고 전진하려는 정신을 거세하는 것이다. 한마다로 말하면 이것은 인간의 사지를 절단하는 악랄한 행위이며, 그런 식으로 사지가 절단된 결과가 '선한 인간'인 것이다. / 과장해서 말하면, 성직자의 규범이 갖춰야 할 첫번째 조건인 이성(지성과 섬세함과 신중의 유산)이 단순히 하나의 기계적 과정으로 바뀌어버렸고, 율법과의 일치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삶을 더이상 어떤 문제도 포함하지 않게 되었고, 세상이라는 개념이 전반적으로 처벌 개념에 오염되기에 이르렀다. 성직자의 삶이 완벽한 삶으로 인정되면서, 삶 자체가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신'이라는 개념이 생명에 대한 혐오, 심지어는 비난과 경멸을 뜻한다. 진리는 성직자의 거짓말로 변하고, 진리의 추구는 성서를 연구하는 신학자가 되는 수단으로 변해버렸다.  

(p121_#142) 마누법전에 대한 비판 :: 마누법전(고대인도의 종교성전. 마무는 인간의 시조)은 신성한 거짓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스로를 규범으로 여기는 성직계급이 있는데, 이 계급은 자신이 인간유형의 가장 높은 예이며 인간의 전형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성직계급에게, 인류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은 인류를 자신들과 똑같이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믿고 있으며 우월하기를 욕망하고 있는데, 이러한 힘에의 의지가 신성한 거짓말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 성직자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성직에 최고권력을 부여하는 사상이 널리 유포되고 있다. 권력을 보완하는 것으로서의 거짓말, 이것이 '진리'의 새로운 개념이다. 이 영역(진리의 영역)에서 의도적이지 않고 순진무구한 발달을 전제하는 것은 실수이며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그런 포괄적이고 압제적인 체계를 발견한 사람들은 절대로 광인이 아니며, 냉철한 심사숙고가 이뤄졌음에 틀림없다. ...... 가장 재능있고 가장 사색적인 유형의 인간이 가장 체계적인 거짓말의 장본인들이다. 

 

4. [가치의 형태] 다양한 종교의 모습들 (#143~157)

(p123_#143) '신약'에 담긴 셈족정신이란 성직자 정신(성직 존중)이며, 성직자 정신은 아리안인의 가장 순수한 '마누법전'에 더 없이 나쁘게 나타난다. 이슬감교는 기독교로부터 '내세'를 처벌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배웠다. 

(p123_#144) 도덕과 종교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p123_#145) '마누법전'은 지배계급의 산물인 아리아인의 긍정적 종교경전이다. (승려계급 브라만 내면의 권력감정을 신격화한 것이 '마누법전'이다.) 코란이나 '구약성서'는 지배계급의 산물인 셈족의 긍정적 종교경전이다. (이슬람교는 남자들을 위한 종교로서 기독교의 감상성과 기만을 깊이 경멸한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기독교는 여자의 종교이다.) '신약성경'은 억압반든 계층에서 나온 셈족의 부정적 종교경전이다. (인도인과 아리아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약성경은 천민을 위한 종교이다.)

(p124_#146) 종교는 본질적으로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유대인의 종교에서 나온 구약과 신약은 도덕적인 종교이다. 이 종교들은 삶의 규칙을 정하고, 보상과 처벌을 통해 신자들을 그 원칙에 준수하도록 만든다. 

(p124_#147) 이교사상과 기독교 :: 이교사상은 '자연성'인데, 자연적인 모든 것을 긍정하며 자연적인 것에서 순수함을 보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자연에 적대적인데, 자연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며 자연적인 것에서 존엄의 결여를 본다. 예를 들면 페르토리우스는 무구한 인간인데, 기독교도는 이 인간 옆에 서면 일시에 무구함을 잃어버린다. '기독교적'이라는 표현은 심리학적 해석의 위조술하나의 원리차원으로 높여진 것을 의미한다. 

