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지배가치 철학을 개인철학으로 환원시켜 후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작성해보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을 되뇌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지식과 일정한 기준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리.
매번 다짐해보았지만 선지식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믿고 따르던 대전제들을 비난해보았지만, 그저 개인의 흔한 비난일 뿐,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점검, 자아성찰 따위로 귀결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힘”이 있을 때는 캐릭터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경험을 하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 대부분 내가 그냥 미웠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대전제가 나를 강력하게 제압하였으므로 분했다. 제압당한 이유를 깨닫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분한 이유를 찾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자기혐오를 일삼았다.
그러나 출처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믿음.
“나라는 존재도 분명히 쓸모가 있을거야.”
이 믿음으로 스스로 토닥였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한 것은 없어."
그런데 이 생각들을 입증하고 싶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내가 세운 대전제들에는 모순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니체에 따르면, 아마 이때가 내가 “힘”이 들었을 때 같다. 위의 대전제가 다양한 이유(가족, 친구, 사회적 지위 등 갈등관계)로 공격받고 있음을 감지하였고, 나는 그것에 증명해야함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니체는 ‘증명해야 하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믿음을 감히 증명하고자 했다니! 그것은 내가 증명한다고 해서 증명되는 것은 아니였다.
누군가에게 한 개인의 믿음은 한정된 경험과 언어로 표현된 단순한 사견에 불과하다. 기존의 대전제를 누군가의 힘이 숨겨있는 전제로 여긴 것처럼.
다시, “힘”을 발판삼아 내가 선택한 순간들을 살아간다.
증명받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 봄이 아니라, 어떤 기원 모를 대전제에 의함이 아니라, 내가 나의 선택을 이해하고 그 인식으로부터 행동하기 위해.
우리는 누구나 숨어 있는 어떤 긍정을 지니고 있으니 충분히 충분히 충분히 자신을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
*해당 챕터는 아니지만 니체의 인상적이었던 405 아포리즘의 한 부분을 발췌하며 마칠게요.
[숨어 있는 어떤 "긍정"이 우리를 앞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이 "긍정"은 우리의 모든 "부정"보다 더 강하다. 우리의 강한 힘마저도 옛날의 늪지에서 우리를 더이상 구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감히 열린 곳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그 임무에 도전한다. 세상은 여전히 풍요로운 상태에서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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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정해놓은 지식과 일정한 기준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리.
그러나 니체가 말한 기준은 그대로 믿으리.
증명해야 하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그가 말하였으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정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긍정되고 부정되어야 할 기준은 오로지 자기의지일 뿐인가.
그렇다면 니체라는 '타인'이 정한 기준을 '내'가 왜 따라야 하는가.
니체가 선지식이고 선입견이며 지배가치이고 대전제이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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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님, 니체가 말한 기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에요!
니체 또한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철학하는 하나의 방식을 설파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그런데 니체 관점을 상당 부분 동의하고자 하는 저의 '힘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어요.
저의 경우, 완벽한 논리적 이해를 통해 니체철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 보다는
때로는 거부감도 들었지만 결국 저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안착이 되었어요.
이 '자연스러움' 또한 저의 '선택'이죠. (이 받아들임도 '힘의 의지'?!)
갑자기 떠오르는 비유로...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드리면요.
마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연스럽게' 그가 나에게 스며들었다, 혹은 빠졌다고 한들,
그것에 대해 의심은 할 수 있지만 논리성을 따지진 않죠.
사랑의 느낌이란 아무도 정확히 말해줄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온몸을 통해서 느껴야만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요.
수많은 타인 중에 내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생긴다는 것. =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방식 중에 니체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
(물론, 현 시점에서요. '사랑은 변하는거야!' 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언젠가 변할 수 있겠죠.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 철학 공부를 하고 있으니 계속 변할거에요. 니체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변화일 수도 있고, 니체의 관점에서 더욱 풍성해지는 의미에서 변화일수도 있겠죠.)
이렇게 볼 순 없을까요? 비약이 심하다고 느끼실 수는 있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저를 포함해,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들 소용이 없잖아요!
