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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후기]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2부 1∼2

아포리아 2020.01.22 22:43 조회 수 : 161

 ※ 중요한 내용들은 사피엔스님이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주신 관계로, 저는 그냥 책을 읽으면서, 또 세미나 시간에 가졌던 주변적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하여
    진은영 씨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라는 뜻의 일체개고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니체 표현대로 수동적 니힐리즘에 불과할 것이지만, 기실 "불교의 진리는 니체가 능동적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을 니체의 철학 이상으로 정치하고 풍부한 형태로 보여준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일체개고는 그런 허무주의적, 퇴행적 의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주의자라면 "기쁨의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충고할 것이다"라고도 했습니다.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다 고통이든, 다 즐거움이든,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 고통으로 느끼면 고통이요, 즐거움으로 느끼면 즐거움일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이는 불교에서 무아나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구요. 물론 불교가 즐거움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요. 더욱이 생성과 소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거대한 총체적 세계 앞에 서면, 고통이냐 즐거움이냐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을 것 같군요. 물론 이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때만이 가능하겠지만.  

 

■ '새로운 습관'에 대하여
    2부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던 구절은 이 부분입니다. 『중독된 사람은 새로운 습관을 붙이는 데 무능력하다. 따라서 자유와 해방의 능력은 베르그송이 소박하게 말했듯이 "무한히 옛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시키는 힘"이다. 이것은 옛 습관을 끊임없이 무화시키는 능력 이외에 다름 아니다.』
    가슴에 와닿은 이유는 이 부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낡은 것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고,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니까요. 니체를 읽으며 내 안의 낡은 것을 찾으려는 우리들은 일단 새로운 사유나 삶을 적어도 시작은 한 셈입니다. 이 구절이 더욱 의미있는 건 처음 뿐이 아니라 언제든 끊임없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 로버트 G. 모리슨의 견해
    97쪽 각주에는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에 대한 로버트 모리슨의 견해가 나와있는데, 잘 보면 흥미롭습니다. '아이러니한 유사성'도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모리슨의 주장에 따르면 니체가 수동적 니힐리즘의 대안으로 제시한 힘에의 의지는 붓다가 말한 갈애(渴愛)와, 그리고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를 의미하는 '자기극복'은 불교의 마음수련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말은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이지만, 눈에 확 띄더군요. 붓다가 말했다는 '갈애'를 불교 사전에서 찾아보면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범부가 몹시 삼독(三毒)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를 불교의 갈애에 비유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지 궁금해집니다. 또 '자기극복'을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라는 한 표현은 자기극복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만, 이 역시 니체의 정확한 의도와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인식과 생성의 배타성'에 대하여
    세미나 시간에 제가 했던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123쪽에는 '인식'이란 말과 '인식론'이란 말이 모두 등장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인식은 '아는 행위'이고, 인식론은 인식의 기원, 구조, 범위, 방법 등을 탐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제가 든 의문은 매우 간단합니다. 인식과 생성이 배타적이라면(여기서 배타적이란 말의 의미는 서로 공존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생성은 어떻게 인식하느냐(알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니체를 읽고 생성의 철학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두 인식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인식과 생성은 배타적'이라고 할 때의 인식은 알게 된다는 광의의 인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은영 씨가 '공동작인'을 설명하면서 얘기한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해 세계를 파악하려는 인식론'에서의 인식론(또는 인식)의 의미로 좁히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오라클님께서 말씀하신 '영원성을 부인하는 영원성'이나 '인과론을 부정하는 상호인과성'처럼 패러독스적 의미로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인식이라는 말 앞에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한 인식'이라는 전제가 생략된 것으로 보는 것, 즉 협의의 인식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건 인식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론으로 말한다면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해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론이 아니라 공동작인처럼 선형적 인과론의 원인 개념 없이 변화와 생성을 사유하는 것도 또다른 종류의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니체가 '인식'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공부하면 좀더 명확해지겠지만, 니체의 용법을 떠나 '인식'이나 '인식론'을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게 제게 떠오른 의문입니다.  

 

■ 시간의 가역성에 대하여 
    사실, 2부를 읽으면서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시간의 가역성'입니다. 다음 시간에 하게 될 이시적 상호인과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원인과 결과의 상호의존성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원인.결과의 상호의존성과 이시적 상호인과, 또는 용수의 공(空) 사상에 따라 선형적 인과론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과거는 고정 불변이 아니며 현재와 미래에 의해 변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125쪽 각주 밑부분에 나온 화엄 철학의 연기관에도 "시간의 가역성, 즉 현재 순간에 미래와 과거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이런 시간의 가역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현재가 과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림으로써 과거의 일을 질적으로 다르게 변화시키는 '일종의 과거 재해석'을 시간의 가역성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과거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가 과거(A)에 영향을 줌으로써 기존 과거가 아닌 과거의 새로운 모습(A')이 나타났다면 A'는 과거인가요 미래인가요.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도 이 문제로 엄청 머리가 아팠는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건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대적, 직선적 시간관으로는 현재.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고 과거를 바꾼다는 명제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거사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고 해도 직선적 시간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에 다른 모습을 하고 반복적으로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순환적 세계관이라는게 말이 쉽지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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