(p125_#148) 기독교 성직자는 관능성의 불구대천의 적이다. 이에 반해 아테네의 신성한 여성숭배에서 목격되는 성의 상징은 무구하고 경외심으로 가득차있다. 

(p125_#149)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강한 족쇄이고, 가장 효과적인 자극이며, 가장 강력한 날개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무구함을 신앙조항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그랬더라면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그런 믿음도 가능했으니까.

(p125_#150) 기독교에 길을 열어준 것이 이교사상의 타락이었다는 것은 악명높은 거짓말이다. 기독교에 길을 열어준 것은 자연적 충동을 악으로 해석한 고대인의 쇠약과 도덕화였다. 

(p126_#151) 종교는 최종적으로 도덕에 대한 믿음에서 몰락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신이라는 사상은 지속될 수 없는데, '무신론'이 마치 그 외의 신들은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도덕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 도덕의 무신론 역시 무신론을 제외한 다른 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문화도 마찬가지로 도덕에 대한 믿음에서 몰락한다. 문화의 발생조건들(*폭력적, 잔인함)이 드러나면, 더이상 문화를 묵인하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26_#152) 니힐리즘적 종교들의 생리학. 대체로 니힐리즘적 종교들은 질병의 역사를 종교적 도덕적 언어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교에서 예배는 계절적 순환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반면, 기독교에서 예배는 마비현상의 순환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p126_#153) 니힐리즘적 종교는 고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데카당적 요소를 찾아모은다. (a) 허약한 자와 살패한 자들 (고대세계의 쓰레기들) (b) 도덕에 집착하고 이교사상에 반대한 자들 (c) 정치에 싫증을 내고 무관심한 자들(권태에 눌린 로마인들) (d) 자기 자신에게 지친 나머지 지하적인 음모에 참여하는 자들의 당파

(p127_#154) 부처 대 그리스도 니힐리즘적 종교들 중에 기독교(*수동적 니힐리즘)와 불교(*능동적 니힐리즘)은 언제나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불교는 달콤하고 온화한 멋진 밤을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는 쇠퇴하는 운동이며 온갖 종류의 쇠퇴하는 요소와 배설물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는 뿌리부터 병적인 온갖 요소들을 긁어모아 놓고 있는데, 이 요소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또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민족종교도 아니고 종족에 의해서 결정되지도 않는다(데카당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므로!) 기독교는 모든 지역에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데, 성공하고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공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에 저주를 표현하며, 모든 형태의 지적운동과 모든 철학에 반대한다. 

(p129_#156) 성직자들과 종교들을 반박하는 유일한 것은 이것뿐이다. 그들의 오류가 더이상 이롭지 않다는 점을, 그들이 오히려 해로운 존재라는 점을, 한마디로 그들의 '힘의 증명'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기독교의 역사에 관하여 :: 기독교는 어떻게 지배적 가치가 되었나 

 

1. 예수가 주도했던 초기 기독교 운동과 바오로에 의해 변형된 기독교 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158~170)

 

2. 바오로의 심리(힘감정) :: 예수의 초기기독교를 변형시킨 바오로의 심리(힘감정)은 무엇이었나? (#171~178)

 

3. 기독교의 심리학적 문제(힘감정) :: 기독교는 데키당스의 종교, 페시미즘의 발흥이며, 원한의 감정이 그 원동력이다!? (#179~203)

 

4. 기독교에 의한 가치전도 :: 기독교는 어떻게 노예도덕을 지배가치로 전도시키나? (#204~212)

 

5. 기독교의 역사에 관하여 :: (#213~216)

 

 3. 기독교 이상 :: 어떤 것이 기독교적인 이상인가 

 

1. 니체는 어떤 점에서 우리(니체와 그의 동류)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다고 하나?

(p171_#218) 우리는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고통도 다른 방식으로 받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양한 사물들을 서로 비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더이상 적대적인 감정을 내면에 숨기지 않는다. 그 결과 아무리 무서운 재앙을 안겾ㄹ지라도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욕망이라 부를 만큼 강한 까닭에, 우리는 대단히 위험한 주제까지도 공격한다. ... 기본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학자들이다.