니체를 왜 따라야 하는가? 그냥! 내가 믿고 싶으니까! 내 신체가, 내 감각이 니체 말을 들으면 반응하게 되고 저는 그것에 따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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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재연샘의 멋지고 솔직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 세미나 시간에 재연샘을 볼 때 제가 느끼는 에너지, 매력, 힘이 재연샘이 쓴 이 글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네요! "내가 나의 선택을 이해하고 그 인식으로부터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는 재연샘!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저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애써왔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니체를 읽으면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그게 진짜 필요한 일인가? 그리고 가능하고 가치있는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직 결론을 내린 건 아니지만 그 고민을 시작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저도 니체가 고맙고 좋아요. 지금은요. 또 어느 순간 니체가 싫어질 수도 있고 또 니체보다 더 멋진 누군가를 만나 재연샘 말대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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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님의 에너지와 매력을 보면서 감탄하는데!
서로 응원하고 있음을 알게되니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저 또한 여전히 증명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저를 매순간 발견해요.
니체를 통한 문제의식으로 좀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요즘은,
"끊임없는 상호작용 안에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곧잘 '긍정'하며 잘 '표현'해보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증명'하고자 했던 반성은 하되 자책은 삼가고
좀 더 나를 잘 표현하는 방법들을 고민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보았어요.
그러니까 자기반성에 매몰되었던 시절보다 더 좋은 에너지가 생기더라구요.
물론 자기성찰도 여전히 하지만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차이나는 재연이, 생성의 재연이를 만들려는 노력들로 이어지게 되고.
니체를 통해 이런 마음가짐이 되니 해님처럼 저도 니체가 고맙고 좋으네요.
그리고 지난 주 수업을 통해 다짐한 것이 있어요. 그동안 헤어나오지 못한 습관을 버리려고요.
모든 현상을 한가지 이론으로 대입해보고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들.
그 이론으로 충분히 설명이 안되면 가차없이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고 주저앉았던 습관이요.
(지난 주 '복수주의' 이론이 저에겐 더욱 의미가 있었어요.^^)
그 습관을 통해 니체 공부까지 하게 되었기에 의미가 있었기에 후회는 않지만,
이제는 생성의 재연이 관점으로서 그동안 스쳐지나온 것들을 다시 바라보기 해보려고요.ㅎㅎ
해님의 따뜻한 댓글 덕분에
저도 한번 더 제 마음을 '잘 표현하는' 노력을 해보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임펙트 있는 후기입니다! 재연샘이 말한 '나의 가치와 지배가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지배가치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들로서, 그것은 철학적 사유ㆍ도덕적 가치ㆍ정치적 이념에서, 이것의 일상 버전인 데시데라타(바람직한 이미지들)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우리시대 지배가치의 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자본중심주의. 자본의 이윤를 중심으로 돈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와 휴머니즘(인간 중심주의. 인간의 이해를 중심으로 동물, 자연, 사물을 도구로 여기는)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가치는 마치 시대의 공기처럼 작동합니다. 먼저 지배가치들은 시대의 공기와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사유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내가 특별한 의식 없이 던지는 말이나 판단들은 대체로 지배가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지배가치가 시대의 공기와 같은 것은 그것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사유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이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동의 없이 이미 내게 주어져있습니다. ("누군가 정해놓은 지식과 일정한 기준"_고재연) 이것을 푸코는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인 기반)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지배가치는 다수가 따르는 다수적 가치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로 가족ㆍ친구ㆍ사회의 의견으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때로 선입견이나 선지식같은 형태로 우리 의식에 존재합니다. 재연샘의 말대로! 그래서 사람들은 지배가치 안에 있을 때(가족ㆍ친구ㆍ사회의 가치에 동의하고,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생각할 때), 무리적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지배가치와 갈등할 때는, 동시에 가족ㆍ친구ㆍ사회와 갈등하고 자신과도 모순관계에 있게 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 지배가치를 견딜 수 없는 부자유와 숨쉴 수 없는 압박감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수자와 소수자는 '수'가 아니라 '가치'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입니다. 다수자는 지배적인 다수적 가치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반면 소수자는 다수적 가치에 저항하여 소수적 가치를 창안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니체는 가치로 구분되는 이러한 존재를 강자와 약자라고 합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퍼스펙티브는 바로 여기 다수적 가치와 소수적 가치 사이에 존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가치는 상대를 자기의지 아래 두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ㅎㅎ