 

2. 니체는 기독교 이상을 어떻게 확립했나? 그리고 기독교 이상의 가치를 어떻게 결정했나? (#221)

축복 / 구원 / 행복 :: (p171_#217) 기독교이상을 상대로 전쟁을! 삶의 목표로 내세우는 '축복받음'과 '구원'의 교리를 상대로 전쟁을! (p173_#221) 지금 기독교 이상은 행복해지려는 의지가 되고 말았다. '축복받음'은 너무도 자명한, 정당화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그 외의 다른 것(살아기는 방법과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은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p173_#222) 행복주의의 가치들이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곧 데카당스(생리적 피로와 의지력의 약화)의 신호이다. 축복에 대한 퍼스펙티브를 가진 기독교는 고통받고 가난한 유형의 인간이 갖는 전형적인 정신법이다. 충만한 힘은 창조하고 고뇌하며 몰락하는 것을 원한다. 충만한 힘에게 기독교의 위선적 구원은 귀에 거슬리는 음악이며, 성직자의 태도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p186_#240) 행복을 하나의 증거로 이용하는 쾌락주의 쪽으로 기우는 사고의 전환 자체가 퇴보의 한 징후이다. 쾌락주의적인 증거가 힘에서 나오는 정거나 공포에서 나오는 증거를 대체하고 있다. 

빈곤, 겸양, 순결 (p174_#223)

'축복받음, 순수, 불멸' (p175_#224) '순진하고, 한가롭고, 불멸하고, 행복한 인간' 인간의 최고욕망의 대상이 되고 잇는 이 개념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비판의 도마에 올려져야 한다. 죄와 일, 죽음, 고통이 최고욕망과 반대가 되는 이유는, 게으른 기독교 개념들 '축복받음, 순수, 불멸' 같은 것들 때문이다.

거룩함(신성) (p175_#225) 

육체의 경멸 (p176_#226, 227)

질병에 대한 퍼스펙티브 (p176_#227)

'자연'에 맞서 벌이고 있는 투쟁 (p176_#228)

양심의 가책 (p180_#233), (p182_#234, 235)

신 앞의 평등 / 미덕 / 자비 (p190_#246) 모든 '영혼'이 신 앞에서 평등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모든 가치평가들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 

 

3. 높은 인간(*강자)와 낮은 인간(*약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p173_#222) 보다 높은 인간은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와 불행에 도전하려는 자세로 낮은 인간과 뚜렷이 구분된다. 행복주의의 가치들이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곧 데카당스(생리적 피로와 의지력의 약화)의 신호이다. 축복에 대한 퍼스펙티브를 가진 기독교는 고통받고 가난한 유형의 인간이 갖는 전형적인 정신법이다. 충만한 힘은 창조하고 고뇌하며 몰락하는 것을 원한다. 충만한 힘에게 기독교의 위선적 구원은 귀에 거슬리는 음악이며, 성직자의 태도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p181_#233) 자신의 삶에 일어난 어떤 일에 최면이 걸렸을 때 자신이 보였던 진지함과 열의에 대해 스스로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신이 건강하다고 보면된다. 또 자신의 양심의 가책이 마치 돌의 깨물고 있는 개의 행동처럼 느꺼재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건강하다. 또 자신의 회개가 부끄럽게 다가오는 경우에도 정신이 건강하다.

 

== 번역수정 등 ==

1. (전반적인 것) 권력의지 ······> 힘에의 의지 / 권력감정 ······> 힘감정 :: 권력의지나 힘에의 의지는 모두 ‘Der Wille zur Macht’나 ‘The Will to Power’를 원문으로 하는 번역이고, 권력감정이나 힘감정은 모두 'das Gefühl der Macht'나 'the feeling of power'를 원문으로 하는 번역이다. 그런데, 권력의지, 권력감정이라는 개념에 대대한 선입견(뉘앙스) 때문에, 대체로 힘에의 의지, 힘감정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권력의지, 권력감정에 대한 갖는 선입견란 그것이 인간에 속한 것이라는 견해와 그것이 외부를 향한 지배력이라는 뉘앙스이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나 '힘감정'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 세계의 존재/생성의 원리이다. 또한 '힘에의 의지'나 '힘감정'은 외부를 향한 명령(지배) 이전에, 자기 힘에 대한 역량(지배)을 의미한다. 

2. (전반적인 것) 쇠퇴 ······> 데카당스 :: 데카당스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힘의 증대'와 반대방향으로 가는 '힘의 퇴화'를 의미하는 중요개념! 반면 쇠퇴는 단순한 서술어처럼 사용되는 경향이 있음. 따라서 서술어 같은 쇠퇴 대신 개념어로서 데카당스로 쓰는 것이 더 적합

3. (전반적인 것) 군집 ······> 무리 :: 강자가 특이적 존재를 나타낸다면, 무리는 평균적인 존재를 나타낸다. (ex. 강자의 도덕, 무리의 도덕) 따라서 군집보다는 무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4. (전반적인 것) '우리'라는 표현(우리 비도덕가, 우리 인식자, 우리 학자, 우리 철학자)은 니체가 자신의 동류를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또한 '위대한' 이라는 표현(위대한 건강, 위대한 경멸...)은 강자적이고 긍정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5. (p113하_#135) 어떤 상태가 어느 인격체와 동일시 됨으로써 구체적인 것이 되고, ······> 어떤 상태를 구체화하여 인격으로 구성하고, / 하나의 원인으로 의인화 인격화되는 것이다. / 그 사람의 내면에 자신의 인품 인격과 관련해서 어떤 회의가 일어난다. 

6. (p130_#160) 예수는 내적인 천국으로 직접 향하는 것이어서, 유대교회의 계율(*의무)에서 천국에 이를 수단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유대교의 실체(유대교의 자기보존의 필요성)까지도 무시한다. 그는 순수하게 내면적이다. ...... 그는 회개(*참회)와 속죄의 가르침에도 반대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신성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한 '스스로 회개와 속죄하는 것으로는 거기에(*신성함)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 (p131_#161) 천국은 마음의 한 상태이다. 어린아이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천국이 아이들의 것이니라." 천국은 지상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달력 속의 어느날에 '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날 그 전까지는 없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이다. 그것은 언제라도 올 수 있고, 또 언제라도 없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8. (p144_#179) 기독교의 원동력은 분노 원한 ::와 민중폭동, 불우한 자들의 반란이다. :: 일반적인 의미에서 '분노'가 아니라, 죄의식과 연결된 '원한ressentiment'이다. 인간의 자연적 본능(욕망)이 외부의 힘(국가권력, 종교권력, 도덕권력 등)에 부정당할 때, 양심의 가책과 원한의 감정이 생겨난다. 이때,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죄가 되고 이 죄에 대한 책임추궁이, 자신을 학대할 때 '양심의 가책'(내 탓이다!)이 되고, 외부를 공격할 때 '원한의 감정(너의 탓이다!)이 된다. 

9. (p146_#182) 성직자 집단(계급)과 성직자 인간(성향) :: [성직자 집단 :: 사회적 계급으로서 성직자] 유대교 성직자 집단은 자신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gott의 규약으로서(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서)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또한 유대교 성직자 집단은 이스라엘을 보존하고 이스라엘의 생존조건이 될 모든 것(예를 들어 국민의식의 중심으로서 할례, 희생예배라고 하는 수많은 것들)을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Gott’으로서 도입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성직자 집단은 자신의 요구를 신gott의 규약으로 제시하고, 이스라엘의 생존조건을 신Gott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성직자 인간 :: 개인적 성향으로서 성직자] 그 후에도 이 과정은 계속되었다. ‘과업’의 필요성(외부에 대해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으로서)이 느껴지지 않는, 유대교의 내부에서 성직자 종의 인간이 고안되었으며, 이들은 귀족사회에 대해 ‘고귀한 천성’을 지닌 인간으로 행동했다. 이 성직자 종은 계급없이 자발적으로 생겨난 영혼의 성직성향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 성직에 대한 반대를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위해, ‘과업’이 아니라 ‘성향’에 가치를 부여했다. (*성직자 인간은 과업의 필요가 아니라 선천적 성향으로서 생겨났다. 이들은 사회적 계급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겨난 성향으로서 성직자였다.)

10. (p152_#192) '신앙'인가, '선행'인가?  ‘믿음’인가, ‘행함(실천)’인가? '행함'(일들을 처리하는 특별한 습관)이 어떤 종류의 '가치평가'(*믿음과 연관된)를 낳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순한 '가치평가'가 '행함'을 낳는 것이 부자연스러운만큼! 인간은 가치감정(*믿음과 연관된)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행동(*행함과 연관된)을 실천해야 한다. :: 이것은 예수와 기독교가 갈라지는 중요한 계기이다. 예수는 현실의 삶에서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했던 반면, 기독교는 천국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p153_#194) 진정한 삶  참된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공통의 삶 평범한 삶(=보통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삶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12. (p155_#197) 진정한 현실적 목표와 진정한 현실적 의무의 완전한 결여. 

13. (p155_#198) 기독교 창시자(*예수)는 그가 유대 사회에서 지성이 가장 저열한 계층에 손을 뻗친 것을 후회함에 틀림없다. 유대 사회의 가장 저열한 계층은 지성의 한계 안에서 기독교 창시자를 묘사했다. 모든 '인격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것'에서 실재성을 배제하는 가르침으로부터, 예수의 수난사를ㆍ인격신을ㆍ인격적 구원자를ㆍ인격의 불멸을 만들어내어, '인격'과 '역사'를 초라한 것으로 고스란히 남겨둔 것은 참으로 치욕이다. 

14. (p157_#201) 편협한 광신자들 무가치한 위선자들, (p157_#202) 광기 과대망상, 거짓말장이 광신자들 위선자들, (p180_#232) '순환성 광기' '순환성 정신착란' :: 니체철학에서 광기는 다수성(지배적 가치)과 맞서는 소수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살려서 표현하면 좋을 듯!

15. (p173_#222) 그런 환경 안에서, 넘치는 힘은 활성화되었다가 고통을 당하며 파멸할 것이다. 충만한 힘은 창조하고 고뇌하고 몰락하는 것을 원한다. 

16. (p175_#224)  ‘참된 하나의 믿음(말하자면 자기기만,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빛과 어둠으로 채워진, 싸우고 투쟁하는 모든 ‘현실의 생존 악하고 거짓된 생존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생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니체 (Nov.1887 ~ March1888) :: Das wahre Leben(참된 삶) nur ein Glaube (d. h. ein Selbstbetrug, ein Irrsinn). Das ganze ringende, kämpfende, wirkliche Dasein(현실의 생존) voll Glanz und Finsterniß nur ein schlechtes, falsches Dasein(거짓된 생존): von ihm erlöst werden ist die Aufgabe.

카우프만 1967 :: The true life(참된 삶) is only a faith (Le., a self-deception, a madness). The whole of struggling, battling, actual existence(현실의 생존), full of splendor and darkness, only a bad, false existence(거짓된 생존): the task is to be redeemed from it.

17. (p183하_#235) 지적 무감각 상태 망연자실한 상태 ::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한 상태

18. (p184상_#235) 우리에게 전혀 아무런 가치를 지니니 못하는 행동들이 있다.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있다. (*우리 신체의 힘에의 의지가 약자적 상태로 나타날 경우, 스스로 부끄러운 행위를 할 경우. 범죄자와 범죄는 별개이다.) .....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은 또다른 종류의 행동이 있다.  반대 종류의 우리의 품위가 미치지 못하는 행위가 있다. (*우리 신체의 힘에의 의지가 강자적 상태에 있을 경우, 비정상적으로 높은 역량을 발휘할 경우. 예술가와 작품은 